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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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Ius Gentium in the Legal Thought of Vitoria and Suárez 1) 오세혁* Oh, Se-Hyuk < 目次 > . 서 론 . 비토리아, 수아레즈와 살라망카 학파 . 만민법의 기초 : 자연법론 . 비토리아의 만민법론 . 수아레즈의 만민법론 . 결 론 I. 서 론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국제법의 창시자는 그로티우스(H. Grotius)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30년을 전후하여 브라운 스코트(J. Brown Scott)를 필두로 한 일군의 학자들 은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c.1483~1546)와 수아레즈(Francisco Suárez, 1548~1617) 를 비롯한 살라망카 학파의 만민법(ius gentium) 사상에 주목하여 이들을 현대 국제 법의 시조로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 1)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 (투고일 : 2010. 7. 19, 심사일 : 2010. 8. 16, 게재확정일 : 2010. 8. 16) 1) J. Brown Scott, The Spanish Origin of International Law: Lectures on Francisco de Vitoria<1480-1546> and Francisco Suárez<1548-1617>, Washington D.C.: Georgetown UP, 1928; J. Brown Scott, The Spanish Origin of International Law. Francisco de Vitoria and his Law of Nations, Oxford: Clarendon Press, 1934; Legaz Y Lacambra, “Die Rechtsphilosophie des Franciscus Suárez”, ZöR 14(1934), 273~371. 법학논문집 제34집 제2Chung-Ang Journal of Legal Studies 2010 Vol 34, No. 2, pp. 261~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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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1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Ius Gentium in the Legal Thought of Vitoria and Suárez

    1)오세혁*

    Oh, Se-Hyuk

    Ⅰ. 서 론

    Ⅱ. 비토리아, 수아레즈와 살라망카 학파

    Ⅲ. 만민법의 기초 : 자연법론

    Ⅳ. 비토리아의 만민법론

    Ⅴ. 수아레즈의 만민법론

    Ⅵ. 결 론

    I. 서 론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국제법의 창시자는 그로티우스(H. Grotius)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30년을 전후하여 브라운 스코트(J. Brown Scott)를 필두로 한 일군의 학자들

    은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c.1483~1546)와 수아레즈(Francisco Suárez, 1548~1617)를 비롯한 살라망카 학파의 만민법(ius gentium) 사상에 주목하여 이들을 현대 국제

    법의 시조로 재평가하기에 이르렀다.1)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

    (투고일 : 2010. 7. 19, 심사일 : 2010. 8. 16, 게재확정일 : 2010. 8. 16)

    1) J. Brown Scott, The Spanish Origin of International Law: Lectures on Francisco de Vitoria and Francisco Suárez, Washington D.C.: Georgetown UP, 1928; J. Brown Scott, The Spanish Origin of International Law. Francisco de Vitoria and his Law of Nations, Oxford: Clarendon Press, 1934; Legaz Y Lacambra, “Die Rechtsphilosophie des Franciscus Suárez”, ZöR 14(1934), 273~371면.

    법학논문집 제34집 제2호Chung-Ang Journal of Legal Studies2010 Vol 34, No. 2, pp. 261~286

  • 262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국내·외에서 이를 지지하는 입장2)과 반대 내지 유보하는 입장3)으로 나뉘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의 옳고 그름은 국제법에 대한 이해, 또 창시자에

    대한 개념정의에 달려 있다. 만일 국제법의 창시자를 국제법의 이념적 기초를 다진

    사람으로 이해한다면4) 그 영예는 비토리아에게 돌아가야 마땅하겠지만, 국제법의

    창시자를 조약 중심의 국제법규범의 체계를 발전시킨 사람으로 이해한다면5) 비토리

    아나 수아레즈는 그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사실, 유럽의 민족국가가 강화되고 동양과 아메리카의 정치공동체가 새로 발견

    되면서 국제법에 대한 체계적 접근의 함의를 탐구할 이상적인 맥락이 제공되었던

    시대가 바로 비토리아를 대표로 한 살라망카 학파의 시기였다.6) 그에 따라 비토리

    아나 수아레즈가 국제공동체 내지 인류공동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국제법의

    이념적 기초를 놓았으며 국가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법원칙으로서 만민법(ius

    gentium)을 내세움으로써 국제관계에 대한 법적 조망을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국제

    법의 창시자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토리아의 이러한 논의가 평화로운

    국제질서의 확보가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침략을 정당화하

    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과연 그로티우스에 앞선 국제법의 창시자라

    고 불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비토리아는 해

    석론적으로 일관된 법규범의 체계를 제시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비토리아의 만

    민법론은 그의 전체 저작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거니와 그것도 일관되게 논의되

    2) 예컨대 Brown Scott, The Spanish Origin of International Law. Francisco de Vitoria and his Law of Nations, 163~172면; H. Rommen, The State in Catholic Thought: A Treatise in Political Philosophy, St Louis: B. Herder, 1945, 623면; A. Verdross, Abendländische Rechtsphilosophie, 2.Aufl., Wien: Springer, 1963, 92~95면; E.-W. Böckenförde, Geschichte der Rechts- und Staatsphilosophie: Antike und Mittelalter, Tübingen: Mohr Siebeck, 2002, 338면; A. Alves/J. Moreira, The Salamanca School, New York: Continuum, 2010, 59면 및 128면 주80; 유병화, ꡔ법철학ꡕ, 박영사, 1984, 141면 및 148면.

    3) 예컨대 H. Welzel, Naturrecht und materiale Gerechtigkeit, 4.Aufl,,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2, 123~124면; B. Hamilton, Political Thoughts in Sixteenth-Century Spain, Oxford: OUP, 1963, 98면, 106면, 166면; R. Marcic, Geschichte der Rechtsphilosophie, Freiburg: Rombach, 1971, 256면; A. Körner, “Francisco de Vitoria”, Deutsche und Europäische Juristen aus neun Jahrhunderten, 4.Aufl.(G. Klenheyer/J. Schröder Hrsg.), Heidelberg: C.F. Müller, 1996, 434~439면, 특히 438면; A. Pagden/J. Lawrance, “Introduction”, Political Writings(F. Vitoria), Cambridge: Cambridge UP, 1991, xiii-xxviii, 특히 xvi면; 백봉흠, “Francisco De Vitoria와 국제법사상”, ꡔ국제법학회 논총ꡕ 제24권 1호(1979), 23~38면, 특히 24면.

    4) 가령 Böckenförde, 위의 책, 338면.5) 가령 Hamilton, 위의 책, 98면 각주1.

    6) Alves/Moreira, 위의 책, 59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63

    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은 수아레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듯 비토리아와 수아레즈가 국제법의 창시자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반

    된 입장이 존재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존재하는데,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

    기에 앞서 올바른 문제제기를 위해서라도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만민법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법철학의 관점에서도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만민법 사상에 대한 논의는

    중세의 신학적 자연법론에서 근대의 이성적 자연법론으로의 이행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또 근대 법실증주의의 성립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의

    미를 지니고 있다. 나아가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만민법 사상에 대한 이해는 법

    의 본질에 대한 법철학적 논의에서도 사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만민법

    은 자연법적 특성과 실정법(인정법)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착안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만민법은 살라망카

    학파 이전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서도 다루어졌으며, 그 유래

    는 로마법으로, 또 그 이념적 기초는 스토아학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

    만, 만민법의 이념적 기초와 본질, 그리고 그 내용은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에 이르

    러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논문은 국제법의 이해 뿐 아니라 법 일반과 법사상에 대한 이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만민법에 대하여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논의 순서는 먼저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생애와 주요 저작

    에 대하여 살라망카 학파와의 연계 하에서 정리한다.(II.) 만민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자연법에 대하여 토마스 아퀴나

    스의 자연법론과 함께 비토리아, 수아레즈의 자연법론을 개관한다.(III.) 본론에서는

    비토리아의 만민법 사상과 수아레즈의 만민법 사상을 순서대로 다루는데 가급적

    원문7)을 직접 인용하며 충실히 소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IV. 및 V.) 끝으로 비

    토리아와 수아레즈의 만민법 사상이 오늘날의 법철학과 국제법에 대하여 갖는 법

    사상사적 의의에 대하여 되짚어보면서 논의를 마무리한다.(VI.)

    7) 다만, 이 논문에서는 라틴어 원전이 아닌 영어 또는 독일어 대역판 내지 번역판을 참조하였다.

    F. Vitoria, Political Writings(A. Pagden/J. Lawrance eds.), Cambridge: Cambridge UP, 1991; F. de Vitoria, Vorlesungen: Völkerrecht, Politik, Kirche, Bd.I./II.(U. Horst et al. Hrsg.), Stuttgart: Kohlhammer, 1995/1997; F. Suárez, Selections from Three Works, Vol. 1/2(J. Brown Scott ed.) Oxford: Clarendon Press, 1944; F. Suárez, Abhandlungen über die Gesetz und Gott den Gesetzgeber(N. Brieskorn Hrsg.), Freiburg: Haufe, 2002.

  • 264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Ⅱ. 비토리아, 수아레즈와 살라망카 학파

    비토리아와 수아레즈가 소속된 살라망카 학파(Escuela de Salamanca)는 일반적으로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살라망카 대학과 다소 느슨하게 결합된 이베리아 스콜

    라 학파의 집단을 지칭한다.8)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종교개혁이나 이탈리아 방

    식의 르네상스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유럽에서 오랜

    스콜라 철학의 전통이 점차 사라지는 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뒤늦게 스콜라

    철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었다. 살라망카 학파는 비토리아의 살라망카 대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는 점 이외에도, 스콜라 철학의 방법론을 부흥시

    키고자 한다는 점, 또 그리스 철학자 ― 특히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로마법

    학자, 구약 및 신약 성경, 기독교 교부 및 초기 스콜라 철학자들의 문헌을 권위 있

    는 전거로 삼고 있으며 당대의 정치적 및 경제적 쟁점을 주제로 삼는다는 점 등이

    그 공통적인 특징으로 꼽힐 수 있다.9)

    살라망카 학파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탁월한 토마스주의자인 비토리아에 의

    하여 창시되었으나, 도미니크 수도회 뿐 아니라 예수회를 비롯한 다양한 수도회의

    구성원들이 살라망카 학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사실 도미니크 수도회가 유럽의

    토마스주의의 부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던 반면에, 예수회는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당대의 신학적 문제에 더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살라망카 학파 내에서도

    세부적인 차이가 없지 않다. 그러나 살라망카 학파가 비토리아에 의하여 창시되고

    여러 학자들을 거쳐 수아레즈에 의하여 완성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더욱이 비토리아와 수아레즈는 법사상의 측면에서 지극히 유사하고 단지 그 개성

    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10) 따라서 살라망카 학파를 이해하는 데에는 비토리아

    와 수아레즈를 중점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1. 비토리아의 생애와 주요 저작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는 1483년경 바스크지방의 알라바(Álava)에서 태어

    8) Alves/Moreira, 위의 책, 1면.

    9) Alves/Moreira, 위의 책, 3면.

    10) Hamilton, 위의 책, 7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65

    나 가족과 함께 부르고스(Burgos)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그는 1504년 도미니크

    수도회로 들어가서 1508년경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비토리아는 처음에

    는 철학 등을 공부하면서 오컴(William Ockham)의 유명론과 에라스무스(Erasmus)의

    휴머니즘에 심취하였다.11) 그러나 그 이듬해 수사가 된 이후로 비토리아는 전격적

    으로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흥을 주도하고 있던 생 자크 대학(collège de St. Jacque)으로 옮겨 크로케르트(Pierre Crockaert)12) 등에게 신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파리에서 당대의 최신 이론을 배우고 익힌 비토리아는 1522년 신학박사학위를 취

    득하고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발라돌리드(Valladolid) 대학에서 신학을 가

    르치고 1526년경부터 살라망카 대학의 신학 주임교수(Cátedra de Prima)로 취임하였다. 비토리아는 이곳에서 교과과정을 개편하여 토마스주의를 부활시키고 스콜라 철

    학의 방법론을 보급함으로써 살라망카 학파를 발전시켜나갔다. 그 역시 스승을 좇

    아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ꡔ신학명제집(Sententiae)ꡕ대신에 ꡔ신학대전(Summa Theologica)ꡕ을 교재로 사용하였으며,13) ꡔ신학대전ꡕ 제2부 2편(secunda secundae)을 크로케르트와 공동으로 편찬하는 등 토마스주의의 부흥을 주도하였다.

    1532년 비토리아가 학장이 되고 데 소토(Domingo de Soto)가 또 다른 신학교수

    (Vespers Professor)가 되면서 비토리아를 중심으로 한 살라망카 대학의 학자들은 점

    차 학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비토리아는 1545년 카를로스 5세로부터 트리

    엔트 공의회의 대표로 추천되었으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수행하지 못하고 1546년

    8월 12일 살라망카에서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1) 당시 비토리아는 특히 에라스무스에 대하여 공감하였으나, 훗날 자신이 위험천만하게 조심성

    없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고 반성하였다. Hamilton, 위의 책, 172면. 결국 이러한 학문적 이력

    으로 인하여 스콜라 철학과 기독교 휴머니즘을 결합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게 되면서

    오히려 비토리아는 에라스무스 및 에라스무스주의에 대하여 한층 강경하게 반대하게 되었다. Q.

    Skinner, The Foundation of Modern Political Thoughts Vol.2: The Age of Reformation, Cambridge: Cambridge UP, 1978, 141면.

    12) 크로케르트(Pierre Crockaert, c.1450~1514)는 늦은 나이에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

    작하여 존 메어(John Mair)가 주도하던 몽테규 대학(Collège de Montaigu)에서 이른바 근대양식(via moderna)의 교육을 받고 강의도 하였으나 1503년경 전향하여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와 밀접히 관련된 고전양식(via antiqua)의

    생 자크 대학(Collège de Saint-Jacques)에 참여하였다. 1509년경부터 크로케르트가 오랫동안 중세신학의 표준적인 학습서로 사용되어오던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ꡔ신학명제집(Sententiae)ꡕ 대신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ꡔ신학대전(Summa Theologica)ꡕ으로 강의하기 시작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Skinner, 위의 책, 135면.

    13) 다만, 당시의 법령 뿐 아니라 1538년의 개정 법령도 여전히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ꡔ신학명제집ꡕ을 기본교재로 사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어서 비토리아도 오랜 기간 동안 살라망카 대학의 묵인 하에 비공식적으로 교과과정을 운영하였고, 그의 사후인 1550년에야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Hamilton, 위의 책, 173면.

  • 266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비토리아의 독창성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당대의 논쟁거리, 특히 법과

    정치 영역의 문제들에 적용시켰다는 점에 있다.14) 이미 비토리아는 발라돌리드 대

    학에서 강의하면서 신세계의 식민지화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이에 관한 관심은 살

    라망카 대학으로 옮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15) 비토리아가 앙가주망을

    실천한 학자이든 아니든 간에, 아메리카 인도인(서인도인)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당대의 논쟁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다행스럽

    게도 비토리아의 주장은 널리 공감을 얻었고 이는 1512년의 「부르고스 법(Leyes de Burgos)」을 계승한 1542년의 「인도법(Leyes de Indias)」으로 결실을 맺었다.

    비토리아 스스로는 생전에 저서를 출판하지 않았지만 그의 강의(lectio)나 특별강

    연(relectio)16)은 제자들에 의하여 충실히 서취(書取)되었다. 이는 그의 사후 보이어(S.

    Boyer)에 의하여 15개의 특별강연으로 구성된 ꡔ신학특별강연집(Relecciones teologicas del Maestro Fray Francisco de Vitoria, 1557)ꡕ으로 출간되었다. 그 중에서 ꡔ국가권력론(De potestate civili, 1528)ꡕ “전쟁법론(De jure belli)”을 포함한 ꡔ인도(서인도)론(De Indis, 1538)ꡕ 등이 법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ꡔ국가권력론ꡕ에서 비토리아는 정치공동체와 국가권력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고, ꡔ인도론ꡕ에서는 스페인에 의한 아메리카 정복 및 식민지화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ꡔ신학대전ꡕ에 대한 비토리아의 주석은 비공식적으로 전해오다가 20세기에 와서 비로소 전6권으로 된 ꡔ성 토마스의 제2부 2편에 대한 주석(Comentarios a la Secunda Secundae de Santo Tomàs)ꡕ으로 공식적으로 출간되었다.17) 그리고 ꡔ신학대전ꡕ 제2부 1편의 問(Quaestaio) 90부터 105까지 다룬 강의안에 바탕한 “법률론(De lege)”에서 비토리아의 자연법론이 상세히 전개되고 있으며 “정의론

    (De justitia)”에서는 소유권과 경제와 관련된 법적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비토리아가 남긴 저작들의 영향력은 그의 제자들 세대와 그로부

    터 영감을 받은 살라망카 학파를 넘어서지 못하고 묻혀졌다.18) 그러다가 20세기 초

    14) A. MacIntyre, God, philosophy, universities: A Selective History of the Catholic Philosophical Tradition, Lanham: Rowman&Littlefield, 2009, 106면.

    15) Hamilton, 위의 책, 172면.

    16) 특별강연(relectio)은 어떤 주제에 대하여 한 학기의 강의가 끝난 뒤에 이를 요약하여 학구적인 청중

    을 상대로 요약 발표하는 강연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Hamilton, 위의 책, 6면; Pagden/Lawrance,

    위의 글, xvii~xviii면.

    17) F. de Vitoria, Comentarios a la Secunda Secundae de Santo Tomàs(V. B. de Heredia ed.) Salamanca: Spartado, 1932-1952.

    18) H. Köck, Der Beitrag der Schule von Salamanca zur Entwicklung der Lehre von den Grundrechten,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67

    에 와서야 비토리아의 저작과 사상은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하여 20세기 전반기에는

    살라망카 학파의 창시자이자 국제법의 아버지로 새삼 재조명되기에 이르렀다.

    2. 수아레즈의 생애와 주요 저작

    준수박사19) 수아레즈(Francisco Suárez)는 비토리아가 사망한 2년 뒤인 1548년 오랜 귀족 가문의 후예로 그라나다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562년부터 1564년까지 살

    라망카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후 우여곡절 끝에 예수회에 입회하여20) 철학을

    공부하고 1566년부터 비토리아의 제자 만치오(J. Mancio) 등으로부터 신학을 배우

    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수아레즈의 경우 철학이나 신학 영역의 저서에서도 법

    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 후, 1571년 수아레즈는 박사학위도 없이21) 세고비아의 예수회 대학에서 강사

    로서 철학을 가르쳤고, 1574년에는 세고비아 대학과 아빌라(Ávila) 대학에서, 1576년부터는 발라돌리드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교수가 질문의 근거에 대한 아

    무런 논증도 없이 과거의 의견들을 단순히 되뇌는 ‘leer por catrapazios’라고 불리던

    전통적인 강의방법을 비판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

    이 높아지면서 1580년에는 훗날 그레고리오 대학이 되는 예수회 대학의 설립을 위

    하여 로마로 파견되었다. 5년 후인 1585년 돌아와 바스케즈(G. Vasquez)의 후임으로

    유명론과 에라스무스의 휴머니즘이 유지되던 알칼라(Alcalá) 예수회 신학원의 신학교수가 되었으나 바스케즈가 귀국한 이후로 그와의 갈등 속에 사직하였다.

    그 후, 1593년 당시 포르투갈 국왕을 겸하고 있던 스페인 필리페 2세의 추천으로

    우여곡절 끝에 1597년 포르투갈 코임브라 대학의 신학주임교수(Prima de Teologia)로

    Berlin: D.&H., 1987, 23~25면; Böckenförde, 위의 책, 318~319면.19) 전통적으로 스콜라 철학에서는 수아레즈의 박학다식함, 사유의 깊이, 자신의 주제를 방어하는

    탁월한 논증력을 고려하여 준수박사(Doctor Eximus)라고 불러왔다. J. Fernandes, Die Theorie der Interpretation des Gesetzes bei Francisco Suárez, Frankfurt a.M.: Peter Lang, 2004, 23면.

    20) 1564년 처음 수아레즈가 예수회에 입회신청하였을 때에는 도덕적 기초는 탁월하지만 필요한 재

    능이나 건강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고, 그 이듬해에도 심사자가 반대하였지만,

    카스티유 교구장의 도움으로 겨우 입회하였다. Hamilton, 위의 책, 185면.

    21) 훗날 수아레즈는 코임브라 대학의 신학주임교수가 될 당시에도 대학학위를 통한 교수자격을 취

    득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에보라 대학에서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단상토론의 형태로 교수자격시험

    이 실시되었다. A. Körner, “Francisco Suárez”, Deutsche und Europäische Juristen aus neun Jahrhunderten, 4.Aufl.(G. Klenheyer/J. Schröder Hrsg.), Heidelberg: C.F. Müller, 1996, 408~413면, 특히 409면.

    22) Fernandes, 위의 책, 26면.

  • 268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취임하였다. 그는 1601년경 총장의 요청에 의하여 세속 법률가뿐 아니라 교회법학

    자, 신학자들에게 공통적인 ‘법률론(De legibus)’을 강의하였다. 수아레즈는 1616년

    퇴임한 후 그 이듬해에 자신의 저서를 출판하기 위하여 리스본으로 갔다가 1617년

    9월 25일 “죽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줄 몰랐다(No creia que era tan dulce el morir).”

    라고 말하고 사망하였다.

    수아레즈는 상대적으로 유명론에 덜 노출된 편이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면서도 개별 주제에 관한 논의에서는 유명론의 영향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23) 그는 이성과 자유에 토대를 둔 도덕신학의 관점에서 법적, 정치

    적, 국제관계적 쟁점을 폭넓게 다루었다.24) 수아레즈는 비범한 통찰력과 위대한 창

    조력을 가진 사상가로서 스페인이 17세기 유럽에서 정신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25)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가장 유명한 스콜라 철

    학자로서 데카르트, 그로티우스, 볼프, 라이프니츠를 비롯한 근대사상가들에게 폭

    넓게 영향을 미쳤다.26)

    수아레즈의 저서는 주저인 ꡔ형이상학 강론(Disputationes metaphysicae, 1597)ꡕ을 비롯하여 전집이 26권에 이를 정도로 대단히 방대하다. 총 22,365면의 총 2,100만

    단어로 구성된 전체 저작은, 각 개별 저작이 건축학적 전체 구조 속에서 적절한

    위치가 부여됨으로써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이룬다. 그의 저서는 아리스토텔레스

    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에 대한 주석의 형태로 전개되는 전통적인 양식을 벗어

    나 교의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27) 그 뿐 아니라, 그 내용에 있

    어서도 그 자신의 방법론에 따라 철학과 신학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는 등 대단

    히 독자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로 인하여 수아레즈의 자연법

    론은 단순히 가톨릭 대학 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대학에서도

    높은 명성을 얻었고 또 널리 읽혔다고 전해진다.

    수아레즈는 비록 직업법률가도 아니고 정통적인 법학연구경력도 없지만, 놀라울

    23) 수아레즈가 둔스 스코투스와 오컴의 유명론에 입각해 있으며, 그가 기본적으로 토마스주의에

    서있다는 전통적인 평가는 왜곡된 토마스주의에 바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로 M. Villey, La formation de la pensée juridique moderne, Paris: PUF, 1975, 384면.

    24) 이에 대한 개관은 J. Pereira, Suárez: Between Scholaticism and Modernity, Milwaukee: Marquette UP, 2007, 18~26면 참조.

    25) Körner, 위의 글, 409면.26) Ch. Bergfeld, “Francisco de Suárez”, Juristen. Ein Biographisches Lexikon(M. Stolleis Hrsg.),

    München: C.H. Beck, 1995, 595~596면, 특히 596면.27) Pereira, 위의 책, 13~14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69

    정도로 풍부한 법학 관련 저작들을 남겼다.28) 그의 법이론은 그의 ‘법률론’ 강의에

    바탕하여 저술된 ꡔ법과 입법자인 신에 관한 논고(De legibus ac Deo legislatore, 1612)ꡕ에 잘 나타나 있다. 그밖에도 영국의 국교회를 수립한 제임스 1세를 비판한 ꡔ신앙옹호론(Defensio fidei catholicae, et apostolicae adversus anglicanae sectae errores, 1613)ꡕ, ꡔ정의와 법(De justitia et jure, 1584)ꡕ등에도 법철학적 논의가 담겨 있다.

    Ⅲ. 만민법의 기초 : 자연법론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만민법론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 철학의

    맥락에서 도덕신학의 틀 내에서 다루어진다.29) 그리고 살라망카 학파가 당대의 신학

    적, 정치적 문제를 논의한 방법론적 기초는 인정법이 아니라 자연법(lex naturalis)이었

    다.30)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립한 법의 위계서열 중에서도 자연법은 정치와 정치공동

    체를 논의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로 기능하였으며, 만민법에 대한 논의에서도 그 기초

    를 이루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제시한 법의 유형 및 위계서열에 따르면, 법

    은 영구법, 자연법, 인정법, 신법의 4가지로 구분된다.31)

    영구법(lex aeterna)은 신의 이성에 의하여 지배되는 전세계를 규율하는 법이다.32)

    신의 이성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므로, 영구법 역시 영원하다. 영구법은

    사물들의 본성에 새겨져 있고, 이성적 존재의 본성에 따라 인간에게도 분여되어

    있다.

    자연법(lex naturalis)은 영구법에 대한 이성적 피조물의 참여이다.33) 진정한 자연

    법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므로 인간의 이성으로써 명확히 인식될 수 있다. 자

    연법은 더 일반적일수록 더 확실하게,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그

    리하여 자연법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자연법의 1차 원칙과 이와 같

    28) Fernandes, 위의 책, 15면 및 18~19면.

    29) 살라망카 학파에 의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이 부흥하게 된 지성사적 배경 및 그 경과에 대

    해서는 Skinner, 위의 책, 135~185면 참조.

    30) Böckenförde, 위의 책, 313면.31) Summa Theologica, I-II, Q.91, A.1-A.6.

    32) Summa Theologica, I-II, Q.91, A.1.

    33) Summa Theologica, I-II, Q.91, A.2.

  • 270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은 정도로 인식되거나 적용될 수는 없고 상황에 따라 변화 가능한 2차 원칙으로

    나뉜다. 한 마디로, 자연법은 근본적인 원리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변적이고 대부분

    의 결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소수의 사례에서 특별한 원인의 결과로서 자연법

    은 변화할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법으로부터 어떤 문제에 대한 개별적인 결정으로 나아갈 필

    요가 있는데, 인간의 이성에 의해 고안된 개별적인 결정이 인정법(lex humana)이

    다.34) 인정법은 올바른 이성의 사용을 통하여 접근가능한 자연법으로부터 도출된

    다. 모든 인정법은 간접적으로라도 자연법의 일반원리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따

    라서 정당하지 않은 인정법은 실제로 법이 아니므로 준수할 의무도 없다.

    인정법은 공동선을 위해 기여하는 방식에 따라 만민법(ius gentium)과 시민법(ius

    civile)으로 구분된다.35) 만민법은 자연법으로부터 도출되는 것들이 포함된다. 반면

    에 시민법은 국가의 공동선을 위하여 규정되어야 할 것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자연법과 인정법 이외에 인간행동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신법(lex

    divina)이 필요하다.36) 신법은 인간 이성이 아니라 성경 구절과 교회를 통한 계시를

    통하여 확인된다. 신법과 인정법의 구분은 신앙과 이성의 각각의 역할을 명확히 하

    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는 신학적, 철학적 주요논점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

    나스의 교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자연법을 포함한 법에 대한 전체적인 구상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법이론에 입각하고 있다.

    영구법은, 그에 따르면, 다른 모든 법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신의 창조적 이성 그

    자체이다. 마치 건축가가 설계도면을 사용하듯이, 창조과정에서 신에 의해 사용된

    규범 내지 규칙들이 영구법이다. 인정법을 비롯한 모든 법은 영구법으로부터 나온

    다. 신의 의지는 그의 지혜와 이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며 양자는 신에게서 필

    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물론 신법의 구속력은 신의 의지 없이 생각할 수 없다.

    나아가 법률의 정의와 그 구속력을 근거짓기 위해서 신의 의지만으로 충분하다.37)

    자연법(ius naturae)은 영구법에 대한 이성적 피조물의 참여이다. 이는 창조 당시

    신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자명한 1차 원칙들이다. 이러한 자연법은 사물

    34) Summa Theologica, I-II, Q.91, A.3.

    35) Summa Theologica, I-II, Q.95, A.4.

    36) Summa Theologica, I-II, Q.91. A.4.

    37) 이처럼 비토리아는 이성에 내재한 자연법의 자율적 효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둔스

    스코투스와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Böckenförde, 위의 책, 324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71

    의 본성에 따른 것으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필연적인 법이다. 그에 따라

    인정법과 달리, 자연법은 공포되지 않더라도 구속력이 있다.

    자연법으로는 흔히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 또는 “다른 사람들이 네게 해주

    기를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라.”는 자명한 두 가지 원칙이 제시된다.

    이러한 1차 원칙은 이성적 존재라면 인식하지 못할 리 없다. 이러한 1차 원칙으로

    부터 살인의 금지와 같은 2차 원칙들이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도출된다. 첫 단계

    로부터 다음 단계로의 추론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합의(consensus

    omnium)라는 기준이다. 지식은 모든 사람들이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결국 자연법이 단지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 사이에도 존재

    한다는 것을 추단케 한다.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게 알지 못할 수 있지만, 자연법의

    실체는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동일하다.

    인정법(lex humana) 또는 실정법(lex positiva)은 인간에 의해 제정된 법으로 이루

    어진다. 인정법 역시 다른 법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선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로

    제정된 것이다. 인정법이 정당하려면 자연법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

    정법은 자연법과 달리, 폐지될 수 있다. 또 그 권위가 인간의 기관으로부터 도출되

    므로 서로 다를 수 있고, 때론 공동체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자연법과 실정법의 경계에서 중간적이면서도 지극히 애매한 지위를 차

    지하는 것이 바로 만민법(ius gentium)이다. 이는 지방의 입법적 확신, 믿음, 관행과

    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체인 전세계의 권한에 의하여 제정된 원칙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비토리아는 만민법이 본질적으로 실정법의 일부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만민법이 자연법칙의 1차 원칙에 직접 기초해야 한다는 필요성, 또

    그 폐지를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합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만민법은 개별 통치자에 의해 제정되는 실정법보다는 자연법에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38)

    끝으로 비토리아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좇아 자연법과 인정법 외에 계시의 신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신법은 무효화되거나 폐지될 수 없고, 또 입법자

    인 신의 의지만으로 정당화되고 구속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인정법과 구별된다.

    수아레즈(Francisco Suárez)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의 법의 서열체계와 자연법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토리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수아레즈는 토마스 아퀴

    나스나 비토리아처럼 영구법부터 시작하여 자연법, 인정법의 순서로 아래로 체계

    38) Pagden/Lawrance, 위의 글, xvi면.

  • 272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화해나가는 전통적인 서술방식을 답습하지는 않았다.39) 그는 ꡔ법과 입법자인 신에 관한 논고ꡕ에서 법의 다양한 유형들을 다루기 전에 제1권에서 법 일반의 본질, 원인과 효과에 대하여 상세히 논의하고 있다.40)

    수아레즈는 법의 본질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계승하여 법을 지성

    내지 이성의 산물로 이해하면서도 오컴 등의 주의주의에 기초하여 의지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법의 개념에 대하여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법은

    정당하고 지속적이며 충분히 공표된 공동체의 규정이다. 한 마디로 법은 지성만의

    산물도 아니고 의지만의 산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수아레즈는 비토리아와 마찬가지로 법을 영구법, 자연법, 인정법, 신법으로 구분

    하지만 의지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등 세부적인 이해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를

    드러낸다. 이 점은 자연법(lex naturalis)에 관한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된다.41)

    그에 따르면, 영구법으로부터 연역된 자연법은 정당성을 가리킬 뿐 아니라 동시에

    명령이나 금지를 포함하고 있다. 다만, 자연법의 내용은 영구법에 참여하는 이성이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진 존재의 본성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42) 자연법은 순전

    히 인간이성에서 연역해낸 규칙이다.

    수아레즈 역시 자연법이 충분히 세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인간 공동체를 위해

    인정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정법은 정의와 조화되게 제정되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법이 아니다. 또한 법이 되기 위해서는 정의라는

    기본적인 필수요건 뿐 아니라 입법자의 정당하고 충분한 권위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법이 공동선을 추구하여야 하고, 공동선이 부정의하게 분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충족하여야 한다.43)

    인정법에는 만민법과 시민법이 포함된다. 전자는 거의 모든 국가의 관습에 의하

    여 공통적으로 성립되며 변경되기 어려운 데 비하여, 후자는 목표에 따라 달리 규

    율될 수 있으며 쉽게 개폐될 수 있다. 이 점에서 만민법은 자연법과 유사한 것처

    39) Hamilton, 위의 책, 5면.

    40) De legibus ac Deo legislatore, I, 1-20 : Selections from Three Works II, 21~139면.

    41) De legibus ac Deo legislatore, II, 5-16 : Selections from Three Works II, 178~325면. 수아레즈는 자연법(lex naturalis)과 자연의 법(ius naturae)을 구별하지 않고 호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와 달리, 수아레즈가 자연법을 인간의 윤리적 의무의 전체로, 자연의 법을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관계를 규율하는 모든 규범의 총체로 이해함으로써 양자를 구분하고 있다는 견해로는

    Köck, 위의 책, 31면.42) Böckenförde, 위의 책, 356면.43) Hamilton, 위의 책, 44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73

    럼 보이지만, 상이한 특성도 갖고 있다. 즉 자연법이 본질적으로 선악의 문제인 데

    비하여 만민법은 그렇지 않고, 또 자연법이 영구불변하며 보편타당한 데 비하여

    만민법의 경우에는 가변적이며 예외가 있을 수 있다. 수아레즈에 의하여 명확하게

    구분된 자연법과 만민법의 관계는 그로티우스 등에 의해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Ⅳ. 비토리아의 만민법론

    비토리아 이전까지 유럽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가 형성되기 전인 데다가 기

    독교적 전통의 단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국가간의 분쟁도 교회법이나

    교황의 중재로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종교개혁의 여파로 로

    마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쇠퇴함에 따라 국가간의 분쟁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결

    될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통의 종교적, 문화적 기반이 사라진 국가들 사이에 발생

    하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론에 기초하여 비토리아는 국가들 사이에 적용되는 법규범을 찾으려 하였

    다. 그 착안점은 바로 국가나 국제공동체가 신앙이 아닌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기

    초하며, 국가에서 모든 인간이, 국제공동체에서 모든 국가가 평등한 것으로 간주되

    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모든 인류를 포괄하는 법공동체로서의 全世界

    (totus orbis)가 등장한다. 이제 기독교 세계(orbis christianus)는 더 이상 이 세계와

    같은 의미가 아니게 되었다.44)

    이러한 맥락에서 비토리아는 개별국가를 넘어서 인류의 공공선(bonum orbis)을

    추구하는 全世界로서의 국제사회에 적용되는 법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사실

    도덕적, 법적 통일체로서의 全世界라는 사상은 이미 오래전 스토아 학파에 의하여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비토리아는 全世界를 단순히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

    으로 자연법에 의하여 결합된 국제공동체로 파악하였다.45)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

    를 규율하는 법을 ꡔ법학제요(Institutiones)ꡕ의 만민법에 관한 개념정의(I, 2,1)를 차용하여 만민법이라고 명명하였다.

    44) Böckenförde, 위의 책, 315면.45) Verdross, 위의 책, 93면.

  • 274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자연적 이성이 모든 민족에 대하여 규정한 것은 만민법이라 불린다

    (Quod naturalis ratio inter omnes gentes constituit, vocatur ius gentium).”46)

    원래 로마법의 만민법(ius gentium)은 시민법(ius civile)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로마

    시민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적용되는 법규범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토

    리아는 국제사회 속에서 성립하는 개별 국가의 권리의무를 규율하는 법을 만민법

    으로 이해함으로써 오늘날의 국제법의 개념에 가깝게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비토

    리아는 만민법이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서 어떠한 단체나 입법자에 의

    하여 창설되지 않더라도 이성에 의하여 승인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는 이러

    한 전세계의 공동합의 내지 동의가 어떻게 이루어져왔는지, 또 어떻게 가능할 것

    인지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논의하지 않았다.47)

    그리고 비토리아는 만민법을 모든 민족, 또는 대부분의 민족에게 공통적인 실정

    법의 일종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연법과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연법은 자명하

    게 정당한 사물만을 다루는 데 비하여, 만민법은 그 자체로 자명하게 정당하지 않

    은 문제에 대한 인간의 합의로 이루어진다.48)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토리아는 만민

    법이 자연법과 밀착되어 종종 만민법의 도움이 없이는 자연법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다고 보아 양자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지는 않았다. 또한 만민법이 인간의

    실정법이지만 보편적 적응성을 갖고 있는데다가 당초의 합의가 번복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시민법처럼 쉽게 변경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만민법의 내용으로는 일반적으로 자기보존을 위한 기본적인 권리, 사적

    소유권제도, 외교면책, 전시에 인간생명을 보장하는 형태로서의 노예제도 등에 관

    한 보편타당한 규정들이 포함된다는 데에는 별 다른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교역의

    자유, 항구 및 강 등 여행의 자유, 거주의 자유 등에 대하여는 논란이 적지 않

    다.49) 그러나 비토리아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비쳐지는 이것들을 만

    민법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가령 하늘, 바다, 물, 강, 항구, 도로는 만인의 공동자

    산이라는 것으로부터 인간이 다른 나라에 가는 것을 금지할 수 없다는 원칙을 이

    46) De indis, Q.3, A.1, §2 : Political Writings, 278면. 이 구절을 기초로 비토리아가 처음으로 ‘ius inter gentes’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보는 견해 ― Verdross, 위의 책, 93면 ― 도 없지 않으나, 그

    가 이를 실제로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또 의도적으로 사용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다. A. Körner, 위의 글, 437면 참조.47) Hamilton, 위의 책, 106면.

    48) Comentarios a la Secunda Secundae de Santo Tomàs, III, Q.57, A.3 : Hamilton, 위의 책, 98~99면.49) Hamilton, 위의 책, 100~104면; 백봉흠, 위의 논문, 33~37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75

    끌어냈다.

    “스페인 사람들은 미개인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그 나라를 여

    행하고 거주할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그들이 여행하고

    거주하는 것을 미개인들로부터 방해받지 않는다.”50)

    “스페인 사람들은 미개인들의 조국에 대하여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미개인들과 적법하게 교역할 수 있다.”51)

    “미개인들에게 그들과 이방인들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스페인 사람

    들이 이를 공유하고 향유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52)

    “(서)인도에서 스페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그 공동체의 시민

    (cives)이 되기를 원한다면, 시민권 뿐 아니라 그 공동체에 거주하는 부모

    에게서 태어난 원주민들이 향유하는 이익도 금지되어서 안 된다.”53)

    나아가 비토리아는 원주민들이 이러한 권리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자기방

    어권의 차원에서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만일 미개인들의 묵인을 얻기 위한 설득이 실패하고 그들이 계속 폭력

    적으로 대응한다면,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을 방어할 수 있고 자신의 안전

    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 미개인의 공동체를 정

    복하고 그들을 복속시키는 조치를 제외한 모든 조치를 다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경우에는 스페인 사람은 그 조치를 취할 수

    있다.”54)

    그런데 이러한 만민법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하는

    만민법이 구속력을 갖는지 여부, 또 현실에서 만민법을 강제할 수 있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비토리아는 만민법의 구속력을 모든 인간의 — 아마도 묵시적인 — 동의라는 생각과 연결시켜 이를 분명히 인정하였다.

    50) De Indis, Q.3, A.1, §1 : Political Writings, 278면.

    51) De Indis, Q.3, A.1, §3 : Political Writings, 279면.

    52) De Indis, Q.3, A.1, §4 : Political Writings, 280면.

    53) De Indis, Q.3, A.1, §5 : Political Writings, 281면.

    54) De Indis, Q.3, A.1, §6~7 : Political Writings, 282~283면.

  • 276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만민법은 단순히 인간들 사이의 협약이나 합의로서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실정법규(lex)로서의 효력을 갖는다.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인 전세

    계는 모든 인간에게 정당하고 이로운 법을 제정할 권한을 갖는다. 이것이

    만민법을 이룬다. 이로부터, 평시 또는 전시에 만민법을 위반하는 사람들

    은 도덕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만민법을 무

    시하는 왕국은 전세계의 제제를 받으므로 어떠한 왕국도 만민법을 무시하

    는 선택을 할 수 없다.”55)

    한편, 비토리아는 만민법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에 이를 강제할 수 있다고 보았

    는데, 만민법의 강제집행은 살라망카 학파에 있어서 정당한 전쟁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비토리아는 “전쟁법론”에서 전쟁은 공동선의 방어에 기여하는 정당한 이

    유가 있을 때에만 허용되고 선전포고시에 정당한 전쟁도 그 이후에도 정당성이 유

    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공동체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과 그 구성원이 입은

    손해에 대하여 복수하고 처벌할 권한을 갖는다. 이는 "공동체는 자족적

    (sibi sufficiens)이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금언에 의해서 뒷받침된

    다. 공동체가 손해에 대하여 복수하고 그의 적에게 교훈을 가르쳐줄 수

    없다면 공동체는 공동선과 안정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

    법행위자는 처벌의 두려움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더 과감하고 쉽게 공

    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사를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는 이

    권한이 공동체에게 인정될 필요가 있다.”56)

    나아가 비토리아는 자기 방어 뿐 아니라 더 큰 악을 예방하기 위한 제재로서 필

    요한 경우에도 전쟁이 정당한 것으로서 허용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선교방해,

    기독교 개종자에 대한 박해와 같은 만민법 위반도 전쟁을 정당화한다고 봄으로써

    식민지전쟁까지도 원칙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57)

    그러면서도 앞서의 주장들과는 일견 모순되게 비토리아는 국제법을 全世界의 차

    원으로 확대하여 인간이 신 앞에서 뿐 아니라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평등하다는

    55) De potestate civili, Q.3, A.4, §21 : Political Writings, 40면.

    56) De jure belli, Q.1, A.2, §5 : Political Writings, 300면.

    57) K. Seelmann, “Francisco de Vitoria”, Juristen. Ein Biographisches Lexikon(M. Stolleis Hrsg.), München: C.H. Beck, 1995, 639~640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77

    것을 강조함으로써 신대륙 원주민의 노예화를 문제 삼으면서 스페인의 정복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는 1550년 식민지 정복 및 노예화를 정당화하려 했던 계관법학자 세풀베다

    (Juan de Sepulveda)와 이를 격렬하게 비판한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사이에 벌어진 역사적인 논쟁58)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 비토리아의 강의와 특별강

    연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비토리아는 1538년경 살라망카 대학에서 행한 특별강

    연 ꡔ인도론ꡕ에서 자연법의 보편성이라는 관념에 기초하여 모든 이민족도 독자적인 권리주체이며 독립과 자립을 요구할 수 있다는 테제를 논증하였다.59)

    “지금까지 말해온 모든 것들의 결론은, 미개인들도 기독교인들과 마찬가

    지로 공적인 차원이나 사적인 차원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진정한 지배를 소

    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진정한 주인(ueri domini)이 아니라는 이유

    로, 시민이건, 군주이건 간에, 자신들의 소유를 강탈해서는 안 된다.”60)

    끝으로, 비토리아의 논의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비토리아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어떤 전쟁이 정당하지 않다고 양심적으로 굳게

    믿는 개인은 참전하지 않을 권리(및 의무)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전쟁이 신민에게 명백히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면, 비록 군주가

    싸우도록 명령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싸워서는 안 된다.”61)

    이상에서 살펴본 비토리아의 전쟁법론을 정리하면, 그는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모

    든 합당한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하여 마키아벨리류의 실용적이고 몰도덕적인 접

    근방법도 거부하고, 에라스무스와 같은 휴머니즘의 순진한 평화주의적 접근방법에

    대해서도 비현실적이고 심지어 무책임한 선택이라 하여 거부하였다. 비토리아는 때

    때로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되, 이 경우에도 가능한 도덕적

    한계 내에서 전쟁이 치러져야 하고 승자는 겸양과 절제를 보여야 한다고 보았다.62)

    58) Alves/Moreira, 위의 책, 95~100면. 세풀베다와 라스 카사스의 역사적 논쟁에 대한 상세한 논의

    는 L. Hanke, All mankind is One: A Study of the Disputation between Bartolome de Las Casas and Juan Gines de Sepulveda in 1550 on the Intellectual and Religious Capacity of the American Indians, DeKalb: Northern Illinois UP, 1994 참조.

    59) 구체적인 논증 구조에 대해서는 Verdross, 위의 책, 93~94면 참조.

    60) De Indis, Q.1, Conclusion, §23 : Political Writings, 250~251면.

    61) De jure belli, Q.2, A.2, §22 : Political Writings, 307면.

  • 278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Ⅴ. 수아레즈의 만민법론

    수아레즈 역시 보편적 공동체에 적용될 수 있는 법적인 틀로서 만민법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수아레즈에게 만민법의 지도이념은, 그가 ‘인류의 공동선(bonum commune

    generis humani)’이라고도 불렀던 모든 국가의 공동선이었다. 이로부터 각 국가는 인류

    의 공동선의 테두리 내에서만 자신의 복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물

    론 수아레즈는 윤리적인 세계질서 속에서 고유한 도덕과 별도로 법의 필요성을 인정

    하였다.

    “인류로 구성된 모든 공동체는 자족적이지 않고 상호 원조와 우애를 필

    요로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공동체의 소통과 우애가 지시되고 올바

    르게 질서잡힐 수 있도록 하는 법이 필요하다.”63)

    수아레즈는 이러한 이념적 토대위에서 만민법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등 만민법

    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켜 후대의 국제법학에서 수용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64) 특

    히, 그는 ‘ius gentium’의 이중적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는 한편, 만민법을 실정법의

    한 유형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연법과 명확히 구별하였다.65)

    “만민법의 규칙들은 인간에 의하여 그들의 의지와 동의에 의하여 제정

    되었다. 만민법은 자연의 창조주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에 씌어있다고 말

    할 수 없다. 따라서 만민법은 자연법이 아니라 인정법의 일부이다.”66)

    한편, 수아레즈에 따르면 자연법은 그 내적 필연성에 의하여 모든 인간들에게

    효력이 있다. 이에 비해 만민법은 다수 국가의 일치된 관행에 기초할 뿐 필연적으

    로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제한적이지 않다. 또한 자연법이 불변적인

    62) Alves/Moreira, 위의 책, 64~65면.

    63) De legibus ac Deo legislatore, II, 19, §9 : Selections from Three Works II, 349면.

    64) Verdross, 위의 책, 97면.

    65) 이는 전통적으로 자연법의 일부로 여겨져 왔던 사적 소유권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

    으켰다. 왜냐하면 만민법으로서의 사적 소유권 제도가 반드시 입법당국에 의하여 수립되어야만

    효력이 있고, 또 소유권도 자연적 정의의 원리를 직접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원칙적으로 변경되

    거나 폐지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Skinner, 위의 책, 153면.

    66) De legibus ac Deo legislatore, II, 17, §8 : Selections from Three Works II, 332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79

    데 비하여, 만민법은 서로 다른 효력근거 때문에 가변적이다.

    이러한 만민법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수아레즈는 만민법을 두 가지로 나누었

    다. 첫 번째 범주는 모든 국가에 공통적인 국내법을 포괄하고, 두 번째 범주는 국제

    적인 상호관계에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공통적인 법들을 포괄한다. 즉 만민법은 ‘국

    가내의 법(ius intra gentes)’으로서의 전통적인 만민법과 ‘국가간의 법(ius inter gentes)’

    으로서의 만민법으로 나뉜다.67) 두 범주 모두 자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원칙적

    으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만민법이지만, 두 번째 범주의 만민법만

    이 고유한 의미의 국제법을 이룬다.

    만민법은, 국가간의 만민법이든, 국가내의 만민법이 든 간에, 모두 실정법의 일

    반적 특성을 갖는다. 다만 모든 만민법은 시민법과 달리, 관습법으로서 존재한다.

    즉 불문법으로서의 만민법은 한 국가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라 국가들의 관습

    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68)

    “만민법의 규칙들은 성문법의 형태로 성립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민법

    의 규칙들과 다르다. 왜냐하면 만민법의 규칙들은 모든 또는 거의 모든

    국가들의 관습에 의하여 성립되기 때문이다. … 불문법은 관습으로 성립

    되는데, 특정 국가의 관습에 의하여 도입될 때 시민법이라고 불리고, 그

    나라만 구속한다. 하지만 모든 국가의 관습에 의하여 도입되고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는 경우에 우리는 이를 진정한 만민법이라고 믿는다.”69)

    이처럼 수아레즈는 만민법을 관습의 일종, 즉 보편적 관습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만민법의 변경 내지 폐지에 대해서도 유연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관습

    이 사람들의 동의에 달려 있으므로 관습법으로서의 만민법의 변경도 동의만 얻으

    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수아레즈도 보편적인 관습으로서의 만민법의

    특성상 이를 변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만민법은 변화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민법에 의하여 금

    지되는 것이 두 가지 점에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악은 아니다. 첫째 문

    제가 되고 있는 원칙이 자연법으로부터 필연적이고 자명하게 추론되는 것

    67) W. Grewe, Epochen des Völkerrechtsgeschicht, Berlin: Walter de Gruyter, 1984, 226~227면.68) 자세히는 Hamilton, 위의 책, 106~109면.

    69) De legibus ac Deo legislatore, II, 19, §6 : Selections from Three Works II, 345면.

  • 280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이 아니고, 둘째 만민법에 의하여 부과되는 의무가 일상적인 의무와 동떨

    어져서 이성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70)

    “그러나 일부 국가가 동의한 국지적인 만민법과 달리 모든 국가가 동의

    한 보편적인 만민법을 변경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러한 만민법은

    모든 국가에 공통적인 것으로서 모두 권위에 의하여 도입된 것으로 보이

    기 때문에 보편적인 동의 없이는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 없다. 물론 변경

    을 위한 내재적인 장애물은 없기 때문에 모든 국가들이 변경에 동의하거

    나 상반된 관습이 점차 자리를 잡아 우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말해서 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71)

    수아레즈는 전쟁법에 관해서는 특별히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지 않았다.72) 그

    는 전쟁을 평화의 수립 및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파악함으로써 박애(博愛)와 모순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방어전쟁의 권리는 침략자의 불법에서 도출되는 데 비

    하여, 공격전쟁은 주권자를 통한 심판관의 집무집행으로 이해되었다. 그에 따르면,

    공격전쟁이 정당화되는 것은, 법적 권원이 존재하고 불법이 다른 방법으로써는 징

    벌되거나 복구될 수 없고 주권자가 확실히 선한 목적을 위하여 공격한다는 전제가

    충족될 경우이다.

    지금까지 수아레즈의 만민법 이론을 살펴보았는데, 만민법에 관한 수아레즈의 입

    장은 더 할 수 없이 명쾌하다. 그의 만민법에는 자연법론의 기본적인 틀에 조화되는

    관습만이 있을 뿐이고 현대 국제법의 기초가 되는 협약이나 협정은 존재하지 않는

    다.73) 더구나 그는 만민법의 토대가 되는 인류의 공동체에 대해서도 크게 비중을 두

    지 않고 간단히 언급하는 데 그친다. 이 점에서 수아레즈의 만민법론은 비토리아의

    만민법론과 크게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후퇴한 느낌도 없지 않다.

    70) De legibus ac Deo legislatore, II, 20, §6 : Selections from Three Works II, 355면.

    71) De legibus ac Deo legislatore, II, 20, §8 : Selections from Three Works II, 356면.

    72) Körner, 위의 글, 411면.73) Hamilton, 위의 책, 108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81

    Ⅵ. 결 론

    비토리아와 수아레즈를 비롯한 살라망카 학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론을

    새로운 법질서 및 정치질서와 조화롭게 재해석하려 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필리페

    2세의 통치하에 유럽의 지배적인 세력으로서 신대륙의 발견 및 식민지 개척, 종교

    개혁 및 종교전쟁, 신성로마제국 등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스페인에서는

    각종 신학적, 철학적, 법적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살라망카 학파

    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루터파를 비롯한 당대의 모든 이단자들을 논박하는 것일지

    모르나,74) 법적, 정치적 차원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관심사는 식민지 개척과 신세

    계의 경영이었다.75) 이 점에서 살라망카 학파는 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 아퀴나스의

    법사상을 국내 및 국제 관계에 적용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76)

    이미 1930년대를 전후하여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법사상사적 의의에 대한 논란

    이 시작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그 평가는 완결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로티우스와

    맞물려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에 대한 평가절하와 평가절상은 반복될 것으로 예상된

    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의 부침(浮沈)과는 별개로 국제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비

    토리아와 수아레즈의 만민법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점은 변치 않을 듯

    하다. 두 사람의 만민법 사상에 대한 이해는 국제공동체, 국제관계의 역사와 진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역사적 가정이겠지

    만, 비토리아와 수아레즈 없이 그로티우스를 상상하기 어렵다. 또 살라망카 학파의

    만민법론이 없이는 오늘날의 국제법론도 상상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비토리아가 살라망카 학파의 다른 학자들과 더불어 국제법의 발전을

    위한 본질적인 사유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국제법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77) 실제로 1926년 네덜란드의 그

    로티우스 협회(Association of Grotius)는 비토리아를 국제법의 창시자로 기념하는 금

    메달을 살라망카 대학에 수여함으로써 이를 사실상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78)

    74) Skinner, 위의 책, 138면.

    75) Hamilton, 위의 책, 5면.

    76) Verdross, 위의 책, 92~99면. 이를 경제적 영역 뿐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영역에 대한 깊은 함

    의를 지닌 첫 번째의 진정한 국제화의 물결(wave of globalization)로 보는 견해는 Alves/Moreira,

    위의 책, 112면.

    77) Körner, 위의 글, 438면; Alves/Moreira, 위의 책, 14면 및 105면.

  • 282 法學論文集 제34집 제2호(中央大學校 法學硏究所)

    요컨대 법사상사의 관점에서 살라망카 학파는 중세의 신학적 자연법론과 근대의

    이성적 자연법론, 또 중세의 만민법론과 근대의 국제법론을 가교한다는 점에서 대

    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국제법학이 국제법적 주요 쟁점들에

    대한 착안점을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만민법 사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

    지로, 오늘날의 법철학도 법철학적 주요 쟁점들에 대한 실마리를 비토리아와 수아

    레즈의 만민법 사상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다. 이 점에서 비토리아와 수아레즈를

    비롯한 살라망카 학파의 만민법 사상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요청된다.

    주제어 만민법(ius gentium), 자연법(lex naturalis),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수아레즈(Francisco

    Suárez), 살라망카 학파(School of Salamanca)

    78) F. Alluntis, “Francisco de Vitoria”, Encyclopedia of Philosophy 2.ed. Vol.9(D. Borchert ed.), Detroit: Macmillan, 2006, 698~699면, 특히 699면.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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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토리아와 수아레즈의 萬民法 사상 285

    [Abstract]

    Ius Gentium in the Legal Thought of Vitoria and Suárez

    Oh, Se-Hyuk

    Hugo Grotius has been widely known as the father of international law or law

    of nations after 18th century. Around 1930, however, starting with J. Brown Scott

    a group of legal scholars paid attention to the legal thoughts of ius gentium in

    the School of Salamanca including Francisco de Vitoria(c.1483~1546) and Francisco

    Suárez(1548~1617). They revalued Vitoria and Suárez as the founders of modern international law. There has been a lot of controversies over the new perspective

    in the domestic and foreign academic circles until now.

    Meanwhile, the understanding of ius gentium in the legal thought of Vitoria and

    Suárez carries an important meaning of the philosophy of law. Because ius gentium provides the points of question on the nature of law since it possesses

    both the characteristics of natural law(lex naturalis) and those of positive law(lex

    positiva or lex humana). And the full-scale study on the idealogical basis, nature,

    and contents of ius gentium owed much to the contribution of Vitoria and Suárez.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of ius gentium in the legal thought of Vitoria and

    Suárez in order to comprehend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modern international law. Hypothetically speaking, there is no Grotius without Vitoria and

    Suárez, there is no modern international law without 'ius gentium' of the School of Salamanca. In the viewpoint of the history of legal thoughts, the School of

    Salamanca is significant in the sense that it built a bridge between mediaeval

    theological natural law theory and modern rational natural law theory. The

    scholars of legal philosophy as well as those of international law find clues to the

    main legal issues from ius gentium in the legal thought of Vitoria and Suár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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