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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한국만화박물관 소장 자료 연구 (1940~1959년 자료를 중심으로) 2019. 12 부설연구소 웹툰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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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한국만화박물관 소장 자료 연구

    (1940~1959년 자료를 중심으로)

    2019. 12

    부설연구소 웹툰랩

  • 한 국 영 상 대 학 교 만화콘텐츠과 교수 박 석 환웹 툰 랩 소 장

    제 출 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귀하

    본 보고서를 ‘2019 한국만화박물관 소장 자료 연구’ 용역의 최종 결과물로 제출합니다.

    2019년 12월

  • 개요

    1. : 2019 2. : ,

    3. : 1940~1959 ( 22 640 , 49 , 75 / 146 764 )

    4. : 1940~19595. : 66. : 19,000,0007. : ( )

    세부과업내용

  • 참여 연구자 및 역할

    ( ),

    20020060606060

    1 6060606060

    2 60※

  • 1 S0024992 S0027393 S900065 (1)4 J000339 56.075 J000524 58.016 J000507 靑春 54.037 S002380 (2)8 S0013089 S00302610 S00629111 J000322 57.0112 J000332 50.0113 S00146414 S00287515 S00030416 S001468 (1)17 S00627718 J000258 50.0419 R00116320 R00121521 S00256822 S002289 (13)23 J000317 56.0524 J000318 56.1125 S012468 026 R00028227 S00092128 J001311 漫画春秋29 S010781 (2)30 J000352 55.0331 J000606 學園 54.0232 S00686833 S00039834 S003365 ( )35 J001358 54.0336 J000426 48.0137 J000562 學生界 54.0438 R00112339 S00627440 S001015 (1)41 J000509 女苑 55.1042 J000536 主婦生活 58.0843 J000612 現代女性 54.0244 S00112545 S00294846 S010782 ( )47 J001520 (53 10 )48 J000439 野談 實話 58.0249 J000438 野談 43.0750 S006531 (1)

    연구원별 담당 자료

  • 연구의 성과 및 과제

    - 1940 1959, ,

    - (1945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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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 차제1장 시대론 ························································································································ 002 1. 1940~1944: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암흑기’의 만화 ········································ 004 2. 1945~1949: 해방의 기쁨과 혼란기의 ‘혼란기’의 만화 ······································ 011 3. 1950~1954: 민족상잔의 비극과 ‘상실기’의 만화 ················································ 022 4. 1955~1959: 폐허 속에서 미래를 설계한 ‘부흥기’의 만화 ································ 028

    제2장 자료론 ························································································································ 041 1. 1940~50년대 만화자료 소장 현황 ·········································································· 042 2. 1940~50년대 만화자료 소장의 상태 ···································································· 048 3. 1940~50년대 만화자료의 내용과 의미 ·································································· 063 4. 1940~50년대 미소장 자료 현황과 제언 ································································ 083

    제3장 주요 자료 연구 ········································································································ 089 1. 김규택의 만화 풍자 해학가 열전 ············································································ 090 2. 최상권의 헨델박사 ····································································································· 106

    제4장 소장 자료 연구 ········································································································ 119 1. 만화원고편 ··················································································································· 120 2. 만화잡지/잡지만화편 ································································································· 133 3. 만화단행본편 ··············································································································· 209

  • 한국만화박물관

    1장. 시대론

  • 소장 자료 연구(1940~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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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만화 : 1940~1959년

    김성훈

    들어가며

    한국 만화사에서 1940년 이후 1950년대 말까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제의 식민통치는 최악으로 치달으며 조선은 일본의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한 여건 속에서 1909년 에 발표된 이도영의 로부터 시작된 한국 현대만화는 불과 30여년 만에 거의 사멸 직전에 처해진다. 다행히 해방과 함께 출판 및 언론의 자유는 회복되고, 신생 매체의 활발한 창간 속에서 한국 만화는 부활의 싹을 틔운다. 그러나 해방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든 민족상잔의 비극은 사람들의 일상을 무너뜨렸으나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만화가 전하는 웃음과 희망의 메시지는 계속되었으며, 휴전과 함께 시작된 재건 분위기 속에서 한국 만화 역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나갈 수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도 가장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한국만화는 그 이전과 그 이후처럼 사회상을 반영해 비뚤어진 세상의 모습을 풍자하기도 했으며, 혹은 현실에서 상처받은 이들에게는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이에 본 연구는 1940년부터 1959년까지 20년 동안의 한국만화 흐름을 5년 주기로 나눠 정리해보고자 한다. 각 시기마다 만화사적으로 주요한 사건들을 정리하고, 그것을 통해 당대 한국만화사에서 이 시기가 지니는 의미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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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40~1944: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암흑기’의 만화

    1) 시대적 상황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일제는 1941년 12월 진주만 습격을 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침략전쟁을 확대해나간다. 그로 인해 이 시기 조선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물자 보급기지로 전락하게 된다. 게다가 일제는 조선과 일본이 본래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주장을 통해 민족말살 정책을 가속화 한다.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와 함께 대표적인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어교육 폐지를 들 수 있다.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글을 배울 수 있었고, 특히 1931년에 만들어진 조선어학회는 한국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및 외래 표기법 통일안 등을 제정해 한글 표준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와 한국어로 된 신문이나 잡지 등은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폐간의 길을 걷게 되고, 그에 따라 우리말, 우리 정서를 담은 우리 만화 역시 갈 곳을 잃어버리는 처지에 놓인다.

    1920년대를 거쳐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만화는 대중들에게 시대를 이해하는 주요한 기능을 해오고 있었다. 신문과 잡지에는 독자만화는 물론 해외 작품이 번역되어 실리기도 했으며, 작품공모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바꾸어 말하면, 현대 만화 장르에서 나타나는 창작과 소비에 관한 대부분의 형태가 이미 1920, 30년대에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이러한 모습은 자취를 감춘다. 우선 매체가 사라졌고, 그에 따라 작가들의 이름 역시 찾기 힘들어졌으며, 당연히 소비할만한 작품도 희박해졌다. 일례로 1982년에 발행된 이해창의 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 명확히 확인된다. 즉, 이도영의 이후 1930년대까지는 당대 만화가들의 활동상에 대한 소개가 이어지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공백기라고 할 만큼 비워진 채로 해방 이후의 얘기로 이어진다. 그만큼 1940년 이후 해방까지 한국만화는 암흑기를 지나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소장 자료 연구(1940~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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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문만화

    1940년대에 들어와 , 가 폐간됐고, 이후 한글로 발행되는 일간지는 뿐이었다. 는 1904년 영국인 배설(裵說: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가 전신이나, 1910년 한일병합이 진행되면서 일제가 사들였고, 이후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친일언론으로 자리 잡았다. 1920년대 무단통치 기간에도 유일한 조선어 일간지였던 이 매체는 1940년대에도 조선어로 발행된 유일한 신문이다. 조선총독부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논조를 유지하면서 해방될 때까지 발행을 이어갔다. 따라서 1940년대 조선어로 발표된 일간 신문만화는 자연스럽게 에 등장하는 작품들이 유일했다. 매체의 속성에 따라 만화 역시 대부분 친일 논조를 대변하게 되는데 작가진에 따라 크게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만화와 조선 만화가들에 의한 작품 등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에 등장한 조선 만화가

    1940년 이후 에 작품을 발표했던 조선 만화가로는 대표적으로 김상욱과 김규택을 들 수 있다.

    김상욱은 1930년대 후반 에 , 에 , 등 어린이 연령대에서 즐길 수 있는 개그만화를 주로 발표해왔다. 1940년 9월 24일부터 같은 해 10월 초까지 총 10회에 걸쳐 에 발표한 역시 아동들에게 최적화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9월 24일자에 실린 작품을 살펴보면, 한 소년이 엄마에게 이제부터 학교에 걸어 다녀야 할 상황이 와서 여러모로 손해라는 얘기를 건네는데, 누나로 보이는 소녀가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고 전차요금도 절약하게 되니 도리어 이익이라는 식으로 반론을 내놓으며 마무리 된다. 4컷 형식의 기승전결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전(反轉)을 통해 웃음을 유도하고 있으나, 당대 현실을 고려해본다면 전시 하에 물자를 아끼고 적응해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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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대해 백정숙은 “전쟁으로 인해 변화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로 변화된 환경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수식을 써서 알리는 내용이다.”1)고 분석한다. 한편, 손상익은 “김상욱은 에 만화를 게재한 뒤 얼마 안 있어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에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가정만화 등을 연재, 자신이 그동안 쌓아올렸던 아동만화가로서의 명성에 커다란 흠집을 내고 만다.”2)고 평가한다.

    4컷 만화를 발표한 또 다른 이로 ‘江素(강소)’를 꼽을 수 있는데, 에서는 이를 김규택의 필명이라고 밝힌다.3) 그는 1941년 7월 9일부터 10월 3일까지 50회가 넘도록 이라는 작품을 연재했다. 그 중 7월 12일에 발표된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군 병사 복장을 한 인물이 한반도 곳곳을 둘러보며 전쟁 이후 오히려 발전되었다며 감탄해한다. 식민지정책과 침략전쟁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제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진 내용이라 하겠다.

    (2) 에 등장한 일본식 작가명

    에서 그나마 존재하던 한국만화가의 이름은 1942년 이후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대신 凡太郞(범태랑), 玄周(현주), 允錡(윤기), 鳩笑(구소) 등과 같이 일본인으로 여겨지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 중 범태랑의 작품은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1942년 7월 1일부터 8월 19일까지 총 38회 게재된 , 1942년 8월 21일부터 9월 2일까지 총 10회 게재된 , 1942년 9월 4일부터 12월 30일까지 총 87회 게재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외에도 1943년 1월 7일부터 3월 8일까지 이 등장했으며, 1943년 7월 12일부터 9월 12일까지는

    1) 백정숙(2013). 식민지 시대의 어린이만화. 2013년 6월호(통권 91호). 23~26p2) 손상익(1996). (프레스빌). 287p3)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7776

  • 소장 자료 연구(1940~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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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게재된다. 이처럼 범태랑의 작품들은 제목을 비롯해 본문 대사도 대부분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어서 우리만화라기보다는 일본만화라 부르기에 더 용이해 보인다. 또한, 컷 우측에 한글로 대사를 번역해놓고 있는 경우도 있어서 만화를 통해 일본어를 모르는 조선인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1943년 9월 15일부터 게재된 은 현주라는 이름으로 발표됐다. 이 작품은 연재 중간에 이라는 제목으로 변경되어 12월 24일까지 게재됐다. 또한, 1943년 3월 12일부터 7월 9일까지 연재된 는 윤기의 이름으로 등장했으며, 1944년 1월 4일부터 같은 해 10월 17일까지 장기간 게재된 은 구소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3) 잡지만화

    1940년대 들어와 잡지 역시 한글로 발행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1930년대 초까지 대중지의 역할을 수행하며 다수의 만화를 선보였던 , , 등은 1930년 후반으로 넘어가며 폐간에 이른다. 1940년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한 대중잡지로는 과 (이후 로 개명했다.)가 전부라 할 수 있으며, 아동잡지로는 이 있었다.

    (1) 의 만화

    은 1935년 조선일보사에서 창간하였으며, 주요섭, 이태준, 김기림, 임화, 유치환 등 당대 대표적인 문학가들의 글이 발표됐다. 특히 1930년대를 거치면서 , , , , 등 한국문학사에서 거론되는 주요 작품들이 발표되는 등 매체사 및 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잡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39년부터는 일제의 탄압과 강요로 친일(親日) 색채가 강해졌고, 일제말기까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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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되는 유일한 시사종합잡지의 위치를 지녔던 만큼 1940년대 들어 징병을 권장하는 글도 많이 등장하게 된다.”4)

    에 발표된 대표적인 친일만화는 1941년 6월호 실린 이 있다. 총 7컷으로 구성되었으며 컷 속 대사는 모두 한글로 표현되어 있다. 전체 줄거리는 주인공인 어린 소녀가 이른 아침에 잠자고 있는 가족들을 모두 깨운 후 줄을 세워 일본 왕을 향해 절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遙拜通城宮(요배통성궁)’이라고 붙어있는 부제처럼 이야기의 주제는 노골적으로 ‘동방요배(東方遙拜, 동쪽(일본)에 있는 대상을 향해 절하는 행위)’를 드러내면서, 작품이라기보다는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내용을 보인다.

    (2) 의 만화

    1940년대까지 발행된 또 다른 잡지로는 이 있다. 이 잡지 역시 조선일보사에서 창간하였는데, 아동잡지로는 드물게 1937년 4월에 등장한 후 1940년 12월까지 발행되었다. 창간호에서 15칸짜리 만화 (정청우 작)가 발표되었으며, 이후에도 임재천의 , (이상 1937년 9월호), 현재덕의 (1939년 5월호) 등 어린이를 타깃으로 한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이 가운데 1940년 11월호에 실린 정현웅의 이 특징적이다. 무엇보다 잡지 한 호에 6쪽에 이르는 게재 분량은 이전에 등장했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탁월한 데생력 역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부분이다. 이러한 특징에 대해 손상익은 “뛰어난 그림 실력과 탄탄한 구성력을 갖춘 秀作(수작)으로 꼽을 만하다.”5)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1940년 12월호에 실린 2회를 끝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이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매체가 폐간 당함에 따라 연재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이 작품에 대해 백정숙은 “당시 일본이 광기의 전쟁을 휘몰고 있던 시기에 정현웅이 을 호기롭게 연재한 것과 그것을 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211885&cid=42192&categoryId=510765) 손상익(1996). (프레스빌). 357p

  • 소장 자료 연구(1940~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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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쪽이나 배치하면서 야심차게 기획한 편집부 모두 다 대단한 용기라 생각한다.”면서 “정현웅의 은 단지 2회에 그쳤지만 이 작품이 세 번만 더 연재되었어도 당시의 만화 단행본 한권 분량은 족히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고 작품이 지니는 의의와 연재 중단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한다.

    , 외에 1940년대까지 발행을 이어온 잡지로는 가 있다. 원래 라는 이름으로 1929년에 창간되었으나 1930년대 후반 친일잡지로 변모하였고 이름까지 친일적인 색채가 담긴 것으로 개명했다. 그나마 1940년대에는 거의 만화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1942년에 결국 폐간에 이른다.

    그 외 식민지정책에 동조하는 기관지 성격의 잡지 , 등에도 일단의 만화가 등장한 바 있다. 1939년에 창간된 잡지 은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매체로서 이주홍 등의 만화가 실린 바 있다. 가령, 1942년 신년호를 살펴보면, 80~81쪽에 걸쳐 이주홍의 전쟁만화가 실려 있다. 또한, “태평양 전쟁의 상대국인 미국과 서구연합군을 비판하고 적들을 괴물 로 그리는 등, 전쟁을 일본의 입장에서 표현한 만평 4개가 실렸다. 은 1933년 결성된 조선금융조합연합회(朝鮮金融組合聯合會)에서 발행한 잡지로서 만화, 산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일제의 정책을 홍보했다. 1941년 7월호를 살펴보면 이주홍의 , 김상수의 등이 게재됐다.6)

    4) 김용환의 등장

    김용환(1912년~1998년, 경남 김해 출생)은 한국만화의 근대와 현대, 즉 일제말기로부터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과 휴전 이후에도 만화가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즉, 그의 만화가로서의 생애가 식민지 시대와 독립, 그리고 분단과 전쟁에 이르는 신생국가의 역사적 배경과 결코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으며, 창작자의 현실은 곧 당대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6) (부산대학교 디자인학과) 25p의 내용을 요

    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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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이름이 매체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3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이 시기에 그는 를 통해 (1936년 5월), (1936년 6월) 등을 선보였다. 만화연구가인 박석환에 따르면, “김용환은 1936년 경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한 것을 빼면 20대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삽화가로 활약했다.”7)고 전하는데, 이에 비추어 에 발표한 작품들은 잠시 귀국한 시절에 발표한 것들로 보인다. 1912년 생인 김용환이 20대를 일본에서 보낸 이유는 단연 그림 때문이다. 국내에서 학교를 마친 후 바로 유학길에 오른 그는 가와바다 미술학교(川端畵學校)8)에서 그림을 배운다. 이후 데이코쿠(帝國) 미술대학에서 정식 미술교육을 받게 되는데, 학비를 벌기 위해 간판작업, 백과사전 삽화 작업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메이저 잡지사 에 원고를 보내며 기타 코지(北宏二)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이후 잡지사의 전속삽화가로 활동하면서 당대 일본작가들에 견주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박기준은 “그는 펜화의 대가로 알려진 가바시마 가쓰이치(樺島勝一)의 작품에 매료되어 그를 본보기로 연습하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일본 펜화가 사이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사실화, 간소화 데생에서 펜화, 붓그림, 채색에 이르기까지 완벽하여 일본에서도 따를 자가 없었다.”면서 “1942년 동경에서 작가생활을 하면서 에 만화연재도 한 적이 있는데 무지한 재일 노동자들을 선도하기 위해 만든 만화가 ‘코주부’였다.”9)고 전한다.

    해방 직전인 1945년 초, 그는 일본의 유명만화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에 입사하게 된다. 때마침 고단샤는 조선에서 소년병을 교육하기 위한 잡지 한국판 발간을 준비한다. 이에 대해 곽대원은 “당시 총독부는 태릉에 연성소(鍊成所) 본부를 설치하고 강제 징발한 청소년들을 모아 일 년 동안 기본적인 군사훈련과 일본어를 습득하게 했는데, 이러한 잡지 창간7)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6740&cid=59065&categoryId=590738) 가와바다 미술학교를 나온 또 다른 만화가로 1920,30년대 최영수, 김규택, 정현웅 등이 있다.9) 박기준(2009.3.10). 한국만화야사: 3박자를 갖춘 만화계의 대부 김용환. .http://dml.komacon.kr/webzine/33/145

  • 소장 자료 연구(1940~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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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일본에 있는 고단샤에게 맡겼다.”10)고 밝힌다. 이 잡지를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일본에 있던 김용환이 이 잡지의 촉탁사원으로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해 손상익은 “식민지 치하에서 총독부의 갖은 검열과 통제로 대다수의 만화작가가 붓을 꺾어야만 했던 한반도의 사정으로 비추어 볼 때 당시 김용환의 창작 작업은 ‘우리 만화작가’로 여기기에 여러모로 거북한 모습”11)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2. 1945~1949: 해방의 기쁨과 혼란기의 ‘혼란기’의 만화

    1) 시대적 상황

    이해창은 해방으로 맞이하게 된 언론의 자유를 "신문, 잡지 등에 만화가 등장하여 해방의 기쁨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고 정치만화, 사회만화 등에 많은 신인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아동만화분야에 있어서도 단행본이 출판”12)되었다면서 당시 급진전된 만화의 유행과 연관 지어 얘기한 바 있다. 그만큼 해방 공간에서 이뤄진 출판의 자유는 곧바로 상업만화의 부흥을 불러왔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상업만화는 무분별하게 출판물을 쏟아냈고, 그로 인해 이를 비판하는 공개적인 글이 등장하기도 했다. 양미림이 잡지 에 발표했던 와 염상섭이 신문에 기고했던 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만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 훗날 본격적인 불량만화 시비의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시사만화 또한 신생매체의 창간과 일제시대 당시 폐간된 언론의 복간 등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마련한다. 다만, 매체의 불안정함 속에서 대체로 작품의 수명이 길지 못한 특징을 나타냈다. 일례로 해방 이후 한 달반 만에 등장했던 의 경우 이듬해 9월 발행 정지되었고, 게재되던 만화도 당연히 더 이상 발표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지속성의 한계와 함께 한 명의 만화가가 10) 곽대원(1995). 코주부 김용환, 그 삶의 궤적. (열화당). 39p11) 손상익(1996). (프레스빌). 349p12) 이해창(1982). (일지사). 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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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적 성향이 다른 매체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면서 내용적으로도 일관성이 없었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가령, “김용환의 경우 좌익지 에 박헌영이 이승만을 후려갈기는 만화를 그리고 공산당에 가입까지 했으면서도 보수우익 신문인 에 시사만평을 그리기도 했다. 또 임동은도 중도파 신문인 과 극우지인 에서 모두 활동”13)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 명의 만화가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매체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작가의 공급이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함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딱지만화(떼기만화)

    우리 말, 우리 글로 우리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해방이 가져다준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일제시대 때 강제 폐간되었던 신문들의 복간과 새로운 언론의 창간 그리고 신생 잡지들의 등장이 해방 이후 줄지어 이뤄졌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런 가운데 한국만화는 해방공간에서 뜻밖의 호황을 누리게 되는데, 이는 소위 ‘떼기만화’ 혹은 ‘딱지만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얘기되어질 수 있다. 손상익은 이와 같은 당시의 만화 붐과 출판사정에 대해 다음처럼 설명한다.

    “인쇄시설의 운영능력 미비로 말미암아 때마침 불기 시작한 만화책 발행 붐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소위 ‘떼기만화’라고도 불렸던 1회용 인쇄만화 ‘딱지만화’가 대량생산된 것도 이때를 전후해서다. 떼기만화란 16쪽 전후로 만들어진 조잡한 만화책으로, 인쇄비용의 절감을 위해 등사판으로 밀어서 인쇄한 것을 비롯 선화지(仙花紙, 최하급 재생용지)에다가 32~36쪽 분량의 1회용 인쇄방식을 통해 제작된 ‘뽑기만화’ 등을 가리킨다.“14)

    혼란스러운 시대상황과 열악한 출판조건에도 불구하고 딱지만화는 큰 인기를 모았고, 이러한 출판 흐름은 195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한영주는 이러한 딱지만화가 지닌 시대적 의미에 대해 “상업적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읽을 것이 없었던 가난한 시절에 그 만화들이 어떤 13) 유선영 외(2000). (한국언론재단). 59p14) 손상익(1998). (시공사). 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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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할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면서 “겨우 십여 쪽 내외의 조악한 만화책이었지만,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15)로 평가한 바 있다. 그러므로 딱지만화는 특정한 시기에 발현된 ‘특별한 만화출판 형태’로 볼 수 있으며, 그러한 형태를 규정짓는 특징 속에는 16쪽 내외의 분량, 열악한 출판환경이 반영되는 지질과 인쇄품질, 공식화된 경로를 통한 서점유통이 아닌 가판 등과 같은 대체유통방식 등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한편으로 이처럼 조악한 인쇄방식으로 나온 출간물이 주로 어린이층에서 소비된 경향은 이후 수십 년간 만화에 대한 불편한 선입견이 자리 잡게 만든 요인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에서는 이러한 딱지만화의 원형을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육전소설에서 찾는다. 즉, “딱지본은 원래 조선시대의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전해오던 고대소설을 1923년부터 신문관에서 근대 납 활자로 찍어낸 값이 싼 소설책들을 가리키는 말이다.”고 정의내린 후 “이후 같은 형식의 만화가 유행하면서 딱지본 만화라는 개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16)고 설명한다. 따라서 딱지만화가 지닌 원초적인 성격에는 기층 민중들의 저렴한 대중적 오락거리라는 사실도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195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몇몇 작품들을 통해 당시 이러한 딱지만화를 출판했던 곳으로 계몽사, 흥문사, 산해당, 명문당 등이 있었던 확인된다. 또한 김성환, 신동헌, 고일영, 박광현, 신동우, 최상권 등 한국 만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유명작가들 역시 딱지만화를 그렸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딱지만화는 해방공간에서 이미 만화가 상업적으로 부흥하였음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초라 할 수 있다. 다만, 현재에 이르러 한국전쟁 이전, 즉 해방공간에서 작업된 딱지만화 작품이 제대로 보존된 사례는 극히 찾아보기 어렵다. 너무 유행했던 탓에 어린이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정부 기관에서 대책안을 마련했을 만큼 많은 양의 작품이 출간되었지만, 현존하는 작품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아울러 그나마 존재하던 것은 1960, 70년대를 지나오며 불량15) 한영주(2001). (글논그림밭). 200p1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7985&cid=42627&categoryId=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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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에 대한 사회적 탄압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모두 사라졌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3) 불량만화 시비

    해방과 함께 찾아온 출판의 자유는 ‘딱지만화’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상업만화의 부흥을 가져왔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걱정거리 또한 낳게 되었으니 무분별한 출간으로 인해 사회적 지탄 대상이 된다. 즉,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출판물이 성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만화가 당시 각광받는 오락거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이후 우리 사회에서 퍼지게 되는 불량만화에 관한 시각의 출발점으로 이해된다.

    1948년 11월 28일 에는 ‘不良漫畵等書籍(불량만화 등 서적) 當局(당국)서 對策成案(대책성안)’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등장해 그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해방 후 서울장안에는 국민학생용 만화 기타 소설 등 각종 서적물이 출판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지도상 향기롭지 못한 것이 많음에 OOOO 학무당국에서는 이에 대한 강력한 대책을 성안 중이라는데 불일간 시책을 발표하게 될 것이라 한다.”

    이를 통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불과 3년 남짓한 시점에 만화를 비롯한 몇몇 출간물이 정부기관에 의해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급속한 성장을 이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적 논리에서 보자면 이러한 출판물의 부흥을 제한할 이유는 없었겠으나, 신생국가로서 아직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사회적 시스템 아래 ‘향기롭지 못한 것’들은 강력한 대책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시각이 비단 정부기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널리 확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글이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다. 1948년 7월호에 발표된 와 1948년 12월 31일자에 실린 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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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해방 전부터 문인으로 활동한 양미림이 발표한 글이다. 양미림은 특히 아동문학에서 두각을 보였는데, 역시 주로 아동문학가 관점에서 무분별한 아동만화의 유통이 지닌 폐해에 대해 지적하면서 그 대응책을 요구하고 있다. 가령, “우수한 그림으로 된 건전한 내용의 만화책도 없는 바 아니다. 대다수 무명 신인만화가들이 혼자서 글과 그림을 담당한 매우 열악한 작품으로 불건전한 내용임에 일고를 가하는 동시에 적당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문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1948년 12월 31일자에 실린 염상섭의 또한 와 비슷한 관점을 보여준다. 가령, “계모, 서모라고 하면 으레 고정된 ‘타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깨뜨리고 인자한 서모, 적자를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교육시키는 서모는 못 그려볼까?”라면서 “그러한 만화라면 어린이보다도 계모와 서모도 눈을 씻고 보게 될 것이다. 질투와 독기, 중상모략 혹은 격투와 강박으로 어린이의 정서를 기르려 하는가?”며 탄식하고 있다.

    이처럼 1948년에 등장한 만화에 대한 비판들은 기본적으로는 당대 만화가 가진 문제점들을 꼬집어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문사(文士)들이 나서서 그 해악에 대해 강조할 만큼 당시 만화는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출판물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부기관에 의한 불량만화 규제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의 일이라서 이들의 글이 주는 신뢰감은 만화에 대한 비난이 아닌 정당한 비판으로서 순기능을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17)

    한편, 1948년 11월 28일 의 기사로부터 약 1년 여 시간이 흐른 1949년 12월 16일에 에는 ‘低俗(저속)한出版物(출판물) 李公報處長言明(이공보처장언명) 嚴重(엄중)단束(속)할 터’라는 제목의 기사가 다시 등장한다. “(전략) 도하 또는 지방에서 발행되는 출판물 중에는 민족도의를 손상시키여 풍기에 저촉되는 저속한 잡지 유행가탐정 소설 만화 등 출판물이 범람”

    17) 김성훈(2014). (대원씨아이). 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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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있다는 내용으로부터 여전한 만화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4) 최초의 만화잡지 그리고 최초의 단행본

    (1) 최초의 만화잡지

    1946년에 이라는 아동잡지가 창간됐다. 이 잡지는 아동문학가 윤석중, 출판인 정진숙 등의 주도로 설립된 을유문화사를 통해 발간되었다. 창간 이후 한국전쟁 직전까지 발행이 이어졌는데 김의환, 김규택 등이 발표한 만화가 실렸고, 정현웅, 김기창 등이 표지를 담당하면서 만화 관련 잡지로 주목받게 된다. 다만 동시, 어린이소설 등이 함께 실리면서 전문적인 만화잡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에 반해 현재까지 해방 이후 최초의 만화잡지로 기록되고 있는 는 제호에서부터 만화전문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1948년 9월 15일에 창간호를 선보인 이 잡지는 당시 김용환이 주축이 된 ‘만화가동인회’ 회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작품을 선보였으며, 수필가로 활동한 김소운이 발행에 관여하기도 했다.특히, 첫 호의 표지를 살펴보면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모습을 한 캐릭터가 ‘新生內閣(신생내각)’이라고 적힌 자동차에 올라타 운전 하고 있고, 그 맞은편에는 김구 모습을 한 캐릭터가 ‘南北協商 号(남북협상 호)’라고 적힌 자동차에 올라탄 모습이어서 당시 정치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묘사해 보이고 있다. 또한 본문에도 시사만평, 캐리커처 등이 실려서 주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전문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2호는 창간호가 나온 지 두 달 뒤인 11월 15일에 발행되었으며, 김용환, 임동은, 최상권 등이 작품을 선보였다.

    에 대해 김성환은 이미 195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순만화지(純漫畵誌)”18)로 규정한 바 있으며, 2호 발행 후 폐간에 이르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표지 그림으로 나온 만화가 문교부에 의해 필화 사건화되었기

    18) 김성환(1955). 만화독본: 우리나라 만화의 발달사. 195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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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19)”이라고 전했다. 그에 따라 이 잡지는 현재까지 해방 이후 발행된 최초의 만화전문잡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특징에 대해 손상익은 “은 우리 만화사에서 귀중한 위치를 차지한다.”면서 “만화문화를 언론의 기능, 즉 시사분석 전문매체로 자리매김한 공로”20)가 있다고 설명한다.

    (2) 최초의 만화단행본

    김용한의 는 1946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고발하는 내용’21)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46년 5월 1일,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만화책이 출판되었다. 아동문학가인 마해송 원작의 를 김용환이 만화로 구성해 조선아동문화협회(아협)에서 펴낸 것이다(초판은 아협에서 출간하고 이후 재판은 을유문화사 출간). 46배판(188X257mm) 사이즈에 32페이지의 얇은 책이었으나 표지에 컬러를 사용하는 등 그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한 페이지에 3칸의 그림이 세로로 배치되어 있고 바로 옆에 대사와 해설을 적어놓았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만화라기보다 그림책에 가깝지만 칸과 칸으로 나뉘어 흥미롭게 풀어낸 토끼와 원숭이의 이야기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높은 호응을 받았다.”22)

    즉, 해방 공간에서 만화는 지금처럼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형태로 규격화되기보다는 글과 그림이 분리된 형태로 구성된 방식, 다시 말하면 오늘날 그림책 형태와 가까운 모습까지도 아울렀던 셈이다. 그러나 분명 각각의 장면이 컷으로 구성되면서 스토리 전달에 있어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만화로 규정하기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 삽화, 동화, 만화, 일러스트 등 지금처럼 세밀하게 정의 내리는 시각을 당시 출판 상황에 비춰 그대로 접목시키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1946년에 출간된 김19) 김성환(1978). (열화당). 242p20) 손상익(1999). 만화. (시공사). 373p2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614450&cid=40942&categoryId=3338522) 한국만화가협회(2015). (한국만화영상진흥원). 3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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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환의 는 현존하는 최초의 만화단행본으로 규정된다. 손상익 또한 에 대해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첫 만화책으로는 김용환의 가 꼽힌다.”면서 “표지가 컬러인쇄로 산뜻하게 장정되는 등 당시 만화로서는 제대로 만든 작품에 속한다.”23)고 그 의의를 밝힌다.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면 풍자적 성격이 강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조난당한 원숭이들을 구해준 토끼들이 도리어 원숭이들로부터 침략을 받은 후 원숭이 흉내를 내야 하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일제의 만행과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묘사해 보인다. 이러한 특징에 대해 만화연구가 박석환은 다음처럼 설명한다.

    “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민족말살정책을 강도 높게 고발한 작품이다. 이중 가장 참혹한 장면이 어린 토끼들을 원숭이로 분장시키는 대목이다. 원숭이로 의인화된 일본은 토끼로 묘사된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원숭이가 세상에서 제일 가는 짐승’이라고 가르친 후 토끼들을 검정 먹물이 담긴 통에 집어넣는다. ‘도대체 너희들이 우리와 달라 털빛이 흰 것이 틀렸단 말야, 우지 말고 들어가, 낄낄낄’거리며 온몸을 검게 만들고 ‘이번에는 이 귀가 시원치 않어. 남의 말만 잘 듣게 생겼지’라며 쫑긋 선 귀와 꼬리를 자른다. 마지막에는 얼굴과 엉덩이 부위의 털을 잘라내 원숭이처럼 분장시키고 ‘이만하면 우리 원숭이를 닮았겠지. 그렇지만 우리 원숭이의 종이지 종이야’라고 말한다. 동화를 원작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를 캐릭터와 화면으로 살려낸 김용환의 만화는 지금 봐도 피가 역류할 것 같은 일본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데 성공했고 원작 동화가 전달하지 못했을 ‘억눌린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해냈다. 당대의 시선으로 이 작품을 보는 어린이와 어른들의 울분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24)

    이 작품이 지닌 만화사적 의의는 국가문화재로 등록되면서 널리 공인받았다.

    23) 손상익(1998). (시공사). 38p24) 박석환(2013). 한국만화정전: 토끼와 원숭이, 김용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6740&cid=59065&categoryId=59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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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이 지닌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2월 21일 등록문화재 537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는 만화로서는 국내 최초로 이뤄진 일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에서는 “우리나라 현존의 가장 오래된 만화 단행본으로 해방 후 예술·문학 등 문화사 및 만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서, 만화적 동물의 캐릭터가 성공적으로 탄생된 최초의 만화책으로 우리나라 만화사 및 해방 후의 생활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25)로 그 역사적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최초 출판 이후 한국전쟁 등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대부분 소실되어 단행본 실물을 접하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2012년 4월 코베이를 통해 국내 경매에 올라왔고 이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낙찰받았다. 당시 경매가는 1,800만 원26)이었으며, 이후 진흥원에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라갈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7) 또한 2017년에는 등록문화재 539호로 지정된 또 다른 만화 (김종래 작)와 함께 영문 영인본으로 제작되어 프랑스 및 벨기에 등지의 만화박물관을 비롯해 한국문화원, 한국학 연구소 등 해외 100여 곳에 배포28)됐다.

    5) 해방 이후 최초 만화가 모임 등장

    만화가단체 결성은 해방 이전에 이미 그 움직임이 나타난 바 있다. 1920년대 중반, 안석주, 김복진 등이 주도한 ‘조선만화구락부’가 그것이다. 다만, 이 단체에 대해 남겨진 자료를 찾기 어려워 구체적인 인원이나 활동상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그에 비해 해방 이후 등장한 만화가단체는 언론에 기사화가 이뤄져 그에 관한 뚜렷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어서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1) 소묵회

    25)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4413105370000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31036001&code=62010927)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11030103251200000228)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1131301158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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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공간에서 등장한 최초의 만화가 관련 모임은 1946년에 결성된 ‘소묵회(素墨會)’로 알려져 있다. 이 모임의 결성은 1946년 2월 24일 에서 ‘素墨會 組織(소묵회 조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됐다. 해당 기사에서 “동회는 금후 전람회 개최, 잡지 발간 등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과 “이승만, 윤희순, 김규택, 정현웅, 최영수, 안석주, 김용환, 김의환, 조병덕, 홍우백, 박성규, 한홍택” 등 참여 회원 명단까지 공개해놓았다. 특히, 사무실까지 “시내 고려문화사 내에 두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친목모임의 성격을 넘어 관련 분야에서의 상당한 역할을 목적에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은 수년 후의 신문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1947년 1월 30일 에서는 ‘畵稿料(화고료) 等(등) 制定(제정)’이라는 제목으로 소묵회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는 “삽화가, 만화가의 친목단체인 소묵회에서는 이번에 확대위원회를 열고 연구기관설치, 기관지 발행, 전람회 개최 등 금년도 사업을 협의하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畵稿料(화고료)를 修(수)하고 회원을 증가키로 되다는 바 사무소는 을지로가 합동통신 삼층”이라는 내용을 전한다.

    1949년 9월 3일 에도 관련 기사가 등장했다. ‘素墨會(소묵회) 畵稿料(화고료) 引上(인상)’이라는 제목 아래 “김규택, 정현웅, 최영수, 김용환, 김의환, 임동은 제씨가 동인인 소묵회에서는 금번 화료를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다 한다.”면서 일간지, 월간지 등 발행주기와 시시만화, 연속만화 등 장르에 따라 원고료를 구체적으로 정했다고 알리고 있다. 이에 대해 만화연구가 박석환은 “재미있는 것은 작품의 형식별로 가격을 고정시켰다는 점이다.”면서 “작가나 작품의 가치와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가격을 정한 것은 얼핏 공정해 보이지만 우수한 작가에게 청탁이 몰리고 다작을 해야 함으로 작품의 질이 하향평준화 되는 구조가 된다.”29)는 의견을 보인 바 있다.

    이러한 기사들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1946년 단체 결성 이후 1940년대 말까지 소묵회의 활동이 이어졌음이 확인된다. 아울러, 최29) 박석환(2012). 한국만화정전: 복남의 탐험기, 최용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5506&cid=59065&categoryId=59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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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 결성 이후 임동은이 가입하는 등 회원에 변화가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소묵회 활동을 통해 작가들 스스로 원고료를 책정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들의 권익과 활동을 보호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반면,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만화가 단체가 고료 인상을 추진하고 신문에도 보도되던 시기였다.”면서 “만화 고료는 결코 싸지 않았다.”30)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소묵회의 활동에 대해 만화연구가 백정숙은 “소묵회 회원들 가운데 대다수는 을유문화사, 아협, 고려문화사, 동문사, 동지사 등에서 그림이야기 형식의 만화를 출판한 작가들이다.”면서 “이들은 많은 삽화작업 사이에 삽화와 만화의 경계를 나누지 않고 어린이 책 출판과 관련한 활동을 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소묵회가 해방 이후 만화계 관련 최초 단체라는 특징을 지니면서도 회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현재적인 의미에서 만화가단체로 규정하기에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손상익은 소묵회를 전문적인 만화가단체 결성의 ‘前 段階(전 단계)’로 명명하면서 1948년 김용환이 결성한 ‘만화가동인회’를 최초의 만화작가 단체로 설명한다.31)

    (2) 만화가동인회

    김용환이 주도하여 1948년에 결성된 모임이다. 이 모임에는 김규택, 김의환, 임동은, 채남인, 최상권, 이병주, 김용필, 오주환, 이영춘, 신동헌 등이 참여했다. 동인회는 당시 김용환이 사장으로 있던 잡지 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창간호에 실린 발족문을 통해 확인된다.

    발족문에는 “대체로 저속 유치한 아동만화에서만 배회한 결과는 으레 만화라면 아이들의 전속이요 만화가를 코무든 푼푼돈을 거두워가는 일종의 상화(商畵)로밖에 보지 않게 되었으니 이 어찌 만화가의 태만의 죄라 아니하겠는가”라고 만화계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지향하는 길은 오로지 만화의 향상과 그 본30) http://comixpark.com/13018073226631) 손상익(1998). (시공사). 222~2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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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령의 발휘에 있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동시에 “은 우리들의 작품발표에 그 지면을 제공하며 만화전(漫畵展), 만화행사 등의 주최자가 되어 줄 것”과 “만화동인회는 측면적으로 의 발전을 조력하며, 이리하여 상호부조의 성과를 거두려는 것이 우리들의 의도”라는 것을 적고 있다. 즉, 이 만화가동인회의 주요한 작품 활동 지면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점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동인회의 활동에 대해 만화연구가 손상익은 “한국전쟁 전에 이미 동인전(同人展) 성격의 ‘만화전시행사’를 개최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 전시회는 우리나라 만화사에 등장한 첫 동인전으로 기록될 만하다.”32)고 평가했다. 이해창 역시 “1948년 해방 후 처음으로 만화작가들의 단체로서 만화동인회가 발족되었다.”33)라며 최초 단체 결성에 대한 의의를 밝힌 바 있다.

    3. 1950~1954: 민족상잔의 비극과 ‘상실기’의 만화

    1) 시대적 상황

    해방을 맞이한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기도 전에 남북으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게 되고, 1950년 6월에 이르러 전쟁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이념에 의해 남북으로 나눠져 동족끼리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어야 했던 상황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맺기까지 만 3여년 시간동안 지속되면서 많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만화계에도 들이닥쳤다. 이에 대해 에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처럼 요약해 보인다.

    “전쟁을 전후해 안석주, 최영수, 정현웅, 이갑기 등이 납북 당하거나 월북했고, 해방 후 등장해 활발하게 활동하던 임동은은 사망하면서 신문 만화의 전체적인 수준이 크게 떨어지고 있었다. 나아가 해방 이후 어린이 대상의 단행본 만32) 손상익(1998). (시공사). 224p33) 이해창(1982). (일지사). 2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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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나 잡지 만화가 쏟아져 나오고, 그 중 일부가 ‘불량만화’로 몰려 만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김으로써 신문들이 만화를 게재하는 데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한다.”34)

    즉, 해방 공간에서 만화계는 1930년대부터 창작역량을 축적했던 작가들이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신진 작가들도 등장하면서 역동적인 무대를 구축해나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은 재능 있는 창작자들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그것은 전체 만화계 지형에서 보자면 큰 손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상업만화의 범람은 이제 정상적인 창작과 생산의 범위를 넘어 해적판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유행을 가져와 세간의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기도 했다.

    2) 일본 해적만화 의 인기

    협약 가맹국 간 저작권을 보호하는 국제저작권 협약의 시작은 195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회의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가 이 협약에 가입한 것은 1987년 10월 1일의 일이다.35) 즉, 1987년 10월 1일 이전 국내에서는 저작권을 보호하는 제도가 극히 미비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에 대한 일례로 1980년대 후반까지 일본만화 해적판 출간이 비일비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해적판 만화의 출발점으로 통상 한국전쟁 중에 출간된 가 꼽힌다. 의 원전은 일본 야마가와 효지(山川物治)의 라는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1951년 에 최초 발표되면서 큰 인기를 모았고, 1960년대 초에는 만화잡지에서 리메이크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 작품이 국내에 해적판으로 처음 등장한 시기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까지 여러 차례 재출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고 전해진다.

    34) 유선영 외(2000). (한국언론재단). 60p3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95115&cid=60533&categoryId=6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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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적판이 출간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이는 서봉재다. 원래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해 있던 중 일본과 부산을 왕래하던 선원들이 읽고 있던 이 작품을 접하게 된다. 이에 국내에 선보이면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당시 부산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던 김성옥을 만나 출판에 이르게 된다. 라는 제목으로 100쪽 분량에 고급 제질로 제작되었는데 시장에 나오자마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고 한다. 이러한 흥행은 곧바로 주변 출판사들을 자극시켰고, 발 빠른 출판사들은 다음 권수를 미리 시장에 내놓을 만큼 경쟁을 불러일으켰다.36)

    이처럼 한국 전쟁 중에 등장한 해적판 만화지만,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김낙호・박인하는 “한국전쟁 직후의 8~16페이지 내외 만화책과 달리 100페이지 내외의 단행본 형식으로 등장하여 큰 인기”37)를 얻었다면서 조악했던 만화출판의 흐름을 바꾼 특징적인 사건으로 설명한다. 최경탄 역시 “는 한국에서도 서점용 만화가 히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요한 의미를 찾으며, 동시에 “김성욱은 출판 후 만화 전문잡지 를 출간함으로써 한국에 본격적인 만화 붐”38)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밝힌다. 다시 말하면, 당대 해적판 만화는 단행본 시장은 물론 한국만화산업 전체에까지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복제만화의 출발점 혹은 표절만화의 시작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홍지민은 1970년대 인기 만화레이블 ‘클로버문고’ 역시 “첫 작품인 (정영숙)과 최고 히트작인 (김동명) 등 상당수가 일본작품을 베낀 것이었다.”면서 “사실 일본만화 표절은 그 역사가 오래됐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서봉재)를 첫 표절 사례로 본다.”39)고 역사적 인과관계를 설명한다. 이처럼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것도 전쟁 중에 일본 해적36) 박기준(2016.6.28).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안의섭, 박현석, 서봉재. .http://dml.komacon.kr/webzine/column/117237) 김낙호·박인하(2010). (두보북스) 196p38)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4392839) 홍지민(2012.5.6.).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1970~80년대 만화를 말하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507018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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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 만화가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사실에 대해 손상익은 다음처럼 정리한다.

    “일본 만화가 불법복제의 타깃이 됐던 이유는 당시 일본의 출판만화산업이 이미 상당한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다양한 소재의 만화가 양산(量産)돼 있어 쉽게 복제대상을 물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식민시대의 경험 등으로 양국의 학제(學制)를 비롯한 사회제도가 흡사한 면을 가진 관계로 두 나라 국민의 문화적 정서가 비슷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 되고 있다. 때문에 일본에서 상품적 가치를 인정받은 만화는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에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일본은 당시 우리나라와 단교(斷交) 상태에 있었다고는 하나, 지리적으로 가까워 밀수 등에 의한 양국 간의 음성적인 교역이 성행했기 때문에 일본만화의 국내 유입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40)

    3) 청소년 잡지 창간

    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1월, 피난지 대구에서 창간된 잡지다. 발행인은 한국출판계의 선각자로 알려진 김익달(金益達)이며, 그가 사장으로 있던 대양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후 대양출판사가 ‘학원사’로 개명하여 , 등의 또다른 잡지들을 창간했을 만큼 은 영향력 있는 매체로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은 여러 측면에서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장학회를 운영해 여러 학생들의 학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문학상을 제정해 수많은 문사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주요 독자층을 청소년으로 삼고 있긴 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한국 잡지 역사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매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만화 분야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니, 김용환과 김성환의 인기 만화가 연재되었다는 점에서 한국만화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40) 손상익(1998). (시공사). 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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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 대해 박기준은 “은 국판 사이즈 50쪽 분량의 청소년 교양지로 출발, 인기 상승과 부수 증가에 힘입어 대폭 증면에 이르게 된다. 연재물 중에서 정비석의 과 김용환의 , 김성환의 이 단연코 인기 선두주자였다.”면서 “그 때까지 잡지와 연재소설은 흔했지만, 10쪽 분량의 장편만화를 몇 년에 걸쳐 연재한 것은 이 처음이었다.”41)고 기억한다.

    (1)

    김용환의 는 창간호부터 연재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잡지에 장편으로 기획된 만화가 거의 없던 형편이었기 때문에 작품이 발표되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작품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최덕교는 다음처럼 설명한다.

    “그때까지 잡지에 소설은 연재되는 것이 있었지만 장편만화를 몇 년에 걸쳐 연재한 것은 가 처음이요, 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마치 라디오만 있던 세상에 TV가 나타난 만큼이나 독자들을 흥분시켰다. 를 영화로 보듯 그림으로 볼 수 있었으니 그 기획은 단연 히트였다. ― 넓고 넓은 중원(中原)천지를 누가 잡느냐 잃느냐 하는 파란만장한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를 매달 10면씩 연속 홈런을 치다시피 하고 나갔으니, 잡지를 사면 누구나 맨 먼저 부터 읽게 되었다. 그것은 열독(熱讀)이었고 열광이었다. 오락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피난시절의 소년소녀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큰 선물이었다.”42)

    이러한 점에 비추어 이 작품이 지니는 시대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장편연재만화라는 새로운 형식의 기획이었다는 점이 하나가 될 것이며, 또한 웃음과 희망을 찾기 힘들었던 전쟁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위안거리가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작품 내적으로 보자41) 박기준(2012.8.21). 세계 속의 한국만화야사: 날개를 단 학원 잡지. .http://dml.komacon.kr/webzine/wkms/251242) 최덕교(2004). 중고등학생들의 큰 마당 학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211954&cid=42192&categoryId=5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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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 여타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완성도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이에 대해 손상익은 “역사만화에서 흔히 채택하고 있는 사실적 그림체가 아닌 만화체 그림을 구사하면서도 그림을 배치하는 구도에서는 전통미술의 기법을 적용하는 기량을 선보였다.”면서 “정통미술에서 강조하는 소실점의 처리라던가 원근법 등의 묘사에서 현재의 만화작가들도 놀랄 만한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43)고 설명한다.

    (2)

    1953년 5월, 은 당시 7월호를 준비하던 시점에 편집장이 교체된다. 편집장을 맡은 최덕교는 새로운 기획을 내놓게 되는데,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던 , , 외에 (최인욱), (방춘해), (이원수 역) 등과 같은 소설과 함께 김성환의 을 새롭게 등장시킨 것이다. 덕분에 당시 “7월호는 2만부를 찍었고, 매진되었다”고 하며, “그중에서도 와 이 단연 화제가 되었다”44)고 전한다.

    이 작품은 키가 큰 인물과 키가 작은 인물이 콤비를 이룬 명랑학원물로서 서로 대비되는 특징을 가진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청소년의 일상을 유쾌하게 담아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을 본격적인 학원만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연재 이후 작품은 여러 차례 단행본으로 제작되었는데, 손상익은 이 작품에 대해 “장신과 단신의 두 주인공을 대비시킨 명랑물로 롱런했던, 소위 ‘브랜드 개념’의 캐릭터를 처음 창출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45)고 전한다. 1977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석래명 감독)라는 제목으로 스크린에 걸린 이 영화에 대해 원작자인 김성환은 “너무 감동적인 장면이 많았다”면서 “어디까지나 학생 시절에 누구나가 겪을 수 있었던 순수한 명랑물이므로 유우머가 그 주축을 이루었어야 했다.”46)고 밝힌 바 있다. 43) 손상익(1998). (시공사). 84~85p44) 최덕교(2004). 중고등학생들의 큰 마당 학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211954&cid=42192&categoryId=5107645) 손상익(1998). (시공사). 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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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 연이은 성공에 이어 1956년에 이르러 은 잡지의 부록으로 을 선보였다. 1956년 당시 , , 등 청소년 대상의 만화전문지들이 줄지어 창간되면서 이들과 경쟁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부록에는 김용환, 김경언, 정한기, 박기당 등의 인기 작가들의 작품이 연재되었으며, 연재분을 모아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다.”47)고 한다.

    4. 1955~1959: 폐허 속에서 미래를 설계한 ‘부흥기’의 만화

    1) 시대적 상황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이들이 폐허 속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동안 한국만화계 역시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특히 1950년대 후반에는 다음 시기, 즉 1960~70년대 한국 만화계를 이끌어갈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다. 이 시기에 데뷔한 이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박기정(1956년 데뷔), 박기준(1956년 데뷔), 이정문(1959년 로 데뷔), 산호(1958년 로 데뷔), 고우영(1957년 둘째형 고일영이 연재하던 를 이어받으면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데뷔)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해방 후 처음으로 만화원작 실사영화가 등장하게 되었으니, 김성환의 이 스크린에 옮겨진 것이 1958년의 일이다. 이처럼 새로운 희망을 다져나가는 시간이었다는 점에서 김이랑은 1950년대 중후반 시기의 한국만화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만화사적으로 볼 때 1960년대 초는 만화대본소의 태동기. 1950년대 중반 , , , , , 로 이어지는 아동만화잡지시대, 1950년대 말 박기당의 , 박광현의 , 김종래의 , 이병주의 , 추동식의 , 신동우의 46) 김성환(1978). (열화당). 29p47) 박소현·이승남(2004). (부천만화정보센터).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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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양장 단행본 시대를 거쳐 ‘빌려보는 만화’로서 대본소 만화가 탄생한 시기이다.”48)

    즉, 1960년 이전, 그러니까 195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한국만화는 ‘빌려 보는 만화’가 아닌 ‘사서 보는 만화’의 시대였음을 역설한다. 그 중심에는 줄지은 만화전문지의 창간, 그리고 양질의 단행본 출간 등이 있었다.

    2) 만화잡지 창간 러시

    1950년대 중반 이후 만화잡지 창간이 줄을 잇는다. 당시에 출간된 매체들은 주요 독자층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 , , 등과 같은 성인용 대중잡지들을 꼽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 , , , , 등을 통해 청소년 독자를 위한 만화전문지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1) 성인용 대중잡지

    은 1955년 7월에 창간된 성인잡지다. 대중소설과 해외 연예인 기사 등을 선보이며 오락성 강한 대중지의 특성을 보였다. 만화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김용환의 , 김성환의 , 신동헌의 등 당대 대표적인 만화가들의 수작들이 발표됐다. 그와 함께 만화공모전을 개최해 신인작가의 등용문이 되었다는 점 역시 눈여겨 볼 부분이다. 공모전을 통해 등장한 대표적인 만화가로서 박수동, 윤승운, 신문수 등을 꼽을 수 있다. 1960년대에는 8만부49)까지 발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그만큼 시대를 대표하는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은 1955년 7월에 창간되어 과 함께 당대 성인대중지 시장의 폭을 넓힌 대표적인 잡지라 할 수 있다. 연예인 화보, 풍속 기사 등을 주48) 김이랑(1995). 전통극화의 개척자, 김종래. (열화당). 91~92p4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9330&cid=46668&categoryId=46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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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선보였으며, 연애소설과 함께 만화도 꾸준히 등장했다. 신동헌의 , 김용환의 , 안의섭의 등 전통소설을 재해석한 작품들이 자주 등장했으며, 백인수의 , 김경언의 , 이재화의 등과 같은 작품도 실렸다.

    역시 1955년 10월에 창간되어 대중잡지의 유행에 한몫했다. 특히 이 잡지는 여성독자층을 핵심 타깃으로 삼은 최초의 본격 여성대중지라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1970년에 폐간을 맞이할 때까지 십여 년간 여성독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는 김성환의 , , 신동헌의 등과 같이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만화가 주로 실렸다. 특히, 1960년대에 선보인 정운경의 는 이후 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40여 년간 장수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사만화 캐릭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들 외에도 또한 1955년에 창간됐다. 주로 정치,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을 기사로 다뤘다. 그와 함께 정운경의 , 신동헌의 , 김용환의 등과 같은 만화가 발표됐다. 특히, 이 잡지를 통해 한국 명랑만화의 출발점으로 꼽히는 길창덕이 데뷔작 을 선보였다.

    이들 대중지들은 만화전문지는 아니었지만 잡지의 주된 콘텐츠로서 만화를 비중 있게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만화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통해 만화가 아동만을 위한 오락거리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성인으로까지 독자층을 확대시켰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그와 함께 등을 통해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성 성인을 위한 작품까지 나올 수 있었다는 점 또한 특기할 부분이다.

    (2) 청소년 만화전문지

    성인대중지와 함께 1950년대 후반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만화전문지 창간도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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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지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 , , 등을 꼽을 수 있다.

    는 휴전 이후 만화전문지 시대의 출발을 알린 매체로 평가할 수 있다. 아동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1956년에 창간되어 김경언, 김기율, 박광현, 박기당, 김종래 등 당대 손꼽히는 만화가들이 작품을 선보였다. 대표 작품으로 김종래의 , 김경언의 , 임수의 , 박현석의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독자퀴즈, 애독자 작품공모 등을 통해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1963년에 폐간될 때까지 만화잡지 문화 형성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발행인 김성옥은 창간 1주년 기념호에서 “창간호가 매진 또 매진되어 3판까지 발간된 사실, 제 3호에서 10만부를 돌파한 사실 등은 한국 잡지계에 처음 있는 일”50)이라고 밝히기도 했다.한편, 잡지에 연재된 인기작들은 단행본으로 묶여져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특징에 대해 만화연구가 박인하・김낙호는 “에서는 200여 쪽 분량과 든든한 장정으로 치장한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면서 “임수의 , 김종래의 , 등의 작품은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1960년대 만화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51)고 평가한다.

    1956년에는 외에도 , 등도 창간됐다. 은 가 창간된 후 불과 몇 달 후 등장해 만화전문지 시대를 함께 개척해나갔다. 만화뿐만 아니라 탐정, SF, 모험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도 연재된 점이 와의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경언의 , 추동성의 , 이정문의 , 방영진의 등이 발표됐고, 그 외 박기당, 김기율, 김종래, 이재화 등이 작품을 선보였다. 한편, 는 1956년 11월에 등장했다. 성인대중지 를 발행하던 출판사에서 펴냈으며, 신동헌, 박현석, 이병주, 김경언 등의 작품이 실렸고, 1961년까지 발행됐다.

    50) 박소현·이승남(2004). (부천만화정보센터). 19p 재인용.51) 김낙호·박인하(2010). (두보북스) 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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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1957년 9월에 창간되어 1961년에 폐간됐다. 김종래와 박기당의 그림이야기, 노석교, 방영진의 탐정만화, 권능수의 SF만화 등이 발표됐고, 김정파의 순정소설 등과 같은 장르물도 실렸다. “다른 잡지들에 비해 과학 기사의 비중이 높다는 것과 긴 분량의 독자투고만화를 실었던 점 등이 특징”52)적이라 할 수 있다.

    (3) 성인용 만화전문지

    청소년 만화전문지 창간이 러시를 보인 1956년에는 성인용 만화전문지도 등장하여 만화잡지 전성기에 한몫했다. 8월에 그리고 9월에 가 창간호를 선보였다. 에는 김용환, 김성환이 참여하였고, 주로 정치 및 사회적 이슈를 다룬 시사만화를 선보였다. 또한 소설이나 연예계 소식을 다루면서 대중잡지의 특징도 담아냈다. 에는 김용환, 김성환 이외에도 정운경, 신동헌, 김기율 등이 작품을 선보였으며, 특히 장르적・형식적인 측면에서 시사만화, 풍자, 카툰, 네칸 만화 등을 통해 다양성을 확보했다. 이들은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은 만화전문지 창간이 줄을 잇던 출판 흐름 속에서 성인층을 주요 타깃으로 삼아 시장차별화를 꾀했다. 당시 성인만화잡지는 청소년 대상의 만화전문지나 성인대중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았으나, 성인층으로의 독자확대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들 외 육군본부에서 발행한 가 1958년에 등장했다. 군에서 제작한 만화잡지답게 주로 반공을 테마로 다룬 내용들이 발표됐다. 김경언, 김기율, 정운경, 이병주, 이재화 등 인기만화가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일정한 완성도를 담보해냈다. “만화를 통해 올바른 군인정신 함양과 반공교육의 역할을 했으며, 군대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병영생활을 다룬 명랑만화를 연재하여 오락 잡지의 역할도 했다.”53)고 평가할 수 있다.

    3) 협회 창설52) 박소현·이승남(2004). (부천만화정보센터). p2253) 박소현·이승남(2004). (부천만화정보센터).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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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공간에서 정현웅, 최영수, 안석주, 김용환, 김의환 등이 참여한 소묵회와 김용환이 주축이 된 만화가동인회 등이 결성되면서 만화가 단체에 대한 움직임이 나타난 바 있다. 다만, 당시 단체들이 공식적인 만화계 대표기구라기보다는 몇몇 관계자들 위주로 결성된 한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전쟁 이후 195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단체는 본격적인 만화계 대표기구 결성을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중심에 대한만화가협회(이하 대한만협)와 현대만화가협회(이하 현대만협)가 있다.

    (1) 대한만협

    대한만협의 이름이 처음 확인 되는 시점은 1955년 7월에 발행된 월간지 을 통해서다. 이라는 작품을 6명의 작가들이 릴레이로 참여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한만화가협회 제공’이라는 표기가 등장한다.이후 협회는 195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문총)’54)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때 ‘한국만화가협회’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작성된 협회 명단에는 김용환이 회장으로 올라있으며, 부회장에 김일소, 사무국장에 신동헌, 서기에 김경헌과 이상호가 참여하고 있다.55) 그 외 김규택, 김의환, 최상권, 박광현, 박기당, 신동우 등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문총에 가입하게 된 사실에 대해 손상익은 “현대만협에 비해 다수의 작가가 회원으로 참여했던 대한만협은 결성 이후 얼마 안 있어 ‘문총’에 가입, 제도권 문화예술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제도권으로의 진입은 공식적인 단체로서 그 성격을 특정지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만협은 한국 만화가를 대표하는 최초의 정식 단체로 보는 시각도 있게 된다.

    (2) 현대만협

    54) 1947년 2월에 조직된 단체다. 좌익계열의 ‘조선문화단체총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우익계열의 문화단체들이 결성한 조직이다. 5・16 군사정변 이후 ‘예총’으로 바뀐다.

    55) 손상익(1998). (시공사).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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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만협은 김성환의 주도 아래 1956년 12월에 발족됐다. 김성환을 비롯해 안의섭, 길창덕, 박기정, 정운경, 백인수, 한성철 등이 정회원이었으며, 김이구, 이서지, 이재화, 이원수, 박기준 등이 준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특히, 정회원 7명은 국제만화가협회에 가입했다.56) 현대만협의 구성원은 대한만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연령대의 작가들로 구성됐다. 이처럼 대한만협과 현대만협이 따로 구성된 것에 대해 김성환은 다음처럼 회고한다.

    “대한(또는 한국)만화가협회가 김용환 씨의 주도 아래 많은 회원을 포섭한 단체로 이루어졌고, 필자가 주도한 현대만화가협회가 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회합의 명단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자의 경우는 김용환, 신동헌, 김경언, 이상호, 이병주, 김정파, 박광현, 박기당 제씨가 회원의 중추였고, 현대만협은 필자와 안의섭, 정운경, 백인수, 한성철, 박기정, 길창덕, 김기율, 김봉천 씨 등, 주로 신문에만 주력을 한 만화가들로 구성이 되었던 것이다.”57)

    결성 후 현대만협은 1959년에 제1회 ‘현대만협전’ 개최, 1960년 10월에 아동만화가들을 영입하여 ‘대한아동만화가협회(大韓兒童漫畵家協會)’를 발족58)시키는 등 단체로서의 성격과 규모를 확대발전시켜나갔다.

    당시 두 개의 단체로 결성된 것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다수의 협회가 구성된 것은 그만큼 만화계의 창작인력이 풍성해졌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와 함께 개별 단체의 구성인원이 달리하는 만큼 만화계 내부적으로 이해관계가 복잡해졌다는 사실도 반영된다. 다만, 두 단체 모두 1961년 5. 16 군사정변 이후 해체된다.

    4) 만화전문 출판 레이블 등장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출판 환경 또한 열악했다. 56) 김성환(1978). (열화당). 248p57) 김성환(1978). (열화당). 6~7p58) (부산대학교 디자인학과) 43p의 내용을

    요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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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한 인프라는 창작자들의 완성도 높은 작품에 대한 의욕을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서 출간한 고급양장의 단행본들이 인기를 끌자, 1950년대 후반부터 만화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출판사들이 등장했다. 그와 함께 유명 레이블이 만들어졌고, 만화산업의 부흥기를 불러오게 된다. 즉, 1950년대 중후반 잡지의 활황은 1950년대 말에 단행본 시장의 활성화를 가져왔고, 이는 다시 만화전문출판사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박인하・김낙호는 다음처럼 설명한다.

    “50년대 중반 이후 만화전문 아동잡지 (1956년 2월 창간), (1956년 11월 창간)가 창간되고 여기에 작가들이 대거 연재를 하게 되면서 200쪽 안팎으로 분량이 늘어나고 고급화된 만화 단행본이 출간됐다. 50년대 중후반 단행본은 50년대 초반 출간된 조악한 20쪽 안팎의 단행본과 질적으로 차이가 났고, 이 만화단행본이 시장에서 인기를 끌자 만화 출판은 자연스럽게 확대됐다.”59)

    당시 만화전문 출판사의 출발은 1955년에 생긴 광문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성문당, 독수리문고, 제일출판문화사, 승리사 등이 차례로 생겨났다. 이들 가운데 특히 제일문고, 부엉이문고, 클로버문고는 발표하는 작품의 양과 질에 있어서 큰 흐름을 주도했다.

    (1) 부엉이문고

    부엉이문고에서 나온 작품 가운데는 시리즈가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SF만화’라는 타이틀이 붙는 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모두 4부에 걸쳐 32권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이전 시기 작품들에서는 만나기 힘들었던 소재, 즉 미래를 배경으로 우주, 과학, 비밀기지 등과 같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 내용이 등장한다. 를 발표했던 김산호는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찰튼 코믹스(Charlton Comics)의 전속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 한편, (1963), (1964) 등을 발표한 김경언과

    59) 김낙호·박인하(2010). (두보북스) 30~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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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0), (1961) 등을 발표한 권영섭도 부엉이문고의 간판작가로 활동했다.

    (2) 제일문고

    제일문고는 김종래, 박기당, 오명천 등 당대 최고로 평가받는 만화가의 작품들을 대거 출판했다. 김종래는 민족적 정서나 역사관이 담긴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인 (1964)는 노비로 팔려간 엄마를 찾아 나서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1964)는 고아로 성장한 한 남자의 인생역정을 그렸다. 그 외 (1962), (1965), (1965)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박기당은 역사물을 주로 발표하면서 모험, SF 등 다양한 장르물도 함께 선보였다. 아버지의 원한을 복수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1965),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왜구에 맞서 싸우는 형제 이야기인 (1965) 등을 발표했다. 한편, 은 액션물을 주로 발표했던 오명천의 대표작이다. 1961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스토리에 있어서는 장대한 스케일을 보여주며, 연출에 있어서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그 외 (1962), (1964)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이들 작가 외에도 제일문고에서는 엄희자의 순정만화, 임창의 명랑만화 등을 출간했다.

    (3) 클로버문고

    만화가 박기준이 핵심이 되어 1958년에 탄생한 레이블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만화독자들에게 기억되는 대표적인 한국만화 브랜드다. 그만큼 인기작을 많이 배출해냈는데, 권영섭의 , 박기정의 , , 방영진의 , , 박부성의 , 이소풍의 등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박기준 역시 자신이 대표 캐릭터인 ‘두통이’로 시리즈물을 발표했다. 특히, 1965년에 발표된 박기정의 는 한국 스포츠만화의 효시로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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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론된다. 주인공 ‘훈이’가 권투선수가 되어 역경을 물리치고 챔피언이 되는 과정을 그리며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주인공이 재일교포 출신으로 등장해 민족적 차별 등의 핍박을 이겨냄으로써 아직 일본 식민지 시대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사했다. 이 작품 외에도 박기정은 야구소재인 (1964), 레슬링소재인 (1968) 등의 스포츠물을 발표했다.

    이들 외에도 만화가가 직접 레이블을 만드는 사례도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박기당, 김기율, 유세종, 고우영, 김원빈 등이 함께 설립한 ‘오성문고’가 있으며, ‘땡이문고’ 역시 임창이 설립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걸쳐 등장한 만화 레이블들은 서점을 통한 정식유통을 진행하면서 한국전쟁 후 무분별하게 확산되던 딱지만화의 근절을 앞당긴 긍정적인 효과도 지닌다. 또한, 나 의 경우처럼 장편 시리즈물의 출현을 가져왔고, 안정적 유통망을 통한 단행본의 전국 유통은 만화가들의 대중적 인기도 한층 높였다.60)

    이처럼 만화전문출판사에서 생산된 작품들이 만화방이라는 고정된 창구를 통해 독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1960년대 들어 한국만화산업을 견인하기에 이른다. 때문에 “이들 만화출판사의 확장은 만화방의 확산과 맥락을 같이 한다.”61)는 분석도 있다.

    5) 필화사건

    김성환은 1955년 2월부터 에 4컷 만화 을 게재했다. 이후 이 작품은 (1980년 9월부터 연재), (1992년 10월부터 연재) 등을 거치면서 14,000회가 넘는 연재기록을 세웠다. 이는 일간신문에 연재된 단일작가의 4칸만화로서는 세계 최장수 작품62)으로 기록된다. 그런 가운데 1958년 1월 23일자에 발표된 작품으로 인해 발생한 필화사60) 부엉이문고, 제일문고, 클로버문고 등 레이블에 관한 내용은 (2013, 한국만화영

    상진흥원)에서 ‘한국만화사’(김성훈 저) 130p의 내용을 수정, 정리하였다.61) 김낙호·박인하(2010). (두보북스) 29p62) 손상익(2005). 꼿꼿한 고집쟁이 이웃집 영감: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 (살림출판

    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53240&cid=42632&categoryId=4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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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은 한국 시사만화 역사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된다. 당시 발표된 작품 해당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화장실 청소부 2명이 길을 걸어가던 중 맞은 편에서 오는 누군가를 발견한다. 이어 두 명은 마주오던 그에게 ‘귀하신 몸 행차 하시나이까?’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데, 그 행색이 인사를 건넨 두 명과 동일한 화장실 청소부의 모습이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고바우 영감이 인사를 한 청소부 두 명에게 ‘저 어른이 누구’인지 묻는다. 똑같은 청소부 모양새인데, 그들이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에서 궁금증이 생겼을 것이다. 헌데,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경무대서 똥을 치는 분이요”였다.

    해당 내용은 같은 화장실 청소부 신분이라 할지라도, 권력기관에 출입하는 이는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묘사해보임으로써 당대 세태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능력보다는 ‘빽’이 출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어지러운 풍조가 팽배하고, 공무원들의 과잉충성이 사회의 지탄을 받던 자유당 정권63)” 시절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실린 신문이 배포되고 나서 다음날 김성환은 서울시경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게 된다. 1월 26일자 기사 ‘問題(문제)된 고바우漫畵(만화) 景武臺(경무대) 모욕했다고 金星煥 氏 召喚(김성환 씨 소환)’에서는 “시경 사찰과에서는 이십오일 상오 만화가 김성환 씨를 소환하여 심문 중에 있다.”면서 “동아일보 1월 23일자 4면에 게재된 ‘고바우’ 만화가 경무대를 모욕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집필동기를 추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틀 뒤인 1월 28일자 기사 ‘漫畵(만화)・評論(평론)・誤植(오식) 등의 對象(대상) 選擧(선거) 앞두어 더욱 注目(주목)’에서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다음처럼 또 다른 기사를 실었다.

    “‘신문만화’가 본시 사회풍자를 지향하는데다가 만화 자체가 과장된 표현을 사

    63) 윤영옥(1995). (열화당), 3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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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하는 것인데도 이를 악의적으로 곡해하고 수사기관에서 입건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이 다가오는 선거를 앞두고 특히 주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작자 김씨는 “어디까지나 사회의 어지러운 현상을 풍자를 한 것이지 경무대를 모욕할 의사는 추호도 없는 것이며 또 결과적으로 모욕이 됐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 표현 심정을 말하고 있다.”

    결국 김성환은 해당 만화의 내용이 경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