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 이름 모세

204

Upload: axasoft

Post on 07-Apr-2016

218 views

Category:

Documents


3 download

DESCRIPTION

6 그 이름 모세

TRANSCRIPT

장 1

1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모세’란 이름으로

기묘자에게서 나온 이름 ‘모세’

“하나님의 40년, 모세 40년”

모세 나이 40에 있었던 일

이후 40년, 그리고 또 40년

“아들 이름을 게르솜 하여 가로되”

아들에게 아들 이름을 주지 않았다

‘더 나은 본향’이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의 그는”

여호와의 사자였음에도

호렙산 불꽃은 오늘날도 가능할까?

“모세의 하나님 만남을 논함”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 (우연이었을까 기연이었을까)

‘이제’가 될 때까지

“그 발에서 신을 벗게 한 까닭은”

‘신을 벗으라’ 하심은

“피 남편이요”

2

“당장 아니 고치시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신지라

아론 없는 모세, 모세 없는 아론

“그 지팡이 하나님 지팡이였나?”

자기 지팡이, 자기 입술로 여겼다면

하나님께 자리바꿈이란 없다

“내가 너로 신이 되게 하였은즉”

모세 섣부른 탓에

‘하나님같이 되리라’

3

“모세의 그 믿음 언제 어디서”

애굽 왕궁에서 자랐으나

‘모세’, 그 이름의 기묘함

XI

“모세로 아론에 하나님같이”

모세와 아론 관계

표적으로 인하여

XⅡ

“홍해를 건넌 자와 빠져 죽은 자”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

지금, 친히,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야

4

5

제 Ⅰ 편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본 문 : 출애굽기 제 2 장 제 8 ~ 10 절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

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

이더니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

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란 이름으로

‘모세’란 이름(물에서 건진 아이)으로 그의 가족이나 바로공주, 히브리민족은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을까?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본편의 핵심이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총리까지 되었던 요셉으로 인하여, 그의 아

비 야곱과 그 일가족은 애굽에 정착하게 됩니다. (출1:1)

이미 애굽에 살던 요셉 가족까지 합하니, 이들 야곱 혈속만 모두

70인에 이르렀습니다. (5절)

거기에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육이 중다(衆多), 번식하고 창성하

여 강대한 민족이 되어, 애굽 온 땅에 가득히 퍼져 살게 되었습니다.

(7절)

그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신민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 애굽보다 많고 강하다’는 현실을 알립니다. (9절)

소수민족인 이스라엘이 나날이 번식하여 애굽보다 강성해지는 것

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

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10절)

6

애굽은 이스라엘의 번성을 억제하는 한편, 자기 나라에서 떠나가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곁에 두고, 계속해서 종으로 부려먹자는 속셈

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에 말살정책을 쓰는 것은 애굽의 국력에도 문제

가 되는 일이기에, 애굽은 궁리하며 지혜를 모은 결과, 이스라엘에

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여 괴롭게 하자는 정책을 세우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한 성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자는 것이었죠.

(8~11절)

부역을 과하게 주어 심하게 학대함으로, 어떻게 하든지 출산을 막자

는 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인구증대를 아예 싹부터 자르자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애굽의 학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번식하고, 창성해

져만 갔으니 말입니다.

애굽의 정책이 어긋났던 것입니다.

7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부과해도, 히브리인의 출산은 막을 길

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말씀을 따르고

있었던 이스라엘이었기에, 날로 중대해져가기만 했습니다.

따라서 애굽은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12절)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의 부역은 날로 엄해져만 갔습니다.

아무리 고된 노동을 시켜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애굽

은 있을 수 없는 한 계획을 세웁니다.

아예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자는 작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멸족정책의 일환으로, 애굽왕은 먼저 산파들을 불렀습니

다.

“히브리 여인들이 해산할 때에 남자 아기가 나오면 죽이고, 여자 아

기가 나오면 살리라” (16절)

애굽 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왕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살려주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8

이에 왕은 다시 산파들을 불러 “어찌하여 이스라엘 남자 아기들을

살려주었느냐?” 꾸중하니, 뭐라 둘러댔습니까?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19절)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아이들을 살려준 산파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

어주셨습니다.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해주셨습니다. (21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는 더욱 성을 내며, 정책을 바꿔 선포합니다.

“남자 아기가 나거든 하수에 던지고, 여자 아기는 살리라” (22절)

이는 산파들 손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이 출애굽기 1장의 간략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2:10)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본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모세’란 이름으로 그의 주변 사람들은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아니

면 무엇을 잃게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본편의 핵심입니다.

출애굽기 제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9

한 레위 사람이 역시 동족인 레위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

았는데, 그 아기의 용모는 태어날 적부터 유난히 준수했습니다.

그런 까닭에서였던지 아이의 부모는 차마 내다버리지를 못하고, 집

안에서 몰래 석 달을 숨겨 키웠습니다. (2:1~2)

바로왕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1:22)

석 달 동안은 그런대로 몰래 키울 수 있었으나(2:3), 아이의 울음소

리가 담 밖까지 들릴 정도로 커지게 되자, 날로 두려움과 근심으로

고민이 심해져 갔습니다.

아이를 하수에 버리지 않고 집에서 몰래 기르고 있다는 비밀이 탄로

되는 날에는, 아이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온 가족이 망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기를 더 이상 숨겨서 키울 수 없고, 왕명도 더 이상 어길 수 없게

되자, 가족들의 고민은 커져만 갔습니다.

아기를 살리자니 온 집안이 멸할 것이요, 나라의 명을 따르자니 아

들을 죽여야 되는, 그야말로 이 일도 저 일도 걸리게 되었으니 그 고

민이 오죽했겠습니까?

10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 부모는 왕명에 따라 아이

를 하수에 띄우기로 결정합니다.

곧장 물에 던지면 잠길 것이 뻔한지라, 아기를 갈 상자에 담았습니

다.

그 상자를 아무데나 던지지 않았습니다.

상자가 물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좀 특별한 곳, 즉 갈대나무들이

막아줄 수 있는 갈대숲 사이에 끼워 감춰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누이로 하여금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멀리서 지켜보게

했습니다. (2:3~4)

이런 것을 미루어볼 때, 당시 바로왕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역력히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갈 상자에 물이 들어와 잠길 수 있다는 걱정에서, 상자 안팎을

역청과 나무진으로 방수 처리까지 완벽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고 걱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갈 상자가 물 위에서 얼마나 오래 뜰지, 상자 안에 아이 생명은 얼마

나 버틸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불안했던 것은 그 이유만이 아니었습니다.

하수에 득실거리는 악어떼들이, 아이를 그냥 두겠습니까?

11

애굽 왕은 이런 상황들을 감안하여 히브리 아이들을 하수에 던지라

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영상 보기 >>>

12

기묘자에게서 나온 이름 ‘모세’

‘모세’란 이름으로 그를 낳은 부모도, 그를 데려다 키운 공주도 합법적이 될

수 있었으니, 실로 평범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누가 지은 이름이었을까?

바로 왕의 정책이 악랄하면 할수록 히브리 부모들의 지혜는, 점점

더 뛰어나가기만 했습니다.

‘모세’라 이름 지어질 아이의 부모가, 갈상자를 아무렇게나 하수에

내던지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담은 상자를 어디에 띄어야 가장 안전할지를 궁리한 끝에,

갈대숲 사이에 끼워 흘러 떠내려가는 것을 막았으니 말입니다.

갈대숲은 사람들 눈에 쉽게 뜨이지 않을 뿐더러, 포식동물들의 접근

도 막을 수 있는 그런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곳은 실로 놀라운 장소였습니다.

갈대숲 주변은 일반인들의 접근이 통제된 지역으로 왕족, 특히 바로

의 공주가 시녀들을 데리고 목욕하러 오는, 특별히 구별된 곳이었습

니다.

모세의 부모는 왜 애굽 공주를 만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굳이 택

했던 것일까요?

13

자기 집에 닥친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해결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지혜였습니다.

이런 엄청난 아이디어가 어디 아무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까?

결국 아이는 부모가 의도했던 대로, 목욕하러 온 바로왕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왕궁에서 살게 됩니다. (2:5)

공주는 아이를 보는 순간, 그 아이가 히브리 아이인 줄을 이내 알아

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왕명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물에 던져야 했던, 히브

리인들의 비극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주는 그 아이가 한없이 불쌍했습니다.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2:6b)

먼저 아이의 부모 마음을 헤아려보았습니다.

아이를 버리려거나 죽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

니다.

어떻게 하든지 아이를 살리려 했던, 그 마음을 한 눈에 간파했던 것

입니다.

단지 왕명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물에 던져야 했던 부모의

심정을, 공주는 애처롭게 여겼습니다.

참으로 묘한 현상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4

잘 살펴 들어주십시오.

당시 애굽에서는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 아이를 낳을 경우, 무조건

하수에 던져 죽여야 한다는 것이 어길 수 없는 왕명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물에 떠내려 오는 사람, 특히 어린아이는 보기만 하면

즉시 건져내 살려주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일반 백성들이 지킬 바 도

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내려온 도덕적 관습이었으며, 나라의 명이기도 했습니다.

설명을 다시 드리자면, 히브리 남자 아이를 하수에 던지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는가 하면, 일반 국민들이 지켜야 할 또 다른 도리가 있

었으니, 강물에 흘러오는 사람을 볼 경우, 반드시 건져 구출해주어

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인륜이요, 도덕이었다 그 말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보건대, 하수에 아이를 버려야했던 아이의 어미는

왕명을 어기지 아니했으니, 합법적인 부모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아이를 건져낸 애굽 공주 역시, 왕의 법과 인륜에서 벗어나지

아니했으니, 합법적으로 아이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양쪽이 다 합법적이었다는 말입니다.

15

더구나 바로 공주는 아이를 물에서 발견한 그 순간부터 불쌍한 마음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묘한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2:10a)

바로왕의 공주는 하수에서 건져온 아이의 이름을, ‘내가 물에서 건

져내었다’,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으로 ‘모세’라 지었습니다.

‘히브리 남자여든 하수에 던지라’ 명한 아버지의 입장도 신경 써야

했으며, 이 아들로 슬픔에 잠겨있을 부모의 마음도 고민한 끝에, 지

은 이름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부모가 지은 것도 아니었으나, 결코 평범한 이름은 아

니었습니다.

한편 히브리 남자 아이는 하수에 던지라고 했던 바로 왕이었지만,

막상 딸이 안고 온 아이를 보고는 매우 애처로웠을 것입니다.

당시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는, 태어날 때의 정황이나 내력을 그 이

름에 담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름만 보고도 그의 신분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16

‘모세’라는 이름은 아시는 대로,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

라”(2:10b)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 자체가 『물에서 건져낸 아이』였습니다.

그를 부르는 사람마다 ‘이는 물에서 건져낸 자’라는 것을, 자연스레

인식하게끔 되어있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한,

첫째, 이 아이의 부모와 가족은 왕명을 지킨 자들이다.

왕의 명령 따라 아이를 물에 던졌다는 사실을, 그 이름 ‘모세’가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둘째, 이 아이를 건진 공주 또한, 도리와 왕명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물에 떠있는 아이를 건져내어 살려주고 길러주었으니 도리를

다한 것이며, 왕명 또한 어기지 않았다는 것을 이름이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모세’라는 이름으로 인하여 히브리인 부모나 바로 공주 모두가, 합

법적이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대변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쪽도 살리고 저쪽도 살렸다는 말입니다.

17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모세’라는 의미를, ‘세례를 의미함’, ‘거듭남

을 뜻함’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분들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바로 공주가 아이를 ‘모세’라 했던 것은, 세례나 거듭난 것을

뜻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관계없는 말입니다.

실로 ‘기묘한 이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묘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바로 왕이나 공주 머리에서 나온 이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모세’란 이름은 후일 그를 출애굽의 인도자로 쓰시려했던, 기묘자

하나님 『기묘자 하나님』에게서 나온 이름이었습니다.

하수에 던져져 사망 가운데 놓여 있던 한 히브리 남자 아이를, 사망

의 왕궁 안으로 돌파하게 하여 거기서 자라게 하였으며, 장차 바로

왕을 이기게 했던 모든 것이, 『기묘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었

습니다.

하나님의 기묘는, 이때부터 모세에게 작동하셨던 것입니다.

영상 보기 >>>

18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출애굽기를 열자마자 한 아이의 기묘한 인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세’라 지어진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를 낳은 어미도, 길러준 바로

공주도 살려낸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히브리 남아는 낳는 대로 버려야했던 당시, 모세를 낳은 부모는 얼

마나 고심했겠나이까?

부모의 놀라운 담력과 기묘로 모세를 하수에서 애굽 왕궁으로 들여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장차 출애굽의 인도자로 세우실 하나님

의 기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나이다.

바로 왕이나 공주가 아이를 불쌍히 여겨 왕자로 키웠던 것 또한, 하

나님이 주신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나이다.

오, 주여!

앞으로 이어질 모세를 통하여,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옵

소서.

지혜의 하나님, 기묘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나이다.

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9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여 해석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

혀 다른 자기중심적 신앙관을 초래할 뿐입니다.

갈렙 목사님은 모세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가를 상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그의 출생부터가 이미 잘 짜여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모세

라는 이름이 증거 해주고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바로 공주에 의해 붙여진 이름 “모세”는, 왕명에

저촉되지 않을 뿐더러, 이스라엘인으로서 애굽 왕궁에서 살 수 있

는 정치적, 민족적, 신앙적으로도 완벽한 이름이었습니다.

모세가 자기 형제들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본가(레위

지파 제사장 반열)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형 아론이 그의 대변인이 된 것이 이를 증거 합니다.

모세가 왕자의 자리를 버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세”라는 이름

으로는 애굽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처지였습니

다.

우리는 모세를, ‘바로 공주의 눈에 띄어 목숨을 부지하고 왕궁에

서 친모의 젖을 먹고 자란 행운아’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훈련으로 지도자가 된 줄로 압니다만,

갈렙 목사님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

다.

20

장 2

21

제 Ⅱ 편

“하나님의 40년, 모세 40년이”

본 문 : 출애굽기 제 2 장 제 13 ~ 14 절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

급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

되 일이 탄로 되었도다

모세 나이 40에 있었던 일

모세가 40세 때, 억울한 일을 당하는 형제를 구하기 위하여 애굽사람을 죽

인 사건은,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첫 시도였다.

모세가 “장성한 후”(출2:11a), 정확히 말해서 바로 공주의 아들 되어

궁중에서 40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 동족들이 고

역 하는 현장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어떤 애굽 사람이 히브리 형제를 치는 것을 보고는, 그 애굽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감추어버립니다. (출2:11~12)

그 이튿날 현장으로 다시 나가보니, 이번에는 히브리 사람들끼리 서

로 싸우고 있는 것을 봅니다.

모세는 그 중 잘못한 자에게 “왜 같은 동포를 치느냐”(출2:13b)며

싸움을 만류합니다.

모세의 살인사건과 동족끼리의 싸움을 말렸던 일련의 행동에 대하

여, 그동안 우리는 그의 민족애(民族愛) 발로에서 나온 실수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오해였습니다.

22

그가 잘못 저지른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첫 시도요 첫 작품, 『하

나님의 첫 시도요 첫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살인을 저지른 후 미디안광야로 도망 가, 이드로의 양 무리

를 치면서 40년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렙산 불붙은 떨기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을 입게 됩니다.

이 일 역시 우리들이 생각해왔던 의미와는 사뭇 다릅니다.

떨기나무에서의 부르심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두

번째 시도, 『하나님의 두 번째 시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동족들을 화해시키려는 사건은 첫 번째 시도였으며, 호렙산에서

의 부르심은 두 번째 시도였다는 말입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할 것입니다.

23

이해를 돕기 위하여 출애굽기에서만 맴돌 것이 아니라, 신약의 사

도행전으로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행6:10a)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6:15b)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 충만으로 천사의 얼굴이 되어, 대중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엄중하던 그 당시에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혜와 성령으로”했던 그의 설교는, 『스데반 개인의

말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여기에 집중해주십시오.

모세가 태어날 때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

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

지 못하게 하려 할새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

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

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24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7:18~22)

모세에 관한 내용을 구약 출애굽기가 아닌, 신약 사도행전에서 소개

해드리고 있습니다.

바로 공주는 당대 왕궁에서의 엄청난 권위는 물론, 나라의 중요한

업무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궁중 안에서만 곱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이

란 대공사 건축현장에 직접 나가 진두지휘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애굽이란 대국의 공주치고는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모세는 그런 공주의 아들로서,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 수업을 성공적

으로 이수할 수 있었습니다.

나이 마흔일 때에는 이미 대단한 위치에 올라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스데반 집사의 입을 통하여 성령께

서 말씀하신 바를,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에, ‘동족 이스라엘 형제를 돌아볼 생각

이 났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7:23)

그것이 모세 안에서 우연히 나온 그의 생각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다음 구절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5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행7:24)

모세는 자기 민족 히브리인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

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형제의 원수를 갚아줄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살인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그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수에 던져졌다가 건짐을 받았다는 것을, 자기의

이름 ‘모세’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겸하여 히브리 출신이라는 사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가 40세가 되던 어느 날, 자기 동족 중 한 사람의 원통함을 보고

는,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개인감정으로 우연히 저지른 사건이 아니었다고 앞서 말씀드렸습니

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하늘의 프로젝트, 『하늘의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사건이었

던 것입니다.

압제 당하고 있는 당신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의 계획이 시작되었다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26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인 그 이튿날, 히브리인 형제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서로가 형제이면서 어찌하여 싸우느냐?”

둘을 화목시키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때 둘 중 해하려는 자가 나서서 모세를 밀어뜨리며 뭐라 했습니

까?

“어제 네가 사람을 죽인 것처럼 또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행

7:26~28절)

모세는 자신이 살인할 당시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었습니다.

분명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아서 시체를 묻었던 것이었는데, 지금

싸움을 말리던 바로 그가 현장을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저(모세)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

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행7:25)

“그 형제들”이란 싸우고 있던 히브리 두 사람, 즉 모세를 관(官)에다

가 고발하겠다던 동족을 말합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협박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을 화해시키려는 것을 보았을 때든지, 아니면 압제하던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을 보았을 때에, 이런 느낌이 있어야 했습니다.

27

‘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왕자를 보내셨구나. 하나님

께서 지금 모세의 손을 빌어 우리를 구원하기 시작하셨나보네.’

모세는 저들이 당연히 그렇게 깨달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저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모세

를 고발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충격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본 모세는, 이들을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오히려 거절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주재자로 세워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

키려는 첫 번째 시도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포들끼리 싸운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영상 보기 >>>

28

이후 40년, 그리고 또 40년

이스라엘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첫 번째 시도는 너무 평범하여 실수로 놓쳤

다. 이에 다음 기회를 곧장 주지 않으셨으니, 그 텀은 40, 40, 40년이었다.

모세가 왕자 시절 애굽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이스라엘 해방을 위

한 하나님의 첫 시도’였다고 앞에서 언급한바 있습니다.

이를 주제로 삼아 유익을 얻고자 하는 지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 역사의 시작, 곧 우리의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시도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흘려보낼 경우, 같은 문

제의 재시도는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다,『재시도는 곧바로 이어지

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놓친 문제에 대한 해결은 무려 40년 후, 『40년 후』에나 온다는 사

실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즉시 깨닫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면, 바로 이어서 다

음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40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 문제의 해결을 다시 주신다

는 것입니다.

“사십 년이 차매”(행7:30a)

29

“사십 년”이란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아 왕궁에서 왕자로 살았던

40년, 그리고 한 형제의 고발이 두려워 광야로 도망가서 양치기로

살았던 그 40년을 말합니다.

“차매”라는 단어에는, 40년이 찰 때까지 의도적으로 기다렸다는 뜻

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동족들의 거절로 미디안으로 떠나자, 하나님은 40년 후에야

그를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사십 년이 차매”, 『사십 년이 차매』광야 가시떨기 불꽃 가

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40년이 지나서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거절하던(행7:35) 저희 동

족들에게 다시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행7:34b)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후 하나님은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또다시 40년간, 기사와 이적

을 행하셨습니다. (행7:36)

“사십년”

하나님께서는 ‘40년’이란 텀(Term)을, 매우 선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0

영원하신 하나님의 눈으로는 앞의 40년과 뒤의 40년이, 우리의 어

제와 오늘처럼 보이실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40년을 우리의 하루처럼 여기셨습니다.

모세가 바로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산 것이 40년, 미디안으로 도

망가서 산 것이 40년, 이스라엘 광야의 인도자로 산 것이 40년, 그의

일생에서의 40, 40, 40이란 숫자는, 당사자인 모세의 선택이 아니었

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호하시는 40, 40, 40 텀』이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에 있어 40년이란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일평생일 수도 있습니다.

허나 하나님에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던 처음 시도가 있은 다음, 두

번째 시도까지의 40년이란 갭(Gap)도 잠깐이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접근하시는 하나님을, 놓쳐버려

서는 결코 아니 될 것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는 것은, 40년 세월을 허송하는 것과 같습니다.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31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두 번째 시도 때

에는, 열 가지 재앙을 비롯하여 홍해 사건, 마라 사건, 만나 사건 등

등 큰 기사와 이적으로 작업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그 일을 행하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아차리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런 엄청난 재앙과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존재

는, 아무도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첫 번째 시도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원수 하나 죽이고는 아무도 모르게 시체를 황급히 묻어버린 후, 다

투던 동족들을 화목시키려던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평화롭고 조용하게 해결, 『평화롭고 조용하게 해결』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축복이며, 응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이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2

자기 민족의 편을 들어 상대를 죽인 후 그 시체를 아무도 모르게 처

리했으니, 그런 사건에 하나님이 개입되었다고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다투는 동족에게 “형제들끼리 왜 싸우느냐?”고 했던 모세의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화목을 권하

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말이니 말입니다.

이 사소한 일이 하나님의 큰 뜻, 곧 이스라엘 해방을 위한 첫 시도라

는 것을, 그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습니까?

평범한 해결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구

원이었다는 진리를,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를 간단히 여기고 놓쳐버렸던 것은, 이스라엘의 큰 실수였습니다.

백성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모세를 주재자로 한 평화적인 첫 시도가

어그러지고 말았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아쉬움이 어찜이뇨!

모세를 주재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왕자 카드’를 깨닫고, 동족끼리

화합하여 모세에게 협조하고 따랐더라면, 다시 말하여 애굽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주재자로 모세 왕자를 세

33

우셨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받아들였더라면, 왜 40년이란 세월이 걸

려야 했겠습니까?

그랬었더라면 두 번째 해방작업인 열 재앙이 무슨 필요였으며, 애굽

병사들이 홍해 속에 수장되는 비극이 왜 있어야했습니까?

은혜를 가지고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했던 이스

라엘로, 오늘날까지 아랍과 이스라엘이 서로 원수 되어 피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아주 오래 전 구원 작업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원수가

되어 있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오, 하나님의 40년, 모세의 40년, 이스라엘의 40년.

그것이 혹 우리의 40년이 될까 심히 염려 되나이다.

영상 보기 >>>

갈렙의 기도

34

하나님 아버지,

출애굽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처음과 그 다음의 간격이란 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

럼 어제와 오늘이 아니며, 일 년 전과 일 년 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았습니다.

하나님에게는 한 세대가 40년이라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

다.

일찍이 모세를 이스라엘 해방의 주재자로 삼기 위하여, 하나님은 요

셉 총리보다 더한 ‘왕자’라는 지위를 확보해주셨습니다.

바로의 왕권을 이어받을 만반의 준비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이 첫 번째 시도가 성공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평화로운

방식으로 자유를 얻었을 것이며, 당당하게 애굽 땅에서 잘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첫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세는 다음 시도까

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오, 주여!

35

우리 짧은 인생에게는 길고도 긴 40년이오니, 우리의 문제 응답으로

다가오실 때에는 우리로 하여금 놓치지 않고 바로 깨달아서, 조용하

고 평화롭게 해결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큰 환난을 치르지 않고 해결 받아, 후유증이 없는 행복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하여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우레 소리보다 더 크게 들을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여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36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한 번의 불순종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모르는 우리이기

에, 신앙생활에 있어 긴장감이나 경외함이 결여되어있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갈렙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우리의 불순종이 얼마나 큰 시

간낭비와, 고난을 초래하는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모세는 40년간 애굽 왕궁에서 고급 교육을 받는 한편, 친족에게서

도 히브리 율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형제를 돌볼 생각을 하게 되

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그는

광야로 도망하여 또다시 40년을 보내게 됩니다. (행7:25~)

그동안 우리는 모세가 실수(살인)하므로 어쩔 수 없이 광야로 쫓

겨 간 줄로 생각했습니다만, 갈렙 목사님은 민족해방을 위해 하나

님이 주신 첫 번째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첫 번째 시도가 무산되자, 두 번째 시도는 모세 나이 80에 왔습니

다.

그리고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또다시 40년을 헤매게 됩니다,

하나님의 40년은 우리에게 평생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한평생

을 보낸 후에야 겨우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사 130년, 과연 우리는 어느 시점에 와있는 것일까요?

갈렙 목사님의 입을 빌어 하시는 하나님의 권고를, 무심히 여기지

마십시오!

37

장 3

38

제 Ⅲ 편

“아들 이름을 게르솜하여 가로되”

본 문 : 출애굽기 제 2 장 제 19 ~ 22 절

19.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

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

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

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

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아들에게 아들 이름을 주지 않았다

모세는 가장 많이 불러댈 아들의 이름에다 자신의 처지와 믿음을 담아 ‘게르

솜’이라 지었다. 모세의 ‘게르솜’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는 모세가 애굽 백성을 쳐 죽였다는 고발을 접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고발한 자는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왕은 곧바로 모세를 죽이겠다며 찾아 나섭니다. (출2:15)

그러나 모세는 바로가 이렇게 나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미

디안 땅으로 도망간 후였습니다.

미디안에 도착한 모세는, 그곳 제사장(이드로라고도 불리는 루우

엘)의 일곱 딸들을 우물가에서 만납니다.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던 이드로의 딸들에게 미디안 목자들이 접근

하여 훼방을 놓자, 모세는 그녀들 편이 되어 도와줍니다. (출

2:14b~16)

이 일로 인하여 모세는 이드로 집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이드로는 자기의 일곱 딸들 중, 모세가 원하는 십보라를 그에게 주

었습니다.

39

십보라에게서 아들을 얻게 된 모세는, 아이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게르솜’의 뜻은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출2:22)

일반적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소망

을 담아 짓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들의 이름을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라는 의

미의 ‘게르솜’이라 했으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슬픈 신세를 아들의 이름에 곁들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말보다, 그 어느 노래보다 사람의 입에 가장 많이 오

르내리는 아들의 이름에다 말입니다.

아무래도 기이하다고 아니 할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참고로 히브리인들의 특이한 관습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나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을 경우, 그것을

계속 반복하여 입으로 말하면, 성공한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들 그렇게 합니다.

한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말합니다.

40

이는 하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호텔이나 집의 문설주에 ‘쉐마’를 부착해

두고서, 들며 날 때마다 그것을 만지거나 거기 적혀있는 소원문을

되풀이 뇌이곤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그 내용이 말하는 자의 믿음이 되고, 나아가서는

성취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

았느니라” (롬10:17)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마8:13)

입술로 소리 내어 말하고 또한 귀로 들음으로서 자기들의 이룰 바,

가질 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취지로 볼 때, 한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어디에 놓아

야, 가장 많이 반복하여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오며가며 볼 수 있는 문지방에 붙여놓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아니면 노래로 지어 틈날 때마다 부르는 것이 좋을까요?

문지방에다 붙이는 쉐마도, 노랫말로 부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긴

하지만, 아들의 이름으로 지어 부르는 것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

다.

41

누구나 자기 아들의 이름은, 매일매일 수도 없이 부릅니다.

아무리 불러도 지치지도 싫증도 않고, 진정을 가지고 부르게 되니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대부분 아이의 장래가 잘 되

기를 바라는 소원을 담아 짓습니다.

물론 의미 있는 일입니다.

히브리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달랐습니다.

아들의 이름에 아들을 담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이루려 했습니다.

‘나는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자신의 사정을 아들의 이름에 올림

으로서, 스스로 ‘게르솜’임을 자처했습니다.

언제나 ‘게르솜’인 것을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들의 이름에다 자기의 신세, 자기의 운명, 자기의 장래를 담아 계

속 부르게 했던 모세였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는 ‘게르솜’하려는 모세 자신을 위한 이름이었지,

아들의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42

그럼에도 모세는 ‘게르솜’을 많이 말하면 말할수록, 많이 들으면 들

을수록 그것이 자신의 믿음이 된다는 것으로 알아서, 이를 중단하거

나 변경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믿음을 이루려 했습니다.

이것이 어디 우연이었겠습니까?

요셉도 그랬습니다.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지었으니, 그 이름 역시 아비인 요셉의 역

사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창41:51)

“하나님이 나로”, 『하나님이 나로』, 즉 하나님께서 아들이 아닌 ‘요

셉인 나로’ 하여금 어려운 과거사를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을, 장

자의 이름에다 담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에 아들의 이야기가 아닌, 아비 요셉 자신의 인생 역사

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다시 풀어 설명 드리자면, 지난 날 요셉의 모든 고난과 그의 아비 야

곱 집안의 모든 일들을, 장자를 얻은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잊어버

43

리게 하셨다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지었다는 말입니

다.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를 장자의 이름에 담아 감사에 감사를 반복했

습니다.

차자의 이름은 ‘에브라임’이라 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이 나로,『나

로』나의 수고한 땅에서『나로』창성하게 하셨다”(창41:52)는 뜻입니

다.

이 이름 역시 아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바로 자신의 마음

을 담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일에 대한 감사를, 가장 많이

말하게 될 두 아들들의 이름에 붙여서, 하나님이 자주자주 들으실

수 있도록 하루에도 수없이 소리 내어 아뢰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신앙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자기의 ‘게르솜’을, 아들의 이

름에 올림으로서 ‘게르솜’임을 자처했습니다.

언제나 잊지 않기 위하여 계속 불러댈 아들의 이름에다, 자기의 운

명과 장래를 연관시켰던 것입니다.

44

바꾸어 말하면 자기 신세가 ‘게르솜’하기를 원하여, 아들 이름에 자

신의 소원을 담아서 자주 입에 오르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거기서 믿음이 나오며, 그 믿음대로 이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상 보기 >>>

45

‘더 나은 본향’이란

모세에게는 세상 어느 곳도 그의 고향, 그의 본국이 될 수 없었다. 안정된 형

편으로 얼마든지 정착할 수 있었음에도, 외국인과 나그네로만 살았다.

모세가 자신을 다잡기 위하여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했던 것

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시금 보태어 살펴드리겠습니다.

‘게르솜’이란 아들의 이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확인한 대로

자식의 형편이 아닌, ‘타국에서 객이 된’(출2:22b), 『타국에서 객이

된』모세 자신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국’이, 지금 모세가 살고 있는 미디안 광야라면,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본국’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가 태어난 애굽을 말하는 것일까요?

모세에게 있어 애굽은, 그의 고향이 될 수 없습니다.

‘물에서 건져 올렸다’는 뜻의 ‘모세’라 불리어지는 한, 자타가 이방인

으로 알게끔 되어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름 때문에 모세는 어차피 히브리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마음 중심에도 애굽보다는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이, 더 가까웠

을 것입니다.

46

그렇다고 하여 자기의 본국을 이스라엘로 여겼을까요?

본국도 고향도 없이 유랑하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을 볼 때,

모세에게 있어서는 비록 미디안 광야였지만 그래도 제사장 집에 거

하면서, 그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삼아 아들까지 낳은 형편이었으

니, 어쩌면 안정된 축에 속했다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미디안의 그 동네 그 집이, 바로 그의 본국이 되고 고향

이 될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그 말입니다.

그럴진대 모세는 아직도 무엇이 모자라서 그곳을 ‘타국’이라 하며,

자신을 ‘객’이라 읊어대고 있었을까요?

좀 특별하지 않습니까?

미디안에다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정착했으니, 거기가 그의 본국이

요 고향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현실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 자신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도 수용하지도 않겠다는

다짐으로,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현실을 자기의 것으로 고착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아들의 이름에

담았던 것입니다.

47

‘게르솜’, ‘게르솜’ 반복하는 것은, 『이 땅에 고향을 두지 않겠다.』,

『이 나라를 내 나라로 삼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맹세요, 고백이

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현실이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에다 자신의 앞날을 확증하는, ‘게르솜’을 입혔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의지가 만들어낸 작품이 바로 ‘게르솜’이었다 그 말입니다.

히브리서 제11장에서 우리는, 모세를 포함한 아브라함, 다윗 등 ‘믿

음의 선진들’에 대한 평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며 그것

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곧 게르솜)

로라 증거하였으니” (히11:13)

“이 사람들”, 곧 믿음의 성공자들은 자기 나라, 자기 집, 자기 고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따라” 더 좋은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객이요 여기는 타국’, 즉 ‘게르솜’인 자신들을 증거

하였습니다.

자기 나라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집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48

그럼에도 ‘이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바라서, ‘객이요 타국이요 게

르솜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에 대하여,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11:14)고

기록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바라던 ‘더 나은 본향’, 『더 나은 본향』이란 어

떤 곳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를 밝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나온 바 (태어난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

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

워 아니하시고 (이러한)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5~16)

모세가 ‘게르솜’, ‘게르솜’을 되뇌고 또 되뇌었던 것은, 해 아래 이 땅

에 자리를 잡아 ‘안 게르솜이 되지 않겠다’는, 오직 그 바람 때문이

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바라던 것들이 다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자신을 세

상에 맡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49

이 땅에는 자기 나라, 자기 고향, 자기 집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긴 나

머지, 다만 ‘게르솜’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애굽도, 미디안도, 심지어 이스라엘마저도 타국일

뿐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자신을 가리켜 ‘객(客)’이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본향’, 하늘나라를 향하여 목숨 걸고 나아오

는 이들 믿음의 사람들을 위하여, 거기에 걸맞은 “한 성”(16절)을 예

비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발붙이고 살 수 있는, ‘영원한 본향’, 『영원한 본

향』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창세기가 이 땅에 이룰 바 하나님의 복을 모델로 쓴 책이라고 한다

면, 같은 저자 모세가 쓴 출애굽기는 천국을 모델로 쓴 책입니다.

이 세상 보다는 천국을 본향으로 알고, 그곳에 믿음과 소망을 둔 사

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출애굽기란 말입니다.

그 책으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50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이 주는 고역으로 인하여, 탄

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어느덧 그 소리는 극에 달했습니다.

저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사 권념하셨습니

다. (출2:23~25)

먼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낼 자부터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찾고 또 찾다가 미디안 광야까지 나가 한 사람을 만나셨으니, 그가

곧 모세였습니다.

당시 모세는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까지 품에 안고, 미디안에서 살

고 있었습니다.

생활에 안정을 얻은, 그야말로 ‘안 게르솜’ 상태였습니다.

설사 그가 ‘이 땅은 나의 본국이요, 이집은 나의 집이요, 여기가 나의

본토라’ 말해도, 무어라 말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기는 내가 살 곳이 아니라’, 『내 살 곳이 아니

라』고 매일 읊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정착하고 안주할까봐 아들에게 아들의 이름을 주지

않고, 본인의 뜻을 다진 ‘게르솜’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 그 땅은 무조건 타국이었던 것입니다.

51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나는 게르솜, 언제나 객’이라고 했을 정도였

습니다.

모세의 상태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11:24)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5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히브리서는 모세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또 다른 선지자’,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또 다른 선지자』라고 평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보화보다도 권세보

다도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쌓아놓고 계시는 ‘하늘 성’, 그 상 주심을 바라보았

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애굽뿐만 아니라 미디안도 자기의 나라가 될 수 없었습

니다.

52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아들까지 낳고 한 가정을 이룸으로 ‘안 게르

솜’ 할만도 한데, 모세는 어디에도 정착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될까봐 아들에게 아들 이름을 주지 않고 자신을 다진

말, ‘게르솜’이라 했던 것입니다.

집도 식구도 있었지만, 언제나 ‘객일 뿐’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 타국이요, ‘게르솜’ 이상의 의미

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를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까지 인도할 자로, 그를 생각하

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천국까지 인도할 장도의 책임자로 세우고자, 미디

안까지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

려는 목적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를 보는 모든 후손들(우리도 포함)로 하여

금, 모세처럼 이 땅에 대하여는 ‘게르솜’, 『게르솜』하기를 바라서

이 책을 기록하셨습니다.

53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소망을 두게 하시려는 뜻에서 말입니다.

현재는 ‘안 게르솜’ 상황일지라도 ‘게르솜’함으로, 천국에 이르게 하

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오, 속히 오실 주님!

영상 보기 >>>

54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세에게는 미디안 땅에 거할 처소도, 재물도, 가족도, 아들도 있었

으니, 당연히 그곳이 자기의 나라며, 고향이며, 집이 될 수 있었습니

다.

‘안 게르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 했습니

다.

아들 이름을 아들의 것으로 주지 않고, 자기의 믿음 따라 ‘게르솜’이

라 하였으니, 이는 ‘게르솜’으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었겠습니까?

가장 많이 불러댈 아들의 이름에다가 자기의 신앙을 얹어, ‘타국이

요 객이로다.’ 고백했던 모세로 인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 주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믿어지고, 믿어지는 그대로 하늘을 소망하려는

모세의 ‘게르솜’을 접하고 보니, 우리에게도 한 소원이 생겼나이다.

우리도 모세처럼, 우리의 소망을 세상에 두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나

이다.

내 나라, 내 고향, 내 집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것들을 내 것으로 여

기지 말고, 거기에 나의 영혼을 맡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55

하오니 하늘에 있는 성, 그곳만이 우리의 진정한 안식처라는 믿음을

더욱 확고히 갖게 해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56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 운명, 소명 등의 내용을, 가장 많

이 부르게 되는 아들의 이름에 붙여서, 수없이 부름으로 잊지 않으

려고 노력합니다.

모세도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자신이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갈렙 목사님은 이 내용을 통해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며, 우리의 본

향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모세의 본국은 애굽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의 본국이라면, 당시 그가 정착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았던 미디안광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가리켜 ‘타국의 객’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애굽이나 미디안은 물론 이스라엘조차도)도 자신

의 본국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을 정착지로 생각하지 않고,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성을 사모하며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성을 예비하셨음(히11:15)을 믿고서 말입니다.

성도들의 또 다른 이름은 “게르솜”입니다.

갈렙 목사님은 우리가 이 “게르솜” 의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인도

해 주십니다.

57

장 4

58

제 Ⅳ 편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의 그는”

본 문 : 출애굽기 제 3장 제 1 ~ 3 절

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

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였음에도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였음에도,

자신을 하나님인양 말씀했으며, 모세 또한 그를 하나님으로 대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

고,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출3:3)며 불꽃 가까이로 다

가갑니다.

그때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와’라 했습니다)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3:4)

위 구절의 시작을 “여호와께서”라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하반절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산 호렙(3:1)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대화

하신 이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했던 “여기”란, 불꽃 앞에 있다는 말이

었습니다.

59

또한 그때 불꽃 속에 계셨던 이가 하나님이셨다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특히 5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3:5a)라는 구절 때문에, 그렇게 이해

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계셨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기실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

다.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2절)

엄밀히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 사자의 입을 빌어서 말씀하

셨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으나, 우리는 무심코 보고

넘어갔던 것입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던 어느 날, ‘하나님의 산’ 호렙

에 이릅니다. (본문1절)

‘하나님의 산’이라고 하여 하나님 본체께서, 하늘 높은 처소를 떠나

호렙산에 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60

하나님이 하늘을 통째 비우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와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

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7절)

이 말씀에 따르면 본체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처소 하늘에 계셨으

며, 호렙산 모세 앞에 나타나신 분은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높은 하늘 처소에 계시다는 전제하에 이어지는 말씀, “내

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8절a), 『내가 내려와

서』라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8절 하반절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는 미래형 문체를 보아서

도,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계셨던 이는, 하나님의 본체가 아

닌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난 기록 4절과 5절의 말씀을 보건대,

하나님이 당신 사자의 입을 빌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61

모세로 말할 것 같으면 본 출애굽기 말고도 창세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까지 모두 다섯 권(‘모세오경’)을 쓴 대단한 저자입니다.

그런 실력 있는 자가 분명하게 쓰기를,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

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3:2a)라고 했습니다.

불꽃 속에 계셨던 분을 “여호와의 사자”라고 그 신분을 천명하고 있

으니, 『여호와의 사자』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게 없을 줄 압니다.

문제는 불꽃 가운데 나타난 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자인 줄 확실히

알면서도, 모세가 그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대해드렸다는 사실입니

다.

아울러 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

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 역시도 자기를 하나님으로, 그리고 자기의 말을 하

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4절a)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5절a)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6절)

62

사자인 자신을 하나님인양 말할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 하나님’이

라고 칭했어야 맞지 않겠습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세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나의 주인’이

라고 했어야 마땅하다 그 말입니다.

영상 보기 >>>

63

호렙산 불꽃은 오늘날도 가능할까?

오늘날 성도들은 자기 목사가 호렙산에 나타난 여호와 사자와 같기를 바라

는가 하면, 목사는 성도가 모세처럼 자신을 하나님 대하듯 하기를 원한다.

오늘날 주의 사자들은 하나님의 산 호렙과 같은 거룩한 성전의 단

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럴 때 성도들은 그를 하나님으로 대하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르지 않게 듣고 있을까요?

모세가 호렙산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하나님처럼 대했듯이, 오늘날

성도들도 단에 선 주의 사자를 그렇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오늘날 주의 사자들은, 호렙산에서 말하던 여호와의 사자처럼,

자기가 마치 하나님인양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요?

과연 어떻게 해야만 당시 호렙산에서의 그 광경을, 오늘의 강단에서

도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요?

진정 주의 사자라면 오늘날도 마땅히,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났

던 그 사자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64

호렙산이나 시내산에서처럼 오늘날도 그와 같은 특별한 경우가 나

타난다면, 성도들도 주의 종 대하기를 모세처럼 할 것이란 말입니

다.

그렇다고 주의 종들이 성도들을 이끌어 가기 위하여,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준비하는 일반적인 설교 말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호렙산의 사자와 모세, 둘의 자세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주의 사자들의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

니라, 호렙산에서의 특별한 사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되어 성도들을 인도하는 여러분,

평생 한번만이라도 호렙산의 상황을, 여러분의 강단에서 만나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찌해야 그렇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의 관계가, 호렙산 불꽃 속에 나타난 사

자와 그 사자를 대하는 모세와 같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있어

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할 것입니다.

65

1. 호렙산의 사자천사처럼 타지 않는 불꽃 호위를 받는 경우.

2. 모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얼굴 꺼풀에서 광채가 날 경

우 (출34:29b)

3.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그 얼굴이 천사와 같을 경우.

(행6:15, 행7:55)

이상과 같은 특별한 경우라면, 성도들은 여러분을 호렙산의 그 사자

와 다름 아니게 대할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이 어찌 모세 때에만 있었겠습니까?

이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

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요12:49~50)

하나님의 명령만이 영생인 줄 알아서 자의적인 말은 일체 아니 하

고, 오직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만 선포하는 자를, 하나님은 당신

을 ‘대신하는 자’, 곧『하나님의 사자』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오늘날 목사에게도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 둘러 인친다면, 호렙산

여호와의 사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66

그렇게만 된다면 목사를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도, 모세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하던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광경은 지금도, 앞으로도 어디서든 나타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주의 사자들이 호렙산의 그 사자와 같고, 성도들은 그 사

자 앞에 선 모세와 같은 경험을,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이라도 가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과 같은 거룩한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될 때에, 성령께서 함께하는 특이한 상황이 펼쳐졌다고 하여, 단에

선 자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부여되고, 그 입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

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 그리하고 싶어도, 그리되어지는 것은 아니란 말입

니다.

보시겠습니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요12:28b)

이 말씀이 울려 퍼졌을 때, 곁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

했습니까?

제각각이었습니다.

67

어떤 이들은 우레가 울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천사가 예수님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요12:29)

그때 하늘의 음성이 멀리서 들렸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곁에 서서”(29절)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들은 소리는 각자가 달랐습니다.

무리들의 반응에 예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외치신 말씀은, 너희 생각처럼 나 예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느니라.” (요12:30)

백성들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

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마13:14b~15a)

세상의 염려와 부자가 되려는 재리(財利)에 갇혀 완악해진 사람들

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둔하고, 눈이 감겨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주의 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외치신

다 해도, 그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우레 소리’라느니, ‘아들 예

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느니, 딴 소리만 할 것입니다.

68

그렇게 밖에 받아들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에 자기의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었던 ‘게르솜 모세’,

『더 나은 본향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던 게르솜 모세』

그는, 호렙산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그 때뿐이었습니까?

훗날 시내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얼굴 꺼풀이 불꽃

속의 사자처럼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죽은 후에도 변화산의 찬란한 광채 속에, 엘리야와 함께 주님을 만

나러 오기까지 했습니다.

요즈음 이러한 모세를 터득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영상 보기 >>>

69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는 높은 처소 하늘에 계실지라도, 당신의 사자들을 이

땅에 보내어 그들로 일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또한 사자들이 당신으로 나타나

기도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원하옵건대 우리도 모세처럼 자기 앞에 선 사자를, 사자가 아닌 하

나님으로 보게 하시고, 사자의 말을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듣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심이, 어찌 그때 한

번 뿐이겠습니까?

여러 선지자들이나 사사들을 통하여 이미도 그리하셨고, 지금도 얼

마든지 그리하고 계시며, 장차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도 더욱더 그리

하실 것으로 믿나이다.

하오나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보는 이, 듣는 이가 너무도 적은 오

늘날입니다.

오, 주여!

70

호렙산 떨기나무 속의 사자와, 그 앞에 신을 벗고 엎드린 모세와 같

은 만남을, 오늘날 만백성에게도 가능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심령이 성령 충만케 되어, ‘게르솜’, ‘게르솜’ 하기를 진심으

로 원하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여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71

장 5

72

제 Ⅴ 편

“모세의 하나님 만남을 논함”

본 문 : 출애굽기 제 3 장 제 3 ~ 5 절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

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

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 - 우연이었을까 기연이었을까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이 모세 입장에서는 우연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를 만나기 위하여 ‘이제’까지 찾고 기다리다가 나타나셨던 것이다.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이 호렙산에서 이루어지던 때의 광경입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 . . .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

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출3:1~2a)

이 만남은 어찌 보면 우연히 일어난 일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기연인 것 같기도 합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불꽃 속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연히 이루어진 일

로 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의도된 만남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연한 만남이었으니 말입니다.

어찌 어찌 양 무리를 서편으로 인도해 가다보니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고, 거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어쩌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출3:1~2)

모세는 애초부터 호렙을 목적으로 일부러 서편 행을 택했던 것도 아

니었으니 말입니다.

73

모세가 호렙 산으로 간 특별한 다른 어떤 의미도, 성경에서는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당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분이셨을까요?

여기서 참고해볼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이 고백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역으로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

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

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

다” (시139:7~10)

이 구절로 우리는 호렙 산에서의 하나님 속마음과, 그분의 느끼심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시편 내용대로라면 모세와 하나님과의 호렙 산 만남은, 모세에게는

우연일 수 있었어도, 하나님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출3:10a)

“이제”라고 하셨습니다.

74

‘네가 어쩌다 여기로 와서 나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다리던 너를 이제 겨우 여기서 만났으니, 『이제야 만났

으니』이제 비로소 너를 바로에게 보내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터

세밀하게 유심히 보시다가, ‘이제’ 『이제』호렙산에 온 것을 매우

반기고 계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모세를 만난 하나님께서는, 그를 애굽에 보내는 이유에 대하

여 설명해주십니다.

첫째,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9절)

그 동안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보신 것입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기에 ‘이제’야말로 모세를 애굽에 들여보낼 적절

한 시기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10절)

달리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이 ‘이제’ 극에 달했으

므로, 저들은 누가 인도하든지 간에 순순히 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처해있다는 뜻입니다.

75

40년 전의 상황과는 완전 달라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둘째는,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4:19b)

40년 전에는 모세가 저지른 살인 사건으로 인하여, 애굽 사람들은

모세를 잡아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랬던 모든 자들이 사망하고 없으니

이제는 ‘애굽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애굽에 들어가도 죽지 않을 확률이 높아졌다는 의미입니

다.

그래서 ‘이제’, 『이제 너를 보내야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라고 하셨던 이유를 다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에 거듭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첫째,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부터 받는 압제와 고통으로

그 괴로움이 극에 달해 있으므로, 40년 전과는 달리 애굽에서 어서

속히 해방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군가가 나서서 ‘나가자’고 하기만 하면, 모두가 순순히 따

라 나올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모세를 죽이려던 애굽 사람들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76

그들이 없어진 이제, 애굽에 다시 들어가더라도 죽지 않고 살아나올

확률이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졌으니, “모세 너는 가라”고 하십니

다.

이 같은 헤아림으로 헤아려 볼진대, 앞서 소개한 시편 139편 7절로

10절의 고백은, 과연 옳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그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계셨습니

다.

그의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행7:20)

바로 왕의 딸로 하여금, 하수에 버려진 그를 데려다가 아들로 기르

게 하셨습니다. (21절)

애굽 왕궁에서 수준 높은 학문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22절)

1차 40년이 차매,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셨습니다. (23절)

2차 40년이 차매, 그를 다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34절)

하나님의 ‘40년 텀(Term)’, 『하나님의 40년 텀』이 차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어디 모세뿐이겠습니까?

77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과도 함께 하심으로, 저들을 ‘크게 번성케

하사’ 대적인 애굽보다 더 강하게 하셨습니다. (시105:24)

반면 애굽의 집권자들에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이스라엘)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

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시105:25)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성을 감지한 애굽은, 처음엔 함께 살기를 원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잔혹하게 변해버렸습니다.

온갖 방법으로 히브리 남자들을 학대하며 죽이려 했습니다.

나날이 이스라엘을 미워하여 교활하게 대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당신의 시선에서 놓치지 않는 대상은, 모

세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와 애굽 백성들까지도 처음부터 세밀히 보시고 계셨습니다.

모든 인생들과 만물 하나까지도 소홀히 하지 아니하셨으며, 지금껏

도 그렇게 운영되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론, 이방 민족들도 하나님이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른, 인간의 ‘전적무능’, ‘전적무지’,

‘전적무력’이라는 설득력 있는 교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78

이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으로,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영상 보기 >>>

79

‘이제’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주권’을 가지고 인간을 좌지우지 않고,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 당신의 뜻을 이룰 환경요건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신다.

절대주권자인 하나님에게는 또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절대주권만 행사하신다면, 무엇이 아쉬워 모세

를 애굽에 들여보낼 시점, 즉 ‘이제’(출3:10)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

겠습니까?

또한 모세의 생명을 찾던 자들이 다 죽기까지 기다리셨겠습니까?

(4:19)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통이 극한에 달하므로(3:9), 누군가가 “애굽을

떠나자.”는 한 마디만 던지면, 이내 순순히 따라나설 분위기가 확보

될 때까지 백성들의 괴로움을 보고만 계셨겠습니까?

그래야만 할 다른 이유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라면 이런저런 것 살피느라 잊고 있었던 ‘출애굽’이란 문제가,

이제야 생각나셨던 것입니까?

하나님은 실로 전지전능하시고 절대주권을 가진 분입니다.

그러실지라도 당신의 권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80

당신이 가지고 계신 절대주권을 당신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으십니

다.

당신의 권세로 세상을 무차별하게 뒤집지를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연약하다 하여, 당신의 절대권능으로 인간사를 좌지우지 않

으신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사나 세상 일에 상관하지 않는, 그런 면도 가지고 계

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책임감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자기의 발, 자기의 뜻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심 있게 보고 계셨습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인도자로 정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모세가 애굽으로 들어갈 요건이 모두 갖추어지게 된 ‘이

제’가 되자, 그 ‘이제’의 당사자인 모세 스스로 때맞추어 호렙산으로

왔던 것입니다.

모세와 대면할 그날을 고대하시던 하나님, 얼마나 반가우셨겠습니

까?

제 발로 와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셨겠습니까?

81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은 무슨 일을 벌여서라도 모

세를 붙잡으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시도를 알 리가 없는 모세는, 정작 호렙산에 별 관

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호렙산에 이르렀다가 이내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무심코 발길을 돌이키려고 할 그때에, 하나님은 대단한 볼거리로 이

벤트를 만들어 그의 관심을 끌고자 하셨습니다.

재빨리 떨기나무에 찬란한 불꽃을 일으키셨습니다.

당연히 모세의 관심과 눈길, 발길은 불꽃으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큰 광경’, 『큰 광경』을 연출하시기까지는, 하나님도 어지

간히 바쁘고 긴장하셨을 것입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큰 광경』으로 인하여, 모세의 발길은 자

연스레 불꽃으로 돌이켜졌습니다. (3:3)

불꽃은 타는데 나무는 타지 않는 광경이 이상하여, ‘가서 보리라’고

말하는 “동시에”, 『동시에』하나님께서는 불꽃나무 가운데서 모세

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얼마나 기다리셨던 순간이었겠습니까?

82

그 오랜 기다림이 바로 눈앞에 이루어지려하고 있으니, 다급하게 부

를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4절)

이를 보건대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모세에게는 우연일지, 아니면 의지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연도 기연도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모세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모세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

셨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이런 면이 있음으로 하여, 또 다른 교리가 나오게 되었

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유 할 의지가 있다’는 해석이 그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온 행위에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부

여됩니다.

이러한 논리에 힘이 실려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야만 상급도, 죄벌도 의미가 있게 됩니다.

83

또한 결과가 어떻게 나든지 간에, 거기에 대하여 결코 핑계치 못하

고『핑계치 못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14절~30절 참조)의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잘 설명해주는 내용입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들은, 주신 것 가지고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장사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뜻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25:24~25)

그는 주인의 절대권능, 절대주권만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따라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아서, 받은 한 달란

트 그대로를 땅에다 감추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셈하자고 할 때 한 달란트 그대로를 내놓았습니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절대주권으로 이것을 늘리든지, 모으든지, 헤치

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겠죠.

한 달란트 받은 자의 행동은 주인, 곧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84

하나님은 그의 지식이나 생각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자유의지를 보장해 주려고 하십니

다.

그 의지에 따라서 나타나는 결과를 보고, 상을 주든지 벌을 주든지

판단하십니다.

그렇다고 볼 때, 만일 모세가 광야 서편으로 가기를 싫어하여 계속

동편으로만 갔다면, 영영히 하나님을 못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 주여.

모세처럼 하나님을 앞에 두고도 무심코 되돌아가려 하거든, 모세 때

보다 더 찬란한 불꽃으로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아주옵소서.

불타는 소리도 더 요란하게 내주시고, 불기운도 더 뜨겁게 하사 우

리의 등골이 후끈 달아오르게 해주시옵소서.

당신의 복되고 성공할 현장으로 끌려가기를 원하나이다.

우연이든지, 아니면 우리 의지로든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생명의 현

장으로 가고 싶사오니,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우리를 성공으로

인도해주시옵소서.

영상 보기 >>>

85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절대주권자가 분명하오나,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았나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에 의하여 돌아가고 있는 세상일지라

도, 당신의 권세로 무참히 짓밟지 아니하시는 줄도 알았나이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제’라는 시점에 부합되기를 기다

리신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하나이다.

차라리 당신의 절대주권으로, 무자비하게라도 우리를 마구 이끌어

가신다면 더 다행일 것 같습니다.

오, 주님,

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어 우리를 감화 감동하게 하사, 우

연으로든지 우리 의지로든지 하나님의 생명과 복이 있는 현장으로,

우리의 발길이 가도록 인도해주시옵소서.

마귀가 주장하는 실패와 사망이 있는 곳은 싫사오니, 그런 곳은 피

하게 하옵소서.

간절히 구하며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아멘.

86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자연이치나 세상질서를 무시 내지

는 초월하신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유익을 위해 무차별적 초월을 기대하는 욕심의 발로에서 비

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는 샤머니즘(shamanism)에서 난 믿음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갈렙 목사님은 모세를 만나시는 하나님을 통해, 어떠한 하나님이신지

를 분명히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시며 전지전능자이실지라도 자연이치와 질서,

세상 주권, 현실 상황, 개인적 기질 등을 모두 인정하는 상태에서 움직

이고 계십니다.

모세의 미디안 40년이란, 모세가 애굽에 들어갈 조건과, 이스라엘 백성

이 순순히 따라 나올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 조성”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차기까지”는 드러내 일하지 않으십니다.

흔적조차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징조”가 없으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연인줄 알고 무심히 지나치는 작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매사에 기도와 감사가 없을 수 없습니

다.

잠들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갈렙 목사님은 우리의 긴장감 없는 신앙생활을 흔들어 깨워주십니다.

87

장 6

88

제 Ⅵ 편

“그 발에서 신을 벗게 한 까닭은”

본 문 : 출애굽기 제 3 장 제 4 ~ 5 절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

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

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으라’ 하심은

아무리 능력과 자격을 갖춘 자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신을 벗어야만 한다.

이는 부정한 채로 죽게 될 것을 염려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시다.

분명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타지 않는 이

유가 궁금해진 모세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불꽃으로 향합니다.

그가 돌아서서 불꽃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

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3~5)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본문5절b)

어떤 의미의 말씀입니까?

단순히 모세가 가려던 지역, 즉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룩하기 때문

에, 더러워진 신을 벗어버리라는 말씀이었습니까?

본편에서는『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의미에 관하여, 집중적으

로 조명해 드릴까 합니다.

이에 참고 될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89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도 모세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나타나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누구인지를 묻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라고 대답합니다. (수5:14a)

말하자면 여호수아를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리어 절하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합니다. (수5:15)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했던 주문과, 호렙산에서 여호와의 사자

가 모세에게 했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명령은 똑같은 내용이었

습니다.

여리고의 군대장관이나 호렙산의 사자는, 두 사람을 위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만나기 위해 호렙산에서, 여호수아를 만나기 위해 여

리고에서 각각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께 가까이 오지를 못하게 했을까요?

왜 신을 벗으라고 했을까요?

다른 말로 묻겠습니다.

90

여호와의 사자나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게 섰거라’는 식으로 그들

이 서있던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하고, 신을 벗게 했던 까닭이 무엇

이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나 군대장관이 돌격할까봐’라고 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 상황인, 출애굽기 제19장

으로 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출19:17)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

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20절)

산기슭에 있던 백성들과 산꼭대기에 강림해 계신 하나님과의 사이

에는, 상거(相距)가 꽤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산에 올라있던 모세에게 이르십니다.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申飭)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

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1절)

“산기슭에서 나 여호와를 기다리던 백성들이 내가 몹시 궁금한 나머

지, 나를 보기 위해 산꼭대기로 몰려오다가 죽을까 걱정되니, 모세

네가 “내려가서”, 『내려가서』백성들에게 단단히 타일러 올라오지

못하도록 통솔(신칙)하라”

91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직분자들이니만큼, 자신들의 몸

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22절)

만일 성결치 못한 상태로 하나님께 접근한다면, 제사장일지라도 “나

여호와, 곧 나의 군대장관이 순식간에 진멸할까 하노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22절b)

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거룩하지 못한 채로 여호와를 가까이한다면, 그가 이스라엘사람이

든제사장이든 심지어 모세일지라도 무론하고,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돌격할까봐 깨끗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군대장관이란 하나님을 보호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나 군대장관은 하나님께 가까이 오는 자들을 돌격할

수도 있으니, 그런 사태를 맞지 않도록 ‘게 섰거라’는 의미로, “네 발

에서 신을 벗으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9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요, 그분이 계신 곳 또한 거룩

한 곳이니, 함부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신을 벗고 게 섰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여 계신 산꼭대기 바로 밑에는, 우렁찬 우레 소리가

울렸으며 번개도 쳤습니다.

또한 빽빽한 구름들이 산을 둘러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나팔소리까지 크게 울려 퍼졌으니, 산기슭 진중에 있던 백

성들이 얼마나 두려워 떨었겠습니까? (19:16)

왜 이런 상황을 연출하셨을까요? (19:21b)

산꼭대기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보기 위하여, 백성들이 돌파하여 올

라가다가 죽게 될까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천지를 진동하며 겁을

주어 꼼짝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레와 번개, 잔뜩 낀 구름, 거기에 큰 나팔소리에 놀란 백성들은, 당

연히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성결치 못하여 죽이려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개하여 깨끗해질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부정한 그대로 죽을까봐

그 같이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93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토록 무한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기대 또한 크십니다.

비록 우리에게 많은 허물과 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 자체만

보시지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 어찌하든지

살리려는 뜻에서 신을 벗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

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

노라” (19:24)

이 말씀을 하신 곳은 시내산입니다.

호렙산이 아닙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르신 대로, 시내산 기슭에 있던 백성들과 제사

장들을 돌파하고, 아론만 데리고 하나님 근접 거리까지 올라갔을까

요?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94

모세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을 처음 뵈었

을 때에는, 백성들이나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호렙산은 하나님이 임하신 거룩한 곳이니

게서 한 발짝도 하나님 앞으로 내딛지 말고 신을 벗으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3:5)

당시 모세는 신을 벗어야만 했으며, 더 이상 하나님 앞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을 다 돌파하고, 하나님 가까이 올라오라고 하

셨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모세에게는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영상 보기 >>>

95

“피 남편이요”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하자 십보라는 아들의 양피를 베어 던지며 “피 남

편”이라고 한다. 이로써 온 가족이 살 수 있었으니,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호렙 산에서의 모세는, “신을 벗고 더 이상 내게 가까이 오지 말

라.”는 여호와의 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하나님과의 거리는 있었어도,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

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

라”(출3:10)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의 지팡이에 능력까지 입혀주

십니다. (출4:2~4 참조)

또한 입이 뻣뻣하고 둔한 모세를 위하여, 그의 형 아론을 동역자로

붙여주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이만하면 애굽으로 떠나도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처

자까지 대동하고 당당하게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만나자마자 죽이려 하시는 것입니다.

96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

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4:24~26)

이에 모세의 처 십보라는 급히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 앞에 던지

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고 말하니, 당장이라도 모세를

죽일 듯 덤비던 여호와께서는 곧바로 모세를 놓아주십니다.

“내 피 남편”이라는 십보라의 말에 어떤 뜻이 있었기에, 그 한 마디

에 모세를 살려주셨던 것일까요?

여기에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십보라의 행동과 외침은 ‘할례에 가늠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굳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해방의 인도자로 선택되어 보냄을 받게 되어있었

어도, 사실 그는 그때(피 남편이 된)까지 무할례자였습니다.

그때까지 할례 받을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97

갓난아기 때 하수에 던져져 바로 공주에게서 40년, 이방 미디안 제

사장 집에서 40년을 보내다보니, 할례 받으라고 권하는 자도 없었으

며, 받을 기회도 없었던 것입니다.

무할례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모세는 더 좋은 본향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궁궐에서 왕자로서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이스라엘과 함께 고난 받

는 것을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히11:24~25)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늘과 땅이 공인하는 공적인 절차,

곧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구별된 백성의 표를 소지하

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큰 역사를 행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신 하나님

은, 당장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제아무리 큰 사명을 받은 중요한 인물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공적인 절차를 갖추지 아니하고서는 사용하실 수가 없었

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될 수 없었으며, 더욱

이 이스라엘을 인도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98

고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무리 필요하셨어도, 죽일 수밖에 없으셨

던 것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들은 그 아비와 동등’, 즉 『아비와 아들은 하

나』라는 것을, 상식처럼 알고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는 전에도 수차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십보라는 차돌을 취하여 아들의 양피에 할례를 한 다음, 그 양피를

아비 모세에게 던지며 “내게는 피 남편이요, 아들에게는 피 아버

지”라고 외쳤습니다. (출4:25)

이 말의 의미는, ‘아들을 할례한 양피는 아버지의 할례 양피와 다름

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스라엘은 ‘아들의 것은 아버지의 것’이라는 상

식이 통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 (요5:18b)

예수님의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나는 그의 아들”이라는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죽이

려고까지 했던 것도, 이런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99

저들은 예수를 향하여 “네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니, 참으로 참람

하도다.”라고 반발했습니다.

“아들은 그 아비와 동등”이라는 상식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예사로 넘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십보라는 ‘이는 게르솜의 양피, 모세의 양피’라고 하는 대신, “그는

내 피 남편이로다.”고 했습니다. (4:25)

즉 ‘모세는 이제 할례 받은 내 남편’, 자신의『피 남편』이라는 사실

을 하나님 앞에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십보라 자신도 할례인이라는 것을 공표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할례를 받을 수 없으되 남편이 받았을 경우에는, 그 아내도

할례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십보라는 이제 할례 받은 아내가 되어, 남편과 함께 당당히 하나님

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십보라에게 진정 찬사를 보냅니다.

오, 하나님,

100

모세로 신을 벗게 하셨던 것은, 거룩하신 당신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오지 말고 게 섰거라’는 뜻이었군요.

모세가 신을 벗었던 것도, 하나님에게 한 발짝도 가까이 가지 않겠

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군요.

여기서 우리는 사명과 함께 능력까지 받았다 하여, 하늘과 땅이 공

인하는 교계의 공적절차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나이다.

세상의 왕들이 정한 법이나 질서를 무시하고, 교계의 공적인 절차를

업신여기면서,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가겠다며 신을 신었다가는, 졸

지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군요.

모세나 여호수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공인의 자

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을 벗으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

님께 가까이 다가가다가 죽게 될까봐, 안 죽게 하려고 ‘게 섰거라’

하셨으니,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을 알았으니,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

하시는 절차를 따른 그 후에, 가까이 오라 명하시옵소서.

영상 보기 >>>

101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이 호기심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보고자 나아갈 경우,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나 여호

와의 사자들이 곧바로 죽일 것을 걱정하시어, 우리에게 신을 벗고

‘게 섰거라’ 하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지 못한 자가, 자칫 영광의 하나님께 손상

을 입힐까봐 ‘신을 벗으라’ 하셨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십니

다.

오, 주여!

‘신을 벗으라.’는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되었나이다.

무턱대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만 하면 하나님 안에 내가 들고, 하

나님이 내 영혼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나이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만한 곳에서 ‘가까이 오라’고 불러

주시옵소서.

회개하며 원하시는 절차를 따르겠나이다.

무할례자였던 모세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할례자가 되었던 것처

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신분도 바꿔지기를 원하나이다.

102

내 안에 악한 영들은 다 내쫓고, 성령님만 충만하기를 원하나이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를 품어주시옵소서.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여 기도드리옵나이

다.

아멘, 아멘.

103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우리는 지금까지 “신 벗음”의 의미를, 신분(의지)의 포기나 하나님

께 가까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알고 있었으나, 갈렙 목사님의 말

씀을 듣고서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못 해석하면 정 반대의 뜻이 될 수도 있는 현실을 보며, ‘누가 나

를 알아서 나를 가르치겠느냐?’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합니

다.

모세나 여호수아의 ‘신 벗김’은,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

도록 경고하신 명령이었습니다.

성결하지 못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사자가 돌격해서

죽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19:21~)

“신 벗음”이란, 더 이상 한 발짝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지 않

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아서, 그 사랑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에서 부르시는 데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먼저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입혀주셨으며(지팡이), 아론으로 동행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적 약속의 표, 곧 할례를 받지 않은 이유로 모세

를 죽이려 하시니, 아내 십보라의 “피 남편” 선포로 모세는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사명과 은사를 받았을지라도, 성경이 공인하는 절차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104

장 7

105

제 Ⅶ 편

“당장 아니 고치시는 것은”

본 문 : 출애굽기 제 4 장 제 10 ~ 12 절

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

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

호와가 아니뇨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신지라

하나님은 모세의 입을 고쳐줄 수도 있으셨지만, 그의 연약함을 만드신 분도

당신이기에 질서를 무시하지 않고, 그 대신 도울 자로 아론을 붙여주셨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 손에 문둥병이

생기는 이적, 하수가 피로 되는 능력을 주시며, 애굽으로 갈 것을 명

하셨습니다.

이 사명을 받은 후에도, 모세의 입은 여전했습니다.

그 사실을 모세는 고백합니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4:10)

하나님의 큰 사명을 받은 후에도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것이, 그

대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기 전이나 받은 후에나, 본래의 모습이 변하지 않

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이러한 사정을 아뢰며, 보낼만한 다른 사람을 보내

라고 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십니다.

106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본문11~12절)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모세의 입 하나 쯤은 당장에라도 교정, 말하

는데 어려움이 없게 해주겠다는 의미로 헤아려집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기에 “나 말고 말 잘하는 자를 보내소서.”(4:13)라고 대꾸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세는 11절의 말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 . .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라는 말씀을, 모세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그는 자신의 입이 태어날 때부터 뻣뻣하고 둔하게 된 것은, 여호와

가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니, 앞으로는 여호와께서 책임지고 가르

쳐 줄 것『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풀어보겠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더냐? 너의 본래부

터 뻣뻣한 입과 둔한 혀 역시, 나 여호와가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겠

느냐? 내가 그것을 모르고 너를 불러낸 것이 아니니라. 나 여호와는

107

너의 모든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으니, 너는 걱정 말고 애굽으로 가

거라. 이제부터는 내가 책임지고 네 입과 함께 있어, 너의 할 말을

가르칠 것이라.” (본문11~12절)

모세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우리 중 더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지금 당장 말 잘하는 입으로 완벽하게 교정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받

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금부터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쳐 주겠다”는 의미

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해석은 과연 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그렇게 지은 자신에 대하여, 아주 속상해

하며 노까지 발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14절)

하나님은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모세에게 붙여주고자, 이미도 그 준

비를 완벽하게 해 두셨습니다.

108

지금 모세의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완벽한 언어구사력이겠으

나, 그 문제 해결 방법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견해가 달랐습

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을 믿기에, 모세의 입도 단한순간에

정상적으로 만들어줄 것을 기대합니다.

하시겠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당신의 특별한 능력으로 못 하실 것

이 없는 하나님이시나, 그렇게 하시지를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준수한 용모를 주신 하나님이, 그의 말솜씨 정도쯤이야 좋

게 하실 수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 안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신지라, 오히려 그리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루아침에라도 확 뒤집어엎고 새로 만들 수 있는 분이지만, 반면

하나님이시기에 현실을 완전 무시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모세의 입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지라,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신들 모세의 연약함이 어찌 마음 편하셨겠습니까?

속이 얼마나 상하셨으면 노를 발하기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마음에 이해가 됩니다.

109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2절)

그렇다고 모세의 입과 혀를 고쳐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 잘하도록 지어진 그의 형 아론을 주선해주신 것입니다.

아론은 그야말로 말 하나는 잘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론으로 하여금, 동생 모세를 돕도록 미리 준비시키

셨습니다.

물론 아론은 기쁜 마음으로 동생의 입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 해결방식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모두 받아들

인다고 해도, 그의 나이는 이미 팔십이었습니다.

육체의 모든 세포조직들이 굳을 대로 굳어있는 나이였습니다.

그런 나이에 어찌 구강 근육을 완전하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언제 바로 고치고 훈련해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랜 세월이 걸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을 잘 알고 있던 모세였기에, 처음부터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

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13절)

110

‘나 대신 말 잘하는 사람을 보내 달라’는 모세의 청에, 하나님도 공

감하셨습니다.

“모세야, 나도 네 고민을 잘 안다. 또한 너의 입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말 잘하는 아론으로 하여금 즐

거운 마음으로 너를 돕도록 내가 움직이겠으니, 너는 지금부터 상당

기간 형의 도움을 받도록 하여라.”

그러면서 아론을 모세 앞으로 데려오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2절)

“가르치리라”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가르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 방법은 어떤 것이며, 그렇게 가르침을 받다보면 모세의 말이 원

만해진다는 것입니까?

이를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너는 그(아론)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

에 함께 있어서 너희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

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5~16절)

이야기가 점점 궁금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111

모세를 아론의 “하나님같이 되리라”,『하나님 같이 되리라』는 말씀

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혜의 말씀 곧 당신의 뜻을 일러주시면, 모세

는 들은 그 말씀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아론에게 넘겨주라고 하셨습

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평소 하던 대로 말을 더듬든지, 어눌하게 하든지,

버디 랭귀지(Body Language)를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만은 제대

로 전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세가 어떻게 전하든지 간에, 아론은 100% 알아들

었다는 말입니다.

형제간이었기에 동생이 말하는 내용을, 그의 형은 다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모세로부터 들은 말을,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의 말솜씨에 얹

어 백성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모세의 역할은, 그야말로 『하나님같이』였습니

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112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지혜의

신,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모세처럼), 또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지식의 능력을 주신

다(아론처럼)’고 했습니다. (고전12:7~8)

아론에게는, 받은 지식을 남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질서정연하게

논술하는,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은사는, 모두의 유익을 위

하여 주신 것이니, 서로 협력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우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역할은, 아론에게 ‘하나님과 같은’ 것

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심과 같이, 모세는 아론에게 그렇

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의 역할을 하면, 아론은 모세로 받은 하나님

의 뜻을 잘 정리하여, 회중들을 설득하며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됩니

다.

113

모세가 준 재료를 가지고 회중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잘 요리

해서 나누어주는, 교사에 가늠하는 역할을 아론이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원석을 캐는 역할을, 아론은 그것을 잘 다듬는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와는 대면하여 직접 말씀하셨으나, 아론과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영상 보기 >>>

114

아론 없는 모세, 모세 없는 아론

말에 능한 아론이었을지라도 모세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었으며,

모세 역시 아론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출4:15)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 두 사람 모두의 입에 함께 있다고 해서, 두 사

람에게 동일한 일을 맡기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에게는 원석을 캐는 역할을 준다면, 또 하나에게는 그 원석을

다듬는 일을 각기 다르게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원석이란 두 사람이 함께 해야만 더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석을 캐는 모세와, 그 원석을 다듬는 아론 둘 다에게 유

익을 주시겠다는 뜻으로,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역사하겠다고 하셨

던 것입니다.

“그(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

(모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아론은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민12:8)

모세는 그가 받은 사명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보겠으나, 아

론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115

하나님은 각자에게 주어진 분야를 잘 하도록, 은사나 능력으로 연결

해주십니다.

자기의 은사를 초월하여, 남의 은사까지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입이 아무리 능하다 할지라도 모세가 없었다면, 그는 하나

님의 진(眞) 뜻을 알 리가 없습니다.

아론의 입에 하나님이 같이 하실지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모세를 통해야만, 아론은 자기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좋은 예가 모세가 없는 동안,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사

실입니다.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르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본편의 말씀을 요약,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나에게 연약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아직 연약함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나보다 더 안타까

워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한대로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16

그렇게 만들어진 내 모습은,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신 결과라고 하

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셨을지라도, 하루아침에 완전히 뒤집어 한 번

에 바꾸어놓지를 않으십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성장해가면서 차츰 바뀌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

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질서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2. 나에게 ‘가라사대’ 하시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명을 주심과 동시에, 그에 따른 능력도 함께

주시며 ‘가라사대’ 하십니다.

명을 받을 때에는, “아직 감당하기에 모자라오니 나 아닌 보낼만한

다른 자를 보내소서.” 말할 수 없습니다.

능력도 함께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처럼 말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말씀을 받은 즉시 순종해야만 합니다.

3. 나에게 사명을 주신 것은,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 하여, 나 혼자 다 감당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117

하나님이 일을 맡기실 때는, 각양 은사 받은 자들을 이미 우리 주변

에 적절하게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연결지어준 사람들과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내게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도울 자를 이미 예비해

두셨으니, 가라 하시면 가야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에 빈약한 모세에게, “내가 네 입에 있어 가르치리

라”(출4:15)고 하셨습니다.

“가르치리라”, 『가르치리라』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입, 즉 아론을 사용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로 이기게 하리라’는 말씀

을 주셨다면, 그것이 나 혼자에게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말

아야 합니다.

‘다른 누구누구와 함께’ 일하시겠다는 말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

다.

118

따라서 여러분 곁에 어떤 스승의 가르침이 있거든, ‘하나님이 이 스

승을 수단으로 내게 가르침을 받게 하시는구나.’ 생각하여, 감사함

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 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7~8)

모든 육체들은 경건에 이르기를 위하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학습을 계속 보태어가다보면, 결국 ‘완전에 이르는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익이 있으나, 그 유익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학습할지라도, 그것은 약간의 유익을 가져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장기간에 걸쳐서 같은 내용을 지속적으로 반복, 학습에 학

습을 더할 것을 바울은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할 때에 성장 발전하며, 범사에 유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판단을 기준으로, 여러분 자신을 헤아려 보기 바랍니다.

숙제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119

모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말 배우기를 시작한지 얼마 후에야,

혼자서도 능히 외칠 수 있는 솔로 스피커(Solo Speaker)가 될 수 있

었을까요?

즉 아론 없이 대중들 앞에서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

가 사역한지 얼마 만이었을까요?

출애굽기를 눈여겨보며, 이 문제를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저 갈렙은 이 문제를 놓고 성경을 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

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꼭 풀어야했던 것은, 본 시리즈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상 보기 >>>

120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인간들마다 각각에게 발전할 수 있는 소지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한 므나와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헤치든지 모으든지 하나님 마음

대로 다해 주실 것이라 믿어, 남기려하지 않고 그냥 묻어 두고만 있

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받은 채로 가지고 있다가, 그대로 내놓으려고 했습니다.

게을러서인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인지, 손 놓고 있을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심지어 믿음을 지키는 여부까지도 내가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본 시리즈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일할 때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 주여!

이제 내가 변하기를 원하나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묻어두는 자가 아니 되기를 바라나이다.

121

우리 앞에 복과 화, 생명과 사망을 두고서, 우리로 하여금 결정하고

선택하라고 하신 하나님,

그리하신 이상 우리의 선택을 무자비하게 짓밟지 아니하시는 하나

님이신 줄 알았사오니, 우리의 각오를 더욱 단단히 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향하여 열심히 따라가겠나이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22

장 8

123

제 Ⅷ 편

“그 지팡이 하나님 지팡이였나?”

본 문 : 출애굽기 제 4 장 제 20 ~ 21 절

20.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내가 그의 마음을 강

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자기 지팡이, 자기 입술로 여겼다면

사명 받은 후의 모세 지팡이는 과거 양칠 때 쓰던 그것이었으며, 그의 입도

사명 받기 전의 그 기능 그대로였으나, 사역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

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본문20절)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본래 그 지팡이는 전부터 모

세가 쓰던 그의 지팡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출

4:2)

모세가 손에 잡은 지팡이는, 과거 그가 양치기할 때부터 사용해오던

그것이었습니다.

분명 모세의 지팡이였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본문에서는 매양 “하나님의 지팡이”,『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했을까요?

얼마 전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124

모세가 그의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갈 때 들었던 지팡이는, 전

에 바로 왕 앞에서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었던, 바로 그 지

팡이였습니다. (출4:3)

말하자면 모세가 평소 쓰던 그 지팡이였다는 말입니다.

잠깐 이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긴 했지만,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갈

때의 지팡이는 여전히 모세가 전부터 쓰고 있던 그 지팡이, 바로

『모세의 지팡이』였던 것입니다. (본문20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모세도 그 지팡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과 사명이, 그 지팡이에 아직도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17절)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가리켜 ‘너의 지팡이’라 하

지 않고, 당신의 것임을 전제로 말씀(17절)하셨습니다.

참으로 올바른 표현입니다.

125

만의 하나 모세가 그 지팡이를 전부터 자기가 들고 다니던 자기 것

으로 여겼다면, 바로 왕 앞에서 어떻게 이적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

니까?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입힌 하나님의 지팡이로 믿지 않았다

면, 그것을 던졌을 때에 어찌 뱀이 될 수 있었으며, 그 뱀이 바로의

뱀을 삼킬 수 있었겠습니까? (7:12)

훗날 하수를 쳤을 때 피가 될 수 있었으며(7:20), 반석을 내리쳤을

때 물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17:6)

그 같은 이적들은 모세가 들고 다니던 지팡이로써는 어림도 없는,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믿지 않고 자기 지팡이로 여겼었다

면, 하나님은 바로 왕 앞에서 이적들을 역사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이적을 행하셔야 할 상황이었어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그 순간부터, 자기 손에 있는 지팡이

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마저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의 사명자들로부터, ‘나는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126

하나님의 사명을 받기 전이나 받은 후에도,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여전하다는 뜻이겠지요.

이러한 부정적인 말은, 겸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앞 시리즈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

님이 만나게 해주시는 인물과 동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준 인물과 계속 연습하며 나가다보면, 약간씩 변화와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유익이 쌓여지면, 자신의 부족함이 묻혀버리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부족하다’ ‘부족하다’ 망설이며 핑

계 대는 이들을 볼 때, 심히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

습니다.

앞 시리즈에서 말씀드린 내용을 상기하기 위하여, 덧붙여 설명 드리

겠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사역은, 여호수아와 갈렙과는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몸과 힘으로 싸워 쟁취하는 것이었다면, 모세의

사역은 거의가 입의 말로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127

이에 모세는 ‘자기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고 하나님께 아룁니

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애굽에 가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명

을 받고나서도, 자신의 약점(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는)이 여전

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10)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나’(11절)라고 반응하셨

습니다.

이 말씀을 적용하여 다시 해석해드립니다.

“누가 네 입을 그렇게밖에 못 지었겠느냐? 부족한대로 그렇게 지은

이는 나 여호와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그것을 탓하기 전에, 오히려

내가 나 자신부터 탓해야 마땅할 것이라. 해서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하겠으니 너는 가라”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2절)

“할 말을 가르치리라”

『할 말을 가르치리라』하셨다고 해서, 당장 모세로 하여금 훌륭하

게 말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대신하여 직접 말씀하시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

다.

말 잘하는 아론의 입을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128

모세의 입장에서 못 할 말은 아니었습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13절)

결국 모세로서는 할 말한 말을 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말에 노(怒)를 발하셨습니다. (14절a)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아론으로 모세의 입을 대신하게 하여, 둘은

함께 사역의 현장으로 갑니다.

모세의 부족한 입을 아론으로 채워, 함께 사역을 시작했던 것입니

다.

이후 모세의 부족한 입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데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을 형제가 동역함으로 인하여, 모세는 자연스럽게 아론

으로부터 말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그의 혀도 풀리게 되어, 아론 없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백

성들 앞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직접 전할 수 있을 만치 완벽해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상 보기 >>>

129

하나님께 자리바꿈이란 없다

모세를 대신해 백성들 앞에 서게 된 아론은, 자신이 모세 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은 자기처소를 떠난 자들을 징계하신다.

그런데,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세의 입을 대신하며 합력하던 아론은, 언제부턴가 모세의 자리가

자기 자리인 줄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대로 자기 자리에 아론이 올라앉고, 자신은 그 아래에

떨어져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게 됩니다.

아론이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을 볼 때마다, 모세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이런 염려는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현실적으로 모세보다는 아론과 더 많이 대면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말하는 것은 직접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데 비하여, 아론

의 말은 항시 들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론은 얼마나 말을 잘하는 인물이었습니까?

하나님도 그의 언어구사력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130

당시 아론의 인기는 백성들 간에 대단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즉 아론과 미리암이 교만

해졌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똑똑함과 인기를 내세워 문제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자리바꿈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상황에 변화가 생기고, 낮은 자에게서 뛰어난 실력이 보인다

해도, 웬만해서는 처음 정해준 자리를 뒤바꾸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모세를 아론과 미리암 위에 두셨습니다.

아론의 재능이 모세보다 훨씬 뛰어나고,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지

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자리를 정해주신 후에는, 각각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기를 원하

셨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일로,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심하게 비

방했습니다.

단순한 비방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민12:2a)

131

아론과 미리암은 여호와께서 자기들과도 말씀하셨다는 것을 구실삼

아, 모세의 자리에 올라 앉으려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신의 지위를 떠났던 것입니다.

역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셨습니까?

설사 아론과 미리암 두 사람이 백성들에게 주는 효과가 모세보다 훨

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저들의 자리를 바꾸어주지 않으셨습니

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칠 일간 부끄러워

하지 않겠느냐” (민12:14)

미리암과 아론의 경우는 아비가 아들에게 침 뱉은 격이 아니라, 아

들이 아비에게 침 뱉은 수준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미리암은 칠 일 동안 갇혀 지내야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노는 그보다 더 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세 사람을 회막으로 불러내

셨습니다. (민12:4)

먼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십니다.

132

“너희 같은 선지자들에게 내 뜻을 전할 때에는 이상이나 꿈으로 말

하지만, 모세와는 다르니라.”

모세에게는 아론이나 미리암처럼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나의 온 집에 충성”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부족한 대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데 충성했다는 말씀입니다.

(민12:6b~7)

아론이나 미리암과는 모세의 격(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어떻게 대하셨다고 했습니까?

모세에게는 아론이나 미리암에게처럼 이상이나 꿈, 은밀한 말로 하

지 아니하고, 직접 대면하여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8절a)

또한 모세는 저들과 달리, 여호와의 형상을 직접 눈으로 보는 자이

거늘, 어찌하여 감히 그를 비방하느냐고 꾸지람도 하셨습니다.

이와 동시에, 미리암의 몸에 이상이 나타났습니다.

순식간에 온 몸이 문둥병에 들어서, 눈같이 허옇게 되어버린 것입니

다. (10절)

결국 미리암은 진 밖으로 쫓겨나 칠일을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133

아론과 미리암의 지혜 있고 설득력 있는 말로 인하여, 백성들은 두

사람을 떠받들며 따랐었습니다.

그러나 미리암이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문둥병에 걸려 온 몸이 눈처

럼 희게 된 모습을 보자, 저들의 마음은 달라졌습니다.

전처럼 미리암은 물론, 아론도 따르려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인기를 부여하며 존경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 둘씩 아론과 미리암 곁을 떠나갔습니다.

떠나도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었습니다.

예부터 유대 백성들은 문둥병자를 보기만하면 돌과 침으로 저주했

으니,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민수기의 이 같은 경고가, 어디 미리암 뿐이겠습니까?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

하신 일을 기억할찌니라” (신24:9)

미리암의 일로 하셨던 과거의 이 말씀은, 이후 또 다른 미리암, 또

다른 아론과 같은 자들에게도 주시는 현재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라도 미리암이나 아론처럼 한다면, 그렇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

하여, 자기에게 주신 위치와 자기가 맡은 지위를 지키는 한편, 위에

두신 이를 비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34

이는 누구라도 잊어서는 안 될 명령입니다.

자기 위에 두신 자가 설사 부족하고 약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자

리를 빼앗으려 비방하는 일은 결코 하지 말라는 주의입니다.

신명기에 기록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는 말씀으

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방하다가 큰 코를 다쳤습니다.

어쩌면 저들이 모세보다 더 똑똑하고 더 유식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보다 모든 조건이 더 잘 갖추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설사 모세보다 더 훌륭하고 더 기능적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들

윗자리에 세우신 이에게 그럴 수는 없다 그겁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긴 했지만, 부족함이 많았던 것은 사

실이었습니다.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입이 뻣뻣했으며 혀는 둔했습니다.

거기에다 또 다른 약점, 곧 구스 여인의 일까지 겹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랫자리에 있어야 할 자가 윗자리의 약점을 잡아 곤란에

빠뜨리는 것을 볼 경우,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미리

암의 문둥병으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35

자기 지위를 떠난 자들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질서를

바로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미리암 같이 실수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쩌면 당시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서로의 자리를 바꾸는 것을

더 좋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론이 인도자의 자리에 앉을 경우, 그를 따르던 자들은 손뼉을 치

며 환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질서란 백성들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 구조를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고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번 윗자리는, 언제나 윗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윗자리는 모세 차지였습니다.

비록 언어구사력이 부족하고, 바로 왕 앞에 나서기를 부끄러워하는

성품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일찍이 아론 위에 모세를 세우셨습니

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은 모세이려면, 『하나님께서 세운 모

세』가 되려면, 자기 손에 있는 지팡이를 자기 것으로 여겨서는 아

니 될 것입니다.

136

처음부터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여야,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영상 보기 >>>

137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만일 모세가 이적을 행하던 그 지팡이를 자기의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그 입술을 자기의 입술로 여겼더라면, 과연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지팡이에 능력을 입힌 사실을 믿어, 그 지

팡이를 자기의 것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고백했습

니다.

자신 역시도 하나님의 것인 줄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우리 사명자들도 모세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오, 주여!

우리는 물론, 우리를 돕는 자들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를 잘 지

킴으로, 자기 처소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들에게 인기 좀 있다하여, 올라가려 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지키지 않을 경우 어떻게 된다는 경고를, 미

리암을 통하여 알게 되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우리의 자리를 잘 알아

지키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38

장 9

139

제 Ⅸ 편

“내가 너로 신이 되게 하였은즉”

본 문 : 출애굽기 제 6 장 제 1 절, 제 7장 제 1 절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모세 섣부른 탓에

백성들의 원망, 바로 왕의 강퍅함, 심지어 모세의 부족한 입까지도, 하나님은

당신의 책임으로 돌리신다. 이것이 당신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철학이다.

바로 왕이 나날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역을 심하게

부과하자,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싸잡아 원망합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토록 심한 학대를 당하게 하시

며, 어찌하여 나를 애굽에 보내셨나이까?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까?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돌보지 아

니하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원망을 수용이라도 하시려는 듯, “이제 내가 바

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

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본문6:1)고

말씀해주십니다.

“강한 손을 더하므로”, “강한 손을 더하므로” 이 말씀을 거듭하셨습니

다.

140

『강한 손을 더 한다』고 해서 우리가 짐작하는 것처럼, 그때부터

그 무섭고 강력한 재앙들을 내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세에게 명하셨던 초보적 이적, 즉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4:21a)고 하시던, 그것

들을 가리켜 “강한 손”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모세가 바로 왕을 처음 만났을 때에 하지 않았던 그 이적들을, 지

금이라도 행하여 보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과의 첫 대면에서 실패했던 까닭은 명받았던 이적들

은커녕, 전하라는 말씀조차 제대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들을 제대로 행하지 않았던 것에 기인했다는 말입니다.

처음의 일이 실패로 매김 되었으매, 하나님께서는 보낼 때의 기대를

저버리신 듯합니다.

보십시오.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4:8b)하면서, 둘째 이적의 표징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까?

재 파송하실 때에는 전의 기초적인 이적들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

게 될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141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이제는)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

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7:3~4)

무슨 말씀입니까?

모세가 이적과 표징을 많이 행한다 할지라도, 바로는 이를 믿지 아

니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를 보건대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첫 작품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셨

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부탁하신 모든 말씀과 명하신 모든 이적들을, 아

론에게 그대로 고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들을 모았습니다.

아론은 모세로부터 들은 말씀, 특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는 내용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백성들은 아론의 이 말을 믿으며,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까지

했습니다. (4:29~31)

그러나 애굽 왕 바로는 여전했습니다.

142

모세에게 굴종하기는커녕 더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

을 전보다 심하게 부가했습니다.

이로써 더 큰 괴로움을 당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전에 가

졌던 믿음마저 버리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할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

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5:21)

모세와 아론을 향한 백성들의 첫 원망이 단초(端初)가 되어, 하나님

께서는 전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더 많은 분량의 말씀들을 해주셨

습니다. (6:2~8)

처음으로 당신의 성호가 ‘여호와’라는 것도 소개하셨습니다. (6:2b)

그리고 그 이름, 『여호와』를 걸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장차 너희의 기업을 삼게 하리라” (6:8)

하나님께서 주신 이 약속의 말씀을,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에게 그

대로 전해만 주었어도,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이 그다지 험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43

바로로 말미암은 백성들의 마음 상함과, 혹독한 일로 당하는 괴로움

이 훨씬 덜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6:9)는 사태도 생기지 않았

을 것입니다.

애굽이 아무리 혹독하게 부렸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위안삼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모세의 담당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받은 아론이 백성들에게 잘만 전했었더라도, 저들은 원망

없이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쨌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한번 불신한 후에는, 어떤

말도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의심하고 원망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광야 40년 내내 그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이스라엘이 이럴진대, 바로와 애굽은 오죽했겠습니까?

바로는 그의 말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조차 몰랐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에 대하여는, 알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144

더구나 모세 특유의 온유가 베인 부드럽고 부담 없는 언어 구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에도 별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무게 있게 받아들이지 않고, 쉽게 듣고 쉽게 거

절해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왕의 한번 거절은, 그것이 씨가 되어 마지막까지 거절에 거절

을 되풀이했습니다.

모세가 섣부른 탓으로 그의 처음 사역은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나 애굽은, 장차 치명적인 결과를 받아들

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헌데, 헌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섣부른 접근이, 바로를 더 강퍅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실수로 돌리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바로가 강퍅하게 된 까닭을 ‘내가’, 『나 여호와』때문이라

고 하셨습니다. (7:3a)

당신의 종 모세의 부족을, 당신 탓으로 헤아리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로의 마음이 강퍅한 것도, 하나님 탓이라고 하셨습니다.

145

모세의 “나는 본래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말에 능치 못한

자”라는 고백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답하셨습니까?

그의 부족한 입도 당신의 탓, 『당신의 탓』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 . . . 나 여호와가 아니뇨” (4:11)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과 당신 백성들의 부족이, 모두 당신 탓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철학입니다.

영상 보기 >>>

146

‘하나님같이 되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나 사자를 통하여 일하신다. 존재는 확실하나 직접 나

타나 말씀도 이적도 아니 행하시니, 이를 가리켜 ‘하나님같이’라고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아론에게 전하면, 아론은 모세로

부터 들은 것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역 방법에 대하여,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일러주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7:1b)

이 말씀 중, 모세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신이 되게 하였

은즉』이란 말씀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은 모세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같이, 대단한 권능자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직접 말하지 말고, 대언자 아론을 세워 그로 말하

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를 가리켜 ‘네가 바로에게 갈 때는 너로 신이 되게 하였은즉’ 이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147

하나님은 모세의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것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아 말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모세야, 전에 네가 말했던 것처럼, 아직까지도 네 혀가 둔하고 네

입이 뻣뻣하여 말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내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하니 아론을 세워 네 입을 대신하게 할 것이라”

“아론이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

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4:16)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바로 앞에 설 때에는 모세가 직접 말하지 말고, 아론으로 대신하라

는 뜻입니다.

능숙하지 못한 모세의 입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4:16)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7:1b)

모세로 하여금, 아론과 바로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하나님같이

되리라』는 의미를, 재확인해주는 구절들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신다는 것을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종이나 사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무슨 말씀이나

어떠한 이적도 행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148

존재는 확실하지만 직접 나타나 일하지 않으시는, 그런 지위에 계시

는 분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같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설득력이나 사역의 부족함을 아셨습니다.

바로와 첫 만남에서의 실패도 사실상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수습책으로 얼마동안은 아론을 대신 내세우셨습니다.

모세만 가지고는 성사되지 않을 것을 아셨다는 뜻이겠죠.

그의 연약한 언어구사력이나 온유한 성품이, 이유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모세는 한동안 직접 나타나 말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그는 ‘바로에게 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로 앞에서 직접 말하지 않고, 아론을 통해서만 했

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바로 앞에 직접 나서지 말고 아론에게 전

해주기만 하라. 그러면 아론은 그 내용을 자신의 말로 바로에게 전

해주어라”고 하셨습니다.

149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7:1b)라는 말씀처럼 행하라는 것이었습니

다. 바로에게 모세를 신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후 얼마동안 말씀을 전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능력 또한 아론

으로 행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도 던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인해 볼까요?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7:10)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아론이” 『아론이』지팡이를 던졌다고 기록되

어 있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바로 왕과 그 신하들 앞에서 지

팡이를 던졌습니다.

어디 지팡이만 던졌겠습니까?

말도 함께 했습니다.

아론이 행한 이적은 또 있었습니다.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하수들

과 운하와 못과 모든 하수 위에 펴라” (7:19)

모세가 아닌, “아론에게 명하기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0

‘모세가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이란 말씀을, 이제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바로에게 직접 나타나 말씀하시

거나,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당신의 사자들이나 천사들을 통하여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

다.

이를 보건대,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에 직접 들어가 그로 강퍅하게

역사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로가 강퍅했든지 겸허했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바로가 강퍅케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명대로 일

하지 못한 종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바로가 모세의 부탁, 즉 하나님의 명령을 쉽게 거절했던 것은, 모세

와 아론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원망했던 것도, 모세의 미숙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1

다시 말하면 애굽 왕의 강퍅함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함은, 그렇

게 되도록 빌미를 제공한 모세와 아론 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의 부족이 만들어

낸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 앞에서나 백성 앞에서, “내가 그

를 강퍅하게”(7:3a), 『내가 바로를 강퍅하게』했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인생들처럼 실패 앞에서 서로 ‘네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내 탓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공격받을 때에도, 당신이 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당신 사자들에 대한 철학이요, 당신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며, 또한 당신의 성품이십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러한 당신께 황송할 뿐이옵니다.

영상 보기 >>>

152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신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위에 당신을 나타내실 때에, 직

접 소리 내어 드러내지 아니하셨습니다.

당신 손으로 이적을 행치도 않으셨습니다.

천사들이나 당신의 사자와 종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들려주셨습니

다.

종들이 맡겨진 사역을 잘하여 첫 시작부터 성공했던 경우도 있으나,

모세와 아론처럼 실패를 안겨드린 경우도 있었던 것을 압니다.

이에 대한 실망이 매우 크셨을 터인데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신지라

‘나 여호와가 이렇게 하였은즉’이라고 정리하고 마셨습니다.

오, 주여!

구하오니 우리로 성령 충만케 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증거하고,

그 능력을 제 때 제대로 나타낼 수 있도록, 말씀의 지혜와 말씀의 지

식과 말씀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세상 백성들 사이에 끼어있는 저희 종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나타내기를 원하오니, 가

능한 한 우리로 실패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153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여 기도드리옵나이

다.

아멘.

154

장 10

155

제 Ⅹ 편

“모세의 그 믿음 언제 어디서”

본 문 : 히브리서 제 11 장 제 24 ~ 26 절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

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을 낙을 누

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

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애굽 왕궁에서 자랐으나

모세에 대한 표현이 출애굽기와 히브리서가 각각 다르다. 본문에서는 ‘믿음

으로’라고 했으니, 애굽왕궁에서 자란 그에게 무슨 믿음이 있었다는 것일까?

젖먹이 때에 애굽 왕궁에 들어가 거기서 성장한 모세에게, 무슨 믿

음이 있었다고 “믿음으로”, 『믿음으로』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

함 받기를 거절했다’는 것일까요? (본문24절)

또한 본문 25절에서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까지 했습니다.

애굽을 떠나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

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본문26절)라고도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의 사정과 사뭇 다른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기록대로,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까닭에

두려운 나머지, 마지못해 도망했던 것이라고 알아왔으니 말입니다.

본 히브리서에서는 모세가 애굽을 떠나야했던 이유를, “믿음으로”

『믿음으로』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허면 40년 동안이나 애굽 왕궁에서 생활하던 모세에게, 도대체 그만

한 믿음이 언제 어떻게 생겼다는 것입니까?

156

과연 누구에게 들어서 그런 신앙이 심기어졌다는 것입니까?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 나는 것이요, 들음은 전하는 자가 있어야 가

능하다’고 했습니다. (롬10:17)

그렇다고 모세에게 젖을 먹이며 유모해주었던 그의 모친이 심어준

믿음이었을까요?

모세의 믿음 수준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유아시절 젖을 먹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던 차원, 그 이상의 믿음이

었다고 히브리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40년을 살면서 어떻게 그만한 신앙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해서 궁구(窮究)하고 또 궁구해보았습니다.

젖을 떼지도 못한 상태에서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궁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장성하고 나서는, ‘믿음으로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

함을 거절했다’는 것을 보면, 청소년기에 그의 본 혈족인 이스라엘

과 수시로 호의적인 내통을 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밖에 없습

니다.

157

그렇지 않고서야 애굽 왕자의 신분으로 어떻게 히브리 신앙이 심겨

져, 애굽을 도망하듯 나왔겠습니까?

왕궁에서 애굽의 법도를 익히는 한편, 같은 기간 왕궁 밖으로 나가

이스라엘의 법도와 율례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환경이 따

로 주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밖에는 그의 신앙에 대하여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애굽의 왕실 교육과 히브리의 고급 교육이라는 두 가지 교육이, 어

찌 모세에게 가능할 수 있었느냐에 대한 비밀의 키는, 그의 이름 ‘모

세’, 『그 이름 모세』에 있습니다.

아는 대로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 내었음”(출2:10)이라는 뜻

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에는 대개 뜻이 있습니다.

‘이름 = 뜻’, ‘뜻 = 이름’이란 말입니다.

모세란 이름은 『물에서 건진 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공주가 지은 그 이름이 얼마나 정치적이고 기묘했는지, 그 이

름이 이루어낸 결과를 보면 실로 놀랍습니다.

가히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158

성경에 기록된 위인들의 경우, 그들 용모에 대한 표현이 그리 많지

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만큼은 특이하게도, 신구약 모두에서 칭찬일색입니

다.

준수했으며(출2:2), 아름다웠다(히11:23)고 했습니다.

매우 특별난 인물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를 낳은 자는 물론, 그 아이를 보는 자들은 입양하여 키

우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허나 히브리 남자아이만은 낳은 부모라 할지라도, 제아무리 아름답

게 태어났다 할지라도 입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사정이었습니다.

나라의 공주였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이 모든 신민(臣民)에게 엄한 명을 내린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나거든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출1:22)

바로왕의 딸은 지혜와 지식이, 왕궁 내 같은 급의 어느 왕자들보다

도 탁월했습니다.

공주 신분으로 당시 세계적인 유명한 국고성 람셋 건립현장의 총감

독의 지위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159

그녀는 갈 상자 안에 있는 아기 모세를 보는 순간 아이를 데려다 키

우고 싶은 마음에, 왕명을 우선하는 특별한 도리를 착안했습니다.

말하자면 아비의 명령을 초월할 수 있는, 절대 우위의 법을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바로 공주가 적용했던 이 법은 어쩌면 영구적인 것으로, 왕의 명령

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나 짐승을 보는 자들은, 무

조건 구조하여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사회법처럼 적용되던 하나의 도리였습니다.

공주는 엄청난 이 도리에 아이의 목숨을 걸기로 했습니다.

그런 의도에서 아이의 이름도 ‘모세’라 지었습니다.

이 법은 여호와의 안식일 법보다도 우선시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누구나 쉬라’는 ‘안식일 법’은, 오랜 세월 이스라엘을

지배해오던 법이었습니다.

바로 공주가 모세의 목숨을 걸었던 그 도리라는 것은, 경우에 따라

이 안식일 법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160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눅14:5)

물에 빠진 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 법보다 앞선다는 말씀

입니다.

설령 짐승일지라도 건져주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안식일 법보다 더

상위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 말입니다.

바로 공주는 모세의 생명을 인정받게 하기 위하여, 이 큰 법에 아이

를 걸고자 했습니다.

왕의 명령보다 더 큰 법이 아니고서는, 모세를 자신의 아들로 당당

하게 키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궁리 끝에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물에서 건진 자’라는 뜻

의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공주는 히브리 아이를 제 아들로 삼고도

오히려 칭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리에 충실한 공주’라 하여, 궁내와 궁 밖 백성들에게 존경까지 받

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친부모도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왜였습니까?

161

‘모세’라는 이름이, 왕의 명대로 아이를 하수에 던졌다는 것을 확실

하게 증명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아이의 친부모는 자신의 신분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아이에게 젖이나 먹이는 유모, 즉 친어미가 아닌 다른 여자라고 감

출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생모인 것을 숨기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말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이 주는 위력 때문이었습니다.

영상 보기 >>>

162

‘모세’, 그 이름의 기묘함

모세가 40년을 애굽 왕궁에 살면서도 레위의 최고급 율례를 익힐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장차 출애굽의 인도자로 택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계획이셨다.

모세가 ‘모세’라 불리어지고 있는 한, 또 다른 문제도 따랐습니다.

제아무리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살고 있더라도, 달리 말해서 애굽의

왕자로 오래오래 살고 싶더라도, ‘모세’라 불리어지는 한은 애굽의

왕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로서는 결코 애굽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그 이름에는 ‘나는 본래 히브리 출신’, 『본래 히브리인』이라는 딱

지가 붙어있어, 아무리 세월이 지나더라도 누구나 이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이 애굽의 왕위를 계승하는 데는 큰 약점이 될 수

있었지만, 반면 이스라엘 본가를 왕래하는 데는 오히려 당연하고 자

연스러운 강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163

법적으로는 애굽 공주의 아들이었을지라도, 기본적으로는 히브리인

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이 확실한 아이를 히브리 본가에 보내주지 않는다면, 그것

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모세는 드러내놓고 보라는 듯이 부모 형제를 자유롭게 찾았을 것이

며, 히브리인들과도 자연스럽게 교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모세’, 얼마나 기묘한 이름입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본가를 내왕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그를 부르

실 때에, 자기에게 아론이라는 형과 미리암이라는 누이가 있다는 사

실을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갓난아기 때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못했더라면 자기 집, 자기 형제

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형 아론은 하수에 던지라는 왕명이 내려지기 전에 태어났기로,

살아 생존할 수 있었던 남자 형제였습니다.

만일 모세가 젖먹이 때 헤어져 40년 동안 가족들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출4:14) 말씀하

셨을 리가 없습니다.

164

모세가 형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다면, “있지 아니하뇨”라는 말투 대

신에, “네게는 아론이라는 형이 있는데 그는 말을 잘 하는 자라. 그

러니 너는 그를 찾아가 도움을 받아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미 자기에게 말 잘하는 형 아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으며, 하나님께서도 모세가 이를 알고 있음을 인지하고 계셨습니

다.

또 하나,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살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의 최고

급 율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히11:28a)

레위의 고유직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이스라엘의 고급 율례들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모세의 그

배경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그럴 수 있었던 환경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충분히 조성되

어있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소개된 모세의 부친과 모친이 어떤 이들인지를 보면,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65

모세의 부모처럼 성경에다 신분을 정확하게 기록해놓은 부모는, 흔

하지 않습니다.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출2:1~2a)

‘레위 족속인 한 남자가 같은 레위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레위

인 남자와 여자』가 혼인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해놓았습니

다.

축약되고 축약된 성경에 이만한 분량의 소개를 굳이 해놓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 말입니다.

이는 모세의 부모가 이스라엘의 최고 제사장 지위인 레위 지파였음

을 알리려는 의도에서,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

까?

모세의 부모는 제사장족으로 대단한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라는 이름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레위 부모의 집을 안방

드나들 듯 하는 아들에게, 그의 부모는 만날 때마다 레위의 고급 율

례와 법도를 전심전력으로 전수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들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왜 안했겠습니까?

준수함과 아름다움이 남달랐던 아들, 바로 왕궁에서 세상의 좋은 학

문을 배울 수 있었고, 아울러 부모에게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배

166

운 점 등등, 아들의 특별한 배경에 대하여 레위 제사장의 신앙으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로, 모세를 세우

시려는 것이 아닐까’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마지못해 애굽에서 쫓겨 미디안으로 도망간 모세’

정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히브리서는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망가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었다고 해

석했습니다.

비록 도망은 가지만, 쫓기는 두려움보다는 믿음으로 꽉차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야곱이 마지못해 외삼촌네로 도망가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있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모세의 도망과 출애굽이 말하는 도망, 어느 것

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까?

167

모세에게 미리부터 주어진 믿음이나 경험들은,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터득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완전 다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모세가 바로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또한

그들과 안면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들이 발생했겠습니까?

나이 80이 되어 바로 왕을 찾아갔을 때, 어찌 왕궁에 들어갈 수 있었

겠습니까?

애굽의 실세들과 협상이 가능하기나 했겠느냐 그 말입니다.

모세가 모세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레위 플러스 레위’에서 뽑아내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영상 보기 >>>

168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출애굽기의 모세만 보고서는, 애굽 공주의 아들로 살다가 사건을 저

질러 어쩔 수 없이 도망간 신세, 그 정도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기록으로, 그를 다시 보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

다.

히브리서는 더 핵심적이고, 더 믿음적인 수준이었으니 말입니다.

히브리서와 출애굽기를 합하여 헤아려 볼진대, 모세가 레위 부부에

게서 태어난 것을 시작으로, 바로 공주의 아들이 되고, 청소년시절

이미 바로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동시에 배울 수 있었던 것을 알았

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히브리 백성임을 한시도 잊지 못했던 그

는, 왕자로서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동족과 고난 받는 길을 택했습니

다.

이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믿었으니, 모든 것들은 결코 저절로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려볼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도 바로 공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이미 모

세에 대한 계획과 세우고 하나하나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169

오, 주여!

우리의 삶도 하나님 뜻 안에 있는 줄로 아오니, 우리도 모세처럼 인

도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아멘.

170

장 11

171

제 XI 편

“모세로 아론에 하나님같이”

본 문 : 출애굽기 제 4 장 제 15 ~ 16 절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모세와 아론 관계

모세의 말씀지식과 아론의 말씀지혜, 이 두 은사가 합력해 사역한다 해도,

필수조건 하나가 뒷받침해주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같이’ 될 수가 없다.

전편에서 아론과 모세는 형제간으로서, 비록 모세가 젖먹이 때부터

바로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살았더라도, 저희 형제끼리는 그동안

수시로 만나 얼마만큼은 서로 알고 지냈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형제라도 모르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실 적

에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출4:14)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

다.

또한 아론에게도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출4:27) 하시지 않고,

“내가 모세라 이름 하는 자를 광야로 보낼 것이니, 너는 거기 나가서

동생인지 아닌지 확인해서 맞으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 형제는 살기는 따로 살았지만, 벌써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에 기초하여, “너는 그(형 아론)에게 하나님 같이 되

리라”(출4:16b)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172

실제로 형제간이 확실하며, 서로가 서로를 알 만큼 알고 있는데, 어

찌하여 모세더러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하셨을까요?

혹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하여,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기에(민12:8)

하신 말씀일까요?

아론에게 모세를 하나님같이 잘 대해 주라고 하신 말씀일까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뜻은, 둘이 사역함에 있

어서 모세의 역할이 하나님 하시듯이, 『모세의 역할이 하나님 하시

듯이』하라는 것입니다. (출4:15~16)

모세는 사람에게 직접 말할 것이 아니라 전할 말, 전할 뜻을 아론에

게 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스스로 직접 하시지 않고, 당신의 천사나 선지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말씀을 받은 천사나 선지자는 백성들 앞에 나가서 외쳤습니

다.

모세나 아론도 그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173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시스템으로 사역하라고 하셨을까요?

원래 모세는 말이 어눌한 자였습니다.

사명을 받은 후에도 여전했습니다. (4:10)

그러기 때문에 대중을 상대로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사정을 들으신 여호와께서는,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

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14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풀어보겠습니다.

“모세야, 너도 네 형이 말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

므로 너는 내가 준 말을 아론에게 주어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하라. 그

가 너를 대신하여 말 할 것이니,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15~16절)

모세의 성품과는 달리 아론은, 눈치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잘 헤

아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헤아린 바를 잘 표현하

는 달란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변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가 대중 앞에 서서 말만하면, 모두가 호

응하며 박수를 보내줄 정도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론은 기회만 있으면 백성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습니

다.

174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은사를 백분 살려, 모

세가 당신에게서 받은 말씀을 아론에게 전해주면, 지혜 있는 아론은

백성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혀가 아무리 뻣뻣하고 입이 둔했어도, 아론은 동생의 입모

양만 보고서도 무엇을 말하는지, 그 뜻을 능히 알아챌 수 있었습니

다.

남들은 모세의 어눌한 말뜻을 헤아리지 못해도, 그의 집안 식구들만

은 잘 이해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대로, 아론은 그 내용들을 다 알

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론은 받은 말씀을 자신의 입으로 외쳤습니다.

이러므로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했던 역할을, 아론이 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야말로 말씀의 지혜가 풍성한 자와 말씀의 지식이 풍족한 둘이 합

력하였으니, 얼마나 큰 선을 이루었겠습니까?

모세와 아론은 그런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나』여기에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조건이 있습니다.

175

모세와 아론의 주고받음이 ‘하나님같이’ 되려면, 필수적으로 따라야

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가 아론에게 ‘하나님같이’ 되고, 아론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천사나 선지자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반

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줄 때와 받을 때에 꼭 따라야 할 조건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 양쪽 모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나

님이 함께』계셔야 ‘하나님같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15절)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말씀을 주는 자의 입과, 받아 전하는 자의 귀와 입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실 경우에 한해서, ‘하나님같이’가 성립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에만 ‘하나님같이’ 말씀하게 되고, 그럴 때에만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말씀을 받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전하는 자와 함께 계셔서 가르

쳐 주면, 그것을 받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처럼 듣

게 된다는 뜻입니다.

176

진실로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심으로 그가 ‘하나님같이’ 되었다

하더라도, 아론이 백성들에게 전할 때에 저들로 하나님이 직접 하시

는 말씀으로 듣게 하기 위해서는, 아론에게도 모세와 동시에 하나님

이 역사하셔야만, ‘하나님같이’란 조건이 구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실 경우에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영상 보기 >>>

177

표적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증거 하는 자에게 표적과 능력이 따르면 그를 ‘하나님같이’ 믿게 되

며, 그가 전하는 말씀도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모세가 ‘하나님같이’ 되었다 하더라

도, 듣는 자들이 아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

려면, 성령의 감동이『모세와 아론, 그리고 백성』모두에게 동시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같이’란 조건이 성립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

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 하나님은,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4:17)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 이적과

능력을 ‘하나님같이’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

도해 내라”는 사명을 주셨을 때에, 모세는 망설였습니다.

백성들이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서, 자

기를 따라 애굽에서 나오겠느냐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178

그때 하나님이 처음으로 주신 이적들이, 두 가지, 지팡이 이적

(4:3~4)과 문둥병 손 이적(4:6~7)이었습니다.

즉 백성들이 모세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필요할 것이라며 주셨던

첫 이적들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같이’ 역사하신 그런 이적들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뱀이라고 하면 사단 마귀나, 그와 함께하는 존재들이 아니겠습니

까?

구약시대 때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지팡이 뱀을 다스리고 제어했었

으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께서 당신의 이름인 『예수 이름』의

능력과 권세로, 사단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했던 이적을, 신약 때에

는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셨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지팡이 뱀 이적이, 신약에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로 가늠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사역 현장으로 나갈 때에, 『예수의 이

름』으로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와 병 고치는 능력을 주어, 필요할

때마다 역사가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179

구약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난 이적들과, 이와 가늠한 신약

때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난 권능은, 공히 그 따르는 표적, 『따르는

표적』으로 ‘하나님같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으로 주셨던 그 표적과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같이’, 『하나님같이』되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표적으로 인하여, 말씀을 듣는

자들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즉 ‘하

나님같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에 이적을 베풀어 주셨다

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게 하기 위

하여, 하나님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본문15절)

구약의 ‘여호와 이름’과 같은 신약의 ‘예수 이름’을, 예수께서는 말씀

을 증거 할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너희에게, 내 이름이 가지고 있는 표적

과 능력을 주노니,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너희를 ‘하나님같이’ 믿게

180

하기 위함이라. 따르는 그 표적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말씀을 확실하

게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라.” (막16:20)

하나님을 증거 하는 자들에게 표적을 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을

‘하나님같이’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때나 신약 때나 변치 아니하시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같이’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아론은 백성들에게 그대

로 전했습니다.

아울러 주신바 이적도 백성들 앞에서 그대로 행했습니다. (출4:30)

이를 보고 들은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4:31)

따라서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같이’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하는 자 아론의 말로 듣기 보다는, 하나님이 저들에

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전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저들의 고난을 감찰

하셨다’ 함을 듣고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181

결국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31b),『경배했다』고 했습니다.

표적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같이’ 될 수 있

었습니다.

표적을 본 자들마다 심령이 동(動)하여 감화 감동함으로, 아론이 전

하는 말씀을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경배했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 시대나 사도들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

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막16:20)

여전히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식의 말씀 은사’는, 레위 아버지와 레위 어

머니, 그리고 형 아론에게 있었던 고급 은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

다.

모세의 이런 은사와 아론이 가지고 있던 말 잘하는 ‘지혜의 말씀 은

사’가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형제가 합하여

‘하나님같이’ 될 수 있었습니다.

182

모세와 아론이 각각 겸비한 은사 위에 여호와 신의 권능, 『하나님

이 함께』역사하심으로, 두 사람이 ‘하나님같이’가 되었다는 말입니

다.

가히 최고의 조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영상 보기 >>>

183

갈렙의 기도

오! 주여,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성령이 함께 하사,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

님께서 친히 주시는 말씀으로 듣게 하옵소서.

‘하나님같이’ 되는 환경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더하

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전할 때에 입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능력도 함께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말씀을 증거 할 때에 수시로 이적을 보여줄 수 있도록, 권능

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귀신이 떠나가 자유를 얻는 자가 생기고, 병들었던 자가 고침을 받

아 손뼉 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저들이 간증할 때에 ‘하나님같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아멘.

184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한국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 중 하나가 “은사”일 것입니다.

특히 예언과 신유,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자들의

행태는, 오늘의 교회를 많이 어지럽혔습니다.

은사의 맞고 틀림은 차제하고, 그런 은사를 가졌다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 같이 군림하였으며, 목사까지도 무시했습니다.

갈렙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모세와 아론의 역할”을 통해, 그것이 얼

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깊이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입이 둔하다는 모세를 대신하여 아론으로 그의 입이 되게 하셨던

배경에는, 그 둘이 한 부모에게서 나온 형제일 뿐 아니라, 어릴 때부

터 서로 왕래하여 잘 아는 사이였으며, 제사장 가문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각각의 소질에 따라 서로 합력하도록 주셨습니

다.

부족하다하여 사명을 감당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 연약한 것을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협력자를 주

셔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필수 조건이 있으니, 모세와

는 하나님이 대면하여 말씀하시지만, 아론은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

을 받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의 선을 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85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직접 가르치신 모세와는 물론이요, 듣고 전하

는 아론에게도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아론으로부터 말씀을 받는 회중에게도 성령으로 함께 하시니,

비로소 말씀에 능력과 효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증하기 위하여 기적까지 베푸셨습

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은사나 직분은, 개인의 자랑이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칫 오해했다가는 미리암처럼 문둥병자가 되며, 아론처럼 금송아

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갈렙 목사님은 이시대의 교회 문제와 신앙의 무분별한 것들을, 설교

를 통하여 그 진의를 가려주시며 또 고쳐주십니다.

186

장 12

187

제 XⅡ편

“홍해를 건넌 자와 빠져죽은 자”

본 문 : 출애굽기 제 11 장 제 29 ~ 30 절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

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

이스라엘은 홍해를 가르고 건너갔으나, 바로 뒤따랐던 애굽은 바다 속에 빠

져 죽었다. 같은 시간, 같은 환경조건이었음에도 죽기도 살기도 했다.

본문 29절을 중심으로, 홍해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하여 말씀드리겠

습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

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일을 두고 ‘믿음으로’, 『믿

음으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홍해를 건널 때의 믿음이란 것은, 무엇을 어떻게

믿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믿었던 하나님의 말씀이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

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

라”(출14:16)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백성들이 들었을 때는, 모세의 지팡이가 아직 들리지 않

았을 무렵이었으며, 바다가 갈라지기도 전이었습니다.

188

그럼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홍해를 향하여

나갔습니다. (15절b)

바다에 이르매 비로소 모세는 지팡이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뒤쫓아 온 애굽의 마병들은, 이미 갈라진 바다와 그 가

운데를 육지같이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면서 애굽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다가 육지 된 홍해를 지금 이스라엘이 건너고 있는데, 우리인들

못 건널 것이 뭐 있겠는가? 설령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바

다를 갈라놓았을지라도, 이미 갈라져 버린 물이 설마 금방 다시 합

쳐지겠는가? 우리가 통과하기 전까지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공

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던데, 그런 하나님이 어찌 이스라엘에게만

역사하랴?’

결국 애굽 마병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히11:29b),『시험하다

가』 바다에 빠져죽었습니다.

홍해 사건으로 한쪽은 죽었고, 다른 한 쪽은 살았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189

그 믿음으로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에 반하여 애굽은 하나님 말씀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저렇게, 이럴까 저럴까 시험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

었습니다.

그 차이 때문에 애굽은 죽었고, 이스라엘은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 맞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 내게 친히 하시는 말씀, 『지금

내게 친히 하시는 말씀』이라야, 그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내게 이루어지는 내 말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히4:12a)

예컨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출14:16b)고 하신 말씀을, 오늘

날 우리가 보고 들었다고 해서, 그 말씀이 지금 내게 친히 하시는 하

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까?

‘아멘, 믿습니다.’ 했다고 해서, 그 말씀이 지금 내게 운동함으로 그

때처럼 바다 가운데 육지를 내어주시겠습니까?

신약에서 사건 하나를 더 소개해보겠습니다.

190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11:23b)고 하신 말

씀이나,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부르셨다

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았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나사로 집에 있었던 그 일이, ‘아멘’한 모든 집에 가

능하겠습니까?

이미 장사 지낸바 되어 썩어 냄새나던 시체가, 가족들의 ‘아멘’에 운

동함으로 생명이 생겨 무덤에서 걸어 나오겠습니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전에 이스라엘 민족과 나사로 가족에게 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내게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나와 내 주변에

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나 과거에 전파된 설교들이, 모두 사

문화(死文化) 되어버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니고말고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

다. (4:12)

지금도 『살아있는 말씀』이 확실합니다.

191

그때 그 민족 그 가족에게 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직접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자주, 그것도 더 많은 대상들에게 어디서나 말씀

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친히 내게 하시는 그 말씀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때맞추어 들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어

떻게 들을 수 있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사34:16)

성경은 세상의 수필이나 소설과는 다른 책입니다.

줄거리가 쭉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중요한 짝을 흩어

서 각기 다른 곳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까?

192

‘아무나 깨달아 고침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들을만한 자들을 위해서는, 흩어져 있는 짝들을 모아주십니

다.

짝을 맞추는 일은 오로지 여호와의 신,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

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령께서 짝을 맞추어 이어주심을 받

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만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말씀을 전하거나 들을 때에는, 성령에 의해서

짝 맞추어진 그대로를 듣고 전해야만 합니다.

우리 중에는 대중에게 직접 전하는 일에는 약하지만, 깨닫는 데에

는 강한 자들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같이’ 되는 자리에 있든지(출4:16), 아니면 아론처

럼 받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설교자의 자리에 있든지 간에,

어쨌든 하나님이 함께, 『하나님이 함께』하셔야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듣는 자 역시 같은 신에 감동되어야만,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

으로 듣게 될 것입니다.

193

“너(모세)는 그(아론)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

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출4:15)

말씀을 주는 입과 받아 전하는 입이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될 때에

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같은 신에 같이 감동 되

어야만’ 『같은 신에 같이 감동되어야만』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

고, 백성들은 그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주 앞에 나아가 말씀을 상고하

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영상 보기 >>>

194

지금, 친히, 내게, 하신 말씀이라야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고 해서 그 말씀이,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

다.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

거늘” (요10:35)

하나님의 말씀에는 운동력과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성령에 감동되

어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신”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았다고 해서 다 ‘신’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이 함께하는 말씀을 받은 경우에만, 하나님이 그의 안에서 생명하

시고 운동하여 받은 바를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칠라치면, 심지어

마귀도 그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습니까?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끌고 올라가, “기록되었으되”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댔습니다.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시91:12)

195

마귀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면서, 예수님더러 성전 꼭대

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마귀가 인용했던 그 말은,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이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이 ‘지금, 친히’,

『지금, 친히』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당시 마귀가 했던 말은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

귀가 인용한 말이었을 뿐입니다.

이에 예수님 마귀에게 뭐라 하셨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마4:7)

“지금 네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도 말라. 내가 만일 너의 제의에 따른다면, 그것은 애굽 병정들이 홍

해 앞에서 하나님이 내게도 건너게 해주실까 아니 하실까, 시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러시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입으로 (지금)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

라”(마4:4)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그대로 하셨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전에 하셨던 과거 완료형의 말씀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말씀’, 『현재 진행형의 말씀』으로 살겠다고 하셨

습니다.

196

하나님이 ‘지금 친히’ 하시는 말씀이라야, 따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성경에는 얼마

든지 많습니다.

시간 관계상 그중의 하나만 예로 들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스1:1a)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신으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받은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고, 증거 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와 함께하셨던 같은 신으로,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도

감동시키셨습니다.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여호와의 신으로) 감동시키시매” (스1:1b),

고래스가 감동되어,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스1:2)는 조서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조서를 듣고 있던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

들” 역시도,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아(스1:5) ‘아멘, 그리 하오리

다’가 되었습니다.

197

이후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데 힘을

보탰습니다.

은그릇과 황금과 물건과 짐승과 보물들을 즐거이 내놓았습니다.

(스1:6)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땅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 예레미야 ⟶ 고레스 ⟶ 여러 족속들, 이런 식

으로 전파되었다는 말입니다.

한 라인에 있던 모두에게 말씀이 이루어진 것은, 같은 하나님의 신

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라인에 얹혀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감동됨으로 작품, 곧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모두에게 같은 ‘여호와의 신’, 『여호와

의 신』이 역사하셨다는 그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1장 9절로 13절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며, 너희가 찾을 것이고, 너희에게 열릴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198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다음, 느닷없이 “구하는 자에게 성

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즉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다시금 강조하기 위하여,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주

며, 알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줄 아비가 있겠느냐”는 말씀까지 덧붙

이셨습니다. (눅11:13b)

뱀과 전갈이란, 사단과 그의 종속을 의미하는 짐승들입니다.

악한 아비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너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더 좋은 것』으로 얹어주시지 않

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성령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성령께서 역사하사, 구하고 찾는 것들을 이루

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구할 때에,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사 응답해주십니다.

199

예배를 드릴 때에도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우리의 드림이 흠향할 수

있는 향기가 되어 피어오르게 해주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어디서나 말입니다.

영상 보기 >>>

200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책 속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전하여 주는 자가 있고 전함을 받는 자가 있을 때에야 운동력이 있

고, 생명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의 말씀은, 사모하는 자, 구하는 자, 두드리는 자가 소유할 수 있으

며, 찾을 수 있고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감화 감동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오늘날 내게 친히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듣고 아멘하게 하옵

소서.

그리 할 때에 생명 하옵소서.

운동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201

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듣곤 합니

다.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며, 아무데나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믿음은 말씀에 의지하는 것이라 여기며,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그 결과에 불만을 가지며 하나님을 의심하기

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정비결이나 주역처럼 여기는 행위입니

다.

그런 문제에 대해 갈렙 목사님은 지금 분명하게 답을 주십니다.

홍해를 건너간 이스라엘과 빠져죽은 애굽 군사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기적) 속에서 상반된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홍해를

건널 수 있었지만, 애굽 군사는 이스라엘이 건너는 ‘현실을 보고’ 건

너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지라, 살았고 운동

력 있는 생명을 가졌습니다만, 지금 내게 성령으로 직접 임재하시

고, 내가 성령으로 감화 감동을 받을 때만, 그 효력이 발생합니다.

성경은 아무나 깨닫지 못하도록, 여러 곳에 감추거나 짝을 만들어

놓아 성령으로 온전히 해석되고 감동될 때에만, 비로소 살아 역사하

는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마귀도, 이단도, 불신자도 인용합니다.

202

허나 그들이 사용하는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다 한 성령으로 감동감화 될 때, 살아

서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 없이는 운동력도 생명력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이유입니다.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실망하는 모순된 신앙 가지고는, 하나님

을 만날 수 없습니다.

갈렙 목사님은 우리가 진실로 알아야할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

도록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