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녹색시민포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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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녹색시민포럼 '우리 시대의 시민' 발제 :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토론 : 조철민(한일장신대 엔지오연구소) 김혜애 (녹색연합 공동대표) 주최 : 녹색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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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제� 발표는�크게� 세� 부분입니다.�

우리� 시대의� 시민에� 대해� 요청받았는데� 처음� 우리�

시대는�어떤가,� 두� 번째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시민

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시민의� 초상이

라� 이름� 붙였는데� 초점을� 지난� 해� 세월호에� 맞추어�

세월호� 이후에� 요구되는� 새로운� 시민의� 상� ,방향에�

대해�이야기하려�합니다.�

우리� 시대가� 복잡다기하기� 때문에� 큰� 줄기를� 잡아�

말씀드리고� 싶은� 데� 맨� 먼저� 쓴� 개념은� 시대정신입

니다.� 시대정신이란� 말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나오

고� 헤겔� 철학에서� 나오면�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한�

시대� 문화적� 소산,� 태도.�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이� 시대정신입니다.� 시대정신을� 말씀

드리는� 이유는� 올해� 광복� 70년인데� 이� 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원동력은� 무엇인가가� 시대정신에� 있다고�

보기�때문입니다.�

광복� 이후�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은� 나라� 세우기였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 결과� 45년� 8월�

15일� 대한민국민주공화국이� 출범했고� 다음� 달� 북한도�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만들었지요.� 나라� 만들기의�

두� 가지� 과제는� 산업화와� 민주화였습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물질적� 욕망,� 다른� 한편은� 인간이라면� 빵

만큼� 중요한� 자기� 생각과� 말의� 자유인� 민주화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70년을� 돌이켜보면� 이렇게� 진행되어왔

다� 볼� 수� 있습니다.� 나라� 세우기가�가장�중요한� 목표였고� 분단된� 형태이지만� 나라를�세웠습니다.� 그것은� 경제

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것이� 최근� 두� 가지� 흐름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고� 있습

니다.�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진전입니다.� 세계화가� 우리�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고� 정보화의� 영향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7년이� 지났지만� 어느� 체제로� 나아갈지� 여전히� 지구적� 차

원에서�보면�암중모색�하고�있습니다.� 다시� 말하면�신자유주의가�한계를�드러낸�것은� 분명한데�포스트�신자유

� 『녹색시민포럼� -� 녹색시민의�시민됨을�위하여』

제2회�우리�시대의�시민�� ○� 일시� :� 2015년� 6월� 30일� 5시�

� ○� 사회� :� 박영신� (연세대�사회학과�명예교수,� 녹색교육센터�이사장)

� ○�발제� :� 김호기� (연세대�사회학과�교수)

� ○� 토론� :� 조철민� (한일장신대�엔지오연구소)

� ○�토론� :� 김혜애� (녹색연합�대표)

주의가� 어떤� 모습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가

치판단이� 아니라� 사실의� 변화라고� 하는� 판단의� 관

점에서� 보면� 전� 지구적으로� 풍경이� 어지러운� 상태

입니다.� 미국은� 진보적인� 정부,� 영국과� 독일은� 보수

적인� 정부,� 일본은� 자민당의� 극우적� 아베정권,� 프랑

스는�진보정권,� 한국사회는� 2008년� 이후� 계속� 보수

적� 정부가� 지배� 중입니다.� 신자유주의가� 한계를� 드

러난� 것은� 분명한데� 포스트� 신자유주의를� 규범적으

로� 뭔지� 주장할지� 몰라도� 사실적으로는� 무엇인지를�

말하기�어렵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결정적� 분수령� 두� 개� 있는데� 경제적�

측면,� 물질생활을� 이루는� 것입니다.� 제가� 쓴� 체제라

는� 말은� 시스템이� 아니라� 레짐이라는� 말인데� 레짐은� 경제적� 생활을� 재생산하는� 토대가� 있다면� 이� 토대에� 조

응해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이� 결합되어�조응관계를� 이루는�것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측면

에� 초점을� 맞춘다면� 중요한� 레짐� 하나가� 61년� 체제와� 다른� 하나는� 97년� 체제입니다.� 일각에선� 87년� 체제를�

말하는데� 87년�체제는�정치적�측면에�초점을�맞춘�체제입니다.�

저는� 정치적� 생활보다� 오히려� 경제적� 생활이� 우리의� 기본욕구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

구요.� 두� 가지�체제가�해방� 70년� 동안�우리의�개인적,� 사회적�생활에�분수령을�이뤘습니다.� 몇� 가지� 상황으로�

두� 체제의�특징을�정리해�보면�세계적�차원에선� 60년대에서� 90년대�초반까지�냉전시대가�지속되었지만� 80년�

후반� 90년대� 들어서면서� 탈냉전시대가� 본격화되었고� 당장� 우리� 사회도� 러시아와� 중국과� 수교했고� 여기에는�

동구�사회주의�몰락이�결정적�영향을�미쳤습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학계에서는� 발전국가라� 하고� 저널리즘� 용어로는� 개발독제체제라고� 하는데� 경제성장을� 위

해� 정치적� 권위주의가가� 이뤄져� 경제적� 동원화와� 정치적� 탈동원화를� 모색하여� 빠른� 성장을� 이뤘습니다.� 97년�

체제로� IMF� 관리체제로� 국가주도의� 발전전략이� 시장주도� 발전전략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

반적인� 규정은� 감세,� 규제완화,� 국내시장의� 개방,�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흔히� 지목됩니다.� 97년� 이후에� 진보적

인� 성향을� 보였던�김대중,� 노무현� 정부와�보수적� 성향의�이명박,� 박근혜� 정부는�사실상� 정치사회� 측면에선� 차

이가�나지만�경제적�측면에선�일관되게�신자유주의적�발전전략을�추진해왔다는�공통점이�있습니다.�

정치적� 측면에서� 61년�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이고� 97년� 체제는� 자유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집니다.� 시민사회는�

60-80년때� 까지는� 무정형의� 시민사회였습니다.� 그것이� 역사적� 기원으로� 따지자면� 유신체제아래에서� 민주화운

동에� 기원을� 두고� 다양한� 사회운동의� 분수령으로� 조직화된� 시민사회로� 바뀌었습니다.� 문화는� 61년� 체제에선�

공동체주의로� 특징� 지워� 진다면� 97년� 이후는� 공동체� 주의� 못지않게� 개인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집니다.� 이것이�

해방� 70년� 동안� 우리가� 경험한� 경제초점을� 맞춘� 사회적� 체제였고� 우리� 사회는� � 2008� 미국� 발� 금융위기� 이

후�포스트�신자유주의체제로�이동하고�있음에�불구하고�여전히� 97년� 체제가�영향을�미치고�있습니다.�

조금� 구체화시켜� 보면�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모습은� 세� 겹으로� 둘러싸인� 위기에� 직면

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생활은� 크게� 생산과� 분배의� 영역입니다.� 이것은� 시장� 안에서� 이뤄지죠.� 일하고�

임금을�받는� 부분이죠.� 그런데�장애인을�포함한�임금을�받지� 못하는�사회적�약자가�있습니다.� 고령자,� 어린이,�

여성� 같은� 계층을� 포함하죠.� 그래서� 시장� 밖의� 또� 하나의� 분배를� 모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재분배라� 이

야기하는데�이건�복지고�다름� 아닌�사회정책이기도�하지요.� 분배와�재분배�모든� 영역에서�상당한�위기에�직면

하고� 있다.� 분배의� 위기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노동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지표로� 말씀드리

자면� 지난� 해� 연말정산� 신고한� 우리� 임금생활자가�

1800만에서� 1900만� 정도인데� 임금� 평균소득은�

400만원을� 넘어서� 440만� 원� 정도입니다.� 이것은�

평균소득이고� 실제로� 이와� 유사한� 개념은� 중위소득

이� 있는데� 가장� 적게� 받은� 사람부터� 가장� 많이� 받

은� 사람을� 늘어놓았을� 때� 가운데� 있는� 사람,� 900만�

명� 정도� 되겠지요.� 중위소득은� 230만원에� 불과합니

다.� 가구� 구성은� 2.6명에서� 2.7명인데� 맞벌이를� 않

고서� 230만원� 갖고� 서울에서� 살기� 어렵습니다.� 이

게� 분배의� 현실입니다.� 분배가� 커다란� 위기에� 직면

했습니다.� � 또� 다른� 지표도� 많은데� 전체� 노동자�

600만� 정도가� 비정규직인데� 통계에서� 포함되지� 않

은� 사람들,� 5인� 미만의� 사업장,� 자영업자에� 의해� 고

용된�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김밥천국의� 조선족� 아주머니들.� 이� 분들은� 정부� 통계에서� 포함되어� 있

지� 않습니다.� 이들을� 포함하면� 민주노총에서� 이야기하는� 850만에서� 900만까지의� 비정규직이� 있습니다.� 비정

규직� 평균� 임금은� 150만원입니다.� 가구당� 남편만� 비정규직이면� 먹고살기� 힘들고,� 부인이� 대부분� 일을� 하는데�

파트타임으로�일합니다.� 절반�정도� 일하면� 150만원에� 80만원을�더해�중위소득이�나옵니다.� 이게�서울에서�가

능하겠습니까?� 아이가� 대학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일년� 등록금이� 천만� 원� 드는데,� 용돈� 같튼� 걸� 고려하지� 않

아도� 이게� 분배의� 현실입니다.� 지니계수를� 포함한� 여러� 통계자료가� 있는데� 발표된� 자료가� 다� 달라� 신뢰성이�

떨어지는데�저는�객관적인�사실을�말씀드리는�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희들이� 보기에는� 2011년� 희망버스� 같은� 사회운동이� 나타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이상� 사

실상� 시장의� 분배를� 갖고�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재분배도� 마찬가지인데� 시장에서� 분배가�

잘� 이뤄지지� 않으면� 시장� 밖에서� 정부가� 세금을� 기초로� 또� 한번의� 분배를� 해야� 하는데,�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노인� 비율이� 49%인데,� 65세� 이상� 노인� 절반� 가까운� 분들이� 사실상� 빈곤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해법도� 별로� 없습니다.� 연금논란이� 뜨거웠는데� 이유가� 대책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재분배도� 현재�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것이지요.� 2010년도에� 중요한� 논쟁이�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무상급식

입니다.� 논쟁은� 상징적�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상징적� 방식이라는� 것은� 무상급식만� 중요한� 것도� 아니라� 지금까

지� 우리가� 국가에� 무엇을� 해줬으니� 이제� 국가가� 이제� 우리에게� 뭘� 해주어야� 하는� 상황인데� 2010년� 그게� 아

이들�급식문제로�나타난�것입니다.� 복지논쟁이�일어난�것이죠.� 심각한�재분배의�위기에�놓여있구요.

또� 다른� 위기는� 대표성의� 위기,� 곧� 정치의� 위기입니다.� 정치가� 가진� 고유한� 독자성은� 마키아벨� 벨리가� 말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새누리당의� 권력투쟁,� 유승민� 사태같은� 그런� 게� 아니라� 보다� 교과서적� 차원에서� 보자면�

한� 국가에서�자원과�가치의� 합리적배분에�대한�최종의사결정입니다.� 우리가� 사회라는�공동체를�유지하기�위해�

의사� 결정해야� 할� 것이� 많은데,� 세금은� 어떻게� 쓸지,� 외교안보는,� 교육은� 어떻게� 할지.� 국민들이� 다� 모여� 결

정하지� 못하니�사실상� 대의민주주의라고� 하는� ,� 정치라는�대표성의� 체계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 � 영역이� 최종

의사결정이죠.� 문제는�대표성의�체계에서�민주주의에서�가장�중요한�것은� 주인인� 국민이고�대통령이든�의원이

든�투표로�뽑은�대리인인데�문제는�대리인들이�주인의�의사를�제대로�반영하지�않는�것입니다.� 대표성의�프리

젠테이션이라� 하는데� 이� 위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광범위한� 무당층입니다.� 조사를� 보면� 대체적으로�

적을�땐� 1/3� 또는� 많을� 땐� 2/3가� 지지하는� 정당이�없다는�것입니다.� 그� 이유는�새누리당이든�새정치연합이든�

정의당이든� 무엇이든� 내� 가치와� 이익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대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치권� 밖에서� 또� 다른� 영웅을� 불러들이려� 합니다.� 지금� 정치가로서는� 큰� 역량을� 보여주는� 것� 같진�

않지만� 2011년� 안철수� 현상으로� 되돌아가면� 영웅대망론이죠.� 제발� 당신이� 한국정치를� 후원해달라는� 것입니

다.� 안철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국정치가� 가진� 대표성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올해가� 민주

화�이룬�지� 28년인데�여전히�우리는�정당정치를�제대로�제도화�하고� 있지� 못한�것입니다.�

마지막은� 인정의� 위기.� 인정� recognation은� 헤겔이� 만든� 개념입니다.� 최근� 철학과� 사회학에선� 독일의� 철학자�

악셀호네트,� 미국의� 페미니트트�학자�낸시� 프레이져�같은�사람이�레커그네이션이라는�개념을� 다시� 재정립해서�

사용합니다.� 레커그내이션은� 자신의� 정체성을� 승인받으려는� 욕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제대로� 처음� 나

타났던� 것을� 저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2002년� 촛불집회를� 흔히� 예로� 많이� 듭니다.� 2002년� 경기도� 광주� 조양

중학교� 여중생� 두� 명이� 미군� 괘도차량에� 깔려� 목숨을� 잃었고� 당시엔� 월드컵이� 막� 진행되던� 때라� 이� 사건이�

크게�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이� 죽음에� 대해� 앙마라는� 네티즌이� 광화문에서� 촛불로� 항의하

자는� 촛불집회를� 제안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촛불집회가� 일반화된� 첫� 번째� 사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여중생을� 죽인� 미군을� 불평등한� 소파� 때문에� 한국의� 법의� 심판대� 위에� 세우지� 못했습니다.� 뭐겠습니까?� 우리

가� 미국의� 이등시민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일등시민으로서,� 억울하게� 죽은� 두� 명의� 여중생에� 대한�

법의� 심판을� 요구하는� 것이죠.� 내가� 시민이라는� 걸,� 내가� 국민이라는� 걸�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사회학에서나�철학에선�인정의�정치라고�이야기�합니다.� 정치에서�중요한�두�가지가�분배의�정치고�하나가�인

정의� 정치입니다.�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성을� 지켜달라는� 것이� 인정의� 정치입니다.� 우리나라� 사회운동의� 역사

에서� 연인원� 백만이� 동원한� 촛불집회가� 많지� 않은데� 2002년� 11월� 여중생의� 촛불집회가� 첫� 번째고� 두� 번째

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외국산쇠고기� 수입� 졸속협상� 때문에� 열린� 그� 해� 6월� 집회가� 백만이� 모였습니다.�

사회운동의�역사나�다른� 책을� 봐도�백만이�모인� 사회운동은�거의�없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은�우리의�대리인인

데� 우리가� 권력을� 위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승인받지� 않고� 미국에� 가서� 덜컥� 30개월� 넘는� 소고기� 수

입을�합의해�준� 것이죠.� 이에� 대한� 저항은�국민으로서�인정을�요구한�것입니다.� 촛불을�든� 가장� 큰� 힘은� 여기

에� 있다� 봅니다.� 저는� 이점에� 있어서� 레커그네이션의� 위기도� 반복해� 나타나고� 있는데� 최근� 대표적인� 것이� 갑

을관계입니다.� 갑을� 관계가� 경제적� 측면만� 아닙니다.� 조현아� 사건을� 떠올리면� 내가� 고용되어� 있더라도� 동등한�

인간인데� 전통사회처럼� 마치주인이� 노예를� 부리듯� 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현대적인� 회사조직� 이라면요.� 이것

이�한국사회에서�우리가�직면한�삼중의�위기입니다.� �

구체적으로� 계급과� 세대의� 측면에서� 나눠�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계급과� 세대를� 따로� 찍어서�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어떤� 갈등은� 이루는�전선이�있습니다.� � 세대,� 이념,� 계급,� 지역� 등이� 있는데�이념은�진보와� 부소,�

지역은� 영남,� 호남,� 중앙과� 지역으로� 전선이� 선명하지만� 계급은� 좀� 들어다� 봐야� 합니다.� 계급구성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에서� 모래시계로� 변하고� 있습니다.� 중산층이� 감소하고� 있는데요.� 양적인� 자료

와� 질적인� 자료에서� 다� 관찰되는데� 보통� 중산층은� 객관적� 지표는� 평균� 소득의� 75~150%를� 중산층이라� 합니

다.� 이� 퍼센트가� 외환위기� 이후� 점차� 줄여들었습니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주관적� 지표인데� 당신이� 중산층에�

속합니까� 물어보는� 것입니다.� YS� 시절� 외환위기� 직전� 한국경제가� 가장� 좋았던� 때� 전체� 국민의� 80%가� 자기

가� 중산층이라� 여겼습니다.� 2013년� 통계에선� 전체� 국민의� 46~7%가�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합니다.� 거의� 절

반이� 줄었습니다.� 이� 통계가� 맞을� 겁니다.� 과거엔� 중산층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는� 다름� 아닌� 다이아몬드형�사회에서� 모래시계,� 가운데가�줄어드는� 모래시계형으로�우리사회가�변화되는�것

입니다.�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내적� 양극화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규직� 대� 현대차� 노동자의� 정규직은� 1

억에� 가까운� 연봉이지만� 1차,� 2차� 협력기업으로� 낮아질수록� 소득이� 몇� 천만� 원� 씩� 줄어듭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적게� 받습니다.� 화이트든� 블루든� 과거처럼� 단일한� 블록을� 이루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새로운� 균열

이�일어나고�있습니다.� �

계급의식의� 변화를� 보자면� 상층은� 이익의� 공고화를� 중시하고� 중간층은� 모순적�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층

을� 지향하나� 자신의� 실제적� 삶은� 하층에� 가깝

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중간층의� 정치적� 성향

은� 상대적� 진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새정치민주연합이� 넓은� 의미에서� 진보적�

정당을� 대표한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의� 핵심� 지

지층은� 호남,� 화이트칼라,� 2-30� 젊은� 세대인

데� 이� 세� 집단이� 다� 흔들리고� 있습니다.� 호남

으로부터� 거부되고� 화이트칼라들이� 실망하고�

젊은� 세대가� 과거처럼� 높은� 지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층계급은� 냉전분단체제� 때문에� 상

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는� 새누리당의� 강고한� 지지기반

입니다.� 계급투표의� 수문이� 열리려면� 지역� 색

의� 영향력이� 완화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지역

투표적� 성향이� 두드러지고� 계급투표가� 활성화�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세대가� 중요한� 변수가� 작용되고� 있습니

다.�

세대의� 문제를� 보자면� 세대의� 풍경은� 20대는� 88만원� 세대� 30대는� 신세대,� 40대는� 486,� 50대� 이상은� 산업

화� 세대라� 말하는데�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안입니다.� 20대는� 청년실업,� 30대는� 보육,� 고용� 주거,�

40대는� 퇴출의� 공포,� 교육,� 노후의� 불안� 50대는� 일자리� ,건강,� 노후의� 불안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 가을학기

에� 우리� 학생들� 100여� 명에게� 특이한� 과제를� 내� 주었습니다.� 우리� 사회를� 규정짓는� 말이� 많지요.� 피로사회,�

단속사회,� 절벽사회�표현�등.� 사회학과� 학생들에게� 너희들�나름의� 한국사회를�규정하고�글로�써� 봐라� 해서� 통

계를� 냈더니� 불안사회가� 압도적이었고� 두� 번째가� 불신사회였습니다.� 저는� 이게� 맞을� 거라� 봅니다.� 우리� 학생

들이�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인데�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불안이고� 불신이었습니다.� 삶이� 불안한� 것

이죠.� 한� 개인의� 삶을� 구성해� 보죠.� 내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맞벌이라면� 보육문제에� 부딪히고� 학교� 들어가면�

한� 가지� 목표� 대학입시를� 향해� 달립니다.� 대학가면� 청년� 실업이� 기다리고� 있고� 운� 좋게� 일자리를� 얻으면� 구

조조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는� 구조조정을� 퇴출의� 공포라� 했습니다.� 내가� 언제� 이� 조직에서�

퇴출될�지� 모른다는�공포죠.� OECD� 자료를�보면�우리가�자기가�첫� 번째�선택한�노동시장에서�떠나는�것이� 보

통� 52세� 전후입니다.� 최근에� 기대수명은� 남

성은� 78세� 여성은� 83세입니다.� 50대� 초반

에� 은퇴하고� 2차� 노동시간을� 찾아야�합니다.�

삼십년에� 가까운� 시간이� 남아있는데�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게� 현실입니다.� 삶의� 모든� 지

점이� 위태롭고� 불안한� 것이� 현실이고� 다른�

사람을� 잘� 믿지도� 않고� 타인,� 타자에� 대한�

분노는� 커집니다.� 이것이� 심판에� 대한� 욕구

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사

회의� 자화상이고� 97년� 외환위기� 이후� 20년

동안� 거칠게� 말하자면� 다소� 괴물과도� 같은�

사회와�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

민들이�대면한�현실입니다.�

시대풍경을� 먼저� 말하는� 것은� 박영신� 선생님으로부

터� 일관되게� 배워� 온� 것은� 개인은� 그� 자체로�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개인으로� 존재하는데� 이러한� 사

회의� 모습이� 개인의� 시민적� 정체성에� 그대로,� 사실

상� 투영된다는� 것입니다� 다.� 한국� 시민들이� 느끼는�

가장� 커다란� 풍경은�불신의� 시민,� 불안의� 시민이�있

습니다.�

시민이란� 누구인가� 이는� 서구적� 개념입니다.� 도시의�

거주민이� 시민입니다.� 도시의� 공기가� 시민을� 자유롭

게� 한다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통상적으로� 도시�

시민이� 시민사회의� 주체를� 이뤄왔습니다.� 삶은� 제도

적� 삶과� 의식적� 삶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데� 두� 겹

의� 삶에서�시민은�두�가지� 역할을�했습니다.�

프랑스� 시민은� 쉬뚜앙인데� 이것은� 공민에� 가깝습니다.� 공적시민입니다.� 시민이� 가져야� 할� 공적의무를� 자각한�

존재입니다.� 자본주의는� 영국이� 주도했지만� 프랑스� 대혁명� 파리콤뮌에서� 보듯이� 프랑스는� 근대민주주의를� 열

어왔던� 나라입니다.� 근대민주주의의� 주체는� 다름� 아닌� 공적의무를� 자각한� 시민� 쉬뚜앙에� 있었습다.� 반면에� 독

일은� 시민이� 뷰거입니다.� 헤겔은� 자신의� 법철학에서� 시민을� 욕망의� 덩어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 뷰거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입니다.� 시민의� 초상을� 생각할� 때� 때� 시민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하나는�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의� 덩어리� 시민이� 존재하고,� 다른� 측면에선� 공적의무를�

자각하는� 공적시민,� 공민으로서� 시민도�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 두� 개의� 정체성이�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 돈� 천원도� 양보하지� 않지만,� 그러나�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면서� 민주주의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시민은� 원래� 이런� 두� 얼굴을� 가지고� 이것이� 정치사회와� 문화와� 일상에�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시민의� 생활�

측면에서�보면�적어도�우리�시대의�시민을�이야기할�때에는�두�가지� 측면을�고려해야�합니다.

시민의� 이념� 문제를� 바라보면� 서구역사를� 보면� 세� 가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첫� 번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

의입니다.� 두� 개념은� 연관된� 이념이기도� 하지만� 갈등하는� 개념이기도� 입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

화시키는� 개념이지만� 민주주의는� 자유� 못지않게� 공화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공동체� 전체의� 질서를� 중시하기도�

합니다.� 이� 두�개의� 개념이�자유민주주의로�결합되어�있지만�내적으로는�긴장의�관계를�이루고�있는�개념입니

다.� 이것은�근대적�시민이�탄생하는데�중요한�출발이�된� 개념입니다.�

두� 번째는�공동체�주의와�개인주의입니다.� 도시의�공기는�시민들에게�자유를�선물했다는�것은�다름� 아닌� 개인

주의를� 발전시킨� 것이지요.� 동시에� 인간은� 공동체주의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를� 벗어나서� 살기� 어려

운� 존재입니다.� 공동체와� 개인주의가� 시민의� 양면성을� 잘� 보여주는� 학문적� 논쟁은� 미국� 정치철학에서� 진행된�

존� 롤스는� 자유주의를� 중시하고� 롤스� 못지않게� 영향을� 행사한� 마이크로� 왈져는� 공동체주의를� 중시합니다.� 흥

미로운� 것은� 이념으로� 보면� 공동체주의가� 보수적� 가치만은� 아닙니다.� 마이크로� 왈져는� 진보적인� 사상가입니

다.� 시민들의�이념에�두� 개가�공존합니다.

세� 번째�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대적시민이라고� 해서� 진보주의만� 자신의� 이념으로� 선택하

지� 않습니다.� 정치역사는� 진보와� 보수의� 계속된� 교체� 속에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보수주의는� 분배보다� 성장,�

변화보다는� 안정,� 개인보다는� 안정을� 중시하는� 이념이죠.� 근대적� 시민의� 뿌리를� 내리는� 데� 이� 이념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민의� 이념도� 사실판단의� 관점,� 가치판단의� 관점에서� 자신의� 이념을� 선택할� 수� 있지만�

두� 가지� 이념이� 시민� 안에� 공존한다는� 것에� 주목해

야� 합니다.� 이와� 연관해� 10년� 전에� 제가� 만든� 개념

이� 한국사회가� 이중적� 시민사회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통주의적� 시민사회가� 있고� 근대

적� 시민사회가� 있고� 공동체주의� 시민사회가� 있고�

개인주의적� 시민사회가�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시민

사회가� 있다면� 자유주의적� 시민사회가� 있고� 보수적

인� 시민사회와� 진보주의적인� 시민사회가,� 근대주의

적� 시민사회가� 있다면� 탈근대적인� 시민사회가� 있다

고� 생각합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곳이�미국입니다.�

미국에서� 유행했던� 개념이� 투아메리카인데� 공화당

의� 미국과� 민주당의� 미국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일베의� 대한민국과� 극좌파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두� 집

단의�거리는�멀어지고�소통은�불가능해지고�있습니다.� 언론에서�보면� 조선일보가� 보여주는�대한민국은�한겨레

가�보여주는�대한민국은�전혀�다른�대한민국입니다.� 한국의�시민사회가�둘로�나눠져�있다는�것이�제가� 시민사

회연구자로�관찰한� 것입니다.� 이� 생각은� 미국의�예를� 들었지만�유럽에도�있습니다.� 가장� 고전적인� 개념이� � 투

네이션스라는� 개념인데� 벤자민� 디즈레일리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보수당인� 토리당의� 디즈레일리는� 19세

기� 후반� 빅토리아시대� 영국의� 수상이었는데� 젊었을� 때� 소설가였습니다.� 그가� 소설에서� 쓴� 유명한� 표현이� 투�

네이션스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영국과� 부자들의� 영국이� 있다는� 것.� 토리당의� 목표는� 투네이션스를� 원네

이션으로� 바꾸는� 것이다라는� 것,�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해�내는� 것이다� 했습니다.� 한국� 보수의� 가장� 큰� 문제는�

철학이� 없다는� 것인데� 저는� 기본적으로� 보수를� 지지하진� 않지만� 연구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미국,� 영국,� 독일

의�보수당이�여전히�살아남고�집권에�성공한�이유는�보수가�지닌�철학을�실천했기�때문입니다.� 개인보다는�공

동체,� 사회통합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한편으로� 보수의� 매력입니다.� 그런데� 한국� 보수는� 이런� 철학이� 없습니

다.� 집권을�위해서만�존재하는�것이지요.� � �

시민의�초상을� 정리해서�말씀드리면�시민의�자기계몽이�중요하다�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선� 시민들의�정체성�

측면에서� 볼� 때� 두� 가지� 시민이� 있습니다.� 천민적� 시민이� 있고� 또다른� 하나는� 공민적� 시민이� 있습니다.� 여기

에� 적진� 않았지만� 그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피난민사회로서� 한국사회.� 극단적인� 이기적� 시민사회의� 역사

는� 어디일까� 보면� 피난민의� 역사에� 있다고� 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여기서� 나의� 삶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 생존입니다.� 서울이� 수복이� 되

면� 서울로� 되돌아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따라서� 공

적인�모든� 가치는� 부차적인� 것,� 타인도�부차적인�것

이� 되고� 나만� 살아남으면� 되는� 것,� 나의� 이익이� 극

대화되는� 것만�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선� 공적시민으

로� 이뤄진� 시민사회는� 구축되기� 어렵습니다.� 여전히�

우리사회에선� 피난민� 속성이� 유지되는� 측면이� 있습

니다.� 단적으로� 보면� 메르스� 사태입니다.� 메르스� 사

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래도� 가장�

고생하는� 사람들은� 의료인인데,� 의료인의� 아이들이

라고� 배척당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피난민� 사회의� 속성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데에선� 공적가치

를�중요하게�말하지만�개인의�실제적�생활에선�자기�이익을�극대화하려는�존재,� 이게� 시민들의�적나라한�초상

일지� 모릅니다.� 욕망의� 덩어리로서� 정체성을� 가진� 시민과� 공적가치를� 지향하는� 시민으로� 이중적� 속성을� 그대

로� 갖고� 있습니다.� 욕망의� 덩어리를� 정체성으로� 하는� 시민의� 역사적� 기원인� 피난민� 사회가� 여전히� 반복되는�

것이지요.� 이중의� 도덕,� 이중의� 논리가� 어릴� 때부터� 내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공적영역에선� 좋은� 이야기를�

하지만�사적� 영역에선�타자를�쓰러뜨려�이기라고�말하고�있습니다.� 얼마나�많은� 부모들이�알게�모르게�자기의�

자녀들에게�이를�강요하고�있습니까?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 스스로가� 갖는� 정체성인데,� 우리� 스스로� 계몽을� 해야� 합니다.� 공적시민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지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구조와� 행위의� 변증법입니다.� 어떤� 개인이라

도� 사회적� 존재입니다.�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사회적� 존재로서� 정체성을� 바꾸어야� 합니다.� 즉자적� 시민에서�

대자적�시민으로�가야�합니다.� 피난민사회에서�이기적�측면이�우리�정체성의�한� 측면이라면�타자와�더불어�살

아가는�공적가치와�공동체적�가치를�모색하는�존재로�거듭나는�대자적�시민이�되어야�합니다.�

시민의� 자기계몽은� 시민� 스스로의� 자기� 결단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 것입

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데� 사회가� 변화하지� 않는데,� 개인이� 아무리� 개인적� 차원에서� 노력한다고�

해서�자기의�정체성이�크게�혹은� 본질적으로�바뀌지는�않습니다.�

시민의� 자기계몽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요구� 되는� 과제가� 국가와� 개인의� 이중혁신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제

도가�바뀌어도�천민적,� 이기적인�의식을�가지고�있다면�개인은�물론� 제도� 자체의�변화도�이끌어내기�어렵습니

다.� 반대로�제도가�그대로�있는데�개인의�혁신만�강조해도�변화되는�것이�없습니다.�

하나는�개인에서�사회로�다른� 하나는�사회에서�개인으로�가는�이중적�과정이� � 필요합니다.

사회에서� 개인으로� 측면에서� 보면� 살림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왜� 살림인가는� 세� 가지� 측면에

서입니다.� 첫째는� 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살림,� 리빙입니다.� 두� 번째는� 국민� 다수의� 가

계� 및� 생활을� 해결하는,� 먹고사는� 문제의� 살림,� 하우스� 키핑입니다.� 세� 번째는� 사회를� 분단하는� 분열과� 해체

를�넘어서는�통합으로서의�살림이�설정될�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를� 이끌어왔던� 제도적� 측면의� 정치� 경제� 국가� 시민사회� 세계화의� 기본적인� 것은� 욕망이라�

생각니다.� 정치적� 측면에선� 선거에서� 51%의� 지지율만� 끌어오면� 되는,� 자기� 지지계급에만� 호소하는� 두� 국민

의� 정치가� 있습니다.� 경제는� 경쟁을� 극단화시키는�

신자유주의가� 있고� 국가와� 시민사회에선� 법치적� 권

위주의로� 나타나고,� 세계화는� 무한경쟁적� 세계화를�

추구해� 왔습니다.� 살림의� 사회는� 정치영역에서� 한�

국민정치를� 모색합니다.,� 포스트� 신자유쥬의로� 경쟁

의� 시장을� 넘어서는� 것이며,� 시민의� 민주적� 거버넌

스로,� 세계화는� � 지속가능한� 사회� � 건설로� 가는� 것

입니다.� 살림의� 사회를� 위한� 5대� 개혁이� 있어야� 합

니다.� 생명없는� 물질추구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정의없는� 기업지배는� 경제민주화로,� 노동� 없는� 경제

성장은� 노동시장개혁으로,� 복지� 없는� 사회통합은� 복

지국가� 구축으로,� 국민� 없는� 정부운영에서� 시민민주

주의로�나아가야�합니다.�

이� 제도개혁을� 위해선�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살

림� 사회를� 위한� 정치적� 리더쉽이� 구축되어야� 하고�

살림의� 사회를� 위한� 시민정치세력� 형성이� 중요합니

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리더쉽과� 팔로우쉽의� 결합이�

되어져야� 합니다.� 제도의� 정치는� 정체성의� 정치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제도를� 만들고� 감시하는� 정체성

의� 정치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정체성의� 정치를�

위해선� 개인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새로운� 변화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87년� 헌법은� 바뀔�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장점이� 많은�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제도와� 법은� 우리보다� 앞선� 국가

의� 시행착오� 경험을�주목해� 갖고� 만든� 것입니다.� 제

도로선� 손색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민주주의

는� 한국시민사회는� �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이� 정

도밖에�안� 되는가?�

사실상� 개인과� 정체성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정체성의� 정치,�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제가� 읽은� 책

중� 가장� 영향을� 받은� 사회과학책은� 미국의� 퀘이커

교도이자� 교육학자인� 파커파머의� 책인데,� 여러� 책이�

우리나라에� 나와� 있죠.� 가르침,�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등.� 파커파머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민주주의

를� 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고는� 제대로� 된� 민주

주의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두� 슬라이드(11,12)도� 파커파머의� 영향� 속에서� 씌여진� 것이다.� 개인의� 사

회로�나아가�새로운�살림을�구축하는�것이�시민의�자기계몽에서�대단히�중요합니다.� �

� 문화,� 교육,� 개인-공동체,� 인간의� 측면에서� 이제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왔던� 것은� 욕망입니다.� 물신주의,� 경

쟁력과� 학벌� 이기적� 개인주의,� 수동적� 주체입니다.� 문화는� 물신주의에서� 인간주의로� 교육은� 경쟁력과� 학벌주

의에서� 공공성과� 패자부활전으로,�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연대적� 개인주의로,� 수동적� 주체에서� 능동적� 주체로�

가야�합니다.

정체성의� 정치는�곧� 마음의� 정치입니다.� 시민의�자기계몽이�이뤄지지� 않으면�민주주의든�시민사회든�만들어지

지� 않습니다.� 정체성은� 다름� 아닌� 마음입니다.� 마음은� 이성과� 감성의� 통일체입니다.�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은� 차이를� 존중하고� 연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파머가� 이야기했듯이� 마음이� 변화되어야� 행동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나타나야�사회가�바뀝니다.� �

살림의� 정체성,� 마음의� 정치,� 시민의� 자기계몽에서� 세�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질문을�던져야�한다� 생각합니다.� 인간이란�누구인가,� 사회란�무엇인가,� 어떤� 삶이� 소망스

런� 삶인가,� 우리가� 시민이라면� 이런� 질문을� 당연히� 던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답변을� 구해야� 합니다.� 자기의�

정체성과� 대면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나란� 어떤� 존재인가,� 자기를�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사회를� 올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세계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속에서� 자

기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내� 삶을� 이끄는� 진정한� 가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진정한� 의미는� 어

디에서� 찾아야�하는가� 답변을�구해야� 합니다.� 질문을�던져서� 답변을� 구하면�참여해야�합니다.� 참여에서� 세� 가

지를� 말씀드리자면� 첫� 번째는� 오랫동안� 생태학에서� 이야기해온� 고전적인� 주장인데�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

적으로� 실천해야만� 것입니다.� 마음이� 변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실천할� 곳은� 지금� 여기입니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소통을� 해야� 합니다.� 제

가� 존경하는� 정치사상가� 중� 한� 사람인� 한나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유의미성을� 획득하는�

것은�타자와� 소통할�때라고� 주장합니다.� 나와� 생각이�다른,� 나와� 마음이� 다른� 타자와� 소통하는� 것은� 아렌트가�

강조했듯이� 인간이� 자기� 유의미성,� 존재의� 유의미성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생각과�

느낌이� 다르더라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묶어� 말하자면� 시민의� 자기계몽은� 정체성의� 정치를� 일구고� 제도의� 정

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살림의� 정체성으로� 거듭나고� 살림의� 정치성에� 기반해서� 제도의� 정치를� 추

구하는�것이�시민의�자기계몽이라�생각하고�있습니다.� � �

[지정토론� :� 조철민]� (한일장신대�엔지오연구소)

연설� 같은� 말씀� 잘� 배웠습니다.� 발제문에� 대한� 비평이� 저에게� 부여되었지만� 그건� 포기하겠습니다.� 녹색연합이�

이� 포럼을� 하는� 이유는� 녹색시민성이라는� 내용을� 발굴하고� 만들려는� 도상에� 이� 포럼이� 있는데� 선생님이� 주신�

내용을�우리가�어떻게�이용하고�활용할까의�측면에서�이야길�해보겠습니다.

김호기�선생님께서�우리�시대의�풍경,� 시민의�초상을�경유해서�이중혁신의�과제를� � 말씀하셨는데�살림의�사회

를� 구축하고� 살림의� 정체성을� 구축하자� 하셨고� 두� 가지� 과제를� 관통하는� 것이� 살림이라� 하셨는데� 살림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보려� 합니다.� 살림은� 개인과� 사회구조를� 매개하는� 역할도� 되고,� 시민과� 녹색을� 연결하는� 매개

도� 됩니다.� 우리는� 이미� 살림이라는� 말을� 생명,� 삶,� 생명철학,� 생활정치� 등의� 용어로� 쓰면서� 낯설지는� 않습니

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걸� 어떻게� 이런� 의미의� 살림을� 녹색시민성이라는� 내용으로� 교육으로� 할까,� 평

범한�사람들의�언어로�만들까입니다.�

제가� 요즘� 복면가왕이라는� 프로를� 열심히� 보는데,� 이� 프로가� 보여주는� 것이� 가수의� 본질은� 노래이고,� 노래의�

본질은� 소리라� 합니다.� 복면가왕의� 논평자� 중� 윤일상이� 계속� 말하는� 것이,� 저� 가수가� 그� 가수임을� 아는� 것이�

톤이라고� 하는데,� 음색이라고� 하는데� 색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녹색시민성을� 이야기할� 때� 톤은,� 색채는� 뭘

까?� 가수는� 그� 톤,� 스타일이� 말로� 표현되는데� 이를테면� 김봉호같은� 가수는� 쇳소리나� 긁는� 소리인데� 그� 소리

를� 내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다� 하고� 그� 스타일을� 알고� 포착하고� 좋아하고� 옆에� 권하게� 됩니다.� 녹색시민

성은� 일반적인� 시민성과�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시민성인데� 선생님처럼� 일반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녹색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녹색이라는� 스타일.� 가수는� 노래로� 이야기하고� 시민은� 삶과� 생활로�

이야기하고� 삶이� 펼치지는� 무대가� 시민사회� 일텐데� 그런� 일련의� 삶과� 무대가� 되는� 시민사회를� 녹색의� 관점에

서� 어떻게� 설명할까,� 그리고� 그� 설명들이� 모여서� 하나의� 스타일이� 될� 것입니다.� 그� 스타일이� 아직� 녹색의� 가

치를� 사랑하는� 사람에겐�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잡히게� 할까가� 우리의� 과제입니다.� 강남

스타일하면� 뭔가� 와� 닿고� 어떤� 게� 떠오른데� 강남스타일이라는� 언어를� 중심으로� 나뭇가지에� 솜사탕처럼� 감겨�

올라오듯.� 우리는�어디서�찾을까라는�고민이�필요합니다.�

폴� 바하라는� 사상가가� 사람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쉽게� 사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옮겨간다고� 말했듯이� 녹색의� 관점에서� 시민성을� 설명할� 때� 좋은� 가치가� ㅁ낳습니다� 모든� 존재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라는� 것� 돼지가� 우리� 음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것처럼� � 생태학에서�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거나�존엄성같은�이�이런� 내용으로�시민성을�채워야�할�것�같습니다.�

이� 과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람시가� 민중은� 자기의� 언어를� 갖지� 못해서� 지배자의�

언어로� 말한다고도� 했고� 인문학교육자� 얼� 쇼리스는� 인문학� 교육은� 미술감상이� 아니라�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언어를�찾아가는�과정이다고�말했는데�언어가�없으면�우리를�설명할�수� 없습니다.� 질문하고�답하고�참여

하려면�공통의�언어가� 있어야�합니다.� 언어가�있어야� 어디� 가보자� 이럴� 수� 있는데,� 최근� 제가� 경험한�것을� 말

하면� 언어라는� 것은�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시민성에� 대한�

개념� 설명� 못하더라도� 그걸� 이야기하고� 누리고� 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철학적으로� 늘어놓는� 말은�

못해도� 자기� 경험과� 에피소드를� 갖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처럼� 영화� 도가니에서� 여주인공이� 수모를� 겪으며�

하는� 말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바꾸려� 해서� 싸운다고� 말하는데� 그� 언어를�

통해� 그� 사람의� 삶이� 설명이� 됩니다.� 여성단체� 활동가� 한� 사람이� 선배� 세대는� 좋았다,� 많은� 것들이� 통과되지�

않았느냐며,� 나의� 활동은� 뭐라고� 설명할까,� 의미� 없는� 것일까� 이야기했는데� 모여서� 당신은� 실패를� 감내하는�

사람이다고�말했을�때� 이� 언어로�이야기가�되는�경험을�했습니다.

두� 번째로� 저도� 80년대� 386선배들을� 비판하며� 살았고� 지금은� 그들의� 자녀쯤� 되는� 대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제� 세대가� 선배세대에게서� 들은� 말� 중� 가장� 싫은� 게� 왜� 사회에� 관심이� 없니� 였는데,� 지금� 학생들은� 제� 세대

에게� 너희는� 왜� 하고� 싶은� 없니라는� 말을� 듣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 한� 번도�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생

각한� 적이� 없고� 사회를� 생각한� 적이� 없는� 거죠.� 제가� 시민교육을� 한� 학기� 강의를� 하고� 리포트를� 받으면� 다�

반성문을� 씁니다.� 선거를� 하지� 않았다,� 민주화를� 위해� 애썼는데� 나는� 이렇게� 산다� 등등.� 그럴� 때�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시민교육,� 시민성을� 도덕으로� 받아들이지� 말아라.� 두� 번째로� 내가� 당위적으로� 말하지� 말아야� 겠

다.� 당위가�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원리를� 말하는� 것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시민교육은� 도덕과� 당위

로�받아들이고�있어서�그걸�넘어서야�할�필요가�있다는�것입니다.� � �

[지정� 토론� :� 김혜애]� (녹색연합�공동대표)

김호기� 선생님께서� 최근� 다른� 논단에서� 우리� 운동진영의� 새로운� 화두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표현,� 살림의�

사회� 쓰시는� 걸� 보면서� 반가웠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 생태사회를� 이루는� 것이� 우리� 사회의� 근

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살림의� 정체성� 부분에서� 몇� 가지를� 이야기하셨는

데� 저는� 녹색운동진영에� 있다� 보니� 인간주의는� 생명� 중심주의� 교육은� 지속가능교육� 연대적� 개인주의는� 상생

의�공동체�등으로�치환되면�어떨까�싶습니다.� � �

저는�최근부터�스스로�진보라는�개념을�안� 쓰기� 시작했습니다.� 유령처럼�매달려�있던� 단어가�진보였는데�제가�

쫓기도� 하고� 갖혀� 있기도� 했는데� 어느� 날부터� 왜� 여기에� 매여있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진보가�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는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편협하게� 바라봐서� 그럴�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 진보라는� 걸� 표방하

는� 그룹이나�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이� 녹색의� 가치로� 봤을� 때� 그리� � 훌륭하지만은� 않았다� 생각합니다.� 진보는�

과연� 시민성이� 있고� 보수는� 시민성이� 없을까.� 사회가� 발전하려면� 진보와� 보수가� 십년단위로� 바꿔주면� 좋다는�

말도� 하는데� 여기서� 전제는� � 천박한� 진보와� 천박한� 보수가� 아닌� 합리적이� 진보와� 보수라면� 서로� 정권을� 교체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시민이� 시민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할까도� 있습니다.� 학생운동

을� 하던� 시절엔� 민중이나� 대중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생각없는� 사람을� 대중이라고� 하고� 계급의식을� 가진�

사람을� 민중이라� 하며� 나눴습니다.� 어떤� 정파가� 특정한� 지향을� 가지지� 않고� 사람� 많이� 모으는� 것에만� 집중하

면� 대중추수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민중,� 대중이� 시민운동� 하며� 따라왔는데� 시민운동의� 영역이� 확장

되자마자�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는데,� 그� 당시� 시민이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녹

색연합�회원들을�대변한다고�항변하기도� 하고,� 저� 쪽에서�공격하는�시민없는�시민운동이라는� 것에서�시민이란�

무엇일까도� 고민했습니다.� 박영신� 선생님께서� ‘시민’이란� 어때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풀리기도�

했습니다.� �

그러면서� 올바른� 시민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고민했는데� 며칠� 전� 교황의� 회칙에서� 최초로� 환경� 회칙

을� 만들었는데,� 교황이� 직접� 주제선정부터� 집필까지� 하셨다� 합니다.� 그걸� 보면서� 환해졌습니다.� 더불어� 사는�

집� 지구를� 돌보는� 일에� 대한� 회칙인데� 이� 위기의� 시기에�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부분에서� 교

황이� ‘올바른� 한계를� 정하고� 바른� 자제력을� 가르칠�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이� 필요하다는� ’부분에

서� 올바른� 한계와� 바른� 자제력이라는� 말이� 딱� 들어왔습니다.� 모든�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과� 모든� 것을� 할� 있어도� 바른�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인데� 이걸�

가지면�진정한�시민이�아닌가�생각하게�되었습니다.� �

공동체가� 보수의�가치라�표현하셨는데�서울시를�중심으로� 에너지자립마을,� 성미산� 마을� 등� 마을공동체�만들기�

사업이� 있습니다.� 공동체야말로� 상당히� 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 교

육,� 지역범죄,� 육아,� 먹을거리� 등의� 문제에서� 뜻을� 같이� 하고자�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

면� 지향하는� 목표가� 생기도� 외부의� 시선이� 있어� 잘하려는� 동기가� 크고� 부단히� 소통하고� 더� 좋은� 걸� 찾으려고�

하고� 공부도� 합니다.� 박원순� 시장도� 서울시가� 가진�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려면� 공동체가� 많이� 만들면� 된다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일정�부분� 그런� 말에�공감을�하게�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공공가치가� 연결되어� 있다� 하셨는데� 일면� 동의를� 하고� 일면� 그렇지� 않은� 모습도� 봅니다.�

조금� 고민스런� 부분인데� 이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건강한� 소통과� 대화인데,� 이걸� 다시� 가능하게� 하

는�게� 생태교육이다�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올바른�한계를�알고� 바른�자제력을�가진�사람이�되도록�유도하고�

사회가�그� 시스템을�갖는�게� 시민을�양성하는�과정이고�그� 도구는�교육일�것이라�생각합니다.� � �

[유종반]� (생태교육센터�이랑�이사장)

질문을� 드리자면,� 이중적� 시민성을� 말씀하셨는데� 이� 이중성이� 인간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것인가,� 원래는� 선

한� 인간인데� 공적인�삶,� 더불어�살아가려는� 것이� 인간인데� 과정에서� 잘못� 되어� 변질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태

생적인� 인간이� 그렇다면� 선생님이� 말하는�혁신이� 가능할까?� 인간을�믿을� 수� 있을까?� 이중적� 인간성을� 어디까

지� 긍정해야� 할까?� 긍정하자면� 혁신이� 어려울� 것� 같고�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을� 믿을� 수� 있을까,� 저는� 믿고�

싶은데� 믿지� 못하겠습니다.� 사회나� 국가도� 어떤� 나라도,� 자국에서� 긍정적이지만�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는� 자

국� 중심인데,� 우리가� 이루려고�하는�것을� 정말� 이룰� 수� 있을까�심한� 회의가�들기도�합니다.� 혁신은�분명히�되

어야� 하는데� 인간과� 사회가� 갖는� 것이� 태생적이라면� 혁신이� 가능할까,� 또� 태생적인�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통

해� 혁신이�가능할까,� 하는�질문이�듭니다.�

[윤기돈]� 녹색연합�에너지기후팀�

인간의� 이중적� 측면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다만� 그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가를� 봐야하는

데� 시민의� 정체성이� 사회의� 정체성과� 서로� 주고� 받으면서� 정체성이� 부각된다고� 보는데� 개인� 정체성에� 실망한

다면� 이는� 사회정체성에� 대한� 실망이� 개인� 정체성에� 투영된� 결과라고� 봅니다.� 저는� 개개인이� 나에� 대한� 믿음

에서�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정도�살면� 남도� 이� 정도� 살� 수� 있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비슷

한� 환경에서� 비슷한� 교육받으며� 주위와� 소통하며� 만들어진� 정체성이라면� 그� 정체성을� 나에� 대한� 믿음으로� 표

현한다면,� 남들� 역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정체성이�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기본의� 정체성은�

이중성이지만�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은� 남에게도� 있는데� 나와� 그들이� 만난� 사회의� 지점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럼� 그들에게도� 그런� 사회를� 만나게� 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궁금한� 건�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민의� 정체성이� 사회정체성과� 조응한다고� 했을� 때� 남녀� 노소� 모두가� 시민인데� �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정

체성의� 그룹,� 사회의� 정체성에� 대면하고� 있는� 그룹은� 누구인가� 하는� 지점과� � 그� 그룹과� 우리는� 어떻게� 만나

야� 하는가,� 교육하고� 스스로� 깨우치고� 조직해야� 할� 시민이라면� 지금� 주목해야� 할� 그룹은� 누군가인가� 하는� 것

입니다.� 올바른�시민으로�살기�위해� 사회의�모순과�가장� 대면하고�있는�존재는�누구인가�예전엔�노동자그룹이

었다면�지금은�누구인지�같이�고민하고�싶습니다.�

이중의� 국가,� 이중의� 시민사회라라고� 하셨는데� 소통이� 중단된� 사회라는� 걸� 주목하고� 싶습니다.� 배설만� 있고�

소통은� 없습니다.� 소통의�단절에서�소통을� 어떻게� 원활하게�할� 것인가,� 모순을� 풀어가는� 과정을�어떻게� 할� 것

인가� 생각해봅니다.� 진보가� 옳은가� 보수가� 옳은가를� 떠나서� 문제를� 바라보고� 문제의� 답을� 얻는� 건� 진보에서�

나올� 수도� 있고� 보수에서도� 나올� 수� 있는데� 그렇게� 안� 보는� 현실에서� 시민은� 어떤� 위치에서� 사회� 변화를� 이

끌어갈까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주장을� 더� 강하게� 이야기해서� 관철하는� 것이� 맞는지,� 내가� 관철하

려는�주장이� 틀릴� 수� 도� 있다는� 전제�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하는� 건지� 올바른� 시민의�모습인지�등에서� 저� 스

스로�헷갈리는�부분이�있습니다.� � �

[신수연]� 녹색연합�평화생태팀�

사회�전체라고�이야기할�수� 없지만,� 보편적인� 사회�대부분� 사람들이� 공감할�수� 있는,� 김호기�선생님이�말씀하

신� 시대정신이� 지금� 한국사회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엔� 계급이나� 노동자라고� 이야기했을� 때� 굉장

히� 많이� 분화가� 되었듯이� 똑같이� 자동차의� 오른� 바퀴와� 왼바퀴를� 조립하지만� 다른� 처우에� 처해있고,� 각기� 처

한� 입장에서�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생태가치는� 대부분� 동감할� 수� 있는� 가치라� 생각했는데� 실제� 활동하다보

면�우리는�반대만�하는� 무리라는�공격을�받습니다.� 하자라는�주장을�하는� 사람들이�아니라�기업의�이윤추구에�

반대하고� 정부의� 사업에� 반대하고,� 제동만� 거는� 집단이라는� 이야기도� 듭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면,� 녹색,� 생태라는� 가치라� 생각했지만� 이것은� 굉장히� 추상적이어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인용되었듯이� 그람시의� 말같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기� 언어가� 없다거나� 한나� 아렌트의� 악이� 어떻게� 가능할까에서� 악이� 가능했던� 것은� 악마적인�

존재가� 있는� 게� 아니라�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사유하지� 않으면� 악이� 된다는� 걸� 말하며� 사유의�

불감성을� 말했는데� 우리� 시대는� 불안과� 불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생존의� 공포가� 있어서� 그럴텐데� 그러면�

공적인�가치,� 공공의�가치를�이야기하는�건� 배부른�소리이고�그런�것을� 가능하게�하려면�그럴려면�기본소득운

동을� 해서� 기본소득이� 먼저� 있어야� 하나,� 경제적� 토대가� 전제가� 되어야� 가치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건� 아닌

가� � 생각하게�됩니다.�

[박영신]�

신수연�씨의� 이야기는�좋은�이야기�많지만,� 결국� 먹고� 사는� 게� 먼저,� 경제적�토대가�중요하다는�겁니까?� 경제

주의�논리�같은� 건가요?

[신수연]�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 저보다� 조금� 후배의� 사람들에겐� 취업의� 기회조차,� 나눌� 빵조차� 없는� 한정된� 기회

조차�제약이�심한� 20대의�친구들은�그렇지�않을까�생각합니다.�

[박영신]�

한나아렌트가� 말하는� 악,� 그�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좋은� 데� 그랬습니까?�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

랬을까요?�먹고� 사는데�여유가�있는데도�그랬을까요?

[신수연]�

이� 시대엔� 안� 좋은� 조건이� 겹친� 것� 같은데� 그� 시대엔� 아니겠지만� 지금은� 경제적인� 요인도� 한� 몫을� 더� 했다�

생각합니다.�

[정명희]� 녹색연합�정책팀

덧붙이면� 저는� 아직�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기본소득� 이야기가� 경제논리� 차원이� 아닌� 차원,� 생태적� 가치를� 앞

세우는�녹색평론이나� 녹생당에서�가장�앞선� 캐치프레이즈처럼�내세우는�게� 기본소득인데,� 그것은�경제가�해결

되야지� 하는� 차원을� 넘어선�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가� 근본적인� 생태적� 관점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생태가

치를� 실현하는� 여러� 길에서� 우리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 하나의� 방법으로� 선택한다면� 그� 바탕엔� 우리도� 기본

소득논의도�우리가�받아들이는,� 또는� 사회에�던져야�하는� 단계가�아닌가�생각합니다.�

[유현상]� 상지대학교�강사

기본소득문제가� 대두되는� 배경에�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김기본소득은� 녹색시민의� 가치에� 부합할� 수�

있느냐에� 회의가� 듭니다.� 기본소득� 이야길� 처음� 들었을� 때� 선진국의� 복지요구는�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이젠�

기본소득까지� 들고� 나오는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진국의� 부의� 상당요소는� 후진국의� 노동착취에서� 기인

하다고� 봤을� 때� 선진국이� 과도한� 복지를� 누릴수록� 후진국과� 격차는� 더� 벌어지고� 후진국의� 삶은� 더� 비참해� 질�

수� 없는데� 이를� 고려하지� 않은� 대안이라고� 생각하빈다.� � 김호기� 선생님께서� 참여의� 원칙� 중� 지구적� 생각과�

지역적� 실천을� 이야기하셨는데,� 기본소득은�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실천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아직도�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어린� 아이들이� 일달러도� 안되는� 돈을� 위해� 생명을� 무릅쓰고� 일하는

데� 그� 부가� 상당수가� 미국과� 유럽으로� 가는데� 그런� 나라에선� 우린� 부가� 되니까� 우린� 이� 정도의� 복지를� 누릴�

수� 있어� 하는� 것은� 마치� 한� 국가� 안에서� 부잣집� 아이들이� 우린� 부자니까� 이걸� 소비할� 수� 있어� 하고� 가난한�

아이들� 앞에서� 과시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생각합니다.� 이것은� 녹색시민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

다.

[박영신]

유� 선생의� 이야기는� 아시아나� 아프리카도� 이른바� 선진국처럼� 어느만큼� 수준이� 올라와야� 녹색에� 대한� 이야기�

할� 수� 있다는�생각과�관계있다는�겁니까?

[유현상]� �

저는�그것도�인정해야�한다�생각합니다.� 이를테면�지구적�차원에서�녹색의�마음이�강조되어야�하는�것이� 후진

국의�당장의�삶을�외면하거나�상처를�줘선� 안된다고�생각합니다.�

[정명희]

그게� 가능하려면� 기본소득이� 도대체� 얼마인가가� 아프리카,� 유럽,� 한국이� 다� 다르겠지만� 어느정도성장이라고�

표현한다면�그것이�되어야�한다는�말은� 개별� 사회에서는�기본소득으로�표현될�수� 있지� 않을까요?

[유현상]�

기본소득은� 노동의� 대가가� 아닌� 국민이고� 시민이라면� 모두에게� 주어진� 소득인데� 모든� 국민이� 4대� 의무를� 다�

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국가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설득력이� 있습니다.� 가끔� 언론에서� 보수논객

들이� 세금� 이야기를� 할� 때� 용어를� 바꿔� 노동자� 절반� 이상은� 세금� 안낸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아이들도� 과자

를� 사면서� 세금을�냅니다.� 소득세를� 안내는� 것을� 세금과�함께� 이야기하면서�말을�바꾸는� 건데요.� 모든� 아이들

도� 보호를� 받아야�한다고� 하면� 기존의� 복지� 안에서�해결해야�하는� 거지요.� 기본소득이� 아니라.� 저는� 기본소득

이�유럽이�청년실업을�해결하기�위해�만들어낸�개념이�아닐까�생각합니

[배보람]� �

신수연� 씨의� 말은� 기본적으로� 시민� 밖의�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세대론으로� 말� 했을� 때�

저도� 선배들은� 호시절에� 운동했다고� 자주� 말하는데� 제도의� 변화와� 같은� 성과가� 있었고� 호명할� 수� 있는� 사람

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굶어죽는� 세� 모녀가� 있고� 한부모� 가족의� 아이나� 조부모와� 사는� 아이들은�

교육의� 수준에서� 시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닌� 곳에�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만든� 제도가� 있지

만� 그� 밖으로,� 제도적� 절차,� 시민�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아무짝에나� 쓸모없는� 존재가� 내가�

될� 수도� 나의� 부모도� 될� 수� 있다는� 불안이� 기저에� 깔려있습니다.� 그� 불안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공공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게,� 나는� 쓰레기인데� 저게�무슨� 의미일까�하는� 다른� 차원이�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기본소득

에� 관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경제적� 맥락이� 아닌,� 아무� 존재가� 아닌� 존재를�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는� 최소

한의�장치,� 방식이�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

[박영신]� �

시민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닐까를� 생각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봤을� 때,� 그가� 누구든,� 어떤� 이유에서� 국가

든� 조폭이든� 이웃에� 의해서� 강도를� 당했든� 그� 사람을� 대개� 지나가는데,� 교육받은� 사람도� 전문직� 사람도� 부자

도�그냥� 지나가는데�어떤�사람은,� 그� 사람은�그�사회에서�무시당하는�사람이었는데�강도당한�사람의�신음소리

를� 들을� 수� 있는� 섬세한� 귀를� 가진� 사람이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구하지요.� 그� 사람이� 시민의� 원형이지� 않을

까�생각합니다.� 부자도,� 전문직도,� 배운� 사람도�아닌� 사람이�시민이라는�거지요.� 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모습

에서�시민의�초상을� � 찾을� 수는� 없을까�생각합니다.� 배보람씨,� 신수연씨의�생각에�이어� 생각해보자면요.

[채영재]� 참가자�

사회에서�가장�기본단위인�가정을�보면� 중산층이라�하면�아파트가�몇�평,� 자동차는�몇� CC� 이런� 걸� 척도로�삼

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부의� 가치에만� 초점을� 두고� 있으면� 그걸� 따지면� 이미� 시민이� 아니다� 생각합니다.� 시민

이라면� 이런� 질문을�해야� 한다고�보는데,� 김호기� 선생님에게� 묻는다면� 어떤�스포츠를�하고�있는지,� 골프는� 치

는지,� 어떤� 악기를� 다루는지,� 싱글인지,� 불의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데� 그런� 걸� 보면� 어떻게� 대처하는� 지� 묻

고� 싶습니다.�

[정윤숙]� 녹색교육센터

경제적� 이야기�많이� 나오는데�경제적� 가치� 말고� 우리가�시민이라�했을�때� 볼� 다른� 관점은� 없을까?� 예를� 들면�

시민단체에� 어느� 정도� 기부금을� 내나?� 같은� 거죠.� 시민에게� 새로� 정립되는� 아이덴티를� 부여해야� 하지� 않나�

봅니다.� 사회학자들이� 바라보는� 그런� 가치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다.� 그것이� 있어야� 같이� 공유하고� 만나고

자� 하는� 사람의� 층,�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집단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실

의� 경제적� 가치로� 바라보는� 시민의� 상인� 아닌� 다른� 상이�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또� 인간의� 삶은� 어느� 때나�

불안이� 다� 있는데,� 인류가� 있다면� 시대마다� 불안이�있고� 불안에� 대한� 대응점이�있을텐데요.� 젊은� 세대들이� 지

금� 불안하다� 80년대는� 운동하기� 쉬었다� 하는데� 그� 때도� 운동하기� 불안했습니다.� 시기시기마다� 불안하지� 않은�

적이�없는데�그럼� 어떻게�대응할까,� 한편으론�불안이�아닌데�우리가�허구적으로�만들어놓은�불안의�크기가�너

무� 커서,� 우리가� 바라보는�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에� 홀릭되어� 우리가� 불안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로� 생각을�

확장시켜�볼� 필요가�있다� 생각합니다.�

[육경숙]� (녹색교육센터)�

살림이라는� 말은� 한살림때문에� 익숙합니다.� 제� 기억에� 살림이라는� 단어가� 한� 살림� 이외에� 잠깐� 돈� 게� 세월호�

사고이후� 인데,� 이때� 안전을� 위한� 사회,� 살림의� 사회,� 살림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살

림이라는�단어엔�우리가�녹색이라고�이야기한�것이�다�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런데�우리�시민단체�또한�조각조

각� 분화되어� 있어� 안전,� 평화,� 복지,� 아동,� 환경� 다� 쪼개져� 있다� 보니� 살림은� 이� 모든� 것이� 어울려져� 이야기

되어야� 하는데� 세월호� 사고� 이후� 계기가� 되었지만� 힘있게� 같이� 하지� 못한� 것이� 직면한� 현실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조철민�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교육이라는� 것이� 당위적이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민

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들어가서� 민주시민교육을� 찾아보았는데� 재미가� 없더라구요.� 저희도� 느끼는� 건데� 유쾌하

고� 재미있는� 것으로� 녹여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김혜애� 선생님이� 말씀하신� 걸� 보면� 누가� 시민이라고� 생각을�

할까,� 그러면�서울시민이�아니라�공공의�문제에�관심� 있고� 참여하려는�사람이냐고�물으면�네라고�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물어본다면,�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같은� 문제를� 떠올리는� 사람으로� 넓혀보면� 이� 사람들이� 시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김호기� 선생님은� 정치적,� 사회적� 관점에서� 시민을� 이야기하셨는데� 마지

막은� 마음과� 질문,� 소통,� 참여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 같지만� 함께� 나눠야� 할� 것이� 은� 이� 부분

이�아닌가�생각해보았습니다.�

[신지선]� (녹색연합�기후에너지팀)

우리는� 돈이� 얼마고�차가� 얼마짜리인지�이야기� 하는데�유럽에선�스포츠,� 악기,� 외국어�이런� 걸� 기준으로� 합니

다.� 그럼� 저는� 외국어도� 하고,� 여행도� 가고,� 운동도� 하니� 저는� 중산층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선� 서민� 축에도�

못� 듭니다.� 비정규직� 평균� 급여가� 150만원인데,� 그것에도� 미치지� 않습니다.� 잠깐� 기분이� 좋았다가도� 박탈감

이� 이어집니다.� 불안,� 불신,� 분노가� 심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

다.� 내� 코가� 석자인데� 어딜� 가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고� 인터넷에서도� 바꾸자� 바꾸자� 누가� 탄핵소추� 발의하

지않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오늘� 느낀� 것은� 도덕적인� 우위에� 있다는� 사람들만� 고민할� 수�

있는� 생각이지� 않을까.� 저도� 박탈감을�느끼는데,� 제� 친구들은�어떨까?� 저희가�찾아가는�과정이�박탈감을�느끼

는� 사람과� 도덕적� 우위에� 있는� 사람을� 중간에서� 이어주는�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고민도� 가치

있지만� 그들의� 박탈감도� 존재하는데� 녹색시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 중간을� 가는� 길을� 안내한다면� 녹색

시민으로의�길잡이가�우리가�되지�않을까�싶습니다.�

[유현상]

김호기� 선생님께서� 피난민� 의식을� 이야기하며� 메르스� 사고로� 의료인의� 가족까지� 왕따� 시키는� 상황을� 연결하

신�점이�흥미로왔습니다.� 한편으론�메르스�사고만�봐도� 매스컴을�보면�초기엔�정부대응의�실패를�이야기�했는

데� 서서희� 문화적�문제,� 국민성의� 문제로�가며� 메르스� 확산에� 국민을�공범으로�몰고�가려는� 흐름이� 있습니다.�

나는� 의료인� 가족을� 왕따시킨� 적도� 없는데� 우리� 국민의식을� 바꿔야� 한다,� 삼풍백화점� 무너질� 때� 나는� 철근�

뺀� 적� 없는데� 국민의식을� 바꿔야� 한다� 말하는데,� 우리� 국민이� 겪은� 사회적� 보편적인� 비극을� 갖고� 국민의식으

로� 뭉뚱그려� 이야기할� 때� 위험성은� 없는지,� 물론�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것은� 아닌� 걸로� 알지만� 우려되는� 부

분이�있습니다.� �

[조철민]

도덕이나�당위로�이야기되는�건�효과가�없습니다.� 최근에�하승우�선생이�쓴� 공공성을�재미있게�읽었는데�마지

막� 구절에� ‘공공성을�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에� � 서로의� 삶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삶에� 대해� 사

고하는� 것이� 공공성인데� 그것은� 우리의� 자유와� 삶을� 위해서다..는� 것인데,�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

하기� 위해� 살기� 위한� 삶의� 원리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 대학� 1학년생을� 보면� 자원봉사나� 시민교육을�

하나의� 부가적인� 스펙으로만� 보고� 있다.� 잘나기만� 할� 게� 아니라� 착하기까지�해야�한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

선� 시민교육은�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사마리안을� 찾기보다� 사마리아� 사회가� 가진� 사회를� 바꾸는�

것이� 더� 나을것입니다.� 사회를� 바꾸는� 방법은� 영웅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모든� 순간� 사람의� 생각이� 바뀌는� 것

인데� 둘다� 어렵습니다.� 합리적인� 대안이라면�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수단이� 가진� 한계가�

분명고� 그것은� 개인적인� 수단으로� 취환이� 됩니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공동학습도� 하지만,� 에너지� 문제도� 한

전의� 비리로� 생긴� 문제를� 자꾸� 개인더러� 자꾸만� 에너지� 아끼라� 하는� 것은� 개인의� 인식이나� 행동의� 변화를� 강

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공동육아에� 참여하고� 있는� 게� 그게� 중요한� 사회적� 조건이� 됩니다.� 제가�

대학동창들을� 만나� 차� 이야기,� 골프� 이야기� 하는데� 거기서�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위축됩니다.� 사회적� 조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신념이� 침해받을� 때� 나를� 지키는� 것이� 사회적� 조건입니다.� 그� 사회적� 조건� 만들기

가�중요하다�생각합니다.� �

<김혜애>

생존이나�경제적�토대가�되어야�시민성이�가능한가,� 높은�지적수준을�가져야�시민성을�가져야�하나� 질문에�빠

질� 수� 있습니다.� 환경운동�하다보면�먹고�살기� 바쁜데�이런� 말� 많이� 듣잖아요.� 그런데�이런� 말이� 어쩌면�사회

지배계층이� 만들어낸� 허위의식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처지를� 극복하려는� 내부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시민성이라� 생각합니다.� 노숙자도� 시민성을� 갖고� 있고� 한달에� 1-20만원� 갖고� 생활하는� 사람도� 시민성이� 있습

니다.� 문제는� 그걸� 해결하려는� 동기,�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시민성이라� 생각합니다.�

선진국민,� 중산층,� 이런�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만든� 허위� 개념에� 대비해� 우리가� 말하는� 시민이� 지향하는� 지수

가�뭔지를�자꾸� 만들어내고�사회에�전파해�나가는�것이� 필요하다는�말에�동의합니다.�

[김호기]

조철민� 선생님이� 말씀했듯이� 언어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참� 어렵습니다.� 상아탑의� 언어도� 아니고,� 무한도전이

나� 런닝맨의� 언어로�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제� 3의� 언어가� 필요한데� 민중들의� 자발성을� 담은� 언어,� 고민해야�

합니다.� 도덕이� 아니라� 원리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눈높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강요하는� 순간�

이탈해버립니다.� 김혜애� 선생의� 첫� 질문에� 답하자면� 진직이는� 타켓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혁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민이라는� 말에� 담긴� 유토피아적� 에너지가� 사실상� 소진되었습니다.� 어떤� 개념이든� 소통되

어야� 하는데,� 지난� 28년동안� 우리는� 소비해� 버렸습니다.� 마을공동체� 중요한� 건� 공감하는데� 국가혁신과� 공동

체혁신� 결합시켜야� 하는데� 스페인� 안드리시아� 지방의� ...�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서울시의� 실험이� 강화될� 필요

가�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하셨는데� 어렵습니다.� 무의식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고� 합리적� 존재이

기도� 하고� 이성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 최근� 가장� 크게� 인간에� 대해� 이해된� 것� 에드워드윌슨의� 사회생물학인

데� 인간은� 진화화는� 존재라는� 것,� 하버마스,� 윌슨� 등등� 토론이� 이뤄지는데� 저는� 제가� 싫어하는� 것이긴� 한데�

경제학적�원리가�중요하다�봅니다.� 경제학적�원리는�딱� 두가지�인센티브와�퍼니쉬먼트인데�선한�일을� 하는�사

람은�보상하고�나쁜�일을� 하는�사람은�엄벌했으면�좋겠습니다.� 이게�잘�이뤄지지�않고�있습니다.

개인적으로�지금은�활동하지� 않지만� 94년부터� 2005년까지�참여연대� 활동했는데�지난�민주화시대를�압축적으

로� 말씀드리자면�시민적� 시민으로� 출발했습니다.� 환경운동연합,� 참연연대,� 경실련,� 녹색연합�등� 어느� 지점부터�

정치적� 시민으로� 바뀌었습니다.� 투표가� 제일� 중요했죠.� 그런데� 좌절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다시� 시민적� 시민

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시민적� 시민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참�

어렵습니다.� 최근엔� 어느� 의제든� 정치적� 의게자� 되어버립니다.� 정당과� 언론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만� 아주�

작은� 책임은�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일련의� 선거� 패배로� 좌절된� 부분이� 있지요.� 시민적� 시민,� 시민적� 시

민사회를� 복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물들어� 있는� 정치적� 색깔을� 빼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도� 생각합

니다.� �

지금의� 시대정신은� 복지국가라고� 봅니다.� 과감하게� 역사의� 합목적적�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 독

일,� 프랑스,� 미국� 다� 그렇게� 갑니다.� 산업화� 다음� 민주화이고� 그� 다음은� 복지국가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계

속� 주춤하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적� 가치와� 탈물질주의적� 가치인데� 물질적� 가치는� 민주화세력.� 오히려� 신세대

들이� 탈물질적� 가치,� 외환위기� 이후� 다시� 물질적� 가치로� 강화되었습니다.� 부모가� 파산하고� 나는� 일자리를� 얻

어야�하니까요.� 한국의�젊은� 세력과� 다른� 나라� 세대와� 다른� 지점입니다.� 한때� 저는� 트라우마�세대라고�말했는

데� 굉장히� 안된� 세대입니다.� 초중등때� 부모의� 파산,� 실직을� 겪고� 간신히� 복귀했는데� 청년실업이� 기다리고� 있

습니다.� 트라우마가� 계속� 있고� 마음� 속� 깊이� 역시� 돈이� 최고야� 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세대의� 특징입니다.�

혹자는� 88만원� 세대라고� 이야기하지만� 충분히� 이해합니다.� 개인의� 삶으로� 보자면� 광복� 70년� 동안� 어쩌면� 가

장� 불쌍한�세대라고�생각됩니다.�

기본소득문제는� 규범적으로는� 옳습니다.� 현실에선� 스위스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규범적� 당

위로는� 옳지만� 과연� 우리� 국민이� 받아들일� 것인가,� 정치적� 결정� 이뤄져야� 가능한� 건데데,� 어렵습니다.� 물론�

이� 방향으로�가야�합니다.� 노동시간�단축하고�기본소득이�이야기되는,� 그러나�쉽지�않습니다.�

스포츠는�등산밖에�못하고�악기� 다루는�것은� 없고�불의는�참여연대�경험상�참지는�않습니다.� (웃음)

시민의�상에� 대해� 질문한�분이� 계시는데�사회학과�정치학�연관된�지난� 20년� 간� 진행된�논쟁� 중에� ‘볼링� 얼론’�

디클라잉� 오브�소셜� 논쟁이� 있습니다.� 미국� 로버트�퍼트넘� 하버드�대� 교수가� 시작한�논쟁인데� 5-60년대� 미국

에서� 동네사람들이� 볼링을� 같이� 치러� 다녔는데� 이때� 볼링�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사회적� 자본이라� 말하며�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적� 자본은� 여기에� 있었다.�

함께� 볼링치기,� 그런데�이것이�쇠퇴했다,� 이것이�십여년�동안� 논쟁되고�있습니다.� 핵심은�여기에�있습니다.� 우

리� 사회엔�같이� 모여�고스톱을�치든�수다를�떠든,� 이런�커뮤니티가�중요합니다.� � �

옛날에도� 불안하지�않느냐고�말하는데�예전엔� 조금� 다른데,� 예전엔�운동을� 하면서도�민주주의가온다는�믿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활동가들에겐� 죄송하지만,� 녹색의�

세상이� 정말� 온다고� 생각합니까?� 그때는� 다� 감옥에� 가도� 전두환� 정권이� 끝장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미래에�

대한�믿음이�없습니다.�

살림은� 전체론적� 접근이� 중요합니다.� 부분에선� 봐선� 언되고� 합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카프

라의� 논리에� 공감합니다.� 심판이라고� 썼지만� 어떤� 이들에겐� 무기력으로� 오는� 것� � 맞습니다다.� 젊은이들의� 초

상일� 겁니다.� 다수의� 친구들은� 무기력할� 겁니다.� 모� 언론매체는� 사토리,� 달관이라고도� 하는데� 이건� 말이� 안됩

니다.� 달관하고�싶어�달관하는�게� 아닙니다.� 앞으로�나아갈�수없어서�생긴�문제입니다.� 이게� 문제인거죠.� 솔직

하게� 말하면� 현재� 우리� 사회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핵심은� 활력인데� 활력이� 전혀� 없습니다.� 기성세대

의�책임입니다.

메르스� 사태에� 대해� 제가� 얼마전에� 메르스� 사태의� 다섯가지� 코드이라는� 책을� 썼는데� 정부의� 책임,� 병원의� 책

임,� 괴담의�사회학,� 메르스가�경제에�미친� 영향,� 메르스의�미래.� 아까� 말씀� 드린�것은� 그� 중� 하나입니다.� � �

유종반� :� 마지막�우리� 사회가�죽어간다�말씀하셨는데,� 우리만�죽어가는지�전�사회가�그런건지?

[김호기]

사회학을� 공부하다면� 2-30대는� 마르크스로부터� 영향을� 받고� 4-50대는�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케임으로부터� 영

향을� 받습니다.� 뒤르케임은� 사회를� 구성하는� 두� 가지� 중� 하나는� 활력으로� 보고� 하나는� 통합이라� 하는데� 우리�

사회는�두� 가지가�다�없습니다.� (다른�나라에�비해�어떤가요?)

우리� 사회가� 두드러집니다.� (전� 지구적으로� 보면요?인류가� 죽어가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지� 않

습니다.� 오바마의� 미국은� 과거보다� 더� 민주적입니다.� 독일이후� 통독이후� 후유증을� 딛고� 활력이� 있습니다.� 제

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활력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우리가� 너무� 국가에� 책임을� 미뤄선� 안� 된다는� 것입니

다.� 정치적� 시민사회가� 아닌,� 시민적� 시민사회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민사회가� 민주화� 이후� 30년대

를� 지나며� 한� 세대를� 마감한� 것입니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과감하게� 시민사회에서� 어

쩌면� 지금� 비정치의� 선언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볼펜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반대로� 더� 많이� 구부

려야�하는데� 지금은�비정치적�작은� 실천을�더� 많이� 해야� 할� 시점에�도래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명박,� 박근혜를�

겪으며� 정치라는� 블랙홀에�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많이� 훼손되었습니

다.� 왜냐하면�실제�한� 개인이� 살아가는데�정치가�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당과� 언론은�계속� 정치이성을� 강

조하지만� 정치가� 행복한� 삶으로� 나가는데� 얼마나� 큰� 비중일까?� 우리도� 모르게� 우리도� 정치중심,� 정치중독에�

빠진�건�아닐까�개인적으로�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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