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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청소년 인성교육 종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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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2019

  • 본 자료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종교문제연구소가 발간했습니다.자료집의 내용은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식 의견이 아닌

    집필자의 개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 대한민국은 지난 세기에 놀랄만한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부러워할만한 발전을 성취했습니다. ‘한류’라는 말이 보여주듯 문화적인 역동성 역시 세계 여러 나라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는 우리나라가 그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시련들을 지혜와 끈기를 가지고,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승화시킨 노력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소중하게 지켜왔던 많은 것들을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의식을 상실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참된 의미보다 치열한 경쟁과 경제적 부유함을 더 강조합니다. 서로 돕고 함께 성장하는 것은 낡은 가치로 밀려났고, 교육 역시 이런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육은 더 이상 훌륭한 인성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지향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고도로 분업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전문화된 지식으로 경제적 이윤 창출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을 만들어 내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게 된 듯싶습니다.

    경제적 발전이 질병을 비롯해 피할 수 없었던 많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치를 폄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윤택해진 우리의 삶은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본격적으로 되묻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제적인 복지를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이른바 ‘영적인 복지’(spiritual well-being)라는 인간 존재의 참된 가치를 묻는 일이 모색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특히 미래의

    머�리�말

  • 주역이 될 청소년들을 전인적 인간으로 키워내는 일은 공동체의 행복과 발전

    에 불가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학교 폭력과 청소년 자살이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나고 있는 현실은 오늘 우리의 교육이 바람직한 이상을 실

    현하는 데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책은 이런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입니다. 무엇보다 종교 전통이 오랫동안 발전시키고 전승해 온 지혜가 우리 교육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

    다는 믿음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는 종교적 지혜를 청소년 인성교육에 결합시킬 수 있는 방안을 오랫동안 고심해 왔

    고, 그 첫 번째 결과물이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입니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왜 종교가 청소년 인성교육에 중요한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여러 종교 전통이 구체적으로 발전시켜온 지혜가 어떻게 인성교육을 풍요롭

    게 만들 수 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비교종교학의 종교 이해를 여러 각도에서 조망해 봄으로써, 종교와 인성 교육을 연결시키는 이론적 기반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는 왜 우리나라에서 특히 종교 교육이 중요한가를 다종교 상황과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았습니다.

    이번 기획은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의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하려는 첫 시도입니다. 평소 종교학자로서 우리가 지녔던 문제의식을 구체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준 문화체육관광부 종무실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내용은 이 기획에 참여한 학자들의 개인적인 의견임을 덧

    붙입니다. 모쪼록 우리의 노력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을 지혜롭게 승화시키는 발전의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합니다.

    연구책임자 김 종 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 Ⅰ. 종교와 인성교육

    1. 세계종교와 인간문화 / 03

    Ⅱ. 종교전통의 이해

    1.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 / 19

    2. 불교와 가르침 / 41

    3. 유교의 윤리 / 65

    4. 도교에서 바라본 마음과 몸 / 79

    5. 한국종교의 흐름과 맥락 / 97

    Ⅲ. 종교이론의 이해

    1. 종교, 도대체 왜 믿을까? / 1132. 현대인의 종교와 인성 / 147

    3. 종교와 인성교육의 과제 / 161

    4. 우리 신화로 인간 이해하기 / 177

    5. ‘무종교의 종교(Religion of no Religion)’ 개념과 새로운 종교성

    / 193

    Ⅳ. 현대와 종교

    1. 한국종교와 현대문화 / 217

    2. 다종교상황과 조화 / 231

    목�차

  • Ⅰ. 종교와 인성교육

  • 세계종교와 인성문화∣김종서 ∙ 3

    종교와 인성교육

    김 종 서(서울대학교)

    1.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론: 종교는 인류 보편현상

    1) 세계문화의 정수인 종교

    - 문명발상지와 유적지

    _ Encyclopedia Britannica

    2) 학문의 뿌리인 종교

    - 대학의 시작과 Oxford대학교

    - 피타고라스, 뉴턴과 다아윈 cf. 만학의 왕, 철학?

    cf. 르네쌍스 문화의 종교성

    - 피렌체의 단테

    - 미켈란젤로와 바티칸 (라우콘상,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2. 농경문화와 종교

    1) 식물들의 죽음과 부활의 시나리오

    2) 농경은 인간 영적 씨앗의 산물

    - 신을 죽이는 제의

    3. 전통사회의 종교와 현대사회의 종교

    1) 아파치 인디안 종교: 절대적, 모든 게 종교

    2) 현대 다 종교: 상대적, 종교는 독립 영역 - 분화

    - 정교분리의 원칙과 적극적 종교정책

  • 4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4. 현대종교의 특징: 세 가지 만남

    1) 세속화(secularization)

    - 종교가 시류를 타고 상징체계가 진부 화 – 한스 큉

    - “하늘나라는 천사들과 참새들만의 것?” (프로이트/ 괴테)

    - 기복신앙: 노먼 빈센트 필(적극적 사고 방식) - ‘기도는 돈’

    2) 다원화(pluralization): 종교가 여럿으로 선택의 대상

    - 비 국교(no establishment). 불필요는 아님

    cf. Lady or Tiger?(F. Stckton)

    3) 새 영성(New Soirits)의 대두

    - S트렌즈 – sacred, soul, spiritual, sin cf. 반 고흐

  • 세계종교와 인성문화∣김종서 ∙ 5

    세계종교와 인간문화

    김 종 서(서울대 교수/ 종교학)

    1. 호모 렐리기오수스?

    아침에 일어나서 열심히 매일 같은 일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세상에 생소한 일이 많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저 꼭대기에 아주 척박한 땅들인데도 그런 땅에 허리가 거의 굳어질 정도로

    계속해서 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체 저렇

    게 절을 해서 얻는 게 뭔가, 참 답답하고 한심합니다. 또 이집트를 혹시 해

    외여행을 하게 되면 거기 어마어마한 피라밋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왕

    들이 죽거나 그랬을 때 큰 무덤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피라밋은 정말 대단합

    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중장비도 없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흘려졌을까요? 그 거대한 돌들을 옮겨다가 피라밋을 만들어 놓은 것

    을 보면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들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진다는 것은 독특하고 중

    요한 것입니다. 그게 종교를 이해하는 눈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집트 사람들

    이 바보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희생을 하면서 피라밋을 만들

    었던 것은 그냥 단순한 어떤 인간의 무덤이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즉 이

    집트의 왕들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었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어떤 신들이

    기 때문에 이 신들에 대한 숭배형식으로 해서 피라밋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

    다. 또 동남아시아를 여행을 해도 마찬가집니다. 방콕에 새벽 5시쯤 한번 거

    리를 나가봅시다. 그러면 수많은 탁발승들이 나와 있고, 이들한테 밥을 공양

  • 6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하려고 늘어서 있는 아주 진짜 순수한 마음의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

    다. 우리 각자가 먹고 살기도 힘들 데 새벽같이 일어나서 저 스님들 공양하

    려고 밥을 해 가지고 나와 서 있는 것이 참 신기하게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상식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집트나 히말라야나 방

    콕 같이 좀 우리보다 좀 뒤떨어진 옛날식 사람들만이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

    진 것은 아닙니다.

    가장 첨단과학의 나라 미국, 미국대통령이 대통령 되는 것을 보면, 성경책

    을 앞에 놓고 신과 성경책 앞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게 됩니다. 성경책이

    무엇이기에 모든 사람들을 통치할 수 권리를 주는 것인가 생각도 듭니다. 사

    실 어떻게 보면 종교라는 것들이 세계 각국에 있는 굉장히 아주 특수한 현상

    들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특수해 보이는 현상이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새벽 5시쯤에 저 도봉산에 있는 도선사에

    한번 올라가 보는 것은 귀한 경험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계속적인

    절을 하고 있어요. 날씨가 엄청나게 추울 때, 밑에 돌이 얼음장 같은데 거기

    서 끊임없이 천배 절을 하고서야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당

    에도 새벽기도를 하러 참 많은 사람들이 갑니다.

    특이해 보이는 종교현상들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거의 다 나타나고 있습니

    다. 다시 말해서, 종교라는 것은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인류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타

    일러(E, B. Tylor) 같은 사람은 『원시문화』라는 책에서 사실 ‘전 세계의 어

    느 곳에도 종교가 없는 나라는 없더라. 종교가 없는 민족은 없더라.’ 그런 얘

    기를 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초창기 서양의 선교사들이 들

    어왔을 때, ‘이 조선이란 나라에는 도대체 종교가 없다. 미신만 있다.’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자기들이 믿는 기독교

    와는 사뭇 다르지만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종교가 있다는 것을

    많은 선교사들이 깨닫게 됩니다.

  • 세계종교와 인성문화∣김종서 ∙ 7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종교라는 것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느낍

    니다. 꼭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종교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안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갑자기 좀 난처한 일이 생기거나 어이없는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 맙소사!’ 이런 말을 합니다. 미국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Oh, my God! 또는 Jesus Chirist! 이런 말을 합니다. 요즘에는 종종 ‘아멘’

    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속어에서는 ‘너 잘났다’, ‘그래 네가 말하는 게

    맞아’. 하는 식의 의미로 통하기도 합니다. 이 ‘아멘’이라는 말은 원래 ‘그러

    할지어다’ 라는 뜻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어떤 사람들은 신을 부정하고

    종교가 완전히 박해를 받으면서 사라졌다고까지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

    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공산치하에서도 종교들이 대부분 잔존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함경도 살던 우리 조상들이 거기 땅이 척박하고 농사지을 땅도 넉

    넉지 않으니까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가서 사시는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

    런데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이 시작되어 소수민족 혼합정책을 쓰면서 이 사

    람들이 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게 됩니다. 함경도 말씨를 쓰던 이 쫓겨

    간 사람들이 무려 80년이 넘은 시간인데도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지방 등에서

    그 엄청난 공산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습니

    다. 이 교회들에서는 자기네 나름대로의 함경도 말투로 예배를 보아 왔는데,

    오래 되다보니 성경책도 너무 후락해져서 새로 자기네 식으로 다 만들어 냈

    습니다. 그렇게 성경책을 만들어내다 보니까 다 (즉 God는 하나님, Bible은

    성경이니 이런 식으로) 번역은 됐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맨 마지막에 ‘아멘,’ 그러는데 이것도 번역하면 안 되나 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다 번역하는 김에 아예 이것도 번역을 해버려 우

    리 말 식으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

    데 거기 한인 교포(요즘에는 ‘까레스키’ 또는 ‘고려인’이라고 하지요) 들 중에

    히브리어를 전공한 사람이 없고, 이것이 ‘그러할 지어다’라는 의미를 아는 사

  • 8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도하고서 맨 마지막에 대충 끝날 때 ‘아멘’ 그러

    니까, 아 이게 끝난다는 뜻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함경도

    말투로 ‘아멘’을 ‘그만 두오’ 라고 번역을 했어요. 그래서 요즘에도 예배를 보

    면 거기 사람들은 설교가 끝난 다음에 기도를 하면서 맨 마지막에 ‘예수그리

    스도 이름으로 그만 두오’ 하면 옆에서 ‘그만 두오’ “그만 두오‘ 한다고 합니

    다.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아무튼 종교라는 현상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아주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

    입니다. 또 기독교적인 말 뿐만이 아니라, ‘이판사판,’ 이니 ‘야단법석,’ 이니

    불교적인 용어도 일상생활에 꽤 씁니다. 우리 일상 언어에서도 종교라는 것

    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소위 종교

    학자들은 인간은 본래 종교적 존재이다. 즉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종교적 인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물론 모든

    인간이 다 종교인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종교적 일 수 있는

    가능성을 다 갖고 있는 존재들이다. 즉 인간에게는 종교성이라는 것이 기본

    (잠재)적으로 다 있다. 이것을 얘기하는 것이 바로 호모 렐리기오수스라는 것

    입니다.

    종교학자 특히 마레트(R. R. Marret) 같은 사람은 이것을 아주 강조했었

    습니다. “인간에게는 종교심성, 종교성이라는 것이 우선 기본적으로 누구에게

    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발현됐을 때 인간들은 종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입장입니다. 이런 보편적 종교현상이기 때문에, 즉 종교는 인류문화에 있어서

    아주 보편적이고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를 알아야 인

    간 문화의 가장 보편적인 것 즉 그 알맹이, 정수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구체

    적인 한 가지 예로서 인류문화의 최고 집대성이라고 알려졌던 대영백과사전

    (Encyclopaedia Britannica)에 종교가 차지하는 분량이 약 10분의 1입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가 차지하는 것도 아마 10분의 1정도 되고 이 두 가지가

    인류문화의 그러니까 거의 20%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요즘 첨단 전자공학이

  • 세계종교와 인성문화∣김종서 ∙ 9

    나 컴퓨터 같은 과학 지식도 중요하지만, 아마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아

    직 지식으로서 인정이 안돼서 그런지 그런 것은 양이 작습니다. 거기에 비

    해서 종교가 차지하는 것은 정말 큰 것으로서, 우리가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들이 대체로 가진 정보,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의

    10분의 1정도가 종교와 연관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게 되면 유럽관광 같을 것을 나갔을 때 예를

    들어서 파리를 갔다고 칩시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갔을 때 보고서 ‘야, 멋있

    다. 좋다.’ 그러고만 나온다면 사실은 베르사이유 궁전을 제대로 본 것이 아

    닙니다. 인류 문화라는 것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입니

    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가서 태양 상징을 모르고, 또 앞에 있는 분수대가 희

    랍종교에 나오는 신화 속의 태양신 아폴로의 이야기를 묘사를 해 조각해 놓

    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본다면 아무 것도 안 본 것입니다. 또 유럽관광을

    가서 독일에 가보면 거의 유적지라는 것이 다 교회입니다. 이탈리아나 프랑

    스나 스페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현상으로서의 세계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류문화를 알게 되는 것입니

    다.

    2. 농경문화와 종교

    늦가을 전국 어딜 가나 온통 누런 황금빛 바다입니다. 태풍이 할퀴고 가

    서 걱정을 하기도 했었는데 해마다 또 풍년이라고 합니다. 농부들의 힘들었

    던 사연이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몇 년째 풍년이 계속되

    어서인지 그저 덤덤하게들 느낄 뿐입니다. 옛날 못 먹어 배고팠던 시절을 돌

    이켜 보면 우리는 오늘날 이 풍요로움의 귀한 축복을 너무 쉽게 그러려니 하

    고 지나쳐 버리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영농이 산업화되고 기계화되면서 세상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뉘 한

  • 10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톨도 버리지 말고 까먹으라던 옛 사람의 가르침은 까맣게 잊혀 졌습니다. 밥

    먹고 뛰지 말라, 배 꺼질라 하시던 할머니 말씀도 들어 본지 오래 되었습니

    다. 농산물들은 지금 흔해 빠져서 선물로도 값싼 천덕꾸러기입니다. 하늘만

    보고 농사짓는 것이 얼마나 마음 졸이는 일이었던가. 그래서 지신밟기로 주

    술적 연희를 하고, 보름달의 사방이 두터워 풍년일 것이라고 서로 달래주지

    않았던가. 또 가물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 비오기를 빌고, 햇곡이 나오면 어김

    없이 안택 고사를 지냈던 것이 이제는 모두 전설처럼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

    니다. 모자라는 일손을 서로 돕던 두레의 전통, 잠시나마 고된 것을 잊게 해

    주던 농악대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각종 신나던 농경유희들도 이제는 다 자취

    를 감추거나 볼거리 행사쯤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생활,

    세시풍속과 민속어휘에 이르기까지 농경문화의 전통이 뿌리째로 급격히 무너

    져 내리고 있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게 되는 그 기원신화들을 보면, 동물

    들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듯이 식용식물들은 세상에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

    었습니다.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도 농산물 하나의 품종개량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잡초만 무성했던 수렵시대에 인간이 여럿 먹을 만한

    곡식을 생산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황량한 벌판

    에 곡식들이 자신의 몸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족장들이 스스로의 생명을 끊

    고 흙 속에 묻혀서 된 것입니다. 즉 ‘창조적 죽음’의 결과입니다. 바꾸어 말

    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서 다른 인간을 땅을 거쳐서 잡아먹은

    셈입니다.

    한편 낟알들은 잔존자들을 위해 제물이 된 신성한 희생자의 몸에서 유래

    하므로 성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본래 사람들은 먹는다는 것을 단지 배가 고

    파서가 아니라, 그 신성한 희생자의 살을 먹음으로써 그의 몸에 상징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니까 곡물의 출현은 단순한 과학 기술적

    승리의 성과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씨앗의 산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

  • 세계종교와 인성문화∣김종서 ∙ 11

    기에 여성으로 간주된 땅의 놀라운 생산력, 또 인간의 성행위에 비유되었던

    밭 갈기와 하늘에서 비 내림 그리고 겨울을 지내고도 되살아나는 식물들의

    죽음과 부활의 반복 시나리오가 배경적 상징체계로서 깔린 것은 물론입니다.

    아무튼 농신(農神)들에게 감사하는 축제가 세계 곳곳에서 발달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나라를 다녀간 미국의 환경시인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는 우리가 농사지어 먹고사는 것이 성례(聖禮)적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만물은 다른 존재들을 살려내려고 모두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온통 서로 얽혀 있다는 화엄(華嚴)의 진리처럼 세상 만물은 ‘먹고 먹힘’의 사슬을 통하여 대자연의 거룩한 드라마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농신뿐만이 아니라 세상천지의 온갖 것들

    에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농경문화의 몰락은 그저 전통적 민속의 상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 년을 간직해온 먹고사는 것을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 그 자

    체가 실종된다는 것이 진짜 중요합니다. 기쁜 수확의 계절에조차 물질적 풍

    요에 도취되어 우리가 바로 이런 정신적인 알맹이들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

    은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2. 전통사회의 종교와 현대사회의 종교

    「하늘나라는 결국 천사들과 참새들만의 세상인가?」 이것은 성스러움에서 멀어져만 가는 인간 삶의 모습을 한탄하면서 괴테가 남긴 절규입니다. 과연

    종교들은 거룩함을 완전히 상실하고 닥쳐오는 과학 기술적 경향에 밀려나고

    말 것인가? 또 현대인은 붕괴된 신념체계들 가운데서 결국 영적 고아로 전

    락되어 버릴 것인가?

    전통사회의 종교형식을 돌이켜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즉

  • 12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종교는 사회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절실한 실재였었습니다. 아파

    치 인디안으로 태어나면 그저 아파치 토속신앙의 신자로 살아야 합니다. 또

    구경꾼으로 혼자 남아있는 것도 안 됩니다. 모두가 같이 믿고 같이 행합니

    다. 종교는 다른 인간적 행위들과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습니다. 여러 제

    의들은 곧 일상적인 삶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믿어서 좋

    은 것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고 상상조차 불가능했

    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희생해서라도 매달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사회 속에 산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회를 덮고 있는 성스

    러운 우산 속에서 사는 것을 뜻했고, 그 영적 우산 자체를 의심하거나 도전

    하는 것은 이른바 신성모독으로서 사회적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신, 지신 및 시조신 신앙의 모습들과 조상숭배로 특징지워

    지는 고대종교의 형식은 따져서 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면서

    모든 사람에게 그냥 주어진 종교였습니다. 이에 중국으로부터 유 불 도 삼

    교가 도입되어 여러 종교의 공존이 이루어지면서도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유교는 제도로서, 불교는 상층계급의 신앙으로서, 그리고 도교는 민간신앙에

    수렴되어 각기 조화로운 분업(?)관계를 잘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전통적 종교형식과는 사뭇 다른 종교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도입되고 동학이 성립될 때쯤부터는

    종교가 단순히 여럿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화로운 공존관계를 깨뜨리

    고 경쟁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따라서 어느 한 종교만을 옹호하는 국교주

    의는 비판되어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고, 모든 종교는 각기 자유롭게 선

    택에 따라 믿어지게 됩니다. 이른바 종교다원주의가 일반화되는 것입니다.

    즉 종교는 이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팔리러 나온 물건들

    과 같습니다. 합리적으로 선택되고 계산적으로 참여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

    러니 각 교단은 초월적이고 성스러운 측면보다는 마치 세속 집단들처럼 주변

    적인 일들에 관심을 집중하게 됩니다. 즉 종교의 다원화는 세속화를 가져오

  • 세계종교와 인성문화∣김종서 ∙ 13

    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세속화현상의 중요한 특징은 구원이 질보다

    양으로 추구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종교들은 수십만 명씩을 동원하는 대형

    집회들을 경쟁적으로 개최합니다. 종교단체가 기업화되고 건물 짓기에만 애

    를 쓰다 보니 신도들이 서로 짜고 예금통장을 노려 자기 집에 강도로 침입하

    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는가 하면, 교회는 신도 수와 재산에 따

    라 공공연히 매매되어 회사처럼 생각됩니다. 교인유치 경쟁이 극심해져 결

    국 목회는 상품화되고, 교회는 성스러움을 잃고 비 종교화되어 버리는 것입

    니다. 불교도 재산관계 갈등이 빈번해지고 종권 다툼이 잦아져 종종 사회의

    냉소거리가 됩니다. 또 사찰의 관광지화와 암자 매매 등 염불보다 잿밥에의

    관심은 자주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참 살맛 안 나는 세상입니다.

    어찌됐든 이쯤 되면 전통적 종교들의 이미지는 철저히 상대화되어 버려서

    결과적으로 제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이차돈이나 김대건과 같은

    순교자가 출현할 수 없습니다. 아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시대는 그런 순

    교자가 불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확고부동한 신앙을 계속 독실하게 지키

    는 사람은 오히려 이웃들로부터 따돌려져 인식적 소수로 전락하기 일쑤입니

    다. 진리는 더 이상 추구되지 않고, 우리는 오직 수많은 상대적이고 개인적

    인 “의견”들만이 난무하는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

    구도 감히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절대성을 상실한 종교들은 세

    속적 이데올로기들과도 경쟁을 치르게 됩니다. 과학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휴머니즘 등이 종종 전통종교들을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편 일단 세속화된 상황은 종교들의 다원화를 더욱 가속화시킵니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철저하게 종교가 다원적인 나라도 없습니다. 물론 종교

    다원사회는 여러 종교의 장점들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다이나믹 함도 있

    습니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가 세계적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는 추세를 감

  • 14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안하면 우리는 분명히 미래의 세계적 종교상황을 앞서 살고 있는 지도 모릅

    니다. 즉 우리는 종교 선진국인 셈입니다. 하지만 철저한 종교다원주의의

    만연은 사회자체의 파괴를 초래합니다. 우선 너무 많은 절대적 신념체계들

    이 난립하다보면 가치관의 혼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생활철학이 자주 흔들릴 수 있다는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는 공감대를 지닌 사회질서체제의 확립이 어려워지고 규범이 무너지는 이른

    바 아노미현상을 의미합니다. 종교들은 남의 종교를 비판하고, 우상숭배라고

    몰아치는가 하면, 거기에 맞서서 실력대결조차 불사하는 갈등이 표면화됩니

    다. 심지어 종교다원화의 극단적 현상으로 생각되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종교”가 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일부 종교인들은 교회 사찰 중심적이던 과

    거의 종교생활의 양식을 과감히 바꾸어, 골치 아픈 그들을 떠나 집에 앉아

    혼자서만 믿는 탈 종교적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들은 다원화를 거치면서 본래의 경건하던 상징체계에서 이탈하

    여 진부 화 되고 유치스럽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종교들이 기복 신앙

    화 되었다는 것이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모든 종교는 사실

    기복적 요소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기복 신앙들 속에서는 종교

    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관심이 밀려나고 일시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욕구만 표

    출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입시철이나 선거철이면 종교기관이 대목을 맞게

    되고, 성직자들이 인생 상담자나 심신질환 치료사 그리고 심지어는 점쟁이

    나 지관노릇을 하게 되니 큰일은 큰일입니다. 돈 주고 복을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은 결국 다 치사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종교다원주의 사회에 있어서 개개인에게 가장 힘든 문

    제로 대두하는 것은 과연 불교, 유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진정한 진리이고 내가 믿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입니다. 흔히 남의

    종교도 이해할 수 있는 관용의 논리가 주장됩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의 종

    교를 믿으면서 다른 종교도 똑같이 진리라고 인정해 줄 수 있을까?

  • 세계종교와 인성문화∣김종서 ∙ 15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각개 종교들은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를 각기 달리 담

    고 있는 그릇들에 납니다. 그 한국적 종교(심)성이 때로는 무속에 담겨지기

    도 하고, 또 역사가 흘러가면서 유교나 불교 및 기독교 그리고 신흥종교들

    속에 담기어 꽃피워져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속에 있는 여러 종교들은 어느 것만이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모두 한국종교라는 하나의 큰 대접 속에 있는 작은 그릇

    들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개의 종교문화는 철저히 배타적일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크리스마스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물론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

    의 탄생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축복된 날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크리스마스

    를 몰랐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크리스마스가 4세기쯤부터 축제일로 시작되

    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데는 수많은 이방교도들의 신앙과 제의가 계속

    덧붙여졌었던 것이 주목되어야 합니다. 특히 로마의 농신제와 여러 곳에서

    지내오던 冬至이후 태양 맞이 축제들과 풍년제의 및 신년제의의 영향 등은 중요합니다. 또 우리가 오늘날 즐기고 있는 크리스마스의 풍습들도 대개 유

    럽이나 미국에서 후에 추가된 것들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독일에

    서, 카드나 캐롤은 영국에서, 선물주고 받기는 이방 로마인들의 신년 선물교

    환풍습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산타클로스는 독일의 화신적 요소를 지닌

    전통적 아이들의 聖人모습에서 힌트를 얻어 상상력 풍부한 미국 사람들이 발명해낸 것입니다. 사실상 크리스마스 풍습 중에서 교회에 의해 처음부터 발

    생된 것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많은 이방교도들의 다

    양한 풍습을 제한적으로만 수용해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자면 우리 한국

    적 고유 신앙 풍습으로부터 오늘날 세계적 크리스마스 유행에 무언가 덧붙이

    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기독교인들은 온 세계

    異邦文化의 基督敎化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문화는 결국 이방문화들 속으로의 끊임없는 土着化를 통해서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 Ⅱ. 종교전통의 이해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19

    종교전통의 이해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

    배 철 현(서울대학교)

    1. 에머슨의 인간 이해

    “Ne te quaesiveris extra.” 이 라틴어 문장을 번역하면 “당신 밖에서 당신

    을 추구하지 마십시오!”다. 19세기 미국 사상가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1841년에 「자립(Self-Reliance)」이라는 한 편의 에세이를 쓴다. 이 에세이는 유럽이 독점해온 철학과 종교 전통으로부터 분리된 미국의 사상

    과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미국의 정신적인 ‘독립선언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철학적이

    며 신학적인 질문을 탐구할 때 과거에 의존한다. 과거의 인물들이 정교하게

    장식된 분묘(墳墓) 속에 남긴 이야기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분묘에는 과거 위대한 사상가들의 글과, 그들의 사상을 숭배하는 학파들의 이론과, 창시자를

    신격화한 종파의 교리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시도한다. 에머슨은 그것을 ‘엑

    스트라’라고 한다. 엑스트라는 파기해도 되는 것들이다.

    위대한 철학가들이나 종교 창시자들의 위대함은 당대 보통사람들이 의존

    하는 과거나 엑스트라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의 게으른 생각인

    관습과 편리한 생각인 편견을 넘어서는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길’

  • 20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을 거침없이 제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철학이나 종교, 혹은 과거 문화나 문

    명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반짝이는 천재성을 훔쳐보고,

    내 자신도 직접 신과 대면하고 만들기 위해서다. 남이 전달해준 이야기에는

    항상 편견과 왜곡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에머슨은 이렇게 촉구한다. “당신은 인생에서 추구할 그 무언가를 발견했

    습니까? 발견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견해나 소문과 같은 엑스트라에 의지하

    지 말고, 당신 스스로 찾으십시오.” 많은 책을 읽고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

    다고 해서 식견이 넓어지는가? “당신 마음속에 있는 당신만의 우주를 찾으십

    시오. 가만히 응시해 그 안에서 나일 강과 유프라테스 강, 에베레스트 산과

    옐로우스톤을 발견하십시오.” 그 우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그 우주는 우리

    주위에서 우리의 관찰을 기다리는 자연, 특히 하늘의 별, 산, 강, 나무, 시냇

    가, 고양이, 아이의 얼굴,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관

    광지가 아니라 조용히 마음속의 우주를 찾을 수 있는 당신만의 산과 강을 찾

    아 인내를 가지고 관찰하십시오.” 위대한 사상에 빛을 비추었던 태양과 달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우리 예배의 대상은 우리가 발견한

    우주와 그 작동 원리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300년경 지금의 이라크 남부에서 인류 최초의 문자

    를 만든 집단이다. 이들은 그림 글자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건설한 도시의 행정 문서에도 사용했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이 보는 물건을 기호로 옮기고, 그 기호가 도시를 원활하게 움직이게 하

    는 소통의 도구가 됐다. 수메르인들은 신을 무엇이라고 표시했을까? 그들은

    ‘별’을 그려 신을 표시했고 ‘딩길(Dingir)’로 불렀다. 딩길이라는 단어는 그림

    의 의미를 상실하고 하늘신인 ‘안’ 혹은 ‘하늘’을 뜻하게 됐다. 에머슨은 이

    인용구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신이다”라고 선언한다. 인간이 삶을 통해

    해야 하는 의무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직하고 완벽한 인간, 즉 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과 일치하기 위한 연습이다. 그런 연습은 자신의 말과 행동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21

    으로 드러나야 한다. 에머슨은 인간이 누구인가를 가장 시적이면서도 간결하

    게 표현한 사상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교

    리라는 이름으로 독점해오던 관행을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부수기 시작한다.

    에머슨은 1838년 7월 15일,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미국 그리스도교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체에 경종을 울리는 세례 요한의 외침과 같은 연설

    을 한다. 에머슨은 하버드 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1929년에 보스턴에 있는 ‘세컨드 처치(Second Church)’라는 유니테리언 교

    회의 목사가 된다. 그러나 교회와 교회의 철학과 마찰이 생겨 1832년 목사직

    을 사퇴한다. 그 후 『자연』이나 『미국 학자』라는 에세이를 통해 뉴잉글

    랜드의 문필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 졸업식 연설은 그가 뉴잉글랜드의 주류

    그리스도교에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해 하버드 대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려는 여섯 명의 졸업생과

    교수들, 그리고 가족들과 보스턴의 지식인들 100여 명가량이 당대 최고의 지

    식인으로 알려진 에머슨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였다. 당시 보스턴의 평균 기

    온은 숨이 턱턱 막히는 섭씨 33도였다. 숨 막히는 더위로 체면을 중시하는

    보스턴 신사들도 풀 먹인 옷깃을 풀어헤칠 수밖에 없었다. 살인적인 더위와

    불편함에도 에머슨이 뿜어내는 새로운 생각과 영감을 가둘 수는 없었다.

    에머슨의 감동적이며 강렬한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하

    거나 반대로 자신이 소중히 생각해온 가치들이 폐기될까 봐 더욱더 웅크리게

    만들었다. 일부는 에머슨의 생각이 전해주는 진귀한 음식의 달콤한 냄새를

    맡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코에는 한없이 고약한 냄새였다. 특히 여섯 명의 졸

    업생들은 학교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에 매료됐다. 그들은 이 고귀

    한 소명을 든든하게 지켜줄 생명과 같은 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

    나 권력을 쥐고 있던 시대착오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한없이 움츠렸다. 에머

    슨은 그들이 주장하는 영성이 무식하고 의존적이며 독선적이라는 사실을 적

    나라하게 드러냈다.

  • 22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그는 전통적인 종교가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권력의 기반이 한없이 허술하

    다는 사실을 공개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종교 브로커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파산되었다고 선언하는 에머슨의 선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습관적으로 과

    거 기성 종교를 비판하는 자칭 지식인들과 달리 에머슨은 오히려 심오하면서

    도 역동적인 영성을 제안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자신의 영적

    인 심연에서 스스로 신을 만나라고 촉구한다. 이는 아직도 유럽 전통의 신학

    과 철학에 밥줄을 대고 있던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학자들의 심기를 단단

    히 건드렸다.

    에머슨은 자신이 오랫동안 몰입했던 생각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자신

    의 철학을 자연이 지닌 신비주의에 대한 서정시로 읊었다. 인간과 자연은 기

    하학적이 아니라 시적이다. 종교인은 당시 영국과 유럽으로부터 정신적인 독

    립을 쟁취하려는 미국의 요구를 섬세하게 감지해야 하며 자연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자연세계의 시인은 자신이

    현재 살고 있고 자신이 관찰한 것을 해석하는 자다.

    그는 졸업생들에게 지금껏 공부하고 매달려온 종교의 굴레를 넘어 매사추

    세츠 주의 들판과 강을 보라고 촉구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에서 영성을

    찾아야 한다. 세상은 자신의 요구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고 “살아 있다는

    엑스터시”를 통해 그 의미를 전달한다. 졸업생들은 신을 책으로만, 머릿속으

    로만, 중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헌과 같은 먼지 자욱한 고서에서만 찾았

    던 동굴의 포로들이었다. 에머슨은 초자연적인 기적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교리의 진위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인간 지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

    다.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삶이 ‘기적’인가를 스스로 관찰해야 한다.

    오늘 여기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를 관찰하지 않는 종교는 다른 사람들

    을 감동시킬 수 없고 시들기 마련이다.

    자신의 오감을 통한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원초적인 언어만이 종교의 언

    어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이 그의 설교에 생기를 준다. 그는 졸업생들에게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23

    듣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 경험한 것을 설교하라고 촉구한다. 다른 사람들이

    해석한 경전에 관한 내용이나 교리를 말하는 것은 옹알이다. 에머슨이 그저

    자연을 가만히 관찰하라고만 말한 것은 아니다. 순간을 응시하면 침묵 속에

    서 말하는 영원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봄의 약동으로 잎이 나고 꽃망울이 터지는 자연의 모멘트를 본다.

    그러나 실제로 이파리와 꽃망울은 모든 찰나에 과격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변화한다. 이 찰나 안에서 식물은 영원히 자라나고 자신의 색깔과 자기 몸의

    구조를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우리가 만일 강력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나무 안의 섬유질이 매순간 변화하고 팽창하고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이 역동성도 얼마의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꽃도, 이파리도 모두

    시들어버린다. 만물은 시간이 지나면 원래 지녔던 독창적인 무결성(integrity)

    을 잃는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찰나에 그 현상

    과 본질이 변하는 과정이다. 움직임을 구성하는 한 동작 한 동작이 거의 움

    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한순간에 저만치 가버린다. 자기 변화의 기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포착해서 인식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에머슨은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발견하는 언어를 ‘오버소울

    (Oversoul)’이라 한다. 그는 ‘신’이라는 단어가 지난 수천 년 동안 종교의 전

    유물이 되면서 그 원래 의미를 잃었다고 말한다. 신이라는 용어는 매우 신인

    동형적이며, 혹은 신화적이고 동시에 유치해서 에머슨이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가 말하는 오버소울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3~4

    월 매화나무에서 막 꽃망울을 막 터뜨리려는 정중동(靜中動)이며 마당에서 한참을 뛰어놀다 어머니 품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네 살 어린아이의 얼굴

    에서 발견되는 만족감, 평화로움, 안도감 같은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소리를

    경청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아낌없이 주는 자연의 경험이 바로 오버소울이다.

    이것이 ‘영적인 법’이다.

  • 24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만일 우리가 자신의 직관에 순응하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한다면,

    봄의 매화나무나 네 살 난 어린아이의 평온함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관찰할 인내나 시간을 갖지 않는 것은, 꽃망울을 천막으로 덮

    어버리거나 새근새근 잠이 든 어린아이를 깨워 큰소리로 유행가를 듣는 것과

    같다. 에머슨은 이 인내와 관찰을 인간 행동의 틀인 도덕이라 부른다. 이 도

    덕은 우리 직관을 통해 발견되는 자연의 계시를 경청하고 순응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계시, 율법, 신, 그리고 도덕은 충분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의 영성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외적인 교리보다 더 문제는 외적

    인 신격화다. 에머슨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주의를 비판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담겨 있는 신의 형상을 깨달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는 우리 안의 신

    의 형상을 파괴해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 안에서 발견되는 신을 경배하고 섬

    겨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와 같으며 신의 형상을 공유한다. 그는 예수

    의 미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이 인간이 된 이유는 반대로 모든 인간

    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에머슨의 이 연설은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의 주도적인 그리스도교 교파였

    던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의 이신론에 영향

    을 받은 자유주의 교파가 과거의 특정한 교파와는 무관한 종교 자유주의로

    변모하게 된다. 에머슨은 전통적인 종교 기관을 거부하고 개인의 직관적인

    사고와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작가

    들, 철학자들, 시인들, 그리고 학자들의 모임인 초월주의 운명의 선구자가 됐

    다. 하지만 그는 이 연설의 여파로 30년 동안 하버드 대학교에 얼씬도 못하

    는 이단아가 되고 말았다.

    에머슨은 신은 2,000년 전에 예수에게 직접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연

    을 통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전한다. 예수라는 한 인물에게만 특별한

    계시가 온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그런 계시를 받을 그릇을 선물해주었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25

    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많은 사람 가운데 특별한 사람이며 특별한 신으

    로 섬겼던 전통적인 신앙에 정면으로 도전한 민주적인 종교심의 뿌리가 됐

    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주장한다. 인간은 신과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신적이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법에 순응하려

    행동한다면 인간은 신이다. 에머슨의 연설만큼이나 충격적인 1장

    26절의 내용을 살펴보자.

    2. 창세기 1장의 인간관

    성서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정의했나?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이다.

    ‘신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P 저자의 인간관이며, 후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의

    인간 연구의 단초가 되는 개념이다. 신의 형상에 대한 교리, 특히 신약성서와

    유대교의 해석과 초대 교부들의 해석은 신 형상에 대한 의미를 자기 나름대

    로 토착화하거나 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들은 P 저자의 뉘앙스는 아

    랑곳하지 않아 그가 의도한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상실시킨다. 유대-기독교

    전통 안에서 인간은 신의 최고의 창조물이며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 창조를

    기술하고 있는 1장 26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힌트를 찾을 수 있

    다.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은 인간 창조를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하

    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신의 창조 중 최고의 걸작인 인간에 대한 창조를 표현하는 구절은 난해하

    기 짝이 없다. 이 구절에 대한 영어 번역도 의미가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New Revised Standard Version(NRSV)』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The

    God said, ‘Let us make humankind in our image, according to our

    likeness.’”

  • 26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NRSV』는 1장 26절 하단에 두 용어에 대해 설명 각주를 첨

    가했다. “먼저 신이 혼자 우주를 창조했는데 ‘우리’라고 표현한 사항에 대해

    설명한다. “복수형 우리를, 우리( 3:22, 11:7, 6:8)라는 표

    현은 아마도 하나님의 ‘천상회의’( 22:29, 욥기 1:6)를 구성하는

    ‘신적인 존재들’인 것 같다.” 그다음으로 ‘형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설명한다.

    1) 형상, 닮음은 겉모습이 아니라 ‘관계와 하는 일’을 나타낸다. 사람은 땅에서

    하나님의 지배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위임받았다. 그것은 마치 부모를 대

    신하는 어린아이의 대비와 같다( 5:3을 보라).1)

    P 저자의 인간 창조에 대한 최초의 문장은 문제투성이이다. 이 문장은 해

    석상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한 분인데,

    왜 간접 인용구의 주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가?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나

    의 형상을 따라서, 나의 모양대로’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왜 는 ‘우

    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로 번역되어 있는 가? 이상하게도 성

    서에서는 일인칭 단수가 아니라 일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복

    수 형태로 쓰인 듯한 인상을 준다. 『NRSV』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천상회의’의 ‘신적인 존재들’이 공동으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설명이다.

    둘째, 간접 인용문 안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형상’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플라톤이 말한 ‘에이도스

    (eidos)’로서의 형상인가? 아니면 인간이 신의 겉모습과 닮았다는 이야기인

    가?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의 겉모습을 베껴 만들었는가? 또한 이 문

    장에서 비슷한 의미를 지닌 두 단어, 즉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는 같은

    의미인가? 이들은 강조를 위한 동의어 반복의 예인가? 『NRSV』의 설명 또

    한 불분명하기 그지없다. 단순하고 명확한 의미를 주기보다는 “관계와 하는

    일(relationship and activity)”이라는 모호한 표현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인간 창조를 이해할 수 있는가?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27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신의 창조 질서 안에서 인간

    이 차지하는 위치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선포임에는 틀림없

    다. 에서는 세 군데( 1:26~18, 5:1~3, 9:6)에서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 표현

    이 문맥에 숨어 있기는 하지만 ‘형상’이나 ‘모양’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파

    악하기는 어렵다. ‘형상’이라는 단어는 성서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으며

    초대 교부들도 그 다양성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들은 형상에는 ‘본질적인 것’

    과 ‘흉내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고 믿었다. 구약성서에서는 몇 가지 흉내적

    인 형상들이 예배 의식에 사용됐다.

    예를 들어 그룹(케루빔)이 지키고 있는 계약의 궤는(

    25:18~22, 37:7~9, 6:23~28)은 신의 현존을 법궤의 네 모퉁

    이에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

    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20:4~5) 신은 비

    가시적이고 형용할 수 없는 분으로 고백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신의 형상은 모두 우상이다. 이러한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1장

    을 기록한 P 저자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기술

    하고 있는가?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

    들’로 해석한다.( 1:15) 비가시적인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처음으

    로 가시적이 되었고 1장 26절에서 예수를 통해 재해석을 시도했

    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형태의 자아, 즉 신의 형상을 지닌

    자아가 된다. 이 형상으로 첫 인간이었던 지상의 아담과는 달리 제2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의 인간이 된다.

  • 28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3. 고대 근동 신화 『에누마 엘리쉬』의 인간 창조

    1장 26절을 번역하기 위해 왜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창조 신화

    를 의식해야 하는가? 인간이 창조되는 순간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찰스

    다윈에 의하면 인간은 오랜 기간 동안 진화 과정을 거쳐 서서히 변해왔기 때

    문에, 인간 창조를 한순간의 사건으로 말한 P 저자를 비과학적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우리가 성서를 보면서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하는 태도 역시 비과

    학적이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자신이 사는 시대의 주도적인 세계관을 배운

    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시간의 노예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세계관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과학적 발명과 발전이 빠른 시대에 우리가 진

    리라고 믿었던 과학적 사실들은 몇 년, 아니 몇 달 안에 더 설득력 있는 대

    안의 등장으로 이내 ‘거짓’이 된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할

    지라도 생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가? 과학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

    나 현대 과학이 생명 기원의 순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고 생각한다.

    성서의 인간 창조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지금부

    터 2,500년 전 P 저자는 왜 인간 창조를 이야기했는가? 당시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민족은 세계 4대 문명권의 문헌에서만 발견된다. 둘째,

    그런 이야기가 어떻게 2,500년 동안 살아남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

    었나? 왜 이 이야기는 24억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는가? 그

    것을 찾기 위한 방안이 있다. 그것은 보다 먼저 기록되어 P 저자나

    그(들)가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주었을 만한 인간 창조 이야기와 비교하는

    것이다. 이것을 비교신화학적 방법론이라고 한다. 서로 유사한 이야기를 비교

    해 선후를 가리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작업이다.

    기원전 6세기경 기록된 1장에 등장하는 인간 창조는 당시 인간

    창조에 대한 세계관을 통해 그 숨겨진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고대 히브리

    인들의 인간 창조에 대한 개념은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P 저자에게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29

    영향을 주었을 만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를 통해 비교 분석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했나? 이들이 P 저자의 세계관에 영향

    을 주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P 저자의 독창적인 인간 창조 내용은 무엇인

    가? 먼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대표적인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의 인간

    창조 부분을 살펴보자.

    『에누마 엘리쉬』는 일곱 개의 토판 문서로 이루어진 총 1,100행의 시

    다. 기원전 1900년부터 인간 창조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음유시인들에

    의해 구전으로 불렸고, 이를 바빌로니아인들이 기원전 1100년경 아카드어로

    기록했다.『에누마 엘리쉬』의 내용과 1장이 유사해서 혹자는 P 저

    자가 『에누마 엘리쉬』의 내용을 참고로 우주 창조와 인간 창조 이야기를

    베꼈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문서를 자세히 비교해보

    면 이야기 전체의 중요한 신화소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 19세기는 고대 근동에서 민족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시

    기였고, 오히려 팔레스타인 쪽에서 몰려온 ‘아모리인’들이 우주 창조와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 쪽에 전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인간 창조에 관한 내용은 사실 부수적이다. 바빌로

    니아인들은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마르둑’ 신의 등극과 그가 거주

    하는 바빌론을 우주의 중심으로 찬양하는 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매년 춘분

    때 축제를 열었다. ‘아키투’ 축제의 클라이맥스는 『에누마 엘리쉬』 공연이

    다. 이 공연은 지구라트로 불리는 피라미드형 종교 시설 앞에서 열린다.

    새로 등장한 젊은 신 마르둑은 혼돈의 여신인 티아맛을 살해하고 우주 창

    조를 통해 질서와 안녕을 가져온다. 전투로써 우주에 질서를 가져온 마르둑

    은 영구적인 왕으로 자리 잡기 위해 자신이 거할 수 있는 도시인 바빌론과

    자신을 위한 신전인 ‘에상길가(원문 병기)’ 건축을 요구한다. 신들은 마르둑

    의 요구를 듣고 그를 위해 궁궐과 신전 건축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 신전을

    누가 지을 것인가? 신전을 짓는 일은 너무 힘들어서 신들의 불평이 이만저만

  • 30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둑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이 내용은 『에누마

    엘리쉬』 6토판 1~9행에 나온다.

    (1) 마르둑 신이 신들의 말을 들었을 때,

    (2) 그는 마술을 행하기로 마음먹었다.

    (3) 그가 에아(Ea) 신에게 말했다.

    (4) 그는 그가 생각하는 계획을 에아에게 말했다.

    (5) 피를(damum) 연결하고 뼈를 만들어

    (6) 태초의 인간을 만들 것입니다. ‘사람이(awīlum)’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7) 내가 태초의 인간을 만들 것이다.

    (8) 신들이 해야 할 일을 그에게 부과해 신들이 쉴 것입니다.

    (9) 내가 신들의 신수를 기적적으로 바꾸겠습니다.

    마르둑은 자기 아버지이며 지혜와 마술의 신인 에아 신의 충고대로 ‘신들

    의 모임’을 소집하고 거기서 혼돈의 여신 티아맛의 남편 킹구(Kingu) 신을

    기억해낸다. 킹구는 티아맛을 선동해 전쟁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군대를 이

    끈 장군이므로 죄과를 묻는다.

    (23) “누가 전쟁을 시작했고

    (24) 티아맛신을 충동하여 군대를 모집했습니까?

    (25) 전쟁을 시작한 자를 제게 인도하십시오.

    (26) 그가 죄과를 져서 당신들이(신들) 평화롭게 쉬도록 해드리겠습니다.”

    (27) 위대한 신들인 이기기(Igigi)신들이

    (28) 신들의 고문인 루갈-딤메르-안키아(LUGAL-DIMMER-ANKIA, 에아

    신의 별명)에게 말했다:

    (29) “킹구가 티아맛을 충동질하여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30) 그들은 킹구를 결박하여 에아신 앞으로 데리고 왔다.

    (31) 에아는 킹구에게 죄과를 묻고 그의 동맥을 절단하였다.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31

    (32) 그는 그의 피로(dam) 인간을(awīlam) 만들었다.(33) 그래서 신들의 노역은 인간에게 지우고 신들은 노역에서 해방되었다.

    (34) 지혜로운 에아 신이 신들의 인간을 창조하고

    (35) 신들의 노역을 인간에게 지웠을 때

    (36) 그 일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37) 누딤무드(에아)와 마르둑은 기적적으로 이와 같은 일을 했다.2)

    『에누마 엘리쉬』에 의하면 인간은 신들을 대신해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노예로 창조됐다. 바빌론 문명은 아직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바빌론은 신전

    중심 사회였다. 통치자는 신의 충실한 종으로 신을 대신해 사람들을 다스리

    는 사제이자 왕이다. 바빌론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작농이나 노예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마르둑은 킹구의 동맥을 잘라 그 흘러나오는 피로 인간을

    만든다. 바빌론 문명에서 ‘피’는 인간에게 지적인 능력을 부여한다. 아카드어

    로 피를 ‘담(dam)’이라 한다. 인간을 신의 피로 만들었다는 주제는 후에 에 등장하는 인간 창조에서도 발견되는 중요한 신화소다. 『에누마 엘

    리쉬』는 마르둑과 바빌론 시의 등극을 위한 찬양 시로 인간 창조에 관한 이

    야기가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인간 창조를 본격적으로 다룬 신

    화인 『아트라 하시스』에서는 인간 창조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한다.

    4. 『아트라 하시스』의 인간 창조

    ‘아트라 하시스(Atra-Hasis)’는 아카드어로 ‘매우 지혜로운 자’라는 의미

    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노아’이며,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신화 『길가메시 서

    사시』에 등장하는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의 별칭이다. 아트라 하시스

    는 방주를 만들어 인류 멸종을 막은 고대 오리엔트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아트라 하시스』는 기원전 1700년경으로 추정되는 고대 바빌로니아어(Old

    Babylonian)로 기록됐다. 『아트라 하시스』 후에 신-아시리아 시대의 왕 아

  • 32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수르바니팔이 니느웨에 도서관을 건립하면서 『아트라 하시스』 토판 문서들

    을 수집해 보관했고, 19세기에 이르러 니느웨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의 의해

    발견했다.

    『아트라 하시스』도 훨씬 이전에 음유시인들이 구전으로 노래하다 마침

    내 17세기 토판 문서에 남겨졌다. 이 토판 문서를 남긴 서기관은 바빌론의

    왕 암미짜두카(Ammi-ṣaduqa, 기원전 1646~1626)의 관리였던 누르아야(Nur-Aya)다. 『아트라 하시스』는 크게 인간 창조와 홍수 사건으로 이루

    어져 있다. 신들의 신수를 펴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이 갑작스레 불

    어나 떠들어대는 판에 신들이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되자 인간들을 홍수로

    멸절시키는 이야기다. 다음은 『아트라 하시스』의 도입부다.

    (1) 신들이 인간들과 같이

    (2) 일을 하고 노역을 할 때,

    (3) 신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4) 그들의 노역은 힘들고, 어려움이 많았다.3)

    아직 인간들이 창조되기 전 이야기로 시작한다. 첫 행부터 인간 창조의

    필요성을 말한다. 신들의 노역을 덜어줄 대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역이

    힘들어지자 『에누마 엘리쉬』와 마찬가지로 신들은 마술의 신인 에아 신에

    게 불평한다.

    (1) 에아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하였다.

    (2) 그들의 동료인 신들에게 말했다.

    (3) “왜 우리는 그들을 정죄합니까?

    (4) 그들의 일은 힘들고, 그들의 어려움도 크다.

    (5) 매일 땅이 울린다.

    (6) 그들의 울부짖음이 크고 우리는 그 소음을 계속 듣습니다.

    (7) 여기에 (…)1)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33

    (8) 출산의 여신 ‘벨레트-일리(Bēlet-ilī)’가 여기 있습니다.(9) 그녀로 하여금 룰루, 즉 인간을 만들게 합시다.(libnī-ma lullȗ awīlam)(10) 그래서 그가 (신들의) 노역을 지도록 합시다.

    (11) 그래서 그가 (신들의) 노역, (엔릴 신의 일)을 지도록 합시다.

    (12) 인간이 신들의 노역을 지도록 합시다.”2)

    에아는 지혜의 신으로 ‘귀가 넓은 분(rapaš uznī)’이라 한다.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들을 적절하게 관리해야 한다. 신들은 우주를 관리

    하는 ‘위대한 신들(ilȗ rabūtum)’과 우주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조그만 신들(ilȗ ṣeḫrūtum)’로 구분된다. ‘조그만 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아르메니아의 아라랏 산에서 발원해 페르시아 만까지 거의 3,000킬로미터

    를 흐른다. 이 두 강은 거대한 강물과 함께 토사를 끌고 내려오는데, 메소포

    타미아 남부 지역은 침적토가 쌓여 강물이 자주 범람한다. ‘조그만 신들’이

    하는 일은 두 강의 바닥에 쌓인 침적토를 퍼 올리는 일이다. 그들은 이 일이

    너무 힘들어 ‘위대한 신들’에게 울부짖는다.

    신들의 여주인인 ‘벨레트-일리Belet-ili’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인간을 만들

    준비를 한다. 엔키는 위대한 신들에게 제안한다. “그녀로 하여금 룰루, 즉 인

    간을 만듭시다. 그래서 룰루, 즉 인간이 신들의 노역을 지도록 합시다.” 룰루

    (lullȗ)는 수메르 차용어로 ‘인간’이라는 의미지만, 여기서는 ‘최초의 인간’을 의미한다.

    우주의 자산인 룰루를 만들기 위한 정교한 프로토콜이 있다. 새로운 생명

    창조와 같은 중요한 일은 신들의 모임에서 결정한다. 신들의 모임에서 ‘위대

    한 신들’은 ‘아눈나키(Anunnaki)’라 하고, 고된 노동으로 이들에게 불평한

    ‘조그만 신들’은 ‘이기기(Igigi)’라 한다. 이 모든 신들을 천상의 회의 장소로

    1) 판독 불가2) 『아트라 하시스』 대영 박물관 78257, 제2행 이하.

  • 34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불러 모으는데 그 장소를 ‘키살 푸후르 일리(kisal puḫur ilī)’, 즉 ‘신들의 모임의 뜰’이라 한다.

    위대한 신들은 최초의 인간, 즉 룰루를 창조하기 위해 창조 여신들을 모

    두 불러 모은다. 벨레트-일리는 지혜의 여신, 마미는 출신의 여신, 그리고 닌

    투는 제사 여신으로 이들은 인간을 만드는 데 관여한다. 닌투 여신은 위대한

    신들에게 자신은 산파이며, 엔키 신만이 인간을 창조할 마술을 가지고 있다

    고 말한다. 엔키 신이 모든 것을 정화하고 인간을 만들 재료를 주면 자신들

    이 인간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189) 벨레트-일리 여신이 출두했다.

    (190) “출산 여신이 인간을 만들도록 하여라.

    (191) 그래서 인간이 신들의 노역을 지도록 하여라.”

    (192) 신들은 그 여신을 불러 부탁하였다.

    (193) 신들의 산파인, 지혜로운 마미를 불렀다.

    (194) “오, 인간을 만드는 출산의 여신,

    (195) 신들의 노역을 지도록 최초의 인간 룰루를 만들어라!

    (196) 엔릴 신이 부과한 일을 지도록 하여라.

    (197) 신들의 노역을 지도록 하여라.”

    (198) 닌투(Nintu) 여신이 입을 열어

    (199) 위대한 신들에게 말했다.

    (200) “내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201) 기술은 엔키(Enki)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202) 그는 모든 것을 정화하기 때문에

    (203) 그가 내게 진흙을 주면 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4)

    닌투 여신은 15일 동안 정화 의례에 참여한다. 첫 번째, 일곱 번째, 열다

    섯 번째 날에 정화 목욕을 할 것이다. 그 후에 킹구 신의 피로 목욕을 해야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35

    한다. 모든 신들의 기운이 그 피에 머물게 된다. 그런 뒤 닌투 신이 킹구 신

    의 ‘살과 피, 그리고 진흙’을 섞어 인간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신과 인간을 진흙으로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후에 실제로 신들이 인간을 진흙으로 만드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신들은

    인간을 킹구의 살과 피, 그리고 진흙 세 가지로 만든다. 인간의 혼인 아카드

    어 ‘에템무(eṭemmu)’는 신의 살로부터 오고,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나 영혼인 ‘테무(ṭemu)’는 신의 피로부터 온다. 이 신적인 속성이 지상의 흙과 섞여 인간이 된다.

    5. 1장 26절a에 등장하는 ‘형상과 모양’

    P 저자는 인간이 신의 형상, 즉 신적인 존재라고 선포한다. 그는 인간을

    ‘신의 형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특별한 관계를 시사한

    다. 히브리 성서에서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신의 형상이다. 신

    약성서에서 신의 형상은 항상 예수와 동일시된다. 1장 26절a에는

    P 저자의 인간 창조 내용이 등장한다.

    “신(엘로힘)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5)

    이 문장의 발화자는 엘로힘이다. 엘로힘은 문법적으로는 남성복수형이나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지칭할 경우는 단수다. 『에누마 엘리

    쉬』와 『아트라 하시스』의 인간 창조는 모든 신이 모인 ‘신들의 모임’에서

    결정한다. 엘로힘을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신들’이라 번역할 수도 있

    으나 ‘말하다’라는 동사 ‘아마르(′āmar)’가 3인칭 남성단수형 동사이므로 ‘엘로힘이 말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 36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인간 창조를 이해하는 두 히브리 단어는 ‘형상’으로 번역한 ‘쨀램(dmwt)’

    과 ‘모양’으로 번역한 ‘더무쓰’다. 쨀램의 어원은 불분명하다. 쨀램은 1장 26절 외에도 성서에서 열두 번 언급된다. 이들 중 열 번은 어떤 사

    물에 대한 겉모습을 이르는 단어로 등장한다. 이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사물

    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의미하지만 일부에서는 추상적인 모습을 의미하기

    도 한다.

    쨀램의 심층적인 의미는 같은 어원을 가진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어 ‘짤

    무(ṣalmu)’에서 찾을 수 있다. 분명 아카드어 짤무는 신상을 의미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있어서 신상은 바로 신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짤무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이 짤무에 내재해 있다고 믿었

    다. 자신이 관리하는 도시에 화가 난 메소포타미아 신들이 그곳을 떠나 다른

    도시로 움직이는데, 이때 신들은 짤무가 움직일 때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고

    믿었다. 신들은 오로지 신화적인 사고 안에서만 우주와 자연에 내재하며 실

    제로는 신상과 동일시됐다.

    대부분의 짤무는 귀한 나무로 만들어졌고 금을 입혔다. 그들은 보석으로

    새겨진 사물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고 그 신에 걸맞은 의상과 황소 뿔 모

    양의 왕관을 쓰고 있다. 이 짤무는 항상 인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예외적인

    경우에만 동물 형태를 취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짤무를 신전에 특별히 마

    련된 목공소에서 만든다. 의례 사제들은 생명이 없는 나무를 신이 머무는 지

    상의 현현(顯現)으로 만들기 위해 정교한 의례를 지낸다. 이 의례를 통해 짤무는 생명이 주어지고 눈과 입이 열려 비로소 살아 있는 것처럼 보고 먹는

    다. 신전의 종사자들은 왕에게 시중드는 것 이상으로 짤무에게 완벽한 의식

    주를 제공한다. 짤무는 때때로 지상의 왕처럼 성전 뜰이나 도시에서 많은 사

    람들에게 전시되는데, 단순한 동상이나 형상이 아니라 신이 지상에 등장한

    현현이다.

    ‘더무쓰’는 흔히 ‘모양’으로 번역하는데 어원을 추적하기가 어렵다.3) 더무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37

    쓰의 구체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하나님이 노아와 계약을 맺고 살인에 대해

    금지하는 말씀이 담긴 9장 6절을 살펴보자.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피를(dam)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dm) 다른 사람에

    의해 흘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ʼadam)을 자기의

    형상(dmwt)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6)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단어는 ‘피’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담

    (dm)’과 ‘사람’을 나타내는 ‘아담(′adam)’의 ‘형상’인 ‘쨀램(dmwt)’의 대비

    다. 만일 1장 26절에서 ‘모양’으로 번역된 ‘더무쓰’가 ‘피’를 의미하

    는 ‘담’과 어원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있는가? 히브리어 어근이 두 개의 자

    음으로 되어 있는 경우, 이 단어를 명사로 만들고자 할 때 ‘요드(y)’나 ‘바브

    (w)’를 세 번째 자음으로 만들어 명사를 구성하는 경우가 있다. 이 히브리

    명사 형태론에 의하면 ‘더무쓰(모양)’는 ‘담(피)’에서 유래한 명사형으로 해석

    할 수도 있다. 고대인들에게 피는 그 존재의 본질을 의미하는 단어로 모양

    대신 피와 관련한 추상적인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문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열쇠는 두 개의 전

    치사에 달려 있다. ‘형상으로’와 ‘모양대로’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전치사 ‘버

    ~‘ 히브리어 모음 추가]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형상으로’에서]’(כ)와 ‘커’(ב)

    으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전치사 ‘베이쓰’는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로 ‘~

    에서’라는 의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전치사의 또 다른 의미는 ‘~로 나

    3) ‘더무쓰’는 흔히 ‘유사하다’라는 의미의 ‘다마’ 동사의 명사형으로 알려져 왔다. 이 단어는 셈어 전체에 거의 나오지 않고 아람어와 아람어에서 차용한 아랍어 ‘모양(dumyatun)’과 티그리니아어 ‘사물의 윤곽(dumat)’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그 어원을 추적하기가 어렵다. 시리아의 텔 파카리야(Tell Fakhariyah)에서 발견된 아람어-아카드어 이중 비문(기원전 850년)에서 아람어 ‘dmwt’가 아카드어 ‘ṣalmu’와 등가어로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두 단어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더무쓰는 1장 26절에서는 ‘쨀램’ 후에 사용되었고, 5장 3절에서는 쨀램 전에 사용됐다. 이 두 단어는 거의 동의어로 쓰인 듯하나 전치사는 다르게 사용했다. 1장 26절의 더무쓰는 전치사 k-를, 쨀램의 더무쓰는 전치사 b-를 사용했으나, 5장 1~3절에서는 전치사 b-를, 쨀램은 전치사 k-를 사용했다. P 저자는 분명 인간 창조 기사를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수사적 용법을 사용한 것 같다.

  • 38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타나는/~로 드러내는/~로서’다. 학자들은 이 용법을 ‘베쓰 에센티에이(beth

    essentiae)’라 한다.

    이러한 경우 ‘베이트’ 전치사 다음에 나오는 단어는 그 앞에 나오는 명사

    와 서술적인 동격 관계를 형성한다. 1장 26절의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형상으로”는 히브리어 원문의 “우리의 형상” 앞에 붙은 전치사를 베

    쓰 에센티에이 용법으로 해석해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형상과 같이” 혹은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본질과 똑같이”로 변역해야 한다. 이 문장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 그 자체’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인간은 하나

    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를 히브리 전치사 ‘버’를 이용해 뚜렷하게 보여준다.

    “모양대로”에서 ‘~대로’로 번역한 히브리어 전치사 ‘커(kə)’의 의미를 추적해보자. ‘카프(kap)’는 두 개의 비교되는 명사가 ‘완전한 등가’ 혹은 ‘불완

    전한 유사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완전히 똑같이’ 혹은 ‘유사하게’라고 번역

    된다. 이 용법을 학자들은 ‘카프 베리타티스(kap vertatis)’라 한다. 이러한 경

    우에 카프 전치사 전후에 나오는 명사들의 관계는 ‘완전한 등가’를 나타낸다.

    이 용법을 이용하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모

    양’과 완전히 똑같이.” 이 두 전치사의 의미로 1장 26절a를 번역하

    면 다음과 같다. “엘로힘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형상으로, 우

    리의 모양과 완전히 똑같이 만들자.’”

    6. 인간은 자신에게 신이다

    P 저자는 1장 26절에서 무엇을 의도했는가?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신의 현현으로 창조됐다. 이 형상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을지라

    도 간직하고 있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다. 신의 형상은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는 신의 형상이며, 바로 신이다. 신의 형상은

  • 유대-그리스도교의 인간관∣배철현 ∙ 39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기초다. 인간은 신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

    할 뿐만 아니라 신의 형상을 지닌 동료 인간들을 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것이 신에 대한 사랑의 완성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인간 창조와 달리

    는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 아닌 ‘신’이라 선포하고 있다.

    에머슨은 자신이 만들어낸 라틴어 문장 “Ne te quaesiveris extra”를 설명

    하는 구절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한 극작가의 문장을 인용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별입니다.

    정직하고 완벽한 인간을 연습하고 실천하는 영혼은

    모든 빛과 모든 영향력과 모든 운명을 명령합니다.

    그 어느 것도 그에게 너무 일찍 오거나 너무 늦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선하든지 악하든지 우리의 천사들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 옆에서 조용히 따라다니는 운명의 그림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게 별이다”라는 문장이 놀랍다. 별이란 신의 특징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는 천체다. 그러므로 인간은 곧 자신에게 신이다.

  • 불교의 인간관 ∣ 윤원철 ∙ 41

    종교전통의 이해

    불교의 인간관

    ― 불성과 인성, 마음의 문제 ―

    윤 원 철(서울대학교)

    1. 들어가며

    종교교육은 그 주체와 목적, 대상 등에 따라 다양한 방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종교학에 기반을 두는 종교교육이라면 종교일반, 인류의 종교문화

    전반을 다룰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교육은 아무래도 특정종교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 양적(量的)으로 대종(大宗)입니다. 특정종교에서 그 내부 사람들, 즉 신자들을 대상으로 “올바른” 신행을 가르치는 종교교육이 있겠고, 또 한편으로는 특정종교

    의 관점과 신행을 외부인들, 즉 비신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설득하여 개종시키려

    고 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종교교육이라고 하면 우선 포교(布敎), 선교(宣敎), 전도(傳道) 등의 개념이 떠오르곤 합니다. 또는 교화(敎化), 감화(感化)라는 개념도 떠오릅니다.

    종교는 워낙 인성함양을 위한 수련의 챔피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가르침

    과 지혜를 청소년 인성교육에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타당한 일입니다. 하지

    만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고민에는 끝이 없을 듯합니다. 특정종교의 전통적인 지

    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특정종교 내부의 청소년뿐 아니라 청소년 일반에게도

    보편적으로 시행해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모색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 42 ∙ 청소년 인성교육과 종교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성교육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고민을 진행

    하려면 우선 인성이 무엇인지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보

    자면 인성이란 “사람의 성품,” “사람으로서의 성품,” 또는 “사람으로서의 됨됨

    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즉 인성교육이란 사람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서 이

    를 기르고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인성이라든가 사람다움이라든가 하는 단어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쉽게 쓰

    는 말입니다. 마치 자명한 뜻을 가진 단어인 듯이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사용합

    니다. 하지만 작정하고 그 뜻을 따지자고 달려들면 갑자기 좀 난감해집니다. 하기

    는, 그 뜻을 따지려면 참 많은 논의가 필요한 개념인데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쉽게

    흔히 쓰는 말이 참 많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시간”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동안에는 시

    간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는 순간, 모르게 되고 말

    았다.” 근래의 예로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강의와 저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쉽게 사용하던 “정의”라는 개념에 기실은 참으로 복잡한 사연들이 담겨있음을 상기시켜주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