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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邵雍 王安石 程頤를 중심으로-

1)

閔 丙 禧 (弘益大)

Ⅰ머리말

Ⅱ皇極經世書의 數의 질서와 士

大夫로서의 邵雍

Ⅲ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

대성

Ⅴ결어

I 머리말

북송 시기는 남송 시기 朱子에 의한 ldquo集大成rdquo으로 표현되는 성리학

적 질서의 완성을 위해 그 집대성을 위한 제 요소들이 준비되는 시기

정도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춘추전국 시기 이후 또 한

번의 지적 다양성을 꽃피운 시기로 주목받기 시작하며 북송 시기 지성

사 자체의 독자적 논리를 이해하려는 연구들이 나타났다1)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사업비)으

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0-327-A00041)

1)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 연구로는 Ira E Kasoff ldquoThe Intellectual Climate of

the Eleventh Centuryrdquo (The Thought of Chang Tsai (1020-77)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Peter K Bol ldquoThis Culture of Ours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4북송 시기는 지적인 다양성을 보이고 있지만 대표적 사상가들에게

서는 중요한 공통적 특징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은 ldquo一以貫之rdquo하는

불변하는 하나의 원리에 대한 추구이다2)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實在하며 인간은 그 원리를 발견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사회를 조직 운영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던 믿음이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을 아우

르는 보편적 원리의 추구는 당송변혁기 이후 나타난 새로운 사회 변화

에서 비롯한 질문 즉 인간사회의 질서와 도덕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이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질문에서 비롯하였다 따라서

북송 시기 지성사와 이의 동아시아 지성사에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관건은 당시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문제가 어떻게 인간 사회의 질서

의 문제와 연결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북송 시기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와 이러한 담론이 당

시 사회 정치적 질서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문제의 가장 핵심에

있었던 새로운 엘리트층 즉 士大夫의 위상 역할 정체성과 그들의 권

력 기반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전개된다는 점에 주목한

다3) 어떻게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문제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Intellectual Transitions in Tang and Sung China (Stanford StanfordUniversity Press 1992) 쓰치다 겐지로 저 성형창 역 북송도학사 (예문서원 2006) (원서 土田健次郞 道學の形成 (東京 晶文社 2002))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들 외에도 張載 (1020-1077)등 많은 당시의 사상가들이

보편적인 하나의 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강구하였다 Ira E Kasoff TheThought of Chang Tsai (Cambridge Cambridge UP 1984) p18 이러한 경향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李覯(1009-1059) 또는 蘇軾(1037-1101)과 같은 이들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로 여겨질 정도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는 시

대정신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는 풍조였다

3) 이러한 연결은 현대적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단지 ldquo과거는 異

國이며 그들은 다르게 행동하였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 they do

things differently there)rdquo라고 할 수는 없다 즉 과거의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

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질적 형태로 사고하고 행동하였고 따라서 이를 설

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의 사고와 행동 자체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받아이기 힘든 것이겠지만 이들의 논리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즉 추상적인 보편 원리의 추구와 같은 형이상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5성과 연결되는가는 그 보편적 원리의 논리와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살

펴봄으로써 좀 더 명확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보편

적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사대부의 學의4) 주요 과제이자 내용으로 규

정하는 것 자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논문은 북송 시기 보편적 원리를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추구

하였던 3인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보편 원리의

추구의 문제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었는지를

이해하도록 하겠다 그 대표적인 3인의 사상가는 邵雍(1011- 1077) 王

安石(1021-1086) 그리고 程頤(1033-1107)이다 이들은 각각 象數學적

인 절대적인 數의 질서 經術과 字學을 통해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룰

수 있는 道 그리고 절대적인 天理라는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관통

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보편 원리를 추구하였다 이들의 보편 원리의

내용과 그 추구가 가지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

보는 것은 북송 시기 지성사를 성리학의 前兆의 역사로서가 아니라

그 역사적 맥락에서 자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후 성리학이 사상의 주류로 떠오르며 큰 영향

을 미치게 되는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5)

학적 논의가 정치적 담론의 주요 부분이었다는 것 자체를 현재적 시각에서 이

해하기는 힘들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담론과 연결되었는가하는 논리를

이해하고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 논리를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고 생각한다

4) 이 논문에서 쓰이는 ldquo學rdquo이라는 용어는 현대의 전문적 학문 교육 교양 교화

와는 그 내용을 달리한다 전통적으로 學術이라는 용어나 광범한 의미의 배움

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범위의 인간이 자신의 수양

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위하여 하는 모든 행위와 과정 등을 포함한 의미이다

전통적 문헌에서 쓰이는 學의 광범한 의미를 포섭하기 위해서 이를 달리 번역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學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는

가가 사대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주요하였으므로 이를 그대로 쓰고 이 용

어의 의미를 각각 다르게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5) 이들의 사상을 각각의 맥락과 논리로 이해하면서도 이러한 다양한 선택지들

이 존재했음에도 왜 결국 성리학이 더 영향력을 가진 주류의 사상이 되었는가

를 설명하는 것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다양한 선택지와 대안들이 결국 성리학

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거나 그 사상들을 단지 성리학에 공헌하거나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6소옹의 경우는 그가 추구하였던 절대적인 數의 질서라는 보편 원리

의 내용성 자체에서는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가 왕안석과

정이처럼 잘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의 學이 추구해야

하는 과제와 내용 자체를 절대적 보편 원리로 규정하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학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대부의 상을 제시하여 큰 호응

을 얻었다 소옹이 보편 원리를 추구하고 이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

는 사대부로서의 존재를 보여준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다 보편 원리의 사상적 체계와 논리가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에 앞서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사대부의 역할로 규정하게 되고 이것이 어떻게 사대부

의 위상과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소옹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왕안석의 경우는 북송 시기의 지성사가 지니는 특성과 문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라고 생각한다 왕안석의 사상은 사

실상 북송 시기 가장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사상이다 그러나 개

혁적 정치가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도 하였고 그의 저작들이 대

부분 유실되어 자료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왕안

석의 경술 자학에 대한 자료가 일부분이나마 輯佚되고 있기에 이를

활용하여 그의 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 논문은 왕

안석이 어떻게 그의 經術과 字學이라는 학술 체계를 통하여 보편 원리

를 제시하려 했으며 이것이 어떻게 그가 지향하였던 새로운 사회 정

치적 질서와 연결되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북송 시기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가장 큰 논쟁은 왕안석의 新法 개혁을 둘러싸고 일어났

다고 볼 수 있다 왕안석의 신법 개혁에 관한 논쟁을 단지 구체적인

영향을 준 요소로만 파악하는 관점과는 매우 다르다 이는 각각의 사상이 지니

는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맥락에서 공통적으로 대응하여야 했던 문제

가 있었고 그 문제에 대응하는 사상으로 어떠한 특정한 사상이 왜 더 호응을

받을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7개혁 정책에 대한 논란만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러한 정책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그의 사상 체계 학의 성격과의 연결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북송 시기의 정치와 사상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을 설명하여야만 그 이후 남송 시기 이

후의 성리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성리학의 사회 정

치 질서에 대하여 발언 방식 그리고 왜 성리학이 그렇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나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왕안석 사상의 심도 있는 이해는 단

순히 왕안석에 대한 이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송 시기 지성사

그리고 북송 이후의 동아시아 지성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정이의 경우는 성리학이 程朱學이라고도 불리듯이 朱熹(1130-1200)

가 南宋시기 성리학 체계를 만들면서 그 바탕으로 삼았던 사상체계이

기 때문에 그 자체의 독자적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성리학 체계 특히

주희에 의해 완성된 주자학 체계 내에서의 의미만이 주된 관심의 대상

이 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이의 사상 자체는 그가 살고 있었

던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이는 이후의

주자학의 중요한 개념적 이론적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철학사적 의미

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북송 시기 당시의 첨예하게 대두되었던 중

요한 정치 사회 사상적 문제에 자신의 답을 제시했던 사상가이기 때

문이다 이 논문에서 살펴보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문제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과의 연관성에서 살펴볼 때 정이는 북송 시기에 상

당히 과감한 새로운 주장을 펼쳤고 이 주장을 뒷받침할 이론적 근거

를 그의 사상체계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소옹 왕안석 정이 이들은 공통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

하였을 뿐 아니라 상호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주희에

6) 이렇듯 정이 사상을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

은 후에 주희가 주자학 체계를 완성할 때 정이가 제공하였던 여러 요소를 어

떻게 그리고 왜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았는지 전유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오히려 큰 도움이 되며 주자학이 지녔던 사회 정치적 의미를 보다 명

확히 드러내게 한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8의한 성리학 체계가 동아시아 지성계의 주류가 되고 난 후 소옹과 왕

안석의 사상은 상당히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왕안석의 사상은

매우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남송 이후 성리학이 주도하게 된

이후에도 소옹과 왕안석의 사상은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아시아 지성사의 다양한 변주에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들의 사상이 왜 특정한 시기에 다시 언급되면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지 성리학 체계와는 어떠한 관련을 맺으며 다시 출현하게 되는지는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이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문제

와 그 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

서 이들의 사상을 북송 시기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그 공통성에 주목하

며 상호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Ⅱ 皇極經世書의 數의 질서와사대부로서의 邵雍

소옹은 황극경세서의 저작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象數學을 발전시

킨 奇人의 풍모를 지닌 특이한 사상가로 알려져 왔다7) 그는 北宋 五

子의 하나로 道學의 선조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후의 정이나

주희의 평가에 의하면 그의 학은 상수계열의 術數學에 가까운 것으로

도학계열과는 다른 종류의 지향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졌다8) 인간 세

7) 소옹에 대한 대표적인 저작은 Anne D Birdwhistell Transition to NeoConfucianism Shao Yung on Knowledge and Symbols of Reality (StanfordStanford UP 1989) Don J Wyatt The Recluse of Loyang Shao Yung andthe Moral Evolution of early Sung Thought (Hawaii University of HawaiiP 1996) ldquoShao Yong and Numberrdquo (Kidder Smith etc eds Sung Dynasty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1990)

8) 소옹에 대한 주희의 평가에 대해서는 Don J Wyatt ldquoChu Hsis Critique of

Shao Yung One Instance of the Stand Against Fatalismrdquo (Harvard Journalof Asiatic Studies 45 1985)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9계의 윤리와 經世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질서에

대해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북송의 소위 도덕 철학자들의 관심

사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결국

소옹의 관심사도 자연세계의 질서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옹이 추구하였

던 원리 역시 자연과 인간 사회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

리로서의 數의 질서였다

그렇다면 소옹이 황극경세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數의 질서와 그

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

되고 있는 것인가 기존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연구나 그의 황극경세서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그의 수에 기초한 우주관과 독특한 易學

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상수학을 통해서 제시

한 우주만물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에 대

해서는 그다지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황극경세서의 대부분은 도표와 매우 의미를 알기 힘든 장황하게

반복되는 각종 사물의 분류 체계와 曆의 리스트로 채워져 있다 이러

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법칙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는 우주관을 표명

하고 있다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우주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9)

이 책에서 유일하게 소옹이 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

한 논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觀物篇 이다 그러나 관물편 의 대

부분도 앞부분의 도표와 유사한 장황하고 반복되는 알고리듬적인 규칙

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는 일부분 경

전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나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보일 뿐이

다 왜 소옹이 이러한 책을 썼는지 그의 상수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

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비교적 소략하다 그

러나 적은 분량이나마 소옹은 관물편 에서 그가 천지와 인간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은

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p484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0이러한 우주만물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聖人이 이러

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관물편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물편 의 주된 주장은

어떻게 物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소옹이

그의 상수학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聖人도 결국은 올바

르게 관물을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觀物內篇 에서 그는 성인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의 物이다 聖人도 또한 사람이다 하나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열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백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천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만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억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조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다 조의 물을 감당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라 아니겠는

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열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어

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하고 성

인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물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 중의 물이라 하며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을 사람

중의 사람이라 한다 물 중의 물은 至物을 말하고 사람 가운데 사람은

至人을 말한다 하나를 들어 지물에 이르고 한 사람으로 지인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이를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성인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一身으로 萬身을 살피며

一物로 萬物을 살피고 一世로 萬世를 살피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으로 하

늘의 뜻(天意)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天言)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

늘의 일(天功)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이 맡긴 일(天事)을 대신하기 때문

이다 또한 위로 天時를 알고 아래로 地理를 다하며 가운데로 物情에 밝

고 人事를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의 경륜과 조화의 출입과 고

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아아 성

인이여 세세토록 성인을 본받지 않으리오 나는 눈으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보아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살피고 자취

를 살펴서 그 體와 用을 찾아 깊이 연구한다면 억만년 천만년의 일일지

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ldquo천지의 밖에 따로 천지

만물이 있으며 그것은 이 천지만물과 다르다rdquo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뿐이 아니라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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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4북송 시기는 지적인 다양성을 보이고 있지만 대표적 사상가들에게

서는 중요한 공통적 특징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은 ldquo一以貫之rdquo하는

불변하는 하나의 원리에 대한 추구이다2)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實在하며 인간은 그 원리를 발견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고 인간사회를 조직 운영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던 믿음이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을 아우

르는 보편적 원리의 추구는 당송변혁기 이후 나타난 새로운 사회 변화

에서 비롯한 질문 즉 인간사회의 질서와 도덕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이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질문에서 비롯하였다 따라서

북송 시기 지성사와 이의 동아시아 지성사에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관건은 당시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문제가 어떻게 인간 사회의 질서

의 문제와 연결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북송 시기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와 이러한 담론이 당

시 사회 정치적 질서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문제의 가장 핵심에

있었던 새로운 엘리트층 즉 士大夫의 위상 역할 정체성과 그들의 권

력 기반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전개된다는 점에 주목한

다3) 어떻게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문제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Intellectual Transitions in Tang and Sung China (Stanford StanfordUniversity Press 1992) 쓰치다 겐지로 저 성형창 역 북송도학사 (예문서원 2006) (원서 土田健次郞 道學の形成 (東京 晶文社 2002))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들 외에도 張載 (1020-1077)등 많은 당시의 사상가들이

보편적인 하나의 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강구하였다 Ira E Kasoff TheThought of Chang Tsai (Cambridge Cambridge UP 1984) p18 이러한 경향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李覯(1009-1059) 또는 蘇軾(1037-1101)과 같은 이들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로 여겨질 정도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는 시

대정신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는 풍조였다

3) 이러한 연결은 현대적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단지 ldquo과거는 異

國이며 그들은 다르게 행동하였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 they do

things differently there)rdquo라고 할 수는 없다 즉 과거의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

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질적 형태로 사고하고 행동하였고 따라서 이를 설

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의 사고와 행동 자체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받아이기 힘든 것이겠지만 이들의 논리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즉 추상적인 보편 원리의 추구와 같은 형이상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5성과 연결되는가는 그 보편적 원리의 논리와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살

펴봄으로써 좀 더 명확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보편

적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사대부의 學의4) 주요 과제이자 내용으로 규

정하는 것 자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논문은 북송 시기 보편적 원리를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추구

하였던 3인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보편 원리의

추구의 문제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었는지를

이해하도록 하겠다 그 대표적인 3인의 사상가는 邵雍(1011- 1077) 王

安石(1021-1086) 그리고 程頤(1033-1107)이다 이들은 각각 象數學적

인 절대적인 數의 질서 經術과 字學을 통해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룰

수 있는 道 그리고 절대적인 天理라는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관통

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보편 원리를 추구하였다 이들의 보편 원리의

내용과 그 추구가 가지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

보는 것은 북송 시기 지성사를 성리학의 前兆의 역사로서가 아니라

그 역사적 맥락에서 자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후 성리학이 사상의 주류로 떠오르며 큰 영향

을 미치게 되는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5)

학적 논의가 정치적 담론의 주요 부분이었다는 것 자체를 현재적 시각에서 이

해하기는 힘들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담론과 연결되었는가하는 논리를

이해하고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 논리를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고 생각한다

4) 이 논문에서 쓰이는 ldquo學rdquo이라는 용어는 현대의 전문적 학문 교육 교양 교화

와는 그 내용을 달리한다 전통적으로 學術이라는 용어나 광범한 의미의 배움

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범위의 인간이 자신의 수양

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위하여 하는 모든 행위와 과정 등을 포함한 의미이다

전통적 문헌에서 쓰이는 學의 광범한 의미를 포섭하기 위해서 이를 달리 번역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學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는

가가 사대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주요하였으므로 이를 그대로 쓰고 이 용

어의 의미를 각각 다르게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5) 이들의 사상을 각각의 맥락과 논리로 이해하면서도 이러한 다양한 선택지들

이 존재했음에도 왜 결국 성리학이 더 영향력을 가진 주류의 사상이 되었는가

를 설명하는 것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다양한 선택지와 대안들이 결국 성리학

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거나 그 사상들을 단지 성리학에 공헌하거나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6소옹의 경우는 그가 추구하였던 절대적인 數의 질서라는 보편 원리

의 내용성 자체에서는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가 왕안석과

정이처럼 잘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의 學이 추구해야

하는 과제와 내용 자체를 절대적 보편 원리로 규정하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학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대부의 상을 제시하여 큰 호응

을 얻었다 소옹이 보편 원리를 추구하고 이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

는 사대부로서의 존재를 보여준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다 보편 원리의 사상적 체계와 논리가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에 앞서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사대부의 역할로 규정하게 되고 이것이 어떻게 사대부

의 위상과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소옹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왕안석의 경우는 북송 시기의 지성사가 지니는 특성과 문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라고 생각한다 왕안석의 사상은 사

실상 북송 시기 가장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사상이다 그러나 개

혁적 정치가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도 하였고 그의 저작들이 대

부분 유실되어 자료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왕안

석의 경술 자학에 대한 자료가 일부분이나마 輯佚되고 있기에 이를

활용하여 그의 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 논문은 왕

안석이 어떻게 그의 經術과 字學이라는 학술 체계를 통하여 보편 원리

를 제시하려 했으며 이것이 어떻게 그가 지향하였던 새로운 사회 정

치적 질서와 연결되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북송 시기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가장 큰 논쟁은 왕안석의 新法 개혁을 둘러싸고 일어났

다고 볼 수 있다 왕안석의 신법 개혁에 관한 논쟁을 단지 구체적인

영향을 준 요소로만 파악하는 관점과는 매우 다르다 이는 각각의 사상이 지니

는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맥락에서 공통적으로 대응하여야 했던 문제

가 있었고 그 문제에 대응하는 사상으로 어떠한 특정한 사상이 왜 더 호응을

받을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7개혁 정책에 대한 논란만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러한 정책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그의 사상 체계 학의 성격과의 연결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북송 시기의 정치와 사상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을 설명하여야만 그 이후 남송 시기 이

후의 성리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성리학의 사회 정

치 질서에 대하여 발언 방식 그리고 왜 성리학이 그렇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나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왕안석 사상의 심도 있는 이해는 단

순히 왕안석에 대한 이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송 시기 지성사

그리고 북송 이후의 동아시아 지성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정이의 경우는 성리학이 程朱學이라고도 불리듯이 朱熹(1130-1200)

가 南宋시기 성리학 체계를 만들면서 그 바탕으로 삼았던 사상체계이

기 때문에 그 자체의 독자적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성리학 체계 특히

주희에 의해 완성된 주자학 체계 내에서의 의미만이 주된 관심의 대상

이 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이의 사상 자체는 그가 살고 있었

던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이는 이후의

주자학의 중요한 개념적 이론적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철학사적 의미

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북송 시기 당시의 첨예하게 대두되었던 중

요한 정치 사회 사상적 문제에 자신의 답을 제시했던 사상가이기 때

문이다 이 논문에서 살펴보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문제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과의 연관성에서 살펴볼 때 정이는 북송 시기에 상

당히 과감한 새로운 주장을 펼쳤고 이 주장을 뒷받침할 이론적 근거

를 그의 사상체계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소옹 왕안석 정이 이들은 공통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

하였을 뿐 아니라 상호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주희에

6) 이렇듯 정이 사상을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

은 후에 주희가 주자학 체계를 완성할 때 정이가 제공하였던 여러 요소를 어

떻게 그리고 왜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았는지 전유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오히려 큰 도움이 되며 주자학이 지녔던 사회 정치적 의미를 보다 명

확히 드러내게 한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8의한 성리학 체계가 동아시아 지성계의 주류가 되고 난 후 소옹과 왕

안석의 사상은 상당히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왕안석의 사상은

매우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남송 이후 성리학이 주도하게 된

이후에도 소옹과 왕안석의 사상은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아시아 지성사의 다양한 변주에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들의 사상이 왜 특정한 시기에 다시 언급되면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지 성리학 체계와는 어떠한 관련을 맺으며 다시 출현하게 되는지는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이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문제

와 그 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

서 이들의 사상을 북송 시기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그 공통성에 주목하

며 상호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Ⅱ 皇極經世書의 數의 질서와사대부로서의 邵雍

소옹은 황극경세서의 저작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象數學을 발전시

킨 奇人의 풍모를 지닌 특이한 사상가로 알려져 왔다7) 그는 北宋 五

子의 하나로 道學의 선조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후의 정이나

주희의 평가에 의하면 그의 학은 상수계열의 術數學에 가까운 것으로

도학계열과는 다른 종류의 지향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졌다8) 인간 세

7) 소옹에 대한 대표적인 저작은 Anne D Birdwhistell Transition to NeoConfucianism Shao Yung on Knowledge and Symbols of Reality (StanfordStanford UP 1989) Don J Wyatt The Recluse of Loyang Shao Yung andthe Moral Evolution of early Sung Thought (Hawaii University of HawaiiP 1996) ldquoShao Yong and Numberrdquo (Kidder Smith etc eds Sung Dynasty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1990)

8) 소옹에 대한 주희의 평가에 대해서는 Don J Wyatt ldquoChu Hsis Critique of

Shao Yung One Instance of the Stand Against Fatalismrdquo (Harvard Journalof Asiatic Studies 45 1985)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9계의 윤리와 經世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질서에

대해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북송의 소위 도덕 철학자들의 관심

사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결국

소옹의 관심사도 자연세계의 질서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옹이 추구하였

던 원리 역시 자연과 인간 사회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

리로서의 數의 질서였다

그렇다면 소옹이 황극경세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數의 질서와 그

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

되고 있는 것인가 기존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연구나 그의 황극경세서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그의 수에 기초한 우주관과 독특한 易學

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상수학을 통해서 제시

한 우주만물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에 대

해서는 그다지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황극경세서의 대부분은 도표와 매우 의미를 알기 힘든 장황하게

반복되는 각종 사물의 분류 체계와 曆의 리스트로 채워져 있다 이러

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법칙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는 우주관을 표명

하고 있다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우주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9)

이 책에서 유일하게 소옹이 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

한 논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觀物篇 이다 그러나 관물편 의 대

부분도 앞부분의 도표와 유사한 장황하고 반복되는 알고리듬적인 규칙

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는 일부분 경

전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나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보일 뿐이

다 왜 소옹이 이러한 책을 썼는지 그의 상수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

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비교적 소략하다 그

러나 적은 분량이나마 소옹은 관물편 에서 그가 천지와 인간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은

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p484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0이러한 우주만물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聖人이 이러

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관물편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물편 의 주된 주장은

어떻게 物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소옹이

그의 상수학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聖人도 결국은 올바

르게 관물을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觀物內篇 에서 그는 성인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의 物이다 聖人도 또한 사람이다 하나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열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백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천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만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억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조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다 조의 물을 감당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라 아니겠는

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열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어

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하고 성

인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물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 중의 물이라 하며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을 사람

중의 사람이라 한다 물 중의 물은 至物을 말하고 사람 가운데 사람은

至人을 말한다 하나를 들어 지물에 이르고 한 사람으로 지인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이를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성인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一身으로 萬身을 살피며

一物로 萬物을 살피고 一世로 萬世를 살피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으로 하

늘의 뜻(天意)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天言)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

늘의 일(天功)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이 맡긴 일(天事)을 대신하기 때문

이다 또한 위로 天時를 알고 아래로 地理를 다하며 가운데로 物情에 밝

고 人事를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의 경륜과 조화의 출입과 고

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아아 성

인이여 세세토록 성인을 본받지 않으리오 나는 눈으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보아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살피고 자취

를 살펴서 그 體와 用을 찾아 깊이 연구한다면 억만년 천만년의 일일지

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ldquo천지의 밖에 따로 천지

만물이 있으며 그것은 이 천지만물과 다르다rdquo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뿐이 아니라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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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5성과 연결되는가는 그 보편적 원리의 논리와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살

펴봄으로써 좀 더 명확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보편

적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사대부의 學의4) 주요 과제이자 내용으로 규

정하는 것 자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논문은 북송 시기 보편적 원리를 각각 매우 다른 방식으로 추구

하였던 3인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보편 원리의

추구의 문제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었는지를

이해하도록 하겠다 그 대표적인 3인의 사상가는 邵雍(1011- 1077) 王

安石(1021-1086) 그리고 程頤(1033-1107)이다 이들은 각각 象數學적

인 절대적인 數의 질서 經術과 字學을 통해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룰

수 있는 道 그리고 절대적인 天理라는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관통

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보편 원리를 추구하였다 이들의 보편 원리의

내용과 그 추구가 가지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의 의미와 역할을 살펴

보는 것은 북송 시기 지성사를 성리학의 前兆의 역사로서가 아니라

그 역사적 맥락에서 자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이후 성리학이 사상의 주류로 떠오르며 큰 영향

을 미치게 되는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5)

학적 논의가 정치적 담론의 주요 부분이었다는 것 자체를 현재적 시각에서 이

해하기는 힘들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담론과 연결되었는가하는 논리를

이해하고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 논리를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고 생각한다

4) 이 논문에서 쓰이는 ldquo學rdquo이라는 용어는 현대의 전문적 학문 교육 교양 교화

와는 그 내용을 달리한다 전통적으로 學術이라는 용어나 광범한 의미의 배움

과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범위의 인간이 자신의 수양

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위하여 하는 모든 행위와 과정 등을 포함한 의미이다

전통적 문헌에서 쓰이는 學의 광범한 의미를 포섭하기 위해서 이를 달리 번역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學이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는

가가 사대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주요하였으므로 이를 그대로 쓰고 이 용

어의 의미를 각각 다르게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5) 이들의 사상을 각각의 맥락과 논리로 이해하면서도 이러한 다양한 선택지들

이 존재했음에도 왜 결국 성리학이 더 영향력을 가진 주류의 사상이 되었는가

를 설명하는 것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다양한 선택지와 대안들이 결국 성리학

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거나 그 사상들을 단지 성리학에 공헌하거나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6소옹의 경우는 그가 추구하였던 절대적인 數의 질서라는 보편 원리

의 내용성 자체에서는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가 왕안석과

정이처럼 잘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의 學이 추구해야

하는 과제와 내용 자체를 절대적 보편 원리로 규정하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학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대부의 상을 제시하여 큰 호응

을 얻었다 소옹이 보편 원리를 추구하고 이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

는 사대부로서의 존재를 보여준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다 보편 원리의 사상적 체계와 논리가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에 앞서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사대부의 역할로 규정하게 되고 이것이 어떻게 사대부

의 위상과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소옹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왕안석의 경우는 북송 시기의 지성사가 지니는 특성과 문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라고 생각한다 왕안석의 사상은 사

실상 북송 시기 가장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사상이다 그러나 개

혁적 정치가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도 하였고 그의 저작들이 대

부분 유실되어 자료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왕안

석의 경술 자학에 대한 자료가 일부분이나마 輯佚되고 있기에 이를

활용하여 그의 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 논문은 왕

안석이 어떻게 그의 經術과 字學이라는 학술 체계를 통하여 보편 원리

를 제시하려 했으며 이것이 어떻게 그가 지향하였던 새로운 사회 정

치적 질서와 연결되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북송 시기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가장 큰 논쟁은 왕안석의 新法 개혁을 둘러싸고 일어났

다고 볼 수 있다 왕안석의 신법 개혁에 관한 논쟁을 단지 구체적인

영향을 준 요소로만 파악하는 관점과는 매우 다르다 이는 각각의 사상이 지니

는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맥락에서 공통적으로 대응하여야 했던 문제

가 있었고 그 문제에 대응하는 사상으로 어떠한 특정한 사상이 왜 더 호응을

받을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7개혁 정책에 대한 논란만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러한 정책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그의 사상 체계 학의 성격과의 연결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북송 시기의 정치와 사상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을 설명하여야만 그 이후 남송 시기 이

후의 성리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성리학의 사회 정

치 질서에 대하여 발언 방식 그리고 왜 성리학이 그렇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나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왕안석 사상의 심도 있는 이해는 단

순히 왕안석에 대한 이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송 시기 지성사

그리고 북송 이후의 동아시아 지성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정이의 경우는 성리학이 程朱學이라고도 불리듯이 朱熹(1130-1200)

가 南宋시기 성리학 체계를 만들면서 그 바탕으로 삼았던 사상체계이

기 때문에 그 자체의 독자적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성리학 체계 특히

주희에 의해 완성된 주자학 체계 내에서의 의미만이 주된 관심의 대상

이 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이의 사상 자체는 그가 살고 있었

던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이는 이후의

주자학의 중요한 개념적 이론적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철학사적 의미

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북송 시기 당시의 첨예하게 대두되었던 중

요한 정치 사회 사상적 문제에 자신의 답을 제시했던 사상가이기 때

문이다 이 논문에서 살펴보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문제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과의 연관성에서 살펴볼 때 정이는 북송 시기에 상

당히 과감한 새로운 주장을 펼쳤고 이 주장을 뒷받침할 이론적 근거

를 그의 사상체계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소옹 왕안석 정이 이들은 공통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

하였을 뿐 아니라 상호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주희에

6) 이렇듯 정이 사상을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

은 후에 주희가 주자학 체계를 완성할 때 정이가 제공하였던 여러 요소를 어

떻게 그리고 왜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았는지 전유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오히려 큰 도움이 되며 주자학이 지녔던 사회 정치적 의미를 보다 명

확히 드러내게 한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8의한 성리학 체계가 동아시아 지성계의 주류가 되고 난 후 소옹과 왕

안석의 사상은 상당히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왕안석의 사상은

매우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남송 이후 성리학이 주도하게 된

이후에도 소옹과 왕안석의 사상은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아시아 지성사의 다양한 변주에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들의 사상이 왜 특정한 시기에 다시 언급되면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지 성리학 체계와는 어떠한 관련을 맺으며 다시 출현하게 되는지는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이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문제

와 그 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

서 이들의 사상을 북송 시기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그 공통성에 주목하

며 상호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Ⅱ 皇極經世書의 數의 질서와사대부로서의 邵雍

소옹은 황극경세서의 저작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象數學을 발전시

킨 奇人의 풍모를 지닌 특이한 사상가로 알려져 왔다7) 그는 北宋 五

子의 하나로 道學의 선조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후의 정이나

주희의 평가에 의하면 그의 학은 상수계열의 術數學에 가까운 것으로

도학계열과는 다른 종류의 지향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졌다8) 인간 세

7) 소옹에 대한 대표적인 저작은 Anne D Birdwhistell Transition to NeoConfucianism Shao Yung on Knowledge and Symbols of Reality (StanfordStanford UP 1989) Don J Wyatt The Recluse of Loyang Shao Yung andthe Moral Evolution of early Sung Thought (Hawaii University of HawaiiP 1996) ldquoShao Yong and Numberrdquo (Kidder Smith etc eds Sung Dynasty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1990)

8) 소옹에 대한 주희의 평가에 대해서는 Don J Wyatt ldquoChu Hsis Critique of

Shao Yung One Instance of the Stand Against Fatalismrdquo (Harvard Journalof Asiatic Studies 45 1985)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9계의 윤리와 經世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질서에

대해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북송의 소위 도덕 철학자들의 관심

사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결국

소옹의 관심사도 자연세계의 질서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옹이 추구하였

던 원리 역시 자연과 인간 사회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

리로서의 數의 질서였다

그렇다면 소옹이 황극경세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數의 질서와 그

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

되고 있는 것인가 기존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연구나 그의 황극경세서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그의 수에 기초한 우주관과 독특한 易學

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상수학을 통해서 제시

한 우주만물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에 대

해서는 그다지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황극경세서의 대부분은 도표와 매우 의미를 알기 힘든 장황하게

반복되는 각종 사물의 분류 체계와 曆의 리스트로 채워져 있다 이러

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법칙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는 우주관을 표명

하고 있다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우주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9)

이 책에서 유일하게 소옹이 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

한 논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觀物篇 이다 그러나 관물편 의 대

부분도 앞부분의 도표와 유사한 장황하고 반복되는 알고리듬적인 규칙

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는 일부분 경

전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나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보일 뿐이

다 왜 소옹이 이러한 책을 썼는지 그의 상수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

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비교적 소략하다 그

러나 적은 분량이나마 소옹은 관물편 에서 그가 천지와 인간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은

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p484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0이러한 우주만물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聖人이 이러

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관물편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물편 의 주된 주장은

어떻게 物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소옹이

그의 상수학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聖人도 결국은 올바

르게 관물을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觀物內篇 에서 그는 성인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의 物이다 聖人도 또한 사람이다 하나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열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백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천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만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억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조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다 조의 물을 감당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라 아니겠는

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열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어

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하고 성

인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물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 중의 물이라 하며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을 사람

중의 사람이라 한다 물 중의 물은 至物을 말하고 사람 가운데 사람은

至人을 말한다 하나를 들어 지물에 이르고 한 사람으로 지인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이를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성인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一身으로 萬身을 살피며

一物로 萬物을 살피고 一世로 萬世를 살피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으로 하

늘의 뜻(天意)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天言)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

늘의 일(天功)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이 맡긴 일(天事)을 대신하기 때문

이다 또한 위로 天時를 알고 아래로 地理를 다하며 가운데로 物情에 밝

고 人事를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의 경륜과 조화의 출입과 고

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아아 성

인이여 세세토록 성인을 본받지 않으리오 나는 눈으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보아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살피고 자취

를 살펴서 그 體와 用을 찾아 깊이 연구한다면 억만년 천만년의 일일지

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ldquo천지의 밖에 따로 천지

만물이 있으며 그것은 이 천지만물과 다르다rdquo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뿐이 아니라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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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6소옹의 경우는 그가 추구하였던 절대적인 數의 질서라는 보편 원리

의 내용성 자체에서는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가 왕안석과

정이처럼 잘 부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의 學이 추구해야

하는 과제와 내용 자체를 절대적 보편 원리로 규정하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학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대부의 상을 제시하여 큰 호응

을 얻었다 소옹이 보편 원리를 추구하고 이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

는 사대부로서의 존재를 보여준 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다 보편 원리의 사상적 체계와 논리가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에 앞서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사대부의 역할로 규정하게 되고 이것이 어떻게 사대부

의 위상과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소옹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왕안석의 경우는 북송 시기의 지성사가 지니는 특성과 문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라고 생각한다 왕안석의 사상은 사

실상 북송 시기 가장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사상이다 그러나 개

혁적 정치가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도 하였고 그의 저작들이 대

부분 유실되어 자료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왕안

석의 경술 자학에 대한 자료가 일부분이나마 輯佚되고 있기에 이를

활용하여 그의 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 논문은 왕

안석이 어떻게 그의 經術과 字學이라는 학술 체계를 통하여 보편 원리

를 제시하려 했으며 이것이 어떻게 그가 지향하였던 새로운 사회 정

치적 질서와 연결되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북송 시기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가장 큰 논쟁은 왕안석의 新法 개혁을 둘러싸고 일어났

다고 볼 수 있다 왕안석의 신법 개혁에 관한 논쟁을 단지 구체적인

영향을 준 요소로만 파악하는 관점과는 매우 다르다 이는 각각의 사상이 지니

는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맥락에서 공통적으로 대응하여야 했던 문제

가 있었고 그 문제에 대응하는 사상으로 어떠한 특정한 사상이 왜 더 호응을

받을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7개혁 정책에 대한 논란만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러한 정책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그의 사상 체계 학의 성격과의 연결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북송 시기의 정치와 사상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을 설명하여야만 그 이후 남송 시기 이

후의 성리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성리학의 사회 정

치 질서에 대하여 발언 방식 그리고 왜 성리학이 그렇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나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왕안석 사상의 심도 있는 이해는 단

순히 왕안석에 대한 이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송 시기 지성사

그리고 북송 이후의 동아시아 지성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정이의 경우는 성리학이 程朱學이라고도 불리듯이 朱熹(1130-1200)

가 南宋시기 성리학 체계를 만들면서 그 바탕으로 삼았던 사상체계이

기 때문에 그 자체의 독자적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성리학 체계 특히

주희에 의해 완성된 주자학 체계 내에서의 의미만이 주된 관심의 대상

이 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이의 사상 자체는 그가 살고 있었

던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이는 이후의

주자학의 중요한 개념적 이론적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철학사적 의미

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북송 시기 당시의 첨예하게 대두되었던 중

요한 정치 사회 사상적 문제에 자신의 답을 제시했던 사상가이기 때

문이다 이 논문에서 살펴보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문제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과의 연관성에서 살펴볼 때 정이는 북송 시기에 상

당히 과감한 새로운 주장을 펼쳤고 이 주장을 뒷받침할 이론적 근거

를 그의 사상체계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소옹 왕안석 정이 이들은 공통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

하였을 뿐 아니라 상호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주희에

6) 이렇듯 정이 사상을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

은 후에 주희가 주자학 체계를 완성할 때 정이가 제공하였던 여러 요소를 어

떻게 그리고 왜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았는지 전유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오히려 큰 도움이 되며 주자학이 지녔던 사회 정치적 의미를 보다 명

확히 드러내게 한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8의한 성리학 체계가 동아시아 지성계의 주류가 되고 난 후 소옹과 왕

안석의 사상은 상당히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왕안석의 사상은

매우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남송 이후 성리학이 주도하게 된

이후에도 소옹과 왕안석의 사상은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아시아 지성사의 다양한 변주에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들의 사상이 왜 특정한 시기에 다시 언급되면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지 성리학 체계와는 어떠한 관련을 맺으며 다시 출현하게 되는지는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이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문제

와 그 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

서 이들의 사상을 북송 시기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그 공통성에 주목하

며 상호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Ⅱ 皇極經世書의 數의 질서와사대부로서의 邵雍

소옹은 황극경세서의 저작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象數學을 발전시

킨 奇人의 풍모를 지닌 특이한 사상가로 알려져 왔다7) 그는 北宋 五

子의 하나로 道學의 선조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후의 정이나

주희의 평가에 의하면 그의 학은 상수계열의 術數學에 가까운 것으로

도학계열과는 다른 종류의 지향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졌다8) 인간 세

7) 소옹에 대한 대표적인 저작은 Anne D Birdwhistell Transition to NeoConfucianism Shao Yung on Knowledge and Symbols of Reality (StanfordStanford UP 1989) Don J Wyatt The Recluse of Loyang Shao Yung andthe Moral Evolution of early Sung Thought (Hawaii University of HawaiiP 1996) ldquoShao Yong and Numberrdquo (Kidder Smith etc eds Sung Dynasty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1990)

8) 소옹에 대한 주희의 평가에 대해서는 Don J Wyatt ldquoChu Hsis Critique of

Shao Yung One Instance of the Stand Against Fatalismrdquo (Harvard Journalof Asiatic Studies 45 1985)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9계의 윤리와 經世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질서에

대해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북송의 소위 도덕 철학자들의 관심

사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결국

소옹의 관심사도 자연세계의 질서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옹이 추구하였

던 원리 역시 자연과 인간 사회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

리로서의 數의 질서였다

그렇다면 소옹이 황극경세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數의 질서와 그

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

되고 있는 것인가 기존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연구나 그의 황극경세서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그의 수에 기초한 우주관과 독특한 易學

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상수학을 통해서 제시

한 우주만물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에 대

해서는 그다지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황극경세서의 대부분은 도표와 매우 의미를 알기 힘든 장황하게

반복되는 각종 사물의 분류 체계와 曆의 리스트로 채워져 있다 이러

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법칙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는 우주관을 표명

하고 있다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우주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9)

이 책에서 유일하게 소옹이 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

한 논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觀物篇 이다 그러나 관물편 의 대

부분도 앞부분의 도표와 유사한 장황하고 반복되는 알고리듬적인 규칙

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는 일부분 경

전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나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보일 뿐이

다 왜 소옹이 이러한 책을 썼는지 그의 상수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

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비교적 소략하다 그

러나 적은 분량이나마 소옹은 관물편 에서 그가 천지와 인간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은

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p484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0이러한 우주만물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聖人이 이러

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관물편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물편 의 주된 주장은

어떻게 物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소옹이

그의 상수학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聖人도 결국은 올바

르게 관물을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觀物內篇 에서 그는 성인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의 物이다 聖人도 또한 사람이다 하나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열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백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천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만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억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조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다 조의 물을 감당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라 아니겠는

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열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어

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하고 성

인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물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 중의 물이라 하며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을 사람

중의 사람이라 한다 물 중의 물은 至物을 말하고 사람 가운데 사람은

至人을 말한다 하나를 들어 지물에 이르고 한 사람으로 지인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이를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성인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一身으로 萬身을 살피며

一物로 萬物을 살피고 一世로 萬世를 살피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으로 하

늘의 뜻(天意)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天言)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

늘의 일(天功)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이 맡긴 일(天事)을 대신하기 때문

이다 또한 위로 天時를 알고 아래로 地理를 다하며 가운데로 物情에 밝

고 人事를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의 경륜과 조화의 출입과 고

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아아 성

인이여 세세토록 성인을 본받지 않으리오 나는 눈으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보아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살피고 자취

를 살펴서 그 體와 用을 찾아 깊이 연구한다면 억만년 천만년의 일일지

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ldquo천지의 밖에 따로 천지

만물이 있으며 그것은 이 천지만물과 다르다rdquo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뿐이 아니라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5: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7개혁 정책에 대한 논란만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러한 정책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그의 사상 체계 학의 성격과의 연결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북송 시기의 정치와 사상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을 설명하여야만 그 이후 남송 시기 이

후의 성리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 과정 그리고 성리학의 사회 정

치 질서에 대하여 발언 방식 그리고 왜 성리학이 그렇게 호응을 얻을

수 있었나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왕안석 사상의 심도 있는 이해는 단

순히 왕안석에 대한 이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북송 시기 지성사

그리고 북송 이후의 동아시아 지성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정이의 경우는 성리학이 程朱學이라고도 불리듯이 朱熹(1130-1200)

가 南宋시기 성리학 체계를 만들면서 그 바탕으로 삼았던 사상체계이

기 때문에 그 자체의 독자적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성리학 체계 특히

주희에 의해 완성된 주자학 체계 내에서의 의미만이 주된 관심의 대상

이 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이의 사상 자체는 그가 살고 있었

던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이는 이후의

주자학의 중요한 개념적 이론적 기반을 준비하기 위한 철학사적 의미

만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북송 시기 당시의 첨예하게 대두되었던 중

요한 정치 사회 사상적 문제에 자신의 답을 제시했던 사상가이기 때

문이다 이 논문에서 살펴보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문제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과의 연관성에서 살펴볼 때 정이는 북송 시기에 상

당히 과감한 새로운 주장을 펼쳤고 이 주장을 뒷받침할 이론적 근거

를 그의 사상체계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소옹 왕안석 정이 이들은 공통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

하였을 뿐 아니라 상호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주희에

6) 이렇듯 정이 사상을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

은 후에 주희가 주자학 체계를 완성할 때 정이가 제공하였던 여러 요소를 어

떻게 그리고 왜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았는지 전유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오히려 큰 도움이 되며 주자학이 지녔던 사회 정치적 의미를 보다 명

확히 드러내게 한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8의한 성리학 체계가 동아시아 지성계의 주류가 되고 난 후 소옹과 왕

안석의 사상은 상당히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왕안석의 사상은

매우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남송 이후 성리학이 주도하게 된

이후에도 소옹과 왕안석의 사상은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아시아 지성사의 다양한 변주에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들의 사상이 왜 특정한 시기에 다시 언급되면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지 성리학 체계와는 어떠한 관련을 맺으며 다시 출현하게 되는지는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이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문제

와 그 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

서 이들의 사상을 북송 시기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그 공통성에 주목하

며 상호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Ⅱ 皇極經世書의 數의 질서와사대부로서의 邵雍

소옹은 황극경세서의 저작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象數學을 발전시

킨 奇人의 풍모를 지닌 특이한 사상가로 알려져 왔다7) 그는 北宋 五

子의 하나로 道學의 선조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후의 정이나

주희의 평가에 의하면 그의 학은 상수계열의 術數學에 가까운 것으로

도학계열과는 다른 종류의 지향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졌다8) 인간 세

7) 소옹에 대한 대표적인 저작은 Anne D Birdwhistell Transition to NeoConfucianism Shao Yung on Knowledge and Symbols of Reality (StanfordStanford UP 1989) Don J Wyatt The Recluse of Loyang Shao Yung andthe Moral Evolution of early Sung Thought (Hawaii University of HawaiiP 1996) ldquoShao Yong and Numberrdquo (Kidder Smith etc eds Sung Dynasty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1990)

8) 소옹에 대한 주희의 평가에 대해서는 Don J Wyatt ldquoChu Hsis Critique of

Shao Yung One Instance of the Stand Against Fatalismrdquo (Harvard Journalof Asiatic Studies 45 1985)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9계의 윤리와 經世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질서에

대해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북송의 소위 도덕 철학자들의 관심

사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결국

소옹의 관심사도 자연세계의 질서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옹이 추구하였

던 원리 역시 자연과 인간 사회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

리로서의 數의 질서였다

그렇다면 소옹이 황극경세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數의 질서와 그

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

되고 있는 것인가 기존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연구나 그의 황극경세서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그의 수에 기초한 우주관과 독특한 易學

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상수학을 통해서 제시

한 우주만물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에 대

해서는 그다지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황극경세서의 대부분은 도표와 매우 의미를 알기 힘든 장황하게

반복되는 각종 사물의 분류 체계와 曆의 리스트로 채워져 있다 이러

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법칙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는 우주관을 표명

하고 있다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우주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9)

이 책에서 유일하게 소옹이 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

한 논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觀物篇 이다 그러나 관물편 의 대

부분도 앞부분의 도표와 유사한 장황하고 반복되는 알고리듬적인 규칙

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는 일부분 경

전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나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보일 뿐이

다 왜 소옹이 이러한 책을 썼는지 그의 상수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

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비교적 소략하다 그

러나 적은 분량이나마 소옹은 관물편 에서 그가 천지와 인간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은

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p484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0이러한 우주만물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聖人이 이러

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관물편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물편 의 주된 주장은

어떻게 物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소옹이

그의 상수학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聖人도 결국은 올바

르게 관물을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觀物內篇 에서 그는 성인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의 物이다 聖人도 또한 사람이다 하나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열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백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천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만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억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조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다 조의 물을 감당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라 아니겠는

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열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어

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하고 성

인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물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 중의 물이라 하며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을 사람

중의 사람이라 한다 물 중의 물은 至物을 말하고 사람 가운데 사람은

至人을 말한다 하나를 들어 지물에 이르고 한 사람으로 지인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이를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성인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一身으로 萬身을 살피며

一物로 萬物을 살피고 一世로 萬世를 살피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으로 하

늘의 뜻(天意)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天言)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

늘의 일(天功)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이 맡긴 일(天事)을 대신하기 때문

이다 또한 위로 天時를 알고 아래로 地理를 다하며 가운데로 物情에 밝

고 人事를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의 경륜과 조화의 출입과 고

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아아 성

인이여 세세토록 성인을 본받지 않으리오 나는 눈으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보아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살피고 자취

를 살펴서 그 體와 用을 찾아 깊이 연구한다면 억만년 천만년의 일일지

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ldquo천지의 밖에 따로 천지

만물이 있으며 그것은 이 천지만물과 다르다rdquo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뿐이 아니라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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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68의한 성리학 체계가 동아시아 지성계의 주류가 되고 난 후 소옹과 왕

안석의 사상은 상당히 주변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왕안석의 사상은

매우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남송 이후 성리학이 주도하게 된

이후에도 소옹과 왕안석의 사상은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아시아 지성사의 다양한 변주에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들의 사상이 왜 특정한 시기에 다시 언급되면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지 성리학 체계와는 어떠한 관련을 맺으며 다시 출현하게 되는지는

북송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이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문제

와 그 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점에

서 이들의 사상을 북송 시기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그 공통성에 주목하

며 상호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Ⅱ 皇極經世書의 數의 질서와사대부로서의 邵雍

소옹은 황극경세서의 저작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象數學을 발전시

킨 奇人의 풍모를 지닌 특이한 사상가로 알려져 왔다7) 그는 北宋 五

子의 하나로 道學의 선조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후의 정이나

주희의 평가에 의하면 그의 학은 상수계열의 術數學에 가까운 것으로

도학계열과는 다른 종류의 지향을 지녔던 것으로 여겨졌다8) 인간 세

7) 소옹에 대한 대표적인 저작은 Anne D Birdwhistell Transition to NeoConfucianism Shao Yung on Knowledge and Symbols of Reality (StanfordStanford UP 1989) Don J Wyatt The Recluse of Loyang Shao Yung andthe Moral Evolution of early Sung Thought (Hawaii University of HawaiiP 1996) ldquoShao Yong and Numberrdquo (Kidder Smith etc eds Sung Dynasty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1990)

8) 소옹에 대한 주희의 평가에 대해서는 Don J Wyatt ldquoChu Hsis Critique of

Shao Yung One Instance of the Stand Against Fatalismrdquo (Harvard Journalof Asiatic Studies 45 1985)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9계의 윤리와 經世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질서에

대해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북송의 소위 도덕 철학자들의 관심

사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결국

소옹의 관심사도 자연세계의 질서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옹이 추구하였

던 원리 역시 자연과 인간 사회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

리로서의 數의 질서였다

그렇다면 소옹이 황극경세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數의 질서와 그

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

되고 있는 것인가 기존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연구나 그의 황극경세서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그의 수에 기초한 우주관과 독특한 易學

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상수학을 통해서 제시

한 우주만물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에 대

해서는 그다지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황극경세서의 대부분은 도표와 매우 의미를 알기 힘든 장황하게

반복되는 각종 사물의 분류 체계와 曆의 리스트로 채워져 있다 이러

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법칙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는 우주관을 표명

하고 있다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우주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9)

이 책에서 유일하게 소옹이 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

한 논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觀物篇 이다 그러나 관물편 의 대

부분도 앞부분의 도표와 유사한 장황하고 반복되는 알고리듬적인 규칙

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는 일부분 경

전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나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보일 뿐이

다 왜 소옹이 이러한 책을 썼는지 그의 상수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

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비교적 소략하다 그

러나 적은 분량이나마 소옹은 관물편 에서 그가 천지와 인간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은

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p484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0이러한 우주만물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聖人이 이러

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관물편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물편 의 주된 주장은

어떻게 物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소옹이

그의 상수학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聖人도 결국은 올바

르게 관물을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觀物內篇 에서 그는 성인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의 物이다 聖人도 또한 사람이다 하나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열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백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천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만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억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조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다 조의 물을 감당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라 아니겠는

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열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어

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하고 성

인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물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 중의 물이라 하며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을 사람

중의 사람이라 한다 물 중의 물은 至物을 말하고 사람 가운데 사람은

至人을 말한다 하나를 들어 지물에 이르고 한 사람으로 지인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이를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성인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一身으로 萬身을 살피며

一物로 萬物을 살피고 一世로 萬世를 살피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으로 하

늘의 뜻(天意)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天言)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

늘의 일(天功)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이 맡긴 일(天事)을 대신하기 때문

이다 또한 위로 天時를 알고 아래로 地理를 다하며 가운데로 物情에 밝

고 人事를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의 경륜과 조화의 출입과 고

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아아 성

인이여 세세토록 성인을 본받지 않으리오 나는 눈으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보아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살피고 자취

를 살펴서 그 體와 用을 찾아 깊이 연구한다면 억만년 천만년의 일일지

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ldquo천지의 밖에 따로 천지

만물이 있으며 그것은 이 천지만물과 다르다rdquo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뿐이 아니라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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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69계의 윤리와 經世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질서에

대해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북송의 소위 도덕 철학자들의 관심

사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결국

소옹의 관심사도 자연세계의 질서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옹이 추구하였

던 원리 역시 자연과 인간 사회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

리로서의 數의 질서였다

그렇다면 소옹이 황극경세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數의 질서와 그

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 사회의 질서와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

되고 있는 것인가 기존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연구나 그의 황극경세서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그의 수에 기초한 우주관과 독특한 易學

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상수학을 통해서 제시

한 우주만물의 질서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연관되었는가에 대

해서는 그다지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황극경세서의 대부분은 도표와 매우 의미를 알기 힘든 장황하게

반복되는 각종 사물의 분류 체계와 曆의 리스트로 채워져 있다 이러

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법칙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는 우주관을 표명

하고 있다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우주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9)

이 책에서 유일하게 소옹이 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

한 논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觀物篇 이다 그러나 관물편 의 대

부분도 앞부분의 도표와 유사한 장황하고 반복되는 알고리듬적인 규칙

을 적용한 사물의 리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는 일부분 경

전에서 따온 이야기들이나 상투적인 에피소드들의 나열이 보일 뿐이

다 왜 소옹이 이러한 책을 썼는지 그의 상수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

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부분은 비교적 소략하다 그

러나 적은 분량이나마 소옹은 관물편 에서 그가 천지와 인간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은

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p484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0이러한 우주만물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聖人이 이러

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관물편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물편 의 주된 주장은

어떻게 物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소옹이

그의 상수학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聖人도 결국은 올바

르게 관물을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觀物內篇 에서 그는 성인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의 物이다 聖人도 또한 사람이다 하나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열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백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천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만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억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조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다 조의 물을 감당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라 아니겠는

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열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어

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하고 성

인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물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 중의 물이라 하며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을 사람

중의 사람이라 한다 물 중의 물은 至物을 말하고 사람 가운데 사람은

至人을 말한다 하나를 들어 지물에 이르고 한 사람으로 지인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이를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성인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一身으로 萬身을 살피며

一物로 萬物을 살피고 一世로 萬世를 살피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으로 하

늘의 뜻(天意)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天言)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

늘의 일(天功)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이 맡긴 일(天事)을 대신하기 때문

이다 또한 위로 天時를 알고 아래로 地理를 다하며 가운데로 物情에 밝

고 人事를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의 경륜과 조화의 출입과 고

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아아 성

인이여 세세토록 성인을 본받지 않으리오 나는 눈으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보아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살피고 자취

를 살펴서 그 體와 用을 찾아 깊이 연구한다면 억만년 천만년의 일일지

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ldquo천지의 밖에 따로 천지

만물이 있으며 그것은 이 천지만물과 다르다rdquo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뿐이 아니라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8: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0이러한 우주만물에서 어떠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또한 聖人이 이러

한 우주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관물편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관물편 의 주된 주장은

어떻게 物을 관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소옹이

그의 상수학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聖人도 결국은 올바

르게 관물을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觀物內篇 에서 그는 성인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의 物이다 聖人도 또한 사람이다 하나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열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백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천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만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고 억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으며 조 개의 물을

감당하는 물이 있다 조의 물을 감당하는 것이 어찌 사람이라 아니겠는

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열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 조의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어

찌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사람은 물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하고 성

인은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지극한 것을 알 수 있다 물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물 중의 물이라 하며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것을 사람

중의 사람이라 한다 물 중의 물은 至物을 말하고 사람 가운데 사람은

至人을 말한다 하나를 들어 지물에 이르고 한 사람으로 지인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이를 성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성인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는 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一身으로 萬身을 살피며

一物로 萬物을 살피고 一世로 萬世를 살피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으로 하

늘의 뜻(天意)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天言)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

늘의 일(天功)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이 맡긴 일(天事)을 대신하기 때문

이다 또한 위로 天時를 알고 아래로 地理를 다하며 가운데로 物情에 밝

고 人事를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또한 천지의 경륜과 조화의 출입과 고

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이다 아아 성

인이여 세세토록 성인을 본받지 않으리오 나는 눈으로 보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비록 눈으로 보아 알 수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살피고 자취

를 살펴서 그 體와 用을 찾아 깊이 연구한다면 억만년 천만년의 일일지

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ldquo천지의 밖에 따로 천지

만물이 있으며 그것은 이 천지만물과 다르다rdquo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나뿐이 아니라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9: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1무릇 知라는 것은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言이라는 것은 입으로

얻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데 또 어떻게

입으로 얻어서 말을 하겠는가 마음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을 妄知

라 하고 입으로 깨달아 말하지 못하는 것을 妄言이라고 한다 내 어찌

妄人을 좇아 망지 망언을 행하겠는가10)

여기서 소옹은 인간 또한 物이고 聖人 또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완

벽한 물이고 성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ldquo一心으로 萬心을 볼 수 있고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또 마음으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고 입으로 하늘의 말을 대신하며 손으로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몸으로 하늘의 임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 천시를 알고 아

래로 지리를 다하며 가운데로 물정에 밝고 인사를 환하게 알기 때문

이다 또한 천지의 출입조화와 고금의 진퇴와 인물의 표리를 두루 꿰

뚫고 환하게 알기 때문rdquo이다 그런데 이는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은 천지의 밖에 있는 다른 천지만물에 대한 지식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ldquo무릇 관물이라는 것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살

피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다 마음으로 살피는 것이 아

10) 소옹 관물내편 제2편 (황극경세서 邵雍集 中華書局 2010) pp7-8ldquo然則人亦物也聖亦人也有一物之物有十物之物有百物之物有千物之

物有萬物之物有億物之物有兆物之物 為兆物之物豈非人乎有一人之

人有十人之人有百人之人有千人之人有萬人之人有億人之人有兆人之

人為兆人之人豈非聖乎是知人也者物之至者也 聖也者人之至者也物

之至者始得謂之物之物也 人之至者始得謂之人之人也 夫物之物者至物之

謂也人之人者至人之謂也 以一至物而當一至人則非聖人而何人謂之不

聖則吾不信也何哉謂其能以一心觀萬心一身觀萬身一物觀萬物一世觀

萬世者焉又謂其能以心代天意口代天言手代天功身代天事者焉又謂其能

以上識天時下盡地理中盡物情通照人事者焉又謂其能以彌綸天地出入造

化進退古今表裏人物者焉 噫聖人者非世世而效聖焉吾不得而目見之

也雖然吾不得而目見之察其心觀其跡探其體潛其用雖億千萬年亦可

以理知之也 人或告我曰天地之外別有天地萬物異乎此天地萬物則吾不得而

知之也 非惟吾不得而知之也聖人亦不得而知之也 凡言知者謂其心得而知之

也言言者謂其口得而言之也既心尚不得而知之口又惡得而言之乎以心不

可得知而知之是謂妄知也 以口不可得言而言之是謂妄言也 吾又安能從妄人

而行妄知妄言者乎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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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2니라 理로 살피는 것이다rdquo11)라고 올바른 관물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러한 ldquo마음과 理rdquo로 일심으로 만심을 살필 수 있는 올

바른 관물의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무릇 거울은 능히 비출 수 있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비록 거울이 만물의 형상을 숨기지 못하게 한다 하더라도 물(水)이

만물의 형체를 한결같이 하는 것만 못하다 비록 물이 만물의 형체를 한

결같이 한다 하더라도 또 聖人이 만물의 情을 하나로 하는 것만 못하다

성인이 만물의 정을 하나로 하는 것은 성인이 反觀할 있기 때문이다 反

觀이라는 것은 나로써 物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물로써 물을 살피는 것

을 말한다 이미 물로써 물을 살필 수 있다면 어찌 또 내(我)가 그 사이

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나 또한 남이고 남 또한 나이며 나와 남은

모두 物임을 알겠다 천하의 눈을 자기의 눈으로 삼으니 그 눈이 보지 못

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를 자기의 귀로 삼으니 그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입을 나의 입으로 삼으니 그 귀가 말하지 못하는 것

이 없으며 천하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으니 그 마음이 꾀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12)

위에서 올바른 관물의 방법으로 소옹은 ldquo反觀rdquo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을 이야기한다13)

여기서 소옹은 매우 명확한 윤리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만약 편

견을 가지고 자신의 私的인 견해와 관점 즉 주관성이 개입된다면 성

11) 상동 관물내편 제12편 (상동) p49 ldquo天所以謂之觀物者非以目觀之也非

觀之以目而觀之以心也非觀之以心而觀之以理也rdquo

12) 상동 ldquo夫鑒之所以能為明者謂其能不隱萬物之形也雖然鑒之能不隱萬物之

形未若水之能一萬物之行也 雖然水之能一萬物之形又未若聖人之能一萬物之

情也 聖人之所以能一萬物之情者謂其聖人之能反觀也所以謂之反觀者不以

我觀物也 不以我觀物者以物觀物之謂也 既能以物觀物又安有我於其間哉

是之我亦人也人亦我也我與人皆物也此所以能用天下之目為己之目其目無

所不觀矣 用天下之耳為己之耳其耳無所不聽矣 用天下之口為己之口其口無

所不言矣 用天下之心為己之心其心無所不謀矣rdquo

13) 반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Anne D Birdwhistell ldquoShao Yung and His

Concept of Objective Observation (fan kuan)rdquo (Journal of ChinesePhilosophy 94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11: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3인이 될 수 없으며 공정하고 객관적이 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매우

평범하고 많은 사상가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

나 사실상 황극경세서에서나 그가 남긴 다른 저작에서도 소옹은 직

접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황극경세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소옹은 올바른 관물을 할 수 있는 방법과 근거를 그의 우주에 대한

설명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옹은 도표와 사물의 분류에 의한 리스트를 통하여

우주만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지 그 방법을 이야

기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물이 어디에 객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황극경세서의 지루한 도표

와 사물의 리스트들의 나열이 어떻게 그의 관물의 주장과의 연관이 되

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자신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단지 상대적인

것 즉 각각의 관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람과

사물의 숫자만큼 그 관점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물을 사물

의 관점에서 주관적인 견해를 개입시키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황에서 무한히 새로운 사물이 출현하게 되는

데 어떻게 우리는 ldquo我rdquo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나 사물을 사물의 관점

에서 객관적으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

여 反觀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하여 자세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

신에 그는 황극경세서의 책 전체를 통하여 그의 우주의 체계에 대한설명을 제공한 것이다

소옹은 이 세상에 무한한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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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4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과

성인도 결국은 이러한 동일한 근원을 공유하고 이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생겨나고 쇠퇴하는 것

은 일정한 법칙과 주기를 따르고 있고 모든 것은 소옹이 제시한 도표

와 리스트 상의 하나의 분류에 속하고 있다 소옹의 도표와 리스트에

서 실제로 각 사물들은 그의 분류의 축 상에 어느 한 점에 반드시 정

확히 위치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분류 체계는 세상의 모든 사

물을 결국 정확한 위치 좌표 상에 절대값을 가진 것으로 표시할 수 있

게 해준다 마치 3차원 그래프에서 (-3 4 5)라는 좌표를 가진 점은 어

떠한 지점에서 그 점을 보더라도 항상 그 위치의 절대적인 값은 변화

할 수 없는 것처럼 소옹은 모든 사물을 그의 황극경세서에서 이처럼위치시켜나가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소 복잡하고 장황하기는 하더라도 소옹이 제

시하는 이러한 우주의 분류체계 -사실상 우주 그 자체-를 완전히 이

해한다면 그 사람은 완벽히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관점에서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그의 황극경세서의 구성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이자 제공하는 지식인 것이다 황극경세서의 全篇의 구

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소옹은 올바른 관물의 중요성을 간

략하게 설명하고 이러한 올바른 관물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간 사회

의 질서의 문제 자체는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주의 象을 제시함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어떻게 주관성을 극복하고 모두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의 가치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북송 시기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세계 천지와 우주가 이러한 주관성을 극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생

각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당 중기 이후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히려 인간 사회의 질서의 문제에 天地自然을 개입시키는 것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인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기준을 인간의 질서에 끌어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13: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5들임으로써 자의적인 해석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위

험성만을 높일 뿐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

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歐陽脩(1007-1072)는 11세기에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14)

소옹은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사회의 문제에 연계시키지 않음으로

써 객관성을 지키려하는 시도가 아니라 객관성에 대한 요구를 자연과

자연법칙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

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해석의 문제라는 지점은 物과 我의 구분을 더

큰 우주의 체계에서 모두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구별이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는 ldquo하늘은 道로

인해 생겨나고 땅도 道로 인해 이루어진다 만물은 도로 인해 형태를

갖추고 사람은 도로 인해 행하게 된다 天地 사람 만물은 다르지만

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이다rdquo15)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제시한 우주의 체계에서 각각의 사물이 어디에 객

관적으로 위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

서는 그 시점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조망하여 만물의 절대적 자리값을

알게되는-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물을 사물의 관점에

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개인은 더 이상 한정된 한 개인의

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물도 하나의 특수한 사물로 국한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세울 수 있는 그러한

특수한 자리 자체가 없어지며 이로써 사물을 주관적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ldquo나와 사물이 없어지면 능히 사물을 사물로 볼 수 있

다rdquo16)는 그의 발언은 이를 이야기 한 것일 것이다

황극경세서는 결국 우주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의 법칙을14)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Kidder Smith Jr Peter K Bol Joseph A Adler

and Don J Wyatt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 (Princeton PrincetonUniversity Press 1990)의 구양수 부분을 참고하시오

15) 소옹 관물내편 제9편 (황극경세서) p33 ldquo天由道而生地由道而成 物由道以形 人由道而行天地人物則異也其于由道一也rdquo

16) 소옹 觀物外篇 下之中 (황극경세서) p152 ldquo不我物則能物物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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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6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체계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자연과학적인 관심보다는 북송 시기의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인간 사회가 공유할 수 있는 질서와 도덕의 기반에 대

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매우 독특한 상수학 또한 당

시의 주된 사회적 도덕적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北宋五子의 하나로 추앙될 수 있었고 이후에도 道

學 집단에서 일정한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는

구양수와 같이 천지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분리하고 철저히 인

간의 질서를 經典과 같은 문화적 기반에 두려고 하였던 사람들과 비교

하면 萬物一體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천지자연의 문제를 인간

의 문제를 설명하는 기반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사상 체계는 道學의 사상 체계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소옹은 직접적으로 우주체계와 그에 대한 객관적 법칙을 제공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의 상수학에서의 중점은

인간의 心의 작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는 ldquo先天의 학문은 心法이다

그러므로 河圖는 모두 중앙으로부터 만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rdquo17)고 한다 결국 그가 제시한 객관적인

법칙과 그의 상수학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바르게 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보편적인 원리 자체보다 인간의

심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보편적인 원리에 도달할 것인가에 중

점이 두어지는 것은 왕안석과 정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들이 제시하고 있는 보편 원리는 그것이 數이든 理이든 그 자체에 대

한 설명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더 초

점이 모아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소옹의 수의 질서를 통해 보편 원리를 추구하는 학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로 모아지면서 올바른 마음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사회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인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

17) 상동 ldquo先天學心法也 故圖皆自中起萬化萬事生乎心也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15: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7한 보편 원리의 추구를 사대부의 학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이전의

단순한 문화적 전통과 교양 典章制度를 익히는 것을 넘어서 사대부의

학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한 것이다 즉 소옹의 학으로 본 사대부의

학은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성인이 되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편 원리의 습득자로서의 사대부

는 이전의 문화의 전승자와 해석자로서 그 권력을 지녔던 사대부와 비

교하여 훨씬 강력하고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가지게 된다

소옹의 삶의 방식과 그의 사대부로서의 명성은 이렇듯 보다 강력하

고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사대부의 출현과 그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소옹은 河北 涿州에서 출생하여 12세에 河南

共城으로 이주하였고 1049년 洛陽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낙양으로의

이주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주요한 변화였을 뿐 아니라 그가 낙양으

로 이주하고 난 후 그는 줄곧 낙양의 사대부 교류에서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당대의 가장 명망 있는 관료와 사대부들과

매우 긴밀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그와 밀접한 교류를 한 사람은 司馬

光(1019-1086) 富弼(1004-1083) 呂公著(1018-1089)와 같이 당대 최상

의 관직과 문벌을 지닌 정치 지성계의 중심인물들이 망라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 받지만 거절하고 많은 제자 집단을 거

느리고 사대부 교류망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으며 일생 동안 학문과

동료와 제자들과의 교우만으로 명망을 유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낙양은 왕안석의 新法이 시행되면서 왕안석에 반대하는 士人들의 근거

지가 되었고 또한 洛學이라고 불리는 程顥(1032-1085) 정이의 근거지

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스승(師)을 자처하였던 그 자신의 정체성

규정 그리고 관직을 갖지 않고 학문적 명망 교우 제자 관계와 같은

사대부층 내에서의 관계만으로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사회적 변화가 맞물려 있

다 소옹은 그 자신의 인간적인 풍모 학자로서 詩人으로서의 명망을

바탕으로 관직이나 문벌의 배경이 없이도 사대부층의 중심이 되는 일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16: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78종의 ldquo스승rdquo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은 이렇듯 새로운 사대부로

서의 정체성을 갖는 집단의 출현이라는 북송 시기 변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8) 물론 그의 개성은 일반적인 유형화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당시 지역사회에서 講學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관직과 문벌이라는 기준이 아닌 새로운 기준으로 지역사회와 전국적인

사대부 사회에서의 명망을 다져가는 일군의 사대부들의 양상을 보여주

는 예이기도 하다 洛陽에서의 사대부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가 사망할

시점까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그의 삶의 방식은 이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삶의 양식의 전범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소옹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수의 질서는 당시에 사대부의 학

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얻지는 못한다 Freeman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옹의 死後 그의 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료와 제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아들인 邵伯溫(1057-1134)정도를 제외하고는 後學을 남기지도 학

파를 형성하지도 못하였다19) 보편 원리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이 그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어떤 방

식으로든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를 깨우쳐야만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는 있겠지만 소옹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정통을 주

장하는 논리를 펴지는 않았다 즉 모든 사대부들이 그의 학을 배워야

하고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소옹

의 경우 그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했던 방식은 그러한 학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의 방식 자체

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할 왕안석과 정이의 경

18) 이러한 그의 일생을 일종의 기인적 풍모를 지닌 은둔자의 삶으로 볼 수도 있

을 것이며 또한 그의 기질적인 특징과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일신을

보호하려는 방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은둔자로서의 풍모를 지니기에

는 소옹은 사실상 매우 활발한 사회적인 교류를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왕안석

의 신법에 대하여 그와 교류하였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반감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19) Michael D Freeman ldquoFrom Adept to Worthy The Philosophical Carreer

of Shao Yongrdquo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23 1982)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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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79우는 보편 원리가 가진 논리 내용과 그 추구의 방법 즉 학의 방식 자

체가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Ⅲ 王安石의 經術과 字學을 통한 道의 추구와

士大夫觀

왕안석은 궁극적인 하나에 이를 수 있고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

게 되면 천하의 만물을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할 수 있는 道가 있다

고 보았다

萬物은 지극한 이치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이치의 精髓를 얻을

수 있는 것이 聖人이다 그 이치의 정수를 얻는 道는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르게 되면 천하의 만물

은 계산하지 않고서도 파악될 수 있다 易은 말한다 ldquo하나에 이르지만백 가지의 思慮가 있다rdquo 이것은 백 가지의 사려들이 모두 궁극적인 하나

로 歸一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능히 그 궁극적인 하나에 이름으로써

천하의 이치들의 정수를 얻는다면 神妙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신묘의 경지에 들어가면 道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0)

왕안석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의 도에 대하여 정교한 철학적 체계

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天道와 人事가 분리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경우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를 이야기하

는 경우가 혼재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그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천인을 통괄하는 하나의 도가 존재하

며 이로써 만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도에 이르

기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21) 이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서 나타

20) 왕안석 치일론 (臨川先生文集 권66 中華書局 1959) p9 ldquo萬物莫不有至理焉能精其理則聖人也 精其理之道在乎致其一而已 致其一則天下之物

可以不思而得也 易曰 ldquo一致而百慮rdquo言百慮之歸乎一也 能致一以精天下之理

則可以入神矣 入于神則道之至也rdquo

21) 민병희 왕안석에 있어서의 道와 字 (동양사학연구 110 2010) p15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18: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0나는 변화에의 대응 문제에 개혁이라는 변화를 추구하는 그는 민감하

게 반응하였고 ldquo權時之變rdquo ldquo同道異迹論rdquo ldquo同迹異實論rdquo 등의 이론을

펼친다22)

왕안석은 정교한 철학체계로 천인을 통괄하는 보편 원리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경술과 자학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의 도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경전 주석서인

三經新義를 ldquo一道德 同風俗rdquo을 이루어 그의 개혁을 완성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고 字說이라는 사전을 만드는데 거의 집착적인 노력을

보였다23) 경술과 자학을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를 통괄하는 하나의 불

변하는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왕안석의 학을 단순히 富

國强兵을 위한 외부적인 제도를 강조하고 이를 경전적 근거를 대어 정

당화시키는 事功學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보편적

원리를 습득하는 양식으로 경전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그의 字에 대한 이론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은 자료의 散逸로 연구에 큰 난점이 있어 왔

다 자료가 영성함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기가 매우 힘들며 또한 송대

이후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주로 道學의 분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

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안석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 또한 부족하다

그러나 매우 적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술과 자학을 엿볼 수 있

는 자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최근에는 輯佚의 노력으로 다른 자료들에

흩어져 있는 왕안석의 저작의 흔적들이 일부 모아져 나오고 있다 왕

안석의 경전주석 중에는 周官新義가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尙書新義와 詩經新義는 程元敏의 三經新義輯考彙評에서 남은 부분들은 잘 집일되었다 왕안석 경술의 주요한 부분인 주역에 대한 주석인 易解도 매우 적은 분량이지만 집일되었다24) 자

2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이범학 왕안석 개혁론의 형성과 성격 -新法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一試論 (동양사학연구 1983) pp48-54 참고23) 이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민병희(2010)을 참고하시오

24)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 I-IV (國立編譯館1986-1987)와 楊倩描 荊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19: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1설의 경우도 극히 소량이어서 그 전모를 아는 데는 한계가 뚜렷하지

만 집일이 시도되었다25)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집일된 부분과 기존자료를 바탕으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 나타난 보편 원리의 추구와 그것이 어떻게 사대부의 위

상 역할 정체성의 문제와 연관성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26) 우선 각 경전 별로 나타나 있는 왕안석 경술의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여 보겠다27)

주관신의는 왕안석의 경전 주석 중 가장 많은 부분이 잔존하고 있

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집일본은 永樂大典에서 수집한 四庫全書本

이지만 이후에도 집일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주관신의에서 나타난 왕안석의 周禮 이해의 가

장 두드러진 특성은 왕안석은 주례를 이해할 때 이 경전의 텍스트

가 가지고 있는 구조의 분석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안

석이 주례를 중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주례의 편제가 매우 체계적이라는데 있었다고 보인다 왕안석은 주례 텍스트의 전체적 구

조로부터 각각의 부분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래서 어떠한 것들의 배열이 지니는 의미를 도출하고 설명하는 것에 무

척 주력하고 있다 또한 그 배열 내에서 각각 위치하고 있는 어휘들도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정합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 그 의

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 삼경신의와 역해 외에 容肇祖 王安石老子注輯本 (中華書局1979)는 왕안석의

노자주의 집일을 시도하였다

25) 張宗祥 輯錄 曹錦炎 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26) 이러한 집일서를 바탕으로 한 연구로 참고할 만한 것은 劉成國 荊公新學研究 (上海古籍出版社 2006) 方笑一 王安石尙書新義初探 (華東師範大學學報 39-1 2007) 徐規 楊天保 走出ldquo荊學rdquo (浙江大學學報 35-1 2005)楊倩描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楊天保 王安石學術史硏究 -以ldquo金陵王學rdquo(1021-1067)爲重點 (浙江大學博士學位論文 2004) 李祥俊 王安石學術思想硏究 (北京師範大學出版社 2000) 張洁 詩經新義硏究 (山西大學碩士學位論文 2007) 등이 있다

27) 별다른 언급이 없을 시 이 부분의 집일자료는 程元敏 三經新義輯考彙評I-IV (國立編譯館1986-1987)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임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20: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2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 어휘를 이루는 字 하나 하나도

그 자를 이루는 원리가 정합적으로 그 자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이렇게 경전 자체의 구조 그 내부에 나타난 배

열 그리고 어휘와 어휘를 이루는 자 모두가 하나의 완전히 정합적인

구조에서 각각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설명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왕안석은 주례에 나오는 어휘와 字들 또한 자신이 지은 자설을이용하여 해석하고 이러한 자의 해석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례의해석의 방식이다 이렇게 내적 정합성 위주의 접근을 하다 보니 간혹

다른 경서를 인용하거나 鄭玄의 주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제도와 禮의 주석으로서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적

다는 것도 특징적이다28)

이러한 주석의 태도로 볼 때 왕안석이 주례를 그의 정책의 기반

이 되는 경전으로 여겼던 것은 주례 텍스트가 보여주는 체계성 때

문이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례가 정책의 전거로 이용 가능한 텍스

트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례에 나오는 제도와 관료 조직에서 자신의 개혁의 근거를 찾는다거

나 실질적으로 고대에 제도가 어떠한 형태로 운영되었는가에 대한 관

심을 보인 예들은 예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텍스트 내에서

모든 제도들과 직위 등이 어떠한 내적 정합성을 지닌 채 편제되고 있

는가를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듯이 맞추는데 주력하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즉 주례라는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하나의 정합적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설명은 매우 기계적이고 억지스러운 면이

강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주례에 대한 접근 방식은 그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제도가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28) 쓰치다 겐지로 앞의 책 p424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21: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3것은 체계성이라고 보았다고 보인다 주례는 구체적으로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관직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

떻게 하나의 체계가 구조적으로 그 체계를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구성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제도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정책의 전거보다는 자신이 구상하

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적으로 이러한 주례의 체계와 같이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

하는 방식으로 주례에 접근하였다 주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

적 정합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자설을 이용한 어휘와 자의 해석이

주석의 주된 경향이란 점은 그의 다른 경전에 대한 주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詩經新義와 尙書新義는 왕안석의 아들인 王雱(1044-1076)이 주

로 편찬하였고 왕안석이 집적 저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왕안석의 사

상에 입각하여 그의 지도 하에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

詩經新義를 보면 왕안석은 毛詩序 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유

는 모시서 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시들이 일정한 의미

를 지닌 채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周南詩次解

를 보면 시들의 배열 순서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를 설명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王의 통치는 가족에서 시작되었다 가족 내의 질서 있는 배치는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근본한다 부부 사이의 올바른 관계는 덕을 소유

한 정숙한 여성을 군자의 배우자로 구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래서 「周

南」편은 關雎로부터 시작한다 이제 정숙한 여인이 덕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에서 그녀의 근본이 女工의 일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이 옷감에 관한 시이다29)

29) 왕안석 周南詩次解 앞의 책 권66 pp1b-2a ldquo王者之治始之于家 家之

序本于夫婦正夫婦正者在求有德之淑女為后妃以配君子也故始之以關雎 夫

淑女所以有德者其在家本于女工之事也故次以葛覃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22: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4주남 편이 關雎 시로 시작되고 다음 시가 葛覃 인 것을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남시차해 는 이런 식으로 卷耳

樛木 螽斯 桃夭 兎罝 芣苢 漢廣 汝墳 麟之趾 시까지 전편 모두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 시의 내용보다도 제목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시의

제목과 순서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확히 ldquo제 자리에rdquo 배치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國風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國風解 30)에서도 왕안석은

주로 그 목차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왜

국풍 이 周南 召南 邶風 鄘風 衛風 王風 鄭風 齊風 魏風 唐風 秦

風 陳風 檜風 曹風 豳風의 순서로 배열되었는가를 각 國의 역사적

연원을 그 순서의 의미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끌어오면서 순서가 정

해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王風의 명칭과 그것이 위

풍 다음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王이라는 것은 周를 말한다 平王이 東遷한 이후 그의 통치는 천하에

이르기에 부족하였고 一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風이라하고 雅라 하

지 않았다 周라고 하지 않은 것은 平王 桓王 莊王이 덕을 닦지 못하고

정치가 갖추어지지 못하니 이는 周를 탓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衛의 다음에 위치시켰다31)

결국 국풍 전체를 해석한다는 뜻의 국풍해 도 주남차서해 와 마찬

가지로 그 편목의 순서와 제목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전체 구조의

정합성을 전제하고 이에서 각 편명과 순서를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방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왕안석의 경전의 편목의 배열

순서에 대한 집착은32) 앞서서 그의 주례에 대한 주석에서도 나타난

30) 羅振玉이 일본에서 구하여 臨川集拾遺의 卷1 (pp24-26)에 실은 것을 程元

敏 II pp120-123에서 다시 실은 本을 이용하였다

31) 상동 p121 ldquo王者 周也 自平王東遷 其後政不足以及天下 以止於一國 於是

爲風而不雅矣 不言周者 蓋平 桓 莊王 德之不修 政之不講 非周之罪也 故次

衛也rdquo

32) 왕안석의 경전의 정합성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Peter K Bol (1989) pp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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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5것이었고 아래 논할 상서 주역의 해석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보인다

尙書新義도 위의 주례 시경의 주석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洪範傳 은 상서에 대한 왕안석의

주석적 저작으로 비교적 긴 문장이 남아 있는 저술이다33) 그런데 홍

범전 은 그의 경술과 자학 전반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특징이란 모든 사물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

고 그 짝들의 상호간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의 특성이 규정된다고 보

는 것이다

무릇 五行이 物이 되매 時 位 材 氣 性 形 事 情 聲 臭 味가 각

각 짝을 이루고 서로 미루고(推) 서로 흩어져(散) 통하지 않는 바가 없

다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이 있으므로 바름과 사악함이 있고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이 있다 性命의 이치 도덕의 뜻

이 모두 여기에 있다 34)

서로 짝을 이룬 것이 상호 미루고 흩어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

할 수 있으며 또한 부드러움과 강함 어둠과 밝음 바름과 사악함 아

름다움과 악함 추함과 좋아함 길과 흉과 같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것의 조합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또한 만물의 복잡한 변화는 이

렇듯 짝을 이루는 관계가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나타난다고 보고 이로

이해 相生 相剋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왕안석은 성명의 이치나

도덕의 뜻과 같은 고차원적이고 윤리적인 인간 사회의 이치 또한 이러

224-233

33) 왕안석의 「홍범전」에 대한 연구는 그의 황극에 대한 해석에 중점을 두어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것이 있다 Michael Nylan ldquoThe Shifting Center

The Original Great Plan and Later Readingsrdquo (Monumenta SericaMonograph Series no24 May 1992)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직접적 정치적

의미의 도출보다는 그 구조적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34) 程元敏 II p125 ldquo蓋五行之爲物 其時其位 其材其氣 其性其形 其事其情 其

色其聲 其臭其味 皆各有耦 推而散之無所不通 一柔一剛 一晦一明 故有正有

邪 有美有惡 有醜有好 有凶有吉 性命之理 道德之意 皆在是矣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24: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6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모두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의 상호 관계로 이 세

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설에서 보이는 왕안석의 문자

해석 방식의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러한 세계 파악의 관점은

당연히 陰陽과 五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이자 上卦와 下卦 등 대칭

적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상호관계로 설명하기 용이한 텍스트인 주역이 그의 경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그래서 왕안석

의 경술 중에 주례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역학이 매

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이후의 영향력의 면에서도 그의 역학의

영향력은 컸다

왕안석은 주역의 주석으로 易解 14권을 저술하였다 한다 그의

易學은 朱熹에 의해서도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청대 乾隆帝 시기 말에 그의 역해는 산일되어 버렸다35)

왕안석의 주역에 대한 해석은 일부가 임천문집에 남아 있다 易

象論解 易泛論 掛名解 九掛論 河圖洛書義 大人論 致一

論 등이 이에 해당한다

易象論解 는 왕안석이 주역의 十翼의 하나인 序掛傳 의 형식을

모방하여 64괘의 괘의 순서에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新 서괘전

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大象傳 의 卦辭를 취하였

다 대상전은 각 상괘와 하괘를 각각 天道와 人事를 설명하는 부분으

로 나눌 수 있는데 왕안석의 역상논해 는 인사를 논한 부분만을 주

로 취하고 있다 그는 역상논해 에서 64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서

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易泛論 은 易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대강을 논한다는 뜻을 가진 것

인데 이는 155개의 字와 41개의 어휘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져 있

을 뿐이다 그는 자연방위 색과 맛 행위동작 山陵川澤 金玉木石 건

축과 전쟁 혼인가정 衣帽服食 전문술어 등 13개 부류의 사휘에 대한

35) 이 논문에서는 楊倩描 荊公易解鉤沉 (王安石易學研究 河北大學出版社 2006) pp26-104의 일부 집일된 부분을 참고하였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25: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7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그의 자설에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

으며 똑같은 방식의 접근이다

掛名解 도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

로 구조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는 글이다

임천문집에 남겨진 글들과 그의 역해의 남겨진 부분을 집일한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유사하다 매우 부분적이지만 집일된 부

분을 보면 왕안석의 주역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易의 卦와 象들의

배열이 일정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로 구조된 것이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괘의 풀이에 있어서도 음과 양 등 대칭적인 구조

에서 의미를 추출하려는 측면이 매우 강한데 이는 앞서 홍범전 에서

도 보았듯이 그의 사상의 현저한 특성이다

왕안석의 역학은 크게 보아 義理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리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그의 역 해석

에는 텍스트의 우주론에서 어떠한 윤리적 의미를 발견해 내고 그러한

의미를 주역의 텍스트에 부여하려는 경향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다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괘와 상들의 배열과 그 체계로부터 의미를

산출해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왕안석은 易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구조

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그 구조 전체를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연역

적으로 그 부분들 즉 괘와 상들의 의미를 추출해 나가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윤리적 사회

철학적인 의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의리역보다 상수학적인 체계에 더 가까운 듯도

하지만 그는 象이나 數 자체가 어떤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고 이

를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상수학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왕

안석의 학이 名數에 밝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결국 그의 학이 논리학

인 名學과 상수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역에 대한 해석방식은 그의 자설에서 보이는 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일치한다 그의 河圖洛書義 를 보면 그는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36)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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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88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왕안석의 경술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왕안석은 성인의 경전을 더 이상 문화

적인 집적물로 보고 있지 않다 왕안석에게 경전은 우주자연과 인간사

회를 통괄하는 어떠한 하나의 원리를 보여주는 완벽한 정합성을 지닌

구조의 精髓였다 그리고 그 경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 정합

성을 이루는 보편적 원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왕안석의 경술은

경전을 통해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도에 이르는 사고를 하는 방

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안석이 春秋를 ldquo斷爛朝報rdquo라고 폄하하였고 과거시험의 교과에서

도 제외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37) 그런데 그가 이렇게 춘추를 경시한 것도 경전을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설명해 나

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춘추의 텍스트는 이러한 내적 구조의 체계적 정합성을 보여주지 못하

였고 따라서 그의 방식에 의해 이 텍스트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내

기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왕안석이 ldquo일도덕 동풍속rdquo의 도구로서의 경술로 통일적으로 제시하

고자 하였던 것은 그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의 존재론적 실체는 아니

36) ldquo공자가 말했다 黃河에서 그림(圖)이 나왔고 洛水에서 글(書)이 나왔다 聖人

은 그것들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 그림은 황하에서 나와야만 했고 낙수에서

나온 것은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글은 낙수에서 나와야만 했고 황

하에서 나온 것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림은 하늘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인간의 道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

하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고 그림은 象을 언급하고 있다 象을 이루는 것은 하

늘이라 불린다 그래서 龍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황하로부터 나왔다 용은

변화에 뛰어나고 하늘의 도는 변화를 숭상하기 때문이다 낙수는 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은 본받을 만한 말이다 그것을 본받고 따르는 것이 사

람이다 그래서 거북이 그것을 등에 지게 하여 낙수로부터 나왔다 거북은 점

을 치는데 뛰어나고 인간의 도는 점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지 자연

의 뜻이며 성인들이 주역에서 본받을 원칙을 찾는 이유이다rdquo 왕안석 河圖洛

書議 앞의 책 권63 p7b

37) 이에 대한 논의로는 이원석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 -왕안석의

춘추비판 배경분석을 중심으로 (규장각 30 2007) 등을 참고할 수 있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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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89었다 그가 경술을 통해서 제공하고자 했던 것은 궁극적 도에 이르는

방법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안석 자신이 바로 그 ldquo어떻

게 배워야 하는가rdquo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다38) 달리 이야기

하자면 경술을 통해 하나의 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lsquo推論rsquo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경술이 궁극적인 도 보편적 원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

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지만 그는 경전으로만 이러한 도에 이

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왕안석에게 경전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

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문자였다 그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볼

때에도 결국 그 경전이 도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그 경전 텍

스트에 쓰인 字 하나 하나가 내재하고 있는 원리에 있었다 그의 경전

주석의 절대적인 분량이 자설에 의거한 문자 해석의 형태였던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왕안석은 인간사회의 통일된 질서를 부여하고 斯文

을 부활시키려는 사명감 때문에 자설을 편찬한다39)왕안석의 문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문자가 단순히 인간의

임의적인 규약에 의하여 생겨난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호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ldquo자연에서 만들어진 것rdquo이라는 믿음이었

다40) 문자는 ldquo자연의 위치rdquo ldquo자연의 형상rdquo ldquo자연의 소리rdquo로 되어 있

어 결국은 ldquo자연의 뜻rdquo을 반영한다고 본다 문자는 모두 ldquo자연에 근본

한 것rdquo이고 인간 개개인의 ldquo사사로운 지혜rdquo에 의하여 ldquo인위로 만들어

낸 바가 아니다rdquo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말과 음이

38) ldquo오늘날 세상의 士로 행세하는 자들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

다 그러나 어떻게 배워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한다rdquo 왕안석 太

平州新學記 앞의 책 p7b

39)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0) ldquo대개 物이 생기면 情이 있게 마련이고 情이 발하면 소리가 됩니다 소리가

비슷한 것은 종류마다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 서로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는 말이 되고 이를 기술하면 글자가 됩니다 글자는 사람이 제정한

것이지만 원래는 自然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鳳凰에는 문양이 있으며 河圖에

는 圖象이 있으니 이것은 인위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모사했을 뿐

입니다rdquo 왕안석 進字說表 앞의 책 권56 p7a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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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0다르고 문자의 모양이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문자의

뜻은 한가지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부분은 자연의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본다41) 그래서

문자의 형태와 구성은 모두 일정한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규칙을 발

견한다면 자연과 인간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

다고 본 것이다

자설의 집일된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42) 또한 집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대부분 왕안석의 자 해석의 穿鑿附會함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언급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기 때문에 정확히 그의 자설의 전모를

알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자설에서 보

여주는 자의 해석 방식은 그가 자가 어떻게 천지를 통괄하는 도를 표

현하고 있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또한 이는 그의 경술

에 나타난 경전 해석 방식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안석은 그의 경전 주석에서 각 요소들이

어떻게 정합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

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일정한 형태의 짝을 이루고 있고 그 짝들이

복잡한 형태로 중첩되고 변용되고 그 상호관계에 의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43) 그래서 왕안석의 자학은 그의

역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44) 그가 주역의 掛 爻 象

과 문자를 결국은 같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

만 모든 것이 음양과 괘 효의 원리와 같이 홀짝이나 剛柔 그리고 글

41) ldquo그 聲의 억양과 뚫리고 막힘과 합쳐지고 흩어지는 것 들어가고 나오는 것

그 형태의 縱橫과 曲直 비뚤어짐과 똑바름 上下 內外와 左右 모두 뜻이 있는

것이며 이는 모두 자연에 근본한 것이지 개개인의 사사로운 지혜가 능히 人

爲로 만들어낸 바가 아니다rdquo 왕안석 熙寧字說序 앞의 책 권84 p4a

42) 張宗祥은 字 618자 어휘 12개를 집일하였다 張宗祥輯錄 曹錦炎點校 王安石ltlt字說gtgt輯 (福建人民出版社2005)

43) 이는 왕안석이 홍범전 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역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44) 楊天保 (2004) pp95-96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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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1자의 위치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짝을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더 분명히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왕안석의 字學에서 그가 字를 해석하는 방식을 보면 문자는 원래

자연의 형상을 따라 그 이치를 체현했다고 보았기에 한자의 象形文字

로서의 특성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 주종을 이루는 해

석 양식은 거의 모든 문자를 會意文字로 파악하고 그 결합 방식을 사

물들이 짝을 이루는 양식의 해석과 상관론적 분류법에 의하여 해석하

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왕안석의 학은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 단순한 짝

을 이루는 원칙에 의하여 모든 것을 천착부회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경술과 마찬가지로 왕안석이 字學을 통해서 의도한 것 또한 문자에

서 발견되는 규칙을 기반으로 하여 이에 따른 心의 움직임 생각의 방

식에 일종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는 원칙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질서를 통괄하기

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기계적인 도식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특히 고

차원적인 性命 도덕을 논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체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왕안석의 경술과 자학에서 드러난 보편 원리와 그

추구 방식은 당시의 사회 정치 질서 특히 사대부의 위상 역할 정체

성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왕안석의 개혁 정책

중에는 학교 교육 과거 제도의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45) 그리고 왕

안석이 그의 개혁 정책의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였던 萬言書 를

보면 인재 등용과 교육에 대한 제언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46) 물론

이러한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제언은 유학자들의 상투적이고 수

사적인 어법으로 볼 수 있지만 왕안석은 부상하는 새로운 성격의 사

대부 엘리트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당시

모든 개혁의 관건이라고 본 것 같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을

45) Peter K Bol (1992) p248에 개혁 내용 요약

46)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0-423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30: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2원했던 왕안석은 새로운 사대부 엘리트에 대해 兩價的인 시각을 지니

고 있었다 왕안석은 그의 개혁의 청사진의 대부분을 이들 사대부들을

어떻게 양성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할애할 만큼 이들을 개혁의 원동력

이자 사회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주체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兼倂 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이 이들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근원이라고도 본다 이 시에서 그는 비속한 관리들과 학자들이 오로지

가렴주구와 겸병에만 매달리고 있고 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분개하고 있다 이는 聖王이 다스렸던 이상적인 三代에서는 모든 권력

과 利權이 군주에게서 하나의 원천에서 나온 것에 비하여 현재는 이

익이 수백 개의 다른 곳으로부터 나오고 사람들이 사사롭게 이를 좌지

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47) 즉 그는 사대부를 하나의

강력한 시스템에 의하여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이 원하는 사회로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안석의 사대부관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는 諫官論 에서 士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다스리고 귀한 사람이 천한 이를 다

스리는 것은 古代의 道이다 귀한 사람은 누구를 말함인가 公卿大夫가

그들이다 천한 이들이란 누구인가 士와 庶人이 이들이다 그들은 다 같

은 사람인데 왜 어떤 사람은 공경이 되고 어떤 사람은 士가 되는가 공

경으로서의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士로서 일을 하

는 것이다 士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다면 그는 公卿으로 일을 하게 되

는 것이다 士는 三公과 같지 않다 士는 자신의 관직 하나만을 고수

하고 百官의 존폐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士는 자신의 임무를 지키고 다

른 여러 일들이 存廢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德과 재능에

부합되게 그 지위에 명해졌으니 그 명칭에 따르고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士는 자신의 상위에 있는 이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이것이 君臣의

分이고 上下의 道이다 士로서 명해졌는데 三公의 일을 책임지고 士의 지

위를 가지고 삼공의 책임을 지는 것은 古代의 道가 아니다 48)

47) 王安石 겸병 (臨川先生文集 권4 中華書局 1959) p11448) 상동 권63 p 673 ldquo以賢治不肖 以貴治賤 古之道也 所謂貴者何也 公卿大夫

是也 所謂賤者何也 士庶人是也 同是人也 或爲公卿 或爲士何也 爲其不能公

卿也 苦士之爲士 爲其賢於士也至士則不然 守一官而百官廢不可以預也 守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31: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3

여기서 왕안석은 公卿大夫 즉 고위 관리와 일반적인 士를 크게 구분

하여 보고 있다 사는 공경대부에 비하면 오히려 庶人에 가까운 존재

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는 덕과 능력의 차이에 의하여 결정되어 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더 능력 있고 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공경대부 즉

고위 관료가 되어 그에 맞는 직위와 임무를 갖게 되고 이보다 못한

이들은 사로서 자신의 맞는 직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자신의 관직에만 충실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몰두하면 되고 삼공과 같

이 모든 일을 관할하고 통괄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과 직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古代의 道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諫官이라는 특수한 직책의 권력의 비대화와 남용에 대하

여 경계 비판한 글이기 때문에 사대부 일반에 대한 인식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간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정부에서 부여한

관직을 넘어서 사대부들의 도덕성과 학문적 성취에 권위를 부여하여

정부의 일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직책이므로 근본적으로는

사대부를 어떠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왕안석은

사대부가 정부와 국가에서 부여한 어떠한 직분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도덕적 학문적 문화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다음은 만언서 에서 왕안석이 학교에서 學者들이 배워야 할 내용에

대하여 논하는 부분이다

禮樂刑政의 일들은 학교에 그 자리가 없습니다 學者들은 이러한 일들

은 관리의 일이라고 막연히 여기고 자신의 일임을 알지 못합니다 학자들

이 배우는 것은 章句學일 따름입니다 장구학을 가르치는 것은 古代에 사

람을 가르치는 道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들어 과거시험의 문장만을 가

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장을 배우는 것은 많은 것을 외우고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익

숙해져서 크게 되어봐야 천하국가를 운용하기 부족할 뿐 아니라 작은 재

一事而百事之失可而無言也稱其德副其材而命之以位也 順其命素其分以事其上而

不敢過也 此君臣之分也 上下之道也rdquo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32: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4주로는 천하국가에 사용되기도 부족합니다 현재의 교육은 사람의 재

능을 이루어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따라 열심히 하면 오히려 재

능을 훼손시키게 되니 이는 왜 그럴까요 무릇 사람의 재능이란 전문적

으로 집중하는 것(專)에 의해 이루어지고 번잡하게 분산되는 것(雜)에 의

해 훼손됩니다 그래서 先王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배치시킴에 匠人은

관부에 농민은 논밭에 상인은 시장에 사는 학교(庠序)에 배치하였습니

다 지금 士는 마땅히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

다49)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안석이 士를 農工商과 같은 하나의 전문적인

직능을 가진 계층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匠人은 관부의 공장에서 농

민은 논밭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일하듯이 士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고 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천하국가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

다 그리고 그 교육내용은 專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물론 이러한 專을

전일하고 잡다하지 않은 공부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만 이후의 農工商과의 병렬이나 天下國家之用을 그 공부내용으로 보는

것으로 보면 이는 ldquo君子不器rdquo의 이상에 의한 사대부가 아닌 정확히

국가의 용도에 맞는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제

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왕안석은 이상적인 三代의 사회에서는 井田制가 학교제와 결

합되어 있었다고 보고50) 모든 사대부들의 생활의 기반을 국가에서 통

제할 수 있고 교육의 내용도 국가에서 제공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

가 개혁에서 학교제가 과거시험을 대신하여 관료를 키워내는 유일한

길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안석은 기

49) 王安石 王安石上仁宗皇帝言事書 (臨川先生文集 39권 中華書局 1959)pp414-415ldquo禮樂刑政之事 未嘗在於學 學者亦漠然自以禮樂刑政爲有司之事 非

己所當知也 學者之所敎講說章句而已 講說章句固非古者敎人之道也 近歲乃始敎

之以課試之文章 夫課試之文章 非博誦强學 窮日之力 則不能及其能工也 大則

不足以用天下國家 小則不足以爲天下國家之用蓋今之敎者 非特不能成人材而

已 又從而困苦毁壞之使不得成才者何也 夫人之材成於專而毁於雜 苦先王之處民

材 處工於官府 處農於畎畝處商賈於津而處士於庠序今士之所宜學者天下國

家之用也rdquo

50) 앞의 책 69권 p733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33: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5본적으로 사대부들을 모두 국가에서 흡수하여 lsquo吏士合一rsquo로서 국가의

관리로서 흡수하여야 한다고 보았다51) 이러한 胥吏와 사대부들의 차

이를 무시하는 왕안석의 사대부관은 당시 엘리트층에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왕안석은 그렇지만 사대부들에게 일정정도의 권한을 移任해서 재량

권을 부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그가

구상하는 궁극적인 사회 질서 시스템의 계획안 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서 사유하여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52)

이는 왕안석의 도와 그의 학의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 왕안석은 당시

의 사회의 변화 상에서 사대부층에 일방적인 규칙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보다는 이들의 사고의 방식의 규칙을 제공

하고 이것을 통일시키는 방식을 택하려 했다고 보인다

왕안석이 생각하는 보편 원리의 추구의 방식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

지는 사대부의 학은 결국은 사대부들이 일정정도의 재량권을 가지지

만 그 권력기반은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에 의거할 수밖에 없는 논

리 구조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사대부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왕안석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성인의 뜻에 근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학으로 규정되는 사대부의 위상은 왕안석의 여러 글에서 보이

듯이 하나의 직능적 기능을 가진 자로서의 士가 되게 되는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안에 대한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은 표면적인 정책에

대한 차이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ldquo사회에서 사대부들의

위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rdquo에 대한 異見에서 비롯한 측면이 강하

였다 이렇게 본다면 왜 구체적인 제도의 대안보다도 성리학적인 접근

방식이 왕안석의 사회 정치적 비전에 대한 궁극적 대안으로 더 힘을

얻게 되었는지가 좀 더 잘 설명되어진다

51) Peter K Bol Ibid (1992) p249

52) Ibid pp219-220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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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6

Ⅳ 程頤의 理와 道學(者)의 절대성

정이가 제시한 보편 원리로서의 理(또는 天理)의 개념과 사상 체계

에 대하여서는 소옹과 왕안석에 비하여 훨씬 많은 연구가 누적되어 있

다 사실상은 북송기의 맥락에서의 정이보다는 그의 사상체계가 이후

남송기의 주희에 의해 수용되어 성리학으로 형성되고 난 이후의 程-

朱 체계로서의 정이의 사상체계가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 시기의 맥락에서의 정이와 이후의 정주학의 체계에서의

정이는 엄밀히 말하여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는 정이가 소옹과 왕안석의 보편원리의 추구와 이를 사

대부의 학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비판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북송 시기라는 맥락에서 보편적 원리를 추구하는 경향들에 대해

어떠한 다른 대안을 제시했는가를 살펴보겠다

그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천둥이 치자 소옹

이 정이에게 ldquo당신은 천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rdquo라고 물었

다 이에 대해 정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정이)는 말씀하셨다 ldquo나는 알고 있습니다만 당신(소옹)은 이해하

지 못하고 있군요rdquo 堯夫는 놀라서 말했다 ldquo어떠한 의미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알고 있다면 數에 의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추론하고 나서 아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말했다 ldquo그

럼 당신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rdquo 선생은 말씀하셨다

ldquo생기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rdquo 요부는 상찬하였다53)

이는 사실상 무의미한 말장난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것

의 원리를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적용하여 추론할 필요는 없다는

53) 정이 二程遺書 21上 (上海古籍出版社 2000) p324 ldquo子曰 某知之 堯夫不

之也 堯夫愕然曰 何謂也 子曰旣知之安用數推也 以其不知 苦特推而後知 堯

夫曰 子以爲起于何處 子曰 起于起處 堯夫瞿然稱善rdquo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35: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7것이다 정호와 정이 형제는 소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정이가

ldquo나는 堯夫(소옹)와 같은 지역에서 같이 지낸지 삼십년에 이르러서 세

상일에 관해서 의론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그 사이 數에 관해

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dquo54)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상수학에 대하여서는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정이의 物과 理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성인의 역할을 보면 사실

상 소옹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55) 그는 이러한 理에 이르기

위해서 수의 원리를 통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는 정이가 왕안석의 道의 이해에 대해 한 評이다

선생님께서는 왕안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왕안석이

道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은 마치 마주보면서 13층의 탑 위에서 相輪

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는 그것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에 상륜은 이

렇고 저렇다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묘사는] 지극히 명료하다 솔직

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스스로 탑 안에 들어가서

상륜을 살펴본다 그러기 위해서 탑에 오르락 내리락 힘들여 기어올라야

하며 내가 마침내 13층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에는 나는 상륜을 본

적이 없어서 왕안석과 같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탑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더 탑에 가까이 갈수록 더 상륜에 가까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상륜 안에 앉아있으면서 나는 왕안석이 이

전에 말했던 상륜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한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왕안석이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나는

이렇고 저런 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가 이렇고

저렇다고 이야기 할 시에 이미 도는 그에게서 분리되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가 이야기한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도는 단지 매일 매일의

일상사를 행함으로서 들어날 수 있는 것이다56)

54) 정호 정이 하남정씨외서 12권 (4 二程集 上 下 中華書局 2006) p444ldquo某與堯夫同理巷居三十年餘 世間事無所不論 惟未嘗一字及數已rdquo

55) ldquo비록 物은 다르지만 理는 같다 그러므로 광대한 천하와 군생은 다양하고

흩어져 있고 서로 다르지만 성인은 이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다rdquo 정이 睽卦

彖傳注 (易傳 4권)56)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 ldquo先生嘗語王介浦曰 公之談道 正如說十三級塔上相輪 對望而談曰相輪者如此如此 極是分明 如某則戇直

不能如此直入塔中上尋相論辛勤登攀邐迤而上 直至十三級時雖猶未見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36: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98

정이는 왕안석이 어떠한 단순한 원리를 적용하여 도를 설명하는 것

을 사실상 도와 멀어지기만 하는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ldquo陰陽

剛柔 仁義rdquo 등의 양분법적인 도식에 의하여 인간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접하면서 자신의 심을 작용시켜 올바른 하나의 정답에 이르는

법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왕안석의 접근 방식을 비판한다57) 특히 정

이는 왕안석 자신이 그것을 제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를 따르게 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정이는 理에 도달하기 위한 소옹의 수를 통한 추론이나 왕

안석의 자에 나타난 법칙에 의한 추론을 모두 궁극적인 도 리에서 멀

어지는 방식이라고 거부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구체적인 접근방식

을 원리의 일부분으로 제공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였다 결국 그가 理

라는 절대적 보편 원리에 대해서 유일하게 명확히 밝힌 구체적인 설명

은 단지 ldquo理는 하나이다(理一也)rdquo라는 것이다58) 이 언명은 사실상 어

떠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물이나 사

건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 적용되는 리가 하나라는 것은 사실상 아

무런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59)

輪能如公之言然某卻實在塔中去相輪漸近要之須可以至也 至相輪中坐示

依久見公對答談說此相輪如此如此 介浦只是說道 云我知有介道如此如此 只佗說

道時已與道離 佗不知道 只說道時便不是道也 有道者亦 自分明 只作尋常本分

事說了rdquo

57) 정이 二程遺書 1 (上海古籍出版社 2000) p5658) ldquo천하의 理는 하나이다 길은 다를지라도 귀착하는 곳은 같으며 생각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도달점은 하나이다 物에는 수없는 차이가 있고 事에는 수없는

변화가 있지만 일로서 이를 통일한다면 차이를 없앨 수 있다rdquo 정이 咸卦九

四爻辭注 (역전 권4) ldquo왜 궁구할 수 있는가 하면 만물은 모두 一理이기 때문이다 一物一理에 이르면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두 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다rdquo 정이 이정유서 15권59) ldquo하나의 物에는 모두 하나의 理가 있다rdquo 정이 이정유서 권18 ldquo눈앞에 있

는 대상은 모두 物이 아닌 것은 없다 각각의 物에는 모두 理가 있다 불이 뜨

겁고 물이 차가운 근거에서 君臣 父子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理이다rdquo 상

동 권19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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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99그러나 정이는 구체적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ldquo보편 원리rdquo의 일

부분으로 설명하는 대신 이러한 理와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

성의 기반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접근방식으로서의 ldquo格物rdquo이라는 방식

을 제시한다 그러나 격물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정이는 ldquo性卽理rdquo 즉 인간의 본성이 리를 이해할 수 있는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설명한다 그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활동

으로 귀결된다 소옹과 같이 수의 원리를 익히는 것도 왕안석의 경술

과 자학과 같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러한 리

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다 원래 주어진 性을 바탕으로 자

신의 心을 지속적으로 본성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만 정

이의 보편적 원리는 인간 사회의 질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정이는 이러한 그의 체계와 그의 學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한다 정

이에게 있어서는 리가 하나이듯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학도 절대적

으로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하나의 옳은 해답을 위해서는 하

나의 올바른 학을 해야 하며 그것은 당연히 그 자신이 제시한 학이어

야만 했다 그러나 이 학에서 보편 원리에 접근하는 방식은 왕안석의

경우처럼 외부에서 설명되어지거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서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

이는 보편적 원리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으로 귀속시키고 이를 추구하

는 도학의 과정 자체를 절대화하였다 이는 또한 이러한 도학을 구현

하는 도학자 - 정이에 의하면 올바른 사대부-를 절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대부가 지닌 자율성과 그 권력의 기반

은 어떠한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된다

이는 보편 원리인 理의 절대성에 의하여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결 어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Page 38: china/CHR/chr2013/chr83pdf/chr83-03... · 2013-07-13 · 64 ÈÉÊËÌÍ¿ Î ¡ @ABCDpQ eq;/Ï[ÐÑp`:MQ{ÒÓZHÔ &D X1Õ0QÖ×[ØÙOC_1e UÚ IÛÜÝÞLyD ßàyDyg# H:134[e | , á{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0

이상에서 북송 시기 3명의 사상가들의 보편 원리에 대한 다른 방식

의 접근과 그 사상적 내용과 논리 추구의 방식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당시의 새로운 엘리트층인 사대부층의 위상 역할 정체

성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연관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소옹은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고민하고 있었던 주관성의 한계를 벗

어나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반을 그의 수로 표

시된 우주의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답하려 하였다 그의 삶의 양식은

새로운 사대부의 존재양식과 정체성을 보여주고 사대부의 학을 보편

원리의 추구라고 규정함에 따라 어떻게 사대부의 위상이 강화될 수 있

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옹에게서는 아직 그

러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방식으로서의 수의 질서의 세계와 자신의

사대부로서의 존재양식이 어떻게 통일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는 상당히 분리되어 존재하였고 소옹 자

신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지도 않았다

왕안석은 공리주의적인 개혁가로서 제도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의 사상과 학의 방법은 唐 중

기 이후 자연과 인간사회를 모두 통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추구

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개개의 구체적 제

도에 대한 논의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하나의 보편적 원리에

근거한 ldquo성인의 뜻rdquo을 아는 인간의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그의 삼경신의나 자설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그가 제시한 학의 방식은 五經正義로 대표되는 문화적 전범을 제

시하는 것이 학의 중심적 내용이었던 당 중기 이전의 학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의 정신활동 심의 작용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는 성리학에서의 리의 개념과 같이 체계적인 논리체계를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이를 단순하고 기계적인 문자를 매개로 한 방법론으로 환원해

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왕안석의 학은 이후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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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1왕안석의 학을 적대시하고 있는 성리학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점이 많

다 이는 왜 성리학이 왕안석이 제시한 사회 정치적 비전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의

식과 외부적 메카니즘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었으나 철학적

논리의 방식과 지향하는 사회질서라는 측면에서는 서로 결코 친화적일

수 없는 매우 다른 체계를 지녔던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의 발전에 의

해 철저히 사라졌다 왕안석의 사상과 학의 몰락은 단순히 정치적 부

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체계의 한계에 의한 지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정이의 학은 사대부의 정체성에 대한 매우 새롭고도 파격적인 해답

이었다 그는 소옹이 이루지 못한 보편적 원리의 추구와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을 통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와 더불어 왕

안석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가 통일적으로 하나의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체계로 제시하였다 그

리고 이를 강력하게 자신의 학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

절대적으로 하나의 보편적인 리와 이에 기반한 절대적인 하나의 올

바른 학 그리고 그것을 오로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기반에

만 의거하여 내면에서 수행하는 學者(道學者)의 상을 제시하였다 정이

에 의해서 관직이나 가문과 같은 다른 외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 단순히 학을 하는 것만으로 절대적인 권력의 기반을 주장할 수 있

는 사대부들의 위상과 권력에 이론적인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학이 사회에서 주관성의 문제를 넘어설 공동

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학의 과정이 필요했다 정이는 자신의 주저작으로 주역의 주석을 꼽

았듯이 동시대의 다른 도학자와는 달리 경전 주석에 주목하였다 그러

나 이러한 심의 자율성의 문제에 무한히 노출될 수도 있는 절대적 권

위의 주장이 실질적인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보다

구체적인 학습 과정과 사회적 기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2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에도 소옹은 정주계열의 도학의 계

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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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에서 철저히 배격되지는 않았다 주희의 역학은 소옹의 先天易學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지 중국이나 조선에서 모두 정

통적인 성리학자임을 자처하는 학자들도 소옹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

을 표명한 예가 많았다 이는 陸象山 王陽明의 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

보다는 정주계열의 성리학을 지지하는 학자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결

합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60)

소옹의 학은 전통적으로 자연학적인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상수학

또는 상수 역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소옹의 상수

학이 정주학 계열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지점은 대체로 정

주학에서의 리의 개념이 포섭하지 못하는 객관적 존재 근거로서의 자

연의 리와 이것이 어떻게 심의 문제와 연관되는가에 대하여 새로운 이

론적 근거를 찾고자 할 때와61) 소옹의 독립적인 사대부로서의 삶의

양식의 방식이 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호소력을 가질 때였다고 보

인다 이는 어떻게 본다면 보편적 원리의 추구에 사대부로서의 삶의

60) 중국에서의 이후 소옹의 수용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범학 원대 吳澄의 심

학과 왕양명의 주자만년정론 (한국학논총 32 2010) 吳澄의 易學과 邵

雍 (한국학논총 31 2009)을 참조 조선에서의 소옹의 상수학에 대한 관심

에 대해서는 구만옥 16세기말 17세기초 주자학적 우주론의 변화 (한국사상사학 1999) 조성산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한국사연구 115 2001) 17세기 중 후반 서울 경기지역 서인의 경세학과

정책이념 (한국사학보 21 2005) 이승수 17세기 후반 지식인의 소옹 육

구연 진량 수용양상 연구 (어문연구 21 2003) 박권수 조선 후기 상수역

학의 발전과 변동 (한국사상사학 22 2004)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

활동과 사상 -천문역산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11 2006)을 참조

소옹의 문학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손유경 기제 신광한의 의식세계에 대한

일고찰 -소옹 흠모 양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논집 29 2009) 이효숙 17-18세기 노론계 문인의 소옹의 시문 수용 양상 (우리문학연구 25 2008)을 참

61) 그러나 ldquo觀物rdquo과 같은 용어들이 정확히 소옹이 사용하였던 방식으로 이용되

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계열의 보편적 원리

로서의 ldquo理rdquo의 규정방식에 대한 그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소옹의 개념을 빌

어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한 듯하다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3양식이 통일적으로 포섭되지 않았던 소옹에게서 오히려 보편 원리와

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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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로의 삶의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안석의 학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난 이후 철저히 사라져 버

리고 그는 주로 반면교사의 예로 인용되어 지고는 하였다 왕안석의

제도에 대한 구상의 사공적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이

어지는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형이상학적인 기반에 대한 추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는 성리학 이후 왕안석의 형이상학적 측면의 추

구는 완벽히 도태되어 사라져 버린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

석을 단순히 제도적 개혁가와 구상가로서만 이해할 때에는 이후 형이

상학 위주의 성리학의 정치적 담론 구조의 형성과 이것이 주류화 될

수 있었던 맥락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명백한 공백이 생긴다 보편적

원리에 대한 추구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이를 추구

하고 접근하는 방식에서의 인간의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 그

리고 학의 과정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의 극대화 이러한 요소들의 결

합을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옹 왕안석을 포함하여 북송시대의

보편적 원리의 추구의 형태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떠한 문제와 연관되어 전개되었는지를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송 시기의 지성사의 이해는 추상적인 보편 원

리와 심의 작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단순히 ldquo異國rdquo의 이해할 수 없

는 행태이거나 현실문제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당시의 맥락에서는 가

장 핵심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4(Abstract)

The Pursuit of the Universal Principle and the

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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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efinition of Shi Status in the NorthernSong

With a Special Focus on the Cases of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Min Byoung Hee

In the Northern Song period the pursuit of a coherent principle

universal to everything both in human and natural realm permeated

various intellectual endeavors Neo-Confucianism systemized by

Cheng Yi and Zhu Xi was the culmination of such an intellectual

ambience What draws attention here is that after the failure of

Wang Anshirsquos reform policies Neo-Confucianism set the framework

for the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 centering metaphysical

discourses based on the universal principle Such frameworks lasted

for long period of time in East Asia Of course there existed

various discourses of the more concrete institutional agendas with

pragmatic approaches to social and political issues but still the

most powerful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came from the argument

based on more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how abstract theoretical discourses on li qi human

nature and the mind was related to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in real society and why this kind of frameworks worked out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metaphysical

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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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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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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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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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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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기 보편 원리의 추구와 士大夫의 位相 (閔丙禧) 105discourse on universal principle as the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issues and new literati identity in the Song period

through examining the cases of three major thinkers in the

Northern Song Shao Yong Wang Anshi and Cheng Yi Shao Yong

who was usually regarded as an eccentric numerologists how show

a new literati identity became conspicuous in Northern Song

Luoyang However hi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was not

integrated into this new identity and lifestyle of Song literati This

paper also throws light on Wang Anshirsquos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his classical studies as the way to access to the

principle Wangrsquos philological studies provided the foundation for his

entire project to unify morality and harmonize customs through the

new classical studies So far scholars have mostly focused on his

ideas of institutional plan and political system presented in his

classical studies Although that aspects crucial to understand his

ideas this paper argues that more fundamental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underlying in his learning is a key to understand why

Neo-Confucianism of which major frameworks of social and political

discourses are grounded in metaphysical discourse rather than in

the articulation of particular institutional and political system

became the alternative to Wangrsquos vision of government Finally I

compare how Cheng Yi differed from Shao and Wang and what he

could achieve from his definition of universal principle and how he

integrated the pursuit of the principle and the lifestyle and identity

of literati elites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pursuit

of universal principle and literati identity in Northern Song also

helps explain the various unfolding of coalitions and conflicts among

those thinkersrsquo ideas in later periods in East Asian societies

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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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3輯 (2013 4)106

주제어 보편원리 왕안석 소옹 정이 북송 사대부 경술 자학 도 상수학

수 리 성리학

關鍵詞 普遍原理 王安石 邵雍 程 北宋 士大夫 經術 字學 道 象數學

數 理 性理學

Keywords universal principle Wang Anshi Shao Yong Cheng Yi Northern

Song shi classical studies philology Dao numerology number liNeo-Confucianism

(원고접수 2013년 3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4월 15일 수정

원고 접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