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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北響堂石窟 北洞과 中洞 蓮花文의 淵源과 그 意味

    蘇 鉉 淑 (圓光大)

    Ⅰ. 머리말

    Ⅱ. 北響堂石窟 北洞과 中洞의 睡

    蓮系 蓮花文

    Ⅲ. 北響堂石窟 睡蓮系 蓮花文의

    淵源

    Ⅳ. 睡蓮系 蓮花文을 통해 본

    北齊 서역문화 수용의 一面

    Ⅴ. 北響堂石窟 睡蓮系 蓮花文

    의 象徵性

    Ⅵ. 맺음말

    Ⅰ. 머리말

    북향당석굴은1) 중국 河北省 邯鄲市 峰峰礦區에 위치한 석굴로서, 북

    제(550-577) 왕조를 개창한 文宣帝(재위 550-559)가 조영하였다. 이곳

    에는 北洞, 中洞, 南洞 등 3개의 대형굴이 있는데, 북동이 가장 먼저

    개착되어, 天保3년(552) 이전에는 대략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1) 현재 널리 쓰이는 용어는 ‘북향당석굴’이 아니라 ‘북향당산석굴’이다. 그러나

    이 석굴군은 향당산에 개착된 것이 아니며 鼓山에 개착됐기 때문에 향당석굴

    이 더 정확한 표현으로 생각되어 본고는 북향당석굴이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명칭에 대해서는 劉東光, 響堂山拾遺 (文物春秋 1999-3), pp.14-31;劉東光 著․勝木言一郞 譯, 響堂山石窟に關するいくつかの問題について (佛敎藝術 230, 2000), pp.37-55를 참조.

    2) “天保三年下敕於鄴城西南八十里龍山之陽 為構精舍 名雲門寺 請以居之 兼為石

    窟大寺主.”(續高僧傳 권16 僧稠傳 , 大正新修大藏經50冊, No.2060, p.554中.이후 大正新修大藏經은 T로 약칭하며, 冊은 생략한다). 한편 북향당석굴 북동

    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동위설과 북제설이 공존한다. 李裕群, 張惠明 등이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2

    북향당석굴 북동 중심주 상부

    북향당석굴 중동 중심주

    북동은 굴의 전체 바깥

    높이 20m, 넓이 20m,

    그리고 主室의 넓이

    11.5m, 깊이 12m, 높이

    11.5m의, 황실의 위엄이

    완연하게 드러난 대형

    굴로 북제 황실의 紀念

    碑的 公共建築에 가까

    운 성질을 지니고 있다.

    중동은 560년경을 전후

    해 완성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는데, 북동의 영

    향 아래 조성되었다. 때

    문에 굴의 형태에서 세

    부적인 장엄의장까지

    북동과 매우 유사하며,

    역시 마찬가지로 황실

    의 권위를 드러내는 기

    념비적 건축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

    은 북동(도1)과 중동(도

    2)의 中心柱 위에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문양이 寶珠와 함께 출현한다.

    은행나무 잎처럼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연화좌 위에 표현되었다. 동일

    한 형태의 문양은 두 석굴의 영향을 받은 북향당석굴 남동, 남향당석

    동위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Soper, Guglielminotti Trivel, 丁明夷, 李文生, 劉東

    光, 曾布川寬, 岡田健 등은 북제 조영설을 주장하고 있다. 필자 역시 북제 문선

    제의 조영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북향당석굴의 조영 시기에 대한 논의는 蘇鉉

    淑, 北響堂石窟 北洞의 轉輪聖王 상징 (美術史學硏究 255, 2007), pp.167-173 및 해당 논문의 주6을 참조.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3굴 제5굴과 7굴, 水浴寺 西窟 등 도성 鄴城 지역의 여러 석굴에서도

    출현한다. 그러나 동시기 다른 지역의 석굴사원이나 단독조상에서는

    이 같은 문양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문양은 그동안 전혀

    주목되지 않았다.

    문양은 일반적으로 장식적 기능만을 하는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러

    나 종교미술에서 문양은 장엄의장으로 불리며 공간을 聖化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대부분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새로운 제재의 출현

    과 유행에는 일반적으로 이유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본고는 두

    석굴에 돌출한 문양의 내용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상술한 문양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동시기 조상과의 비교

    분석을 통해 알아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문양은 연화문이지만

    기존의 전통적인 연화문과 다른 睡蓮系 연화문(이하 ‘수련문’으로 약

    칭)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수련문이 북제 황실 석굴에 나타난 현

    상에 주목, 그 배경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먼저 수련문의 연원이 이집

    트에서 시작되어 페르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음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북제와 페르시아의 문화 교류 상황을 탐색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북제 황실의 서역문화에 대한 傾倒, 즉 ‘胡化’는 중앙아시

    아의 상업민족인 소그드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련문은 현재까지 발견된 중국 내 소그드인 관련 유물에

    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북향당 석굴의 수련문은 페르시

    아문화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출현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

    로 본 연구는 북제 황실의 서역문화 수용의 구체적인 모습을 미술사적

    으로 제시해준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북동과 중동은 황제가 조영한 석굴로 다른 석굴과 달리 정치적 색채

    가 비교적 농후한 편이다. 그러므로 수련문 역시 단순히 북제 황실의

    페르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을 뛰어넘어 어떤 상징성을 띠고 있을 가능

    성이 크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수련문의 含意를 살펴보고, 나아가 북

    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의 중심주 위에 표현된 수련문의 정치적 상징성

    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4

    중동 중심주 위의 수련문

    북동 중심주 위의 수련문

    Ⅱ.北響堂石窟 北洞과 中洞의 睡蓮系 蓮花文

    북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은 단층

    탑의 모양으로 외관을 조성한 점,

    보주를 柱頭 위에 얹은 珠柱가 다

    량으로 출현하는 점 등 유사한 특

    징을 다수 공유하고 있는데 특히

    본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양 또

    한 그러하다.

    북동과 중동은 석굴 가운데에

    커다란 기둥이 있는 中心柱窟로서,

    중심주 상면과 측면에 커튼과 그

    장식들이 함께 묘사되어 불상이

    帷帳 안에 안치되는 帷帳龕 형태

    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유장 위

    에 보주와 함께 매우 독특한 형태

    의 문양이 표현되어 있다(도3, 도

    4). 이런 문양은 북위시대에 열린

    龍門석굴이나 鞏縣석굴, 북향당석

    굴과 동시기에 개착된 山西省 太原의 天龍山석굴, 甘肅省 天水의 麥積

    山석굴 등에도 출현하지 않으며, 각 지역에서 다수 제작된 단독 조상

    과 造像碑 등에서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북동과 중동보다 뒤

    늦게 조성된 鄴城지역의 기타 석굴 내부, 즉 북향당석굴 南洞의 좌벽

    에 위치한 소형 불감, 남향당석굴 제5굴과 7굴 정벽의 유장, 수욕사 서

    굴 동벽과 서벽의 최상부와 후벽 및 중심주 東面 최상부에도 표현되었

    다( 참조).3) 이 석굴들은 황실이나 權貴, 혹은 고위 승려에 의해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5

    무정 원년 조상비의 중 유마 부분

    업성지역 석굴에 표현된 수련계 연화문

    만들어진 것으로,4) 이 문양이 황

    실 석굴에서 시작되어 점차 업성

    지역의 주요 석굴들에 영향을 미

    쳤음을 알 수 있다.5)

    현존 유물 가운데 이런 문양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미국 메트로

    폴리탄미술관 소장의 동위 武定

    원년(543) 造像碑이다. 이 조상비

    는 永熙2년(533) 李道贊등이 邑義

    500여인과 함께 만들기 시작해 10

    년만에 완성한 높이 3m가 넘는

    대형 조상비이다.6) 상술한 문양은 조상비 전면의 상부에 대칭으로 묘

    3) 은 필자의 조사와 사진 촬영 등을 기초로 제작했으며, 수욕사 서굴의

    우측 연화문은 邯鄲市文物保管所, 邯鄲鼓山水浴寺石窟調査報告 (文物 1987-4)의 도11을 참고했다.

    4) 남향당석굴은 제2굴 굴 문 양쪽에 판 龕 안에 수대 사문 道淨이 撰한 를 통해 석굴 조영에 북제 高官이 관여했고(邯鄲市峰峰鑛區文管所․

    北京大學考古實習隊, 南響堂山石窟新發現窟檐遺迹及龕像 , 文物 1992-5,pp.13-14), 수욕사 서굴 또한 굴 안의 명문에 의해 석굴 조영에 고위 승려가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邯鄲市文物保管所, 邯鄲鼓山水浴寺石窟調査報告

    , 文物 1987-4, pp.1-23).5) 이런 현상은 탑형굴이라는 석굴의 형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북향당석굴

    북동이 탑형굴의 단서를 열었는데, 탑형굴은 업성 이외의 다른 지역에는 출현

    하지 않는다. 즉 북향당석굴 중동과 남동, 그리고 남향당석굴 제3굴과 7굴, 그

    리고 수욕사 서굴 등 업성지역 석굴에서만 출현하고 있어 북향당석굴 북동이

    업성지역의 다른 석굴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6) 北京圖書館藏中國歷代石刻拓本匯編 6冊 (中州古籍出版社, 1989), p.96; 金申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6사된 에서, 유마가 앉아 있는 유장의 상단 장식품

    으로 표현되었다(도5). 이 조상비는 원래 河南 淇縣의 浮山 封崇寺에서

    발견되어 하남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이 조상비 말고

    다른 조상비나 단독 조상 등에서는 동일한 문양을 찾아볼 수 없다.

    석굴사원과 조상비 등에 나타난 이 문양의 분포 공간을 종합해보면,

    모두 유장감 위의 장식으로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6세기 불교 조상에

    표현된 유장이나 석굴 사원의 유장감 상부에 표현된 장엄의장과의 비

    교를 통해 이 문양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유장은 원래 중국의 전통적인 가구 가운데 하나로서 실내나 실외

    모두에 설치하던 일종의 천막 같은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그 단초가

    보이며, 진한시대에 이르러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유장은 실내에서는

    榻床 주위에 주로 설치하였는데, 가리거나 공간을 구분하는 실용적 기

    능 이외에도 유장의 색상이나7) 상부의 장식 등을 통해 여기에 앉는

    자의 신분과 지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불교 미술에서 유장이 장엄의장으로 출현하는 것은 남북조시대 중

    후기, 즉 북위 후기의 낙양을 비롯한 중원지역이며, 이후 점점 서부지

    역 등 주변으로 확산되며,8) 당대까지 매우 유행했다. 그리고 유장형태

    의 불감은 대략 520년대 공현석굴 등에서 출현, 동위 북제시기에 이르

    러 주요한 불감 형식으로 자리 잡는다.9)

    編著, 海外及港臺藏歷代佛像 -珍品紀年圖鑑 (山西人民出版社, 2007), pp.85-86; 顔娟英 主編, 北朝佛敎石刻拓片百品 (臺北: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2008), pp.113-114. 金申은 영희3년부터 이 조상비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는

    데, 이는 탁본을 잘못 읽은 것이다.

    7) 唐의 段成式이 편찬한 酉陽雜俎 권1 禮異 편에는 양 무제가 동위의 사신을‘임광전 안의 皂帳에 앉아서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정환국 옮김, 譯註 酉陽雜俎 2, 소명출판, 2011, p.262).

    8) 馬世長, 交匯․融合與變化 -以敦煌第249․285窟爲中心 (巫鴻 主編, 漢唐之間文化藝術的互動與交融, 文物出版社, 2001), pp.301-302.

    9) 唐仲明, 從帳形龕飾到帳形龕 -北朝石窟中一個被忽視的問題 (敦煌硏究 2004-1), pp.27-32. 서부지역 유장형 불감의 출현은 동부보다 늦어 동부의 영

    향 아래 성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7유장은 이처럼 실제 생활에서, 그리고 불교 사원에서 불상을 봉안하

    는 寶帳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므로 기록과 실물을 통해 그 모습을 추정

    할 수 있다.10) 보장은 화려한 장식을 한 유장을 말하는데, 위진남북조

    시대 보장의 상부에는 山花蕉葉,11) 보주, 연화, 연봉우리 등이 장식되

    었다.

    보장의 장엄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鄴中記에서 石虎가 만든床의 장식을 소개한 대목으로, ‘유장의 정상에 금으로 만든 연화를 장

    식했다’고 하여 연화가 유장의 장식품이었음을 알려준다.12) 게다가 7세

    기 중엽 道宣이 편찬한 集神州三寶感通錄의 ‘荊州 長沙寺像’조는 수개황15년(595) 이 상을 안치한 불전의 내부를 묘사하면서 ‘寶帳花炬’라

    는 표현을 하고 있다.13) 보장이란 역시 이 글에서 ‘金寶로 장엄하였다’

    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보석 등으로 장식한 유장이다. 花炬는 보장

    위에 장식한 꽃과 화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화염은

    보주와 보주가 내뿜는 빛을 함께 묘사한 형태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기록을 반영한 실물 사례는 남북조시대의 세속회화나 석굴사원의 유장

    감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

    북위 낙양지역 무덤에서 발굴한 石棺이나 석관을 안치한 榻床 등에

    는 선각화가 빈 공간 없이 빽빽이 묘사돼 6세기 전기 북위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여기에는 유장과 그 안에 앉아 있는 인물을

    묘사한 장면이 다수 있다. 寧懋石室의 山墻 외벽에서 보는 것처럼 직

    사각형을 세로로 세운 후 그 위에 원을 얹은 도안화된 문양을 보주문

    사이사이에 표현한 경우도 있지만,14) 일반적으로 화염을 내뿜는 보주

    10) 小杉一雄, 中國佛敎美術史の硏究 (新樹社, 1980), pp.128-151. 그는 세속의유장이 불상을 안치하는 보장으로 이용되는 것은 천자의 御床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p.139).

    11) 산화초엽은 ‘초엽’ 으로도 불리는데, 삼각형의 박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宋]李誡 著, 營造法式 권32 ‘山花蕉葉佛道帳’조와 揚之水, 曾有西風半點香 -敦煌藝術名物叢考 (三聯書店, 2012), pp.8-14를 참조.

    12) [晋]陸翙 撰, 鄴中記 (許作民 輯校注, 鄴都佚志輯校注, 中州古籍出版社,1996), p.20.

    13) 集神州三寶感通錄, T52, No.2106, p.416上中.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8

    용문석굴 빈양중동 천장

    공현석굴 제4굴 서벽 감의 유장 상부

    와 전통적 연화문을 번갈아 표현하고 있다.15) 이런 형태는 북위 용문

    의 석굴 사원에서도 종종 등장하여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유장이 석굴

    사에서 불상을 안치하는 불감의 장식으로 그대로 차용되었음을 잘 보

    여준다.

    북위 황실이 개착한 용문석굴 賓陽中洞의 천장과 공현석굴 등의 유

    장감도 6세기 보장의 장엄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빈양중동은 북위

    宣武帝가 부모인 孝文帝

    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두

    굴 가운데 하나로 520년대

    에 완성되었다. 3벽에 각각

    불상과 보살상 등을 안치

    했는데, 벽의 좌우에 커튼

    을 드리우지는 않았지만

    천장 부위에 삼각형이나

    반원형의 접힘 장식이 있

    어 유장을 표현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유장 상부

    는 북위 석관 등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연화와

    보주를 번갈아가며 장식하

    였다(도6). 공현석굴 또한

    북위 황실이 조영하여 당

    시 상층 계층이 사용하던

    유장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유장의 장식이 빈

    양중동과 매우 유사하다(도7).

    이처럼 문헌과 현존하는 미술사적 자료들을 종합해볼 때, 북향당석

    14) 黃明蘭 編著, 洛陽北魏世俗線刻畵集 (人民美術出版社, 1987), 도99·108.15) 黃明蘭 編著, 앞의 책, 도91.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9

    이집트 고분 벽화, 기원전 1200년

    굴 북동과 중동 중심주의 유장감 상부에 보주와 함께 출현하는 것은

    연화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연화문은 기존의 전통적인 연화문과는

    매우 달라 과연 연화문일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북향당

    석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남향당석굴 제5굴 정벽과 수욕사 서굴 중

    심주 동면의 연화문(의 가장 오른쪽)은 문양의 상부를 매끈한

    포물선이 아니라 마치 낱개의 꽃잎처럼 요철을 표현하여 북향당 석굴

    북동과 중동의 문양이 花文임을 알려준다.

    Ⅲ. 北響堂石窟 睡蓮系 蓮花文의 淵源

    연화문은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하며, 헬레니즘 문화의 동점에 따라

    고대 인도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 등 동아시아에 전래되었다.16)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통적인 연화는 붉은색을 띠는

    紅蓮花로서 수련과의 넬

    룸보(Nelumbo)屬에 들며

    주로 인도, 중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일

    대에 분포하고 있다.17)

    동아시아 불교미술에서

    애용된 연화문은 바로

    넬룸보屬의 연화를 묘사

    한 것이다.

    반면 북향당석굴 북동

    과 중동의 연화는 수련과의 님파이아(Nymphaea)屬에 드는 睡蓮으로

    추정된다.18) 님파이어속에 속하는 수련은 꽃잎이 화려하고 뾰족하며

    16) 上原眞人, 日本の美術4 -No.359 蓮華紋 (至文堂, 1996), p.19.17) 李華春 編著, 佛敎植物散策 (臺北: 佛敎專業書局, 1991), p.40.18) 연화와 수련은 모두 수련과에 속하는 다년생 수초이다. 그러나 연화는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10

    리이글이 분류한 수련계 연화문

    꽃잎 사이에 초록색 꽃받침을 가지고 있는데, 열대 및 온대 지역에 고

    루 분포하고 있다. 원래 수련은 아침에 태양이 뜰 때 잎이 벌어졌다가

    저녁에 해가 질 때 오므라지는 속성을 갖고 있어 고대 이집트에서는

    태양꽃으로 여겼다. 때문에 柱頭에 혹은 의복의 문양이나 고분 벽화에,

    혹은 이마의 장식용 꽃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도8).

    리이글의 연구에 의하면 이집트의 수련문은 보통 네 가지로 표현되

    었다.19) 즉 정면형과 세 종류의 측면형이다( 참조). 정면형 연화

    는 ‘로제타문’으로 불리며 광명을 상징한다. 측면형 연화는 古이집트

    예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의 a는 가장 사실적으로 표

    현한 경우이며, c는 꽃잎과 꽃받침 등 없이 윤곽만 가장 간결하게 표

    현한 경우이다. b는 그 중간 형태로 a형의 꽃잎 위에 선을 이었는데,

    때문에 b형의 연화에서 내부의 꽃잎 線(花瓣)을 지워버리면 c형이 된

    다.

    북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의 연화는 윤곽만 보면 c형으로서,20) 수련의

    Nelumbo屬, 수련은 Nymphaea屬에 속한다(李華春 編著, 앞의 책, p.40).

    19) アロイス·リ-グル 著, 長廣敏雄 譯, リ-グル美術樣式論(新版) (岩崎美術史,1980년 5刷(1970년 초쇄)), pp.76-83; 阿洛瓦 里格爾 著, 劉景聯․李薇蔓 譯, 風格問題-裝飾藝術史的基礎 (湖南科學技術出版社, 1999), p.30-33(일본과 중국에서 각각 번역된 두 책의 원저는 Alois Riegel, Stilfragen.-Grundlegungen zueiner Geschichte der Ornamentik, Berlin: Verlag von Georg Simens, 1893).

    20) 측면형 b나 c가 연화인가 아니면 파피루스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

    다. 이에 대해서는 アロイス·リ-グル 著, 長廣敏雄 譯, 앞의 책, pp.75-77과 阿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11측면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중동의 사례에서 보듯

    연화 안쪽에 채색으로 문양을 표현하고 있어 북동의 경우도 윤곽은 부

    조로 표현하고, 연화 내부는 색을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b형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21)

    인도에서는 전통적 연화문 이외에 수련문도 다수 출현한다. 기원전

    2세기 柱頭에 보이는 연화문은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 왕궁에서 흔

    히 나타나는 정면형의 로제타문과 동일하다.22) 그러나 로제타문을 가

    장 안쪽에 배치하고 그 외연에 넬룸보속의 연화를 표현한 복합형이 이

    후 유행하며 주류를 형성한다.23) 산치와 바르후트 탑의 난순 부조에는

    측면형의 수련문도 나타나는데, 주로 덩굴무늬와 함께 표현했으며 사

    실적으로 묘사한 a형이 대부분이다. 수련문은 또한 보살상의 지물로,

    혹은 공양인의 봉헌물로도 나타나는데, 역시 a형이 다수이며 b와 c형

    은 찾기 어렵다.

    페르시아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수련문이 나타난다. 리이글에 의하면

    페르시아의 연화문과 팔메트문은 이집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이집트

    의 것과 매우 유사한데, 정면형과 측면형 모두 출현한다. 정면형의 대

    표적 사례는 아케메네스왕조(기원전 550년-기원전 330년)에서 건립한

    페르세폴리스의 건축 부조이다. 여기서 수련문은 공간을 구분하는 문

    양대로, 혹은 동물의 몸에 장식으로 묘사되었다.24) 금은 공예품에도 정

    洛瓦 里格爾 著, 劉景聯․李薇蔓 譯, 앞의 책, pp.29-33 참조. 그러나 리이글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이런 형태가 수련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여 이를 따랐

    다.

    21) 북제의 불교 造像 가운데는 회화와 조각을 결합한 것이 다수 있다. 산동성

    靑州나 하북성 定州지역에서 출토한 상들 가운데는 조각하지 않은 면에 붓으

    로 문양이나 존상을 나타내고 색칠을 한 경우가 상당량 있다. 특히 2012년 1월

    동위․북제의 도성인 鄴南城에서 발견한 3천여 점의 불교 조상을 필자가 최근

    실견했는데, 선으로 그리고 채색한 부분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어 당시 조상

    에 조각과 회화를 결합하는 경향이 매우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22) 林良一, 東洋美術の裝飾文樣 -植物文編 (同朋舍, 1992), p.94의 도123의 a와b.

    23) 인도의 초기 연화문에 대해서는 林良一, 앞의 책, p.94의 도123 참조.

    24)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5卷 西アジア (小學館, 2000), 도209․212․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12

    인물형 조개 장식품의 부분

    부분

    면형이 다수 출현한다.

    측면형 수련문 가운데는 a형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데, 기원전

    668년-631년경 제작으로 추정하

    는 이라크 니네베의 北宮殿에서

    출토한 石床 상부(대영박물관 소

    장)는 a형으로 가득하다.25) 또한

    기원전 6-4세기 제작의 은제 암

    포라형 리톤에는 팔메트문과 함

    께 출현하며,26) 조개 용기에는

    인물과 함께 묘사되기도 했다.

    현재 베를린국립박물관 서아시아

    미술관이 소장한 이 조개 용기는

    기원전 8-7세기 제작으로 보이는

    데, 선각으로 다수의 측면형 연

    화를 묘사했다(도9).27) 여기에는

    a형 이외에 b형도 함께 출현한

    다.

    b형 역시 기원전 6-5세기의

    페르세폴리스 건축 부조에서 찾

    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

    이 손에 쥔 모습으로 표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8)나 29)(도10)에서 왕과 왕자가 손에 쥔 연화이다. 또한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13의 행렬도>에서도 페르시아 고관들은 다른 나라의 귀족들이 조공품을

    든 데 비해 한 손에 b형 연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아케메네스왕조의 수도 가운데 하나인 페르세폴리스가 위치한 이란

    남부 지역에서 탄생한 사산왕조(224-651)는 고대 이란문화의 부활을

    내세웠다.30) 연화문 역시 아케메네스 왕조를 계승하여 다수 출현한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의 6-7세기 추정 은제 호 등에 여성을

    위요하는 장식문帶로 정면형이 출현한다.31) 한편 북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의 연화문처럼 건축물의 상부에 표현된 것도 있다. 5세기 작품으

    로 추정되는 타크에보스탄(Taq-i Bustan)大洞의 아치형 입구에는 a형

    수련이 문의 아치 상부를 따라 문양대를 형성하며 둥글게 장식되어 있

    다.32)

    이상 언급한 이집트, 인도 및 페르시아의 측면형 수련문 가운데 북

    향당석굴 북동 및 중동 연화문과 가장 유사한 것은 이집트와 페르시아

    의 b형 연화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古이집트와 북제는 시기적으로

    나 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이 연화문의 연원을 이집트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게다가 인도에서는 회화나 조각 모두 주로 a형으로

    표현했고, 간략화된 b형과 c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인도 문

    화의 영향으로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페르시아로부터 영향일 가능

    성이 가장 큰데 이 또한 북제가 당시 사산왕조와 사신 왕래 같은 정식

    교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때문에 페르시아 문화의 영

    향을 강하게 받은 소그드인이 주목된다. 그들이 당시 중국 경내에서

    활발한 상업 활동을 펼치고 있었고 북제 조정에서 이런 소그드인들을

    크게 중용하여 당시 북제에서 호화가 두드러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페르시아의 영향을 논하기 전에 중간적 존재로

    29)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5卷 西アジア, 도215.30) 田邊勝美, ササン朝ペルシアの美術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5卷 西アジア), p.321.

    31)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5卷 西アジア, 도289.32) 안나 반잔 지음, 송대범 옮김, 앞의 책, p.176.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14서 소그드 문화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그드인은 아무다리아와 시르다리아 사이의 트랜스옥시아나 지역,

    즉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및 타지크스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민족

    이다. 그들은 인종상 이란 계통의 중앙아시아 古민족에, 언어상으로는

    東이란어 계통에 속하며 역사상 많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와 사산왕조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소그

    드와 페르시아 문화는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은 중국 내에서 출현하는 페르시아계통 문화를 대부분 소

    그드 문화의 범주 안에서 다루어 왔다.

    그런데 두 문화 사이에는 차이 또한 엄연히 존재했다. 종교면에서

    페르시아와 소그드인 모두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지만 둘 사이에는 그

    차이 또한 매우 커서33) 페르시아에서 神像 숭배가 없었던 반면 소그

    드인들은 祆祠에 신상을 공봉했다. 葬制 역시 달라 페르시아인들이 鳥

    葬을 행한 반면 소그드인들은 시체를 개에게 먹이고 남은 인골을 납골

    함에 넣었다.34) 또한 소그드인은 동서남북 교통의 요충에 위치해 여러

    문화를 수용해 많은 습합도상을 만들어냈지만, 원래 도상과 다른 변형

    이 다반사로 이루어졌다.35) 이처럼 두 문화는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

    33) 林悟殊, 火祆敎的葬俗及其在古代中亞的痕跡 (西北民族硏究 1990-1; 羅豊,胡漢之間 -“絲綢之路”與西北歷史考古, 文物出版社, 2004, p.246에서 재인용);葉奕良 編, 伊朗學在中國論文集(第3集) (北京大學出版社, 2003), p.200의 주4.

    34) 曾布川寬, 中國出土ソグド石刻畵像の圖像學 (曾布川寬․吉田豊 編, ソグド人の美術と言語, 臨川書店, 2011), pp.222-223.

    35) 페르시아에서 유행한 四肢에 리본을 맨 유익 천마도상도 소그드인의 유적지

    인 아프라시압 궁전지의 벽화에서는 날개가 소멸하고 귀인이 탄 말로 변화하

    고 있는 점, 소그드 은기인 유익 낙타문 병에 보이는 밖으로 크게 만곡한 가는

    손잡이도, 이 형식 자체의 은기는 페르시아에서 기원하지만, 이미 변형이 가해

    져 안쪽으로 억제된 듯한 느낌으로 완곡한 굵은 손잡이 등은 소그드화한 은기

    로 되고 있는 점, 페르시아 은기에는 항상 가까이 하기 어려운 엄격함이 존재

    하는 반면 소그드 은기에는 항상 친밀한 느낌이 든다는 점 등이다. 게다가 이

    란 지방에서는 천마에 제왕이나 신들과 같은 인물이 올라타는 도상은 발견할

    수 없지만 소그드 지역에서는 이런 도상이 출현한다(曾布川寬, 앞의 글,

    pp.317-322).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15고 차이점 또한 적지 않은데 연화문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6세기에 활동한 소그드인, 또는 소그드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胡人의 무덤이 북제와 북주 경내에서 잇따라

    발굴되었다. 이를 피장자의 사망 순서대로 살펴보면, 북주 천화6년

    (571) 소그드인 大天主 康業묘(2004년 발굴),36) 북주 보정4년(564) 罽賓

    호인 李誕묘(2005년 발굴),37) 同州(섬서 大茘) 薩保를 지냈던 북주 대

    상원년(579) 安伽묘(2000년 발굴),38) 凉州 薩保를 지냈던 북주 대상2년

    (580) 史君묘(2003년 발굴),39) 역시 薩保를 지내고 북제와 북주 등에서

    활동한 수 개황12년(592) 虞弘墓(1999년 발굴)40) 등이 있다. 이밖에 묘

    주의 이름과 그 출신은 알 수 없지만 소그드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 또

    한 상당하여 보스턴미술관, 기메미술관 그리고 쾰른미술관에 분산 소

    장된 傳 하남성 안양 출토 북제 石棺床과 石屛風,41) 산동성 靑州 傅家

    36) 西安市文物保護考古所, 西安市北周康業墓發掘簡報 (文物 2008-6), pp.14-35; 程林泉․張翔宇․山下將司, 北周康業墓志考略 (文物 2008-6), pp.82-84.

    37) 程林泉․張翔宇․張小麗, 西安市北周李誕墓初探 (藝術史硏究 7, 2005),pp.299-308. 이탄은 소그드인은 아니고 罽賓 출신으로 북위 정광 연간에 중국

    에 이주한 바라문종이다. 그러나 그의 석관에는 상반신이 나신인 수호신을 배

    치하고 하단에 조로아스터교의 의식에 사용하는 拜火壇이 선각되어 그도 조로

    아스터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8) 陝西省考古硏究所, 西安北郊北周安伽墓發掘簡報 (考古與文物 2000-6),pp.28-36; 陝西省考古硏究所, 西安發現的北周安伽墓 (文物 2001-1), pp.4-26; 陝西省考古硏究所 編, 西安北周安伽墓 (文物出版社, 2003). 薩保는 ‘商隊首領’을 뜻하는 소그드어 s’rtp’w의 음역으로서, 소그드인 등 서역으로부터 중

    국 경내에 이주한 사람들의 취락을 관리하도록 정부에서 임명한 관리이다. 북

    조나 수에서는 薩保, 薩甫로, 당대에는 薩寶로 불렸다.

    39) 西安市文物保護考古所, 西安北周凉州薩保史君墓發掘簡報 (文物 2005-3),pp.4-33.

    40) 山西省考古硏究所․太原市考古硏究所․太原市晋源區文物旅遊局, 太原隋代虞

    弘墓淸理簡報 (文物 2001-1), pp.27-52; 張慶捷, 太原隋代虞弘墓石槨浮雕的初步考察 (巫鴻 主編, 漢唐之間文化藝術的互動與交融, 文物出版社, 2001),pp.3-28; 姜伯勤, 隋檢校薩寶虞弘墓石槨畵像石圖像程序試探 (巫鴻 主編, 앞의

    책), pp.29-50; 山西省考古硏究所 等編, 太原隋虞弘墓 (文物出版社, 2005).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16발견 북제 무평4년(573) 화상석,42) 최근 발표된 일본 MIHO미술관 소

    장 석병풍,43) 기메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Vahid Kooros 소장의 6세기

    석병풍과 석관상44), 그리고 甘肅 天水 石馬坪 수대 무덤 출토 석병

    풍45) 등이 있다.

    여기에 표현된 畵像은 소그드인들이 가져온 模本에 기초하여 중국

    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 유물들에서 수련

    문을 발견하기 어렵다. 비록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목에 리본을 맨 새, 다리 등에 리본을 맨 말, 연주문으로 테두리를 장

    식하는 기법, 그리고 사산왕조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 관련 제재 등이

    상당수 출현함에도 불구하고 수련문은 아직 없다. 특히 이곳에 다수

    출현하는 유장이나 건축물의 지붕 상부에는 보주만 표현하거나 보주와

    함께 전통적 연화문(도11) 혹은 草葉文 등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蓮

    池에도 전통적 연화문만 나타날 뿐 페르시아에서 흔히 나타나는 정면

    형이나 측면형 수련은 없다.

    게다가 소그드인이 거주하던 중앙아시아의 판지켄트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등에서도 b나 c형의 측면형 수련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동안 잇따른 발굴로 소그드 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b나 c형의 측면형 연화문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북향

    41) Gustina Scaglia, “Central Asians on a Northern Ch’I Gate Shrine” (

    Artibus Asiae, vol.XXI, 1958). 정면과 좌우의 병풍을 구성하는 화상 석판이보스톤미술관(2건)과 기메미술관(1건)에, 전면에 돌출된 석궐이 쾰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원래 하나의 세트로서 20세기 초 하남 彰德府(현재의

    安陽)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42) 夏名采, 益都北齊石室墓線刻畵像 (文物 1985-10), pp.49-54; 夏名采, 靑州傅家北齊線刻畵像補遺 (文物 2001-5), pp.92-93; 鄭岩, 靑州北齊畵像石與入華粟特人美術 -虞弘墓等考古新發現的啓示 (巫鴻 主編, 앞의 책), pp.73-109;

    姜伯勤, 靑州傅家北齊畵像石祆敎圖像的象徵意義 -與粟特壁畵的比較硏究 (藝術史硏究 5, 2003), pp.169-188.

    43) B.I.マルシャ-ク글, 稻垣肇 譯, MIHO MUSEUMの棺床屛風と六世紀後半の

    中國․ソグド人藝術 (MIHO MUSEUM硏究紀要 4, 2004), pp.32-42.44) 曾布川寬, 앞의 글, pp.230-239.

    45) 天水市博物館, 天水市發現隋唐屛風石棺床墓 (考古 1992-1), pp.46-54.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17

    사군묘 석곽 부조의 연화 장식

    당석굴 북동과 중동 수련문의 직

    접적 연원으로 소그드 문화를 상

    정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현

    재까지 출토된 유물의 상황으로

    미루어 북향당석굴 수련문은 소그

    드라는 중간 매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페르시아문화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 문화와의 연관성은 북

    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의 수련문이 페르시아의 왕과 왕자의 손에 든 연

    화와 그 표현법이 매우 유사한 데서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연화는

    측면형 수련을 중앙에 크게 표현하고, 그 하부 좌우에 각각 조그맣게

    연봉우리를 표현하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꽃받침처럼 보인다(도10).

    때문에 윤곽의 형태만 보면 북동과 중동 연화의 하단부와 상당히 유사

    하다. 수련 아래쪽을 좌우로 벌려 꽃받침처럼 표현한 형태는 북동과

    중동에만 있으며 상술한 업성지역 기타 석굴에서는 출현하지 않는다.

    Ⅳ. 睡蓮系 蓮花文을 통해 본 北齊 서역문화

    수용의 一面

    북제의 상층문화는 일반적으로 ‘胡化’ 혹은 ‘西胡化’로 칭해질 만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호인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상인으로서, 혹은 歌舞樂工으로서 북제 정권의 상층에 진입하기도 하

    였는데, 때문에 ‘商胡丑類’ ‘西域丑胡’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46). 그런

    46) [唐]李百藥 撰, 北齊書(中華書局), p.187; 北齊書 恩倖傳 , p.685(이후 인용하는 중국 정사는 모두 中華書局 출판본을 사용했다). 한편 북제 호인들의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18데 지금까지 북제의 호화와 관련해서 주목되어 온 것은 소그드인이었

    다.47) 게다가 동위와 북제가 사산왕조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북제에서 나타나는 페르시아 문화 요소는 모두 소

    그드 문화의 영향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북제 天保3년(552) 문선

    제가 魏收에게 명해 편찬한 정사 魏書의 西域傳 에서는 소그드(粟特)와 페르시아(波斯)를 분리해 부르고 있어48) 당시 두 지역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제 무성제의 아들인 南陽王 綽이

    페르시아 개를 매우 좋아했고49) 후주가 ‘宮人들에게 白越布로 折額하

    는 것을 좋아했다’50)는 기록은 북제에 페르시아 문화가 일상생활 깊이

    활동과 그들에 대한 북제인 및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에 대해서는 畢波, 中古中國的粟特胡人 -以長安爲中心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11), pp.72-74 및 榮新江, 中古中國與外來文明 (三聯書店, 2001), pp.302-306을 참조. 북제와 달리북주에서는 정치 무대에서 활약한 호인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은데 북제의 胡

    漢문제에 대해서는 蕭璠, 東魏北齊內部的胡漢問題及其背景 (臺灣學者中國史硏究論叢 -社會變動,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2005, pp.160-185; 原載 食貨月刊 6-8, 1986)를 참조.

    47) 중국 정사에선 이들에 대한 호칭이 시대마다 달랐는데, 漢書에서 ‘康居屬國’ 등으로 불렀으며 魏書에서 비로소 소그드의 음사인 ‘粟特’으로 부르기 시작했다(余太山 撰, 兩漢魏晋南北朝正史西域傳要注, 中華書局, 2005, p.523). 後漢書․西域傳과 晋書․西戎傳에서 소그드는 ‘粟弋’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粟特’으로 표기한 가장 오래된 예는 前秦 建元3년(367)에 馮翊護軍인 鄭能

    邈이 세운 (八瓊室金石補正 권10)에 보인다. 이 비문가운데 前秦의 馮翊護軍이 관할하는 12종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

    운데 ‘粟特’의 어구가 보인다(森部 豊, ソグド人の東方活動と東ユラシア世界の歷史的展開, 關西大學出版部, 2010, p.32의 주27). 수당시대 사료에서는 ‘昭武’諸國, 혹은 ‘昭武九姓’ 등으로 불렀다(榮新江, 從撒馬爾干到長安-中古時期粟特人的遷徙與入居, 從撒馬爾干到長安-粟特人在中國的文化遺迹, 北京圖書館出版社, 2004, p.3).

    48) 魏書․西域傳은 이미 유실되었으나, 당의 李延壽가 편찬한 北史․西域傳에 수록되어 있다. 北史․西域傳은 魏書․西域傳, 周書․異域傳, 隋書․西域傳을 토대로 편찬하였다(余太山 撰, 앞의 책, p.2). 한편 당대 편찬된周書․異域傳, 北史․西域傳, 隋書․西域傳, 梁書․西北諸戎傳, 南史․西域諸國傳 등도 두 곳을 구분해 부르고 있다.

    49) 北齊書 권12 列傳 제4․南陽王綽傳 , p.159.50) “後主好令宮人以白越布折額, 狀如髽幗.”(隋書 권22 五行志 上 , p.630). 연구에 의하면 白越布는 ‘白越諾布’를 지칭하는데, 이는 백색의 錦緞인 ‘越諾布’로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19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북제 하청3년(564)에 사망, 업성의 서

    남쪽에 묻힌 爾朱元靜의 墓誌에는 爾朱元靜이 “속세의 인연을 끊고 도

    에 입문했는데 그 믿음이 마치 페르시아의 여성과 같다”51)고 하여 당

    시 일정한 페르시아觀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제에서 이처럼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보이는 것은 북위 멸망

    후 낙양의 40만호가 모두 북제 도성으로 이주한 것과 관련이 있다. 북

    위는 이미 평성시대부터 페르시아와 정식 외교관계를 가져 페르시아에

    서 10차례의 사신이 오고 또한 북위에서도 페르시아에 사신을 보내기

    도 했다.52) 선학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 가운데는 페르시아 상인들이

    國使를 사칭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북위와 페르시아 사이에 직접

    왕래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또한 魏書․西域傳에는 태평진군 연간(440-450)에 북위에서 韓羊皮를 페르시아에 사신으로 보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페르시아의 왕이 사신을 보내 훈련된 코끼리와 珍物 등

    을 보냈는데, 于闐을 경유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53)

    때문에 북위 경내에서 많은 양의 페르시아 은화와 페르시아제 은반,

    페르시아제 금반지 등이 출토되고 있다.54) 물론 대부분은 당시 실크로

    드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소그드 상인이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지만,

    서 페르시아가 원산지라 한다(姚崇新, 中古藝術宗敎與西域歷史論考, 商務印書館, 2011, p.318-319).

    51) “遂情断虑, 舍俗入道. 知清云/阴树, 识净水图光. 四心将发, 三或/□遣. 信若波

    斯之女, 定似中天之/姨. 方寻明晦, 而求至理, 岂若春埃,/罗斯风烛. 春秋七十有二,

    从□物/化. 粤以大齐河清三年岁在甲申/正月庚申二日辛酉, 窆於邺城西/南柏山之阳, 高胜之地.”(밑줄은 필자. 赵超, 漢魏南北朝墓志彙编, 天津古籍出版社,2008, p.418).

    52) 魏書를 보면, 문성제 太安원년(455), 문성제 和平2년(461), 헌문제 天安 원년(466), 헌문제 황흥2년(468), 효문제 承明 원년(476), 선무제 정시4년(507), 효

    명제 희평2년(517), 효명제 신구 원년(518), 효명제 정광2년(521)과 정광3년

    (522) 등에 페르시아 사신이 북위에 왔다. 이 가운데 낙양 천도 이전이 5번, 천

    도 이후가 5번이다. 북위와 페르시아의 외교 왕래에 대해서는 魏書의 해당帝紀와 西域傳 참조.

    53) 魏書 권102, 列傳 90․西域傳 , p.2263.54) 羅豊, 앞의 책, pp.74-75.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20양국의 외교 사절 교환 과정에서 페르시아 상인이 직접 가져온 경우도

    존재하였다.55) 특히 북위 河間王 元琛이 秦州자사로 있을 당시 “서역

    에 사신을 보내 명마를 구했는데, 멀리 페르시아까지 이르러 천리마를

    얻었다”56)는 기록은 정식 사절 이외에도 북위가 페르시아와 무역했음

    을 잘 보여준다. 그는 또한 종실을 만날 때 여러 寶器를 진설했는데,

    서역에서 가져온 백여 개의 금병과 銀瓮, 그리고 수정발, 마노배, 유리

    완 등이 있었다.57) 北史․西域傳과 周書․異域傳에는 수정, 마노,유리의 산지로서 페르시아를 들고 있어58) 원침이 소유한 진귀한 그릇

    가운데는 페르시아에서 가져온 것도 다수 있었을 것이다.

    낙양은 국제도시였다. 洛陽伽藍記는 당시 ‘낙양에 거주하는 서역인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북위에 귀화한 사람만도 1만여 가에

    이르렀다’고 했는데,59) 이들 가운데 페르시아인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洛陽伽藍記에는 이국적인 용모를 한 호인, 혹은 이국적인물건을 보고 페르시아를 연상하는 당시 상황을 전하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낙양가람기 권3에는 ‘永橋南道 동쪽에 獅子坊과 白象坊이 있는데,백상은 영평2년 乾羅國에서, 그리고 사자는 페르시아 胡王이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60) 그러나 魏書․西域傳과 魏書․孝莊帝紀에 의하면

    55) 王銀田, 北朝時期絲綢之路輸入的西方器物 (山西省北朝文化硏究中心, 4-6世紀的北中國與歐亞大陸, 科學出版社, 2006), pp.78-80. 하북성 정현의 탑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페르시아 은화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함은 북위

    효문제 태화5년(481)에 황제가 매납한 것인데, 481년 이전 북위에 5차례의 페

    르시아 사신이 왔다. 이 때 궁중에 헌상된 화폐를 정현 사리탑에 매납한 것으

    로 추정하고 있다.

    56) “琛在秦州, 多無政績, 遣使向西域求名馬, 遠至波斯國, 得千里馬, 號曰追風赤

    驥.”([東魏]楊衒之 撰, 周祖謨 校釋, 洛陽伽藍記校釋, 上海書店出版社, 2000,p.149).

    57) 洛陽伽藍記校釋 권4, p.150.58) 北史 권97, 西域傳 , p.3222; 周書 권50, 異域傳 , p.920.59) 洛陽伽藍記校釋 권3, p.117.60) “永橋南道東有白象獅子二坊. 白象者, 永平二年乾羅國胡王所獻. 皆設五綵屏風

    七寶坐床, 容數人, 真是異物. 常養象於乘黃曹, 象常壞屋毁牆, 走出於外. 逢樹即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21당시 사자를 보낸 것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염달국, 즉 에프탈이다. 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楊衒之가 사자를 페르시아왕의 조공품으로 기

    록한 것은 당시 낙양에서 그렇게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사한 오류는 또 있다. 권1에는 영녕사를 찬탄하는 보리달마의 고

    사를 수록했는데, 양현지는 보리달마를 ‘페르시아에서 온 호인’으로 적

    고 있다.62) 달마는 양 무제 보통 원년(520) 배를 타고 廣州에 이르렀으

    나, 바로 그해에 북위로 와 숭산 소림사에 주석했던 남인도 출신의 승

    려이다63). 洛陽伽藍記는 547년 동위의 楊衒之가 공무로 낙양에 들렀다가 폐허가 된 옛 왕조의 도성을 보고 저술한 것이므로 6세기 북조인

    들의 인식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양현지는 낙

    양에서 보리달마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양현

    지 같은 관리가 달마를 페르시아인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은 낙양성의

    많은 사람들 또한 그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역적 외모와 서역의

    산물을 보며 페르시아를 떠올리는 북위인들의 사례는 마치 20세기 중

    拔, 遇牆亦倒. 百姓驚怖, 奔走交馳. 太后遂徙象於此坊. 獅子者, 波斯國胡王所獻

    也. 為逆賊万侯醜奴所獲, 留於寇中. 永安末, 醜奴破滅, 始達京師. 莊帝謂侍中李

    或曰: “朕聞虎見獅子必伏, 可覓誠之.” 於是詔近山郡縣捕虎以送, 鞏縣山陽並送二

    虎一豹. 帝在華林園觀之. 於是虎豹見獅子, 悉皆瞑目, 不敢仰視. 園中素有一育熊,

    性甚馴, 帝令取試之. 虞人牽盲熊至, 聞獅/(1013a)子氣, 驚怖跳踉, 曳鎖而走. 帝大

    笑. 普泰元年, 廣陵王即位, 詔曰: “禽獸囚之則違其性, 宜放還山林.” 獅子亦令送

    歸本國. 送獅子者以波斯道遠, 不可送達, 遂在路殺獅子而返. 有司糾劾, 罪以違旨

    論. 廣陵王曰: “豈以獅子而罪人也.” 遂赦之.” (밑줄은 필자. 洛陽伽藍記校釋,pp.117-118).

    61) 魏書 권102, 列傳 90․西域傳 에서는 “염달국이 정광 말년에 사신을 보내 사자를 바쳤다. 高平에 이르러 萬俟醜奴를 만나 구류되었다. 추노가 평정

    되자 京師로 보냈다”(p.2279)고 기록했으며, 魏書 권10 孝莊帝紀 는 “영안3년 6월 염달이 사자 한 마리를 바쳤다”(p.265)고 적고 있다.

    62) “時有西域沙門菩提達磨者, 波斯國胡人也. 起自荒裔, 來遊中土. 見金盤炫日, 光

    照雲表, 寶鐸含風, 響出天外, 歌詠讚歎, 實是神功. 自云, 年一百五十歲, 歷涉諸

    國, 靡不周遍, 而此寺精麗閻浮所無也. 極物境界, 亦未有此. 口唱南無, 合掌連日.”

    (밑줄은 필자. 洛陽伽藍記校釋 권1, pp.11-12).63) 續高僧傳 권16, T50, No. 2060, p.551中下; 佛祖統紀 권38, T49, No.

    2035, p.350上; 洛陽伽藍記校釋 권1의 校釋부분, pp.11-12.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22반 한국에서 서양인의 외모를 한 사람은 모두 미국인으로 인식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물건은 모두 美製로 인식했던 것과 유사한 이치라 하

    겠다.

    6세기 북조인들의 페르시아에 대한 관심은 正史에서도 읽을 수 있

    다. ‘波斯’라는 단어가 중국 사서 가운데 가장 먼저 출현하는 것은 魏書로,64) 여기에는 정치는 물론 토양과 특산물까지 페르시아에 대해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구에 의하면 魏書 페르시아관련 기록이 상당히 사실에 근거한 것이어서,65) 이런 정보가 페르시아

    사신이나 북위 경내에서 활동한 페르시아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유래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晋書 이하 위진남북조시대 정사의‘서역전’에 기재된 서역제국의 官制는 高昌國과 페르시아 및 大秦에 집

    중되어 있다고 한다.66) 다시 말해 남북조시대에 페르시아에 대한 관심

    이 증가하고 또한 페르시아 상인들의 중국 내 상업활동이 매우 활발해

    짐으로써 페르시아에 대한 이해 또한 상당히 정확해졌다고 할 수 있

    다.67) 그리고 이처럼 북위에서 형성된 페르시아觀은 북위 멸망 후 낙

    양 인구의 이동에 의해 고스란히 업성에 이식되었을 것이다.

    수 개황12년 매장된 虞弘(534-592)의 사례는 북제의 페르시아 문화

    접촉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해준다. 虞弘은 13세에 柔然의 사

    64) 石云濤, 三至六世紀絲綢之路的變遷 (文化藝術出版社, 2007), p.202.65) 石云濤, 앞의 책, p.205.

    66) 余太山, 兩漢魏晋南北朝正史西域傳硏究 (中華書局, 2003), p.406.67) 마찬가지로 6세기 페르시아에서도 중국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는 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페르시아 政論書 파스나마(Farsnama)에는 6세기 중반 사산조 페르시아를 통치한 호스로 아누히르완(Khosraw

    Anoshiravan, 재위 531-579)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왕은 일정한 공중 장소에서 몇 개의 寶座를 늘어놓는데,

    그의 왼쪽에 중국 황제를 위해, 그의 뒤에는 에프탈 국왕을 위해, 그리고 그의

    오른쪽에는 비잔틴 황제를 위해 보좌를 놓았다고 한다(Frantz GRENET, 粟

    特人的自畵像 , 粟特人在中國 -歷史, 考古, 語言的新探索(法國漢學 10), 中華書局, 2005, p.308). 다시 말해 6세기 중반 페르시아의 세계 인식은 남쪽의 페

    르시아 황제를 중심으로 동쪽에 중국, 북쪽에 에프탈, 서쪽에 비잔틴을 그려놓

    고 있는 것이다.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23자로 페르시아와 吐谷渾을 여러 차례 다녔으며, 문선제 당시 유연의

    사자로 북제에 온다. 이후 돌아가지 않고 북제에 머물며 관직을 역임

    했고, 북주와 수에서도 祆祠와 외교 사무를 담당했다.68) 그의 族屬은

    아직도 정론이 없는데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 소그드 문화권에 속하

    는 호인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의 유물에는 페르시아적 요소가 매우

    강해 그가 페르시아 사행 등을 통해 페르시아 문화를 깊이 접촉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69) 묘지명에는 문선제가 그의 귀국을 不許했다

    고 했는데, 북제 황실은 비록 간접적이지만 이처럼 우홍 같은 사람들

    을 통해 지속적으로 페르시아 문화와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돌궐이나 吐谷渾 등을 경유해 북제에 들어온 호상들도 그

    규모가 상당했는데, 이들은 하북과 산동지역 등 북제 영내의 비단 특

    산지를 장악, 대 서방 비단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70) 당시 호상 대부

    분은 소그드인으로 추정되지만, 이 가운데 페르시아인 또한 존재했을

    것이다.71) 그러므로 동위․북제와 페르시아 사이에 외교사절 같은 공

    식 교류가 없었을지라도 북위에서부터 이어진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지속되었고, 민간 교류 또한 단절되지 않았으므로 북향당석굴에 페르

    시아 수련문이 등장할 수 있던 조건을 충분이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68) 太原隋虞弘墓, pp.89-93.69) 張慶捷, 虞弘墓石槨圖像中的波斯文化因素 (伊朗學在中國論文集 3), pp.237

    -255.

    70) 각각 550년과 567년 매장된 茹茹公主와 李希宗의 무덤을 비롯해 6세기 하북

    지역에서 상당수의 동로마 화폐가 나왔는데, 이의 중국 유입에는 소그드 상인

    과 페르시아 상인의 역할이 비교적 컸다(羅豊, 中國境內發現的東羅馬金幣 ,

    榮新江․李孝聰 主編, 中外關系史-新史料與新問題, 科學出版社, 2004,pp.49-78).

    71) 호인들은 安陽, 鄴城, 幷州 등 북제 경내에서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薩

    保가 있어 이들을 통솔했다. 특히 업성에는 이들 薩保를 총괄하는 최고 수령인

    大薩保가 거주하고 있었다(榮新江, 中古中國與外來文明, 三聯書店, 2001,pp.100-101; 榮新江 解說, , 從撒馬爾干到長安 -粟特人在中國的文化遺迹, 北京圖書館出版社, 2004, pp.118-119; 森部 豊, 앞의 책, pp.34-36).한편 隋書․百官志 中에는 북제와 관련해 “典客署, 又有京邑薩甫二人, 諸州薩甫一人”(p.756)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24있다.

    Ⅴ. 北響堂石窟 睡蓮系 蓮花文의 象徵性

    연꽃 문화는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는 수련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기원전 29세기 이집트 제4왕조시대부터 수련문이 출현

    했고, 上이집트에서는 수련을 그들의 紋章으로 사용했다.72) 아침에 태

    양과 함께 피었다가 해가 지면 꽃잎을 닫는 성격으로 인해 수련은 이

    집트에서 태양신, 혹은 태양과 그 光輝를 상징한다.73)

    인도의 연화문 역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이미 기원전 20세

    기 인더스 문명에서부터 출현한다. 현재 보스턴 미술관 소장 지모신의

    머리를 장식한 꽃은 연화로서74) 생명의 근원이나 풍요를 표현한 것이

    다. 이후 리그 베다에는 ‘창조의 신 범천(브라흐마)이 비슈누의 배꼽에서 피어난 연화 위에서 탄생한다’고 기록해 연화가 여전히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교의 발생 이후 ‘白蓮’은 곧 석

    존을 비유하는 단어가 되었으며, 나아가 ‘최고의 바른 진리’를 의미하

    였고 광명을 상징하여 광배나 대좌에 장식되기도 했다.75) 이처럼 많은

    72) 古代オリエント博物館 編, シルクロ-ド: 華麗なる植物文樣の世界 (山川出版社, 2006), p.9.

    73) 若宮信晴, 西洋裝飾文樣の硏究 (文化出版局, 1980), p.288(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 2001, p.248서 재인용). 이집트 창세신화에서는 원초의 물로부터 거대한 수련이 나타나고, 여기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으며, 死者의 書 제15장에는 태양신 호루스가 연화에서 화생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기록하

    고 있다(古代オリエント博物館 編, 앞의 책, p.10). 또한 死者의 書에는 수련이 冥界의 신이면서 무량한 수명을 주는 신의 표지로 기록되어 있다(阪本右二,

    蓮, 法政大學出版局, 1996년 4刷(1977년 初印), pp.74-75). 때문에 이집트에서수련은 명계의 신에게 바치는 공양품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바로 재생

    과 부활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古代オリエント博物館 編, 앞의 책, p.12).

    74) 阪本右二, 앞의 책, p.89.

    75) 阪本右二, 앞의 책, pp.96-99. 한편 불교에서 연화는 빛을 상징하여 두광에

    표현되었는데, 연화두광이 인도에서 본격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2세기 후반-3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25상징성을 가진 연화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이 되어 다양하게 표

    현되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도 불교미술의 연화문은 대

    부분 넬룸보속의 전통적 연화문이며, 측면형 수련문의 경우도 있으나

    사실적인 a형이 다수며, 은행잎처럼 간략한 b형과 c형은 찾기 어렵다.

    고대 중국의 불교미술에서 나타나는 연화는 대부분 넬룸보속의 전

    통적 연화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흐름을 깨고 북향당석굴 북동과 중

    동에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수련문이 유장의 상부 장식으로

    출현하고 있다. 원래 유장의 상부에 연화문을 장식하는 것은 고대 중

    국에서 지붕 혹은 傘蓋의 상부에 연화를 장식하던 데서 유래하는 것으

    로 그 연원이 전국시대 이전까지 올라간다.76) 연화를 지붕이나 천장

    중심에 장식하는 것은 하늘 또는 태양의 光輝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

    다.77) 다시 말해 불교 유입 이전부터 중국에서 연화는 하늘 연못에 피

    는 꽃으로서 광휘를 표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불교의 연화 역시 광명

    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 불교 유입 이후 세속과 불교미술 모두에서 연

    화문이 다양하게 출현했다. 그런데 남북조시대 후기에 이르러 유장 상

    부에는 도안화되고 비사실적 문양이 연화를 대체하거나, 불상의 장엄

    에서도 보주가 연화를 대체하는 현상이 증가하여78) 연화가 가진 광명

    의 상징성이 잊히고 단순한 장식문양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북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의 유장 상부에 기존의 연화문과 다

    른 수련문이 갑자기 출현한 것은 이 연화문이 단순한 장식문양이 아니

    세기경이며(林良一, 앞의 책, pp.82-83) 광명을 숭상하는 고대 페르시아문화에

    서 유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伊藤義敎, 佛光とイラン要素 , ゾロアスタ-硏究, 岩波書店, 1979, pp.361-409; 曾布川寬, 앞의 글, p.272에서 재인용).

    76) 기원전 5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기 잔편이 山西省 長治의 汾水嶺에서 출

    토했는데, 지붕 위에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2001, p.157).

    77) 林巳奈夫, 中國古代物における蓮の花の象徵 (漢代の神神, 臨川書店, 1988;原載 東方學報 59, 1987), pp.219-280; 서정록, 앞의 책, pp.154-172.

    78) 蘇鉉淑, 中國 南北朝時代 寶珠文 연구 -墓葬美術을 중심으로 (美術史論壇 24, 2007), pp.63-95.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26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선택되었음을 시사한다. 첫 번째로 가능한

    가설은 ‘하늘의 빛(光輝)’이라는 중국 고래의 상징성을 회복한 것, 즉

    復古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특히 문선제의 능묘로 추정되는 무덤에

    서 복고풍의 도제 명기가 출현하여 그런 가능성을 높여준다.79) 그러나

    불교 전래 이전 중국 연화문은 꽃잎이 비교적 넓은 정면형으로서 북동

    이나 중동에서 볼 수 있는 측면형 수련문은 출현하지 않아 전통 관념

    의 회복으로 보기 어렵다. 대신 연화문의 형태가 페르시아 수련문과

    매우 유사하고 당시 북제 황실이 페르시아를 비롯한 西胡문화에 경도

    되었으므로 페르시아 연화문을 채택하며 그 상징성까지 수용했을 가능

    성이 크다.

    페르시아에서 연화는 왕과 왕실의 표지이다.80) 페르세폴리스는 다리

    우스 대왕이 고대 이란의 新年, 즉 春分에 屬州의 대표자를 모으고 충

    성을 서약하기 위한 의식의 祭場을 주요 목적으로 조영된 것으로 추정

    되고 있는데,81) 여기에 표현된 , , 82) 등의 부조에서 왕과 왕자들은 손

    에 연화를 들고 조공 사절단을 맞고 있다. 그리고 왕을 향해 가는 에서는 고관들이 왕에게 바칠 공양물로 연화를

    손에 들고 있다. 한편 수사 출토의 정치적 성격이 농후한 기념비적 조

    각인 83)에서도 왕은 한 손에 연화를 쥐고 있다.

    79) 문선제의 능묘로 추정되는 河北省 臨漳縣 灣漳大墓에서는 20개의 鼎, 33개의

    鍾, 21개의 磬 등 東周시대 청동기 형식을 가진 도제 명기들이 발견되었다. 巫

    鴻은 이를 단순한 방고적 취향이 아니라 자신이 개창한 왕조를 고대문화의 연

    장선상에 놓고자 하는 정치적 행위로 해석했다(巫鴻, 中國藝術和視覺文化中的

    “復古”模式 , 巫鴻 著, 梅枚․肖鐵․施杰 等譯, 時空中的美術 -巫鴻中國美術史文編二集, 三聯書店, 2009. p.11. 이 글은 Wu Hung, “Patterns of Fu gu(Returning to the Ancient) in Chinese Art and Visual Culture”, Wu Hung,

    ed., Reinventing the Past: Archaism and Antiquarism in Chinese Art andVisual Culture, Chicago: Paragon Books에 게재됨).

    80) 戴爾 · 布朗 主編, 王淑芳 飜譯, 波斯人: 帝國的主人 (華夏出版社, 2002),p.99.

    81) 林良一 解說, ペルシアの遺寶1 -彫刻·建築 (新人物往來社, 1978), p.167.82)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5卷 西アジア, 도 213 · 215.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27그런데 왕실의 표지인 연화는 또한 광명을 상징하기도 했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태양신 미투라는 보통 광명을 표현한

    두광을 두르고 있는데,84) 타크에보스탄의 4세기 마애부조인 에서 미투라는 연화 위에 서있다. 또한 프랑스 기메

    미술관에 전시된 개인 소장의 북조 석병풍은 소그드인 혹은 페르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호인의 부장품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여기 묘사된 태

    양신은 높이 치켜든 두 손에 각각 연화를 쥐고 있다.85) 태양신의 대좌

    로, 혹은 지물로 표현된 연화는 바로 태양신의 속성인 광명을 상징하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산왕조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는데 조로아스터교는 光明

    과 암흑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진 종교로서 광명을 매우

    중시하여 사후 낙원을 무량광명의 세계로 묘사했다. 때문에 최고신인

    아후라 마즈다는 일반적으로 광명을 상징하는 둥근 環(후아르나,

    xvarnah, 光輪)을 손에 들고 있는데, 간혹 후아르나 대신에 연화를 든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86) 후아르나는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사

    산왕조의 수많은 부조에서 아후라 마즈다가 페르시아

    왕에게 왕권신수의 표지로서 바로 광륜인 후아르나를 건네주고 있다.

    페르시아에서 왕권은 신이 부여한 권리로서 ‘靈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87) 광명의 授受에 의해 왕권의 정통성이 생기는 것이다. 때문에

    페르시아 미술에서는 후아르나 외에 聯珠文에서도 보듯 빛의 속성을

    가진 문양들이 왕권 또는 왕실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88) 때문에 연화

    83)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5卷 西アジア, 도 216 및 해설.84) 태양신 미투라와 그의 도상에 대해서는 曾布川寬, 앞의 글, pp.236-239 참조.

    85) Catherine Delacour · Pénélope Riboud 글, 施純琳 譯, 巴黎吉美博物館展圍

    屛石榻上刻繪的宴飮 (4-6世紀的北中國與歐亞大陸, 科學出版社, 2006),pp.108-125. 태양신이 든 연화 가운데 왼손의 연화는 측면형 수련문과 유사하

    나 매우 간략하여 불분명하다.

    86) R. W. Ferrier ed., The Arts of Persia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London, 1989), p.44의 도25.

    87) [伊朗]阿卜杜 · 侯賽因 · 扎林庫伯 著, 張鴻年 譯, 波斯帝國史 (復旦大學出版社, 2011), p.345.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28역시 왕실의 표지임과 동시에 광명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북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은 북제 개창황제인 문선제가 자신의 정치

    적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해 조성한 기념비적 건축물이었다. 때문에 다

    른 지역 석굴들에는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둥근 지붕을 한 단층

    탑 형태의 외관은 아육왕의 팔만사천 사리탑 건립을 모방한 것으로 문

    선제가 전륜성왕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보주를 주두 위에 얹은 珠柱는

    광명의 불국토를 상징하고, 나아가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영토를 상징

    했다.89) 때문에 두 석굴의 연화문도 단순한 장식문양이 아니며 ‘광명과

    왕실의 표지’라는 페르시아 연화문의 상징성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크

    다.

    또한 북동과 중동을 비롯해 업성 지역 석굴의 유장감 위에 빛을 상

    징하는 수련문이 표현된 것은 당시 정토사상의 흥기와도 밀접한 관련

    이 있다. 남북조시대 후기는 末法思想의 흥기로 말미암아 佛이 상주하

    는 佛國 정토, 즉 불국토에 대한 희구가 아주 강하였고 이에 따라 점

    점 불국 정토의 장엄을 묘사하는 예술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교 경전에 묘사된 불국토는 어둠이 없는 광명의 세계이다.90) 觀無量壽經 卷1은 불국토는 ‘칠보로 만들어지거나 혹은 국토가 모두 연화로 되어 있으며, 이곳은 모두 청정하고 또한 광명이 있다’91)고 하여 광

    88) 道明三保子, ササンの連珠圓文錦の成立と意味 (シルクロ-ド美術論集, 吉川弘文館, 1987), pp.153-176.

    89) 蘇鉉淑, 東魏北齊寶塔文硏究 (藝術史硏究 8, 廣州 中山大, 2006), pp.323-363; 蘇鉉淑, 北響堂石窟 北洞의 轉輪聖王 상징 (美術史學硏究 255,2007), pp.167-196; 蘇鉉淑, 響堂山石窟 寶珠文 연구 -珠柱를 중심으로 (佛敎美術史學 4, 2006), pp.7-36; 蘇鉉淑, 響堂石窟火焰寶珠紋硏究 -以柱頭上的火焰寶珠紋爲中心 (藝術與科學 5, 淸華大學出版社, 2007), pp.24-38.

    90) “諸佛土……皆有光名”(觀無量壽佛經, T12, No.365, p.341中). 그런데 많은학자들의 지적에 의하면 정토신앙에서 강조되는 무량무애의 광명은 조로아스

    터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상낙원인 天界는 무량한 광명이

    무한하게 빛나는 곳이다 (田辺勝美, タ-ク․イ․ブスタ-ン大洞彫刻硏究 -圖

    像學及びイコノロジ-的試論 , 岡山市立オリエント美術館硏究紀要 2, 1982,pp.79-84; 曾布川寬, 앞의 글, p.248 주33에서 재인용).

    91) “十方諸佛淨妙國土, 皆於中現, 或有國土七寶合成, 復有國土純是蓮花, 復有國土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29명 불국세계의 주요 장엄의장으로서 보주와 연화를 들고 있다.

    그런데 불경에 의하면 불국토에는 등급이 있어 광명이 클수록 불국

    토의 등급도 높다.92)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북향당석굴 북동과 남동은

    중국의 어느 석굴보다 보주문이 많고, 또한 광명을 상징하는 수련문이

    역시나 광명을 상징하는 커다란 보주와 함께 출현해 두 석굴을 가장

    뛰어난 정토로 구현하고 있다. 게다가 두 석굴의 수련문은 형태면에서

    업성의 다른 석굴의 수련문보다 훨씬 화려하다. 광명을 상징하는 보주

    가 연화 아래 추가되어 광명의 의미를 더욱 강화하여 어느 석굴보다

    많은 빛으로 충만해 있다. 상술했듯이 유장의 장식은 신분에 따라 달

    랐으므로 이와 같은 장식성의 차이는 또한 북동과 중동의 조영자가 황

    제라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93) 그러므로 유장감 위의 수련문은

    단순한 장식문양이 아니라 이 석굴이 황실석굴이며, 나아가 어느 곳보

    다 밝은 빛으로 가득 찬 불국토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나아가 북제 황

    실이 다스리는 영토 또한 불국토임을 드러내주는 정치적 장엄의장이라

    하겠다.

    Ⅵ. 맺음말

    북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은 북제 초대 황제인 문선제가 조영한 중심

    如自在天宮, 復有國土如頗梨鏡, 十方國土皆於中現. 有如是等無量諸佛國土嚴顯可

    觀. 令韋提希見, 時韋提希白佛言, 世尊, 是諸佛土, 雖復清淨皆有光明.”(T12, No.

    365, p.341中)

    92) “諸天宮殿七寶光明 漸下漸劣.”(經律異相 권1 三大災 , T53, No.2121, p.5上).

    93) 황실석굴인 북동과 중동 수련문과 기타 석굴 수련문의 차이와 유사한 현상을

    페르시아 연화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왕과 왕자가 든 연화가 왕실의 상징으

    로서 가운데 측면형의 연화, 그리고 그 좌우에 각각 조그만 연봉우리를 함께

    묘사한데 반해 고관들이 든 연화는 공양물로서의 성격이 강해 측면형 한 송이

    만을 손에 들고 있다. 이런 문양상의 차이가 신분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30주굴로서 중심주를 帷帳龕 형식으로 꾸몄다. 그런데 이 유장감 상부에

    낯선 문양이 보주와 함께 묘사되었다. 본 연구는 먼저 이 문양이 무엇

    을 표현했는지 도상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북제 문화교류의

    일면을 살펴보았으며, 나아가 조영자의 신분이 석굴 조성에 어떻게 개

    입하는지 문양의 정치적 상징성에 대해 추론해 보았다.

    두 석굴에 표현된 문양은 연화문이지만, 전통적인 연화문이 아니라

    이집트와 페르시아로부터 유래하는 수련문이다. 수련문의 갑작스런 등

    장은 당시 북제 문화 교류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

    다. 북제는 서역문화에 대한 경도, 즉 호화가 두드러진 것으로 평가받

    는데, 호화는 소그드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북향당

    석굴 북동과 중동에 표현된 형식의 수련문은 중국에서 발견된 소그드

    인의 유물을 포함해 현재까지 알려진 소그드 문화에서 거의 찾기 어렵

    다. 대신 페르시아의 수련문과 유사하여 두 굴의 수련문은 페르시아

    문화의 직접적 영향 아래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제가 페르시아와 공식적인 대외관계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실 석굴사원에서 수련문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북위 멸망 이후

    낙양에 거주하던 ‘수를 헤아일 수 없을 만큼 많은’ 호인들이 모두 새

    왕조의 도성인 업성으로 이주한 것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당시 서쪽

    으로 북주에 가로막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제에는 대규모 호상들이

    왕래하며 활발한 상업활동을 전개했는데, 이 가운데는 페르시아인 혹

    은 虞弘처럼 페르시아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존

    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북제는 비록 페르시아와

    정식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도성 업성에는 페르시아 문화의 요소가 등

    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페르시아 문화가 북위 낙양에서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

    고 낙양에는 수련문이 거의 출현하지 않는데 비해 북제 황실석굴인 북

    향당석굴 북동과 중동에서 돌출하고 이후 업성지역에서 유행하게 된

    다. 이는 서역문화에 경도된 북제 황실의 의도적인 선택에 의한 것으

    로 생각된다. 페르시아에서 수련은 빛과 광명을 상징하고 나아가 왕실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31의 표지였다. 때문에 두 석굴의 수련문은 이 굴이 황실석굴이며, 빛으

    로 충만한 세상임을 드러내는 장엄의장이 된다. 빛으로 충만한 세상은

    또한 불국 정토의 모습이었다. 때문에 수련문은 당시 정토 사상의 유

    행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장엄의장으로서, 석굴 내부가 정토임을 알려

    주는 정토의 표지였다. 나아가 두 석굴이 문선제가 조영한 석굴이란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석굴뿐만 아니라 문선제가 통치하는 북제 영토

    역시 불국토임을 드러내는 정치적 상징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할 수 있

    다.

  •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32(中文摘要)

    北齐皇家石窟和睡莲系莲花纹-北响堂石窟北洞和中洞莲花紋的渊源和其内涵-

    苏铉淑

    北响堂石窟北洞和中洞是北齐(550-577年)开创皇帝文宣帝(550-559

    年在位)开凿的. 此两个洞窟中心柱上方的帷帐之上刻有银杏叶状的纹样,

    它和宝珠纹一同出现. 形制同样的纹样还出现于比北洞和中洞开凿时间晚

    的北响堂石窟南洞、南响堂石窟第五窟和第七窟, 以及水浴寺西窟等邺城地区石窟群中, 但其他地区石窟和单体造像中尚未发现. 因此, 可以推定此

    纹样具有特殊的内涵.

    本文首先通过与同时期造像的比较研究, 探索此纹样所表现的是何物. 此

    纹样为莲花纹, 但不是传统的莲花纹, 而是侧面形睡莲纹. 睡莲纹从古埃及

    渊源, 而传播到古波斯地区, 在这两个地区很盛行. 故此可推定北响堂北洞

    和中洞的睡莲纹受到波斯文化的影响.

    众所周知, 北齐皇室胡化现象极其明显. 由于在商业、音乐等的艺术活

    动, 甚至在政治方面, 在北齐境内粟特人的活跃很突出, 一般认为北齐皇室

    的胡化里粟特文化的因素居多. 因此可以推定此睡莲纹也在粟特文化的影

    响下出现. 但有兴趣的是, 包括在中国境内发现的粟特人的遗物在内, 在粟

    特文化圈里尚未发现这种银杏叶状的侧面形睡莲纹. 所以不轻易地断定此

    睡莲纹属于粟特文化的范畴. 相反, 此莲花纹很可能不通过粟特文化的中

    介, 直接受到波斯文化的影响而出现. 这与北魏灭亡后洛阳的四十万户全部

    迁移到东魏北齐都城邺城有关. 當时这些人中胡人也众多, 而且其中波斯人也不会少. 换句话说, 通过这些过程, 北魏洛阳的波斯文化直接移植到东魏

    北齐都城邺城.波斯人崇拜光明, 这种思想给佛教影响, 即佛教的净土或佛国土里都有光

  • 北齊 皇室石窟과 睡蓮系 蓮花文 (蘇鉉淑) 33明. 而且睡莲象征着光明, 因此可知北响堂北洞和中洞的睡莲纹表现的是此

    洞窟就是充满光明的净土. 北响堂北洞和中洞是由文宣帝开凿的皇家石窟,

    除了此睡莲纹之外, 两个洞窟里还出现在其他地区石窟中没发现的诸特征,

    如单层塔形的窟形、珠柱以及宝珠纹样的运用極多. 而且这些特征均具有

    政治性的内涵, 即它们赞美文宣帝所统治的北齐境内就是净土, 进而显示北

    齐皇帝是佛教的圣王转轮圣王. 睡莲纹也不是例外, 具有两种功能, 即它不

    但将石窟变成为光明充满的净土, 而且还美化北齐皇帝的统治.

    주제어: 북제, 황실석굴, 수련문, 페르시아 문화, 광명

    關鍵詞: 北齊, 皇室石窟, 睡蓮紋, 波斯文化, 光名

    Keywords: Northern Qi, Royal Caves, the Motif of Lotus, Persian Culture,

    Brightness.

    (원고접수: 2012년 7월 13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8월 10일, 수정원고 접

    수: 8월 15일, 게재 확정: 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