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미와 왕실 생활이 조화를 이룬 궁궐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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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동궐도(東闕圖)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가로 576cm, 세로 273cm의 큰 그림.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뿐 아니라 다리와 담장, 괴석까지 실제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 고 건물의 이름을 기재하여 궁궐 연구와 복원작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 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아름답게 채색한 이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 기법을 모 두 수용하고 있으며, 동궐이 가장 전성했던 시절을 기록하여 예전의 영화를 재 현하고 있다. 국보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연미와 왕실 생활이 조화를 이룬 궁궐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1484년 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 궁과 경계 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하였다. 창경궁 터의 역 사는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이 즉위한 1418년 고려의 남경(南京) 이궁(離宮)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세운 것이다.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공사 도중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은 창건 초기에는 쓰임새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 (離宮)으로서 활용 빈도가 높아졌다. 동양의 궁궐은 보통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 중심축을 따라 건물을 엄격하게 배 치하는데,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려 때 동향이었던 것 을 존중했다고도 하는데, 입지 여건상 동향으로 짓는 것이 지형에 더욱 자연스럽고 적합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처럼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고려하면서도 기능과 용도에 따라 생활의 편의 를 추구하여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 갖춘 궁궐이 되었다. 창경궁은 임진 왜란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이때 재건된 명 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 건물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내전 건물들은 1830년 환경전 화재 이후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한 것이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일제의 ‘훼손’에 의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을 잃 게 된다.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 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 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 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 많은 전각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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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동궐도(東闕圖)

자연미와 왕실 생활이 조화를 이룬 궁궐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1484년 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

궁과 경계 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하였다. 창경궁 터의 역

사는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이 즉위한 1418년 고려의 남경(南京) 이궁(離宮)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세운 것이다.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공사 도중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은 창건

초기에는 쓰임새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

(離宮)으로서 활용 빈도가 높아졌다.

동양의 궁궐은 보통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 중심축을 따라 건물을 엄격하게 배

치하는데,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려 때 동향이었던 것

을 존중했다고도 하는데, 입지 여건상 동향으로 짓는 것이 지형에 더욱 자연스럽고 적합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처럼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고려하면서도 기능과 용도에 따라 생활의 편의

를 추구하여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 갖춘 궁궐이 되었다. 창경궁은 임진

왜란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이때 재건된 명

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 건물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내전 건물들은 1830년

환경전 화재 이후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한 것이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일제의 ‘훼손’에 의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을 잃

게 된다.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

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

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

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아직 많은 전각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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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품위를 보여 주는 정문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에 세워졌다. 1484년

(성종 15)에 창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2층 누

각형 목조건물로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다.

홍화문을 통과하면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500년도 더 된 옥천교(玉川橋,

보물 제386호)가 놓여 있다. 다리 난간 아래 홍예(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궁궐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도깨비 상을 조각하였다.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

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

다. 홍화문은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1홍화문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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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으로 돌아온 소현세자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임금과 백성이 만났던 홍화문

홍화문 弘化門 옥천교 玉川橋

명정문 明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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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품격과 실용을 추구한 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正殿)이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

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

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

다.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

명정전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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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명정전의 쓰임새

명정전 행각에 주둔했던 장용영

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명정문(보물 제385호)

과 행각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다.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

을 치르기 위한 재실(齋室)로도 쓰였다. 명정전은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조기축진찬도 팔곡병>(1829) 중 ‘명정전외진찬 부분도’

명정전 明政殿명정문 明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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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비극

3국왕이 정무를 보던 곳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

다. 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

는 찾아보기 어렵다.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

도 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

한 것이 그 예이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 동

행각과 함께 복원되었다. <동궐도>에는 숭문당, 명정전과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2칸 규모의 작은 부속 건물이 있으며, 문정문에서 문정전 건물에 이르는 복도각이

길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다.

문정전 일원

문정전 文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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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정 현판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

4임금과 신하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 곳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

(순조 30) 소실된 것이 그해 가을에 재건되었다. 경사진 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영조의 친필 현판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함인정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1633년(인조 11) 건립된 정자이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

년에 재건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숭문당과 함인정

숭문당 崇文堂

빈양문 賓陽門

함인정 涵仁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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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왕실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진 곳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졌다.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

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

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이에 비해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고 친

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경춘전과 환경전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환경전 歡慶殿경춘전 景春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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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통명전과 양화당

통명전과 장희빈의 저주

품위를 갖춘 내전의 중심 전각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

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

으나, 병자호란 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화당 養和堂

통명전 通明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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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후궁들의 처소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영춘헌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했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

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영춘헌과 집복헌

영춘헌과 정조 독살설

영춘헌 迎春軒

집복헌 集福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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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흔적만 남은 궁궐 여성들의 처소

이 일대의 숲은 궁궐 여성들의 처소가 모여 있던 생활구역이었다. 그 가운데 요화당

(瑤華堂)과 취요헌(翠瑤軒)은 효종이 공주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었으며, 통화전

(通和殿)은 혼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사이에 궁녀들의 작은 처소들이

많았고 어린 왕자들과 관련된 건물들도 섞여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일대의 모든 내전들이 사라졌다.

내전 터 일원

동궐도(東闕圖)

취요헌 翠瑤軒

요화당 瑤華堂

통화전 通和殿집복헌 集福軒

춘당대 春塘臺

화초고 花草庫

태실과 성종대왕태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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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왕이 농정을 살피던 곳

춘당지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

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면적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

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섬

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춘당지 일원

내농포(內農圃)

팔각칠층석탑 八角七層石塔

대온실 大溫室소춘당지 小春塘池

대춘당지 大春塘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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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근문 月覲門

내농포 內農圃

관덕정 觀德亭

집춘문 集春門

10문무의 정신을 담은 곳

1642년(인조 20)에 지은 관덕정은 활을 쏘던 정자이다. 건립 당시에는 취미정

(翠微亭)으로 불리다가 1664년 현종 때 관덕정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다. 앞쪽의 넓은 터는 군사 훈련장과 무과 시험장으로 쓰였다. 정자 뒤로는

단풍 숲이 우거져서 여러 임금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들이 전해진다. 집춘

문은 관덕정 북쪽 담장에 난 궁문으로 문묘(文廟, 또는 성균관)가 마주 보이는 곳

에 있다. 역대 임금들이 문묘로 나갈 때는 이 문을 이용했다.

관덕정과 집춘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월근문(月覲門)

동궐도(東闕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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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동궁 터 일원

왕자가 정무 보던 곳

관천대(觀天臺) 서쪽의 빈 터부터 담장 너머 창덕궁의 낙선재 일원까지는 동궁의

영역으로 왕세자가 거처하면서 정무를 보던 곳이다. 정조 9년에 이곳에 수강재(壽

康齋)를 지어 세자의 별당으로 삼았으며, 그 뒤 북쪽 언덕에 취운정(翠雲亭)을 세

워 후원을 만들었다. 1686년에 지어진 이 정자는 다행히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현재는 낙선재 일원과 함께 창덕궁 영역에 속해 있다.

동궐도(東闕圖)

관천대 觀天臺

< 동궁 터 일원 東宮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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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왕실을 위한 관청

관천대 동쪽과 남쪽의 빈 터는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관청, 즉 궐내각사가 있

던 곳이다. 창경궁 궐내각사의 중심에는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도총부(都總府)가

있었다. 그 주변에 있던 내사복시(內司僕寺)는 왕실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던 곳

으로, 마구간과 사료 창고 등 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대규모 복합 시설이었다. 일

제강점기 때 이 일대를 헐어 동물원 축사를 만들었으나, 1980년대에 복원사업을

추진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궐내각사 터

명정전 明政殿

명정문 明政門홍화문 弘化門

< 궐내각사 지역 闕內各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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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