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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 도서관, 소설 속에 빠져들다 도서관, 고요한 기적의 장소 내가 기억하는 도서관은, 맞은편 15도 각도에 앉아 있던 남학생과 눈을 마주친 어느 대학의 도서관이다. 내가 도서관을 회상하는 방식은, 그 15도에 있다. 고개를 들어 15도를 돌아보면 그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때 그 도서관, 책상 위에 있던 그 취업서적들은 무의미하다. 취업준비와 대학원 준비를 함께 하느라 전기가 바닥에 배선된 듯 불쾌하게 아팠던 엉덩이의 무게감 또한 제법 생생하게,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살짝 엉덩이가 아파올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그를 바라보던 그 15도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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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도서관, 고요한 기적의 장소 - nl.go.kr · PDF file0 2 5 그 도서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매일매일 그 의 출석과 퇴실을 체크하던 어느 날,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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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소설 속에 빠져들다

도서관,

고요한

기적의 장소

내가 기억하는 도서관은,

맞은편 15도 각도에 앉아 있던 남학생과

눈을 마주친 어느 대학의 도서관이다.

내가 도서관을 회상하는 방식은, 그 15도에 있다.

고개를 들어 15도를 돌아보면 그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때 그 도서관,

책상 위에 있던 그 취업서적들은 무의미하다.

취업준비와 대학원 준비를 함께 하느라

전기가 바닥에 배선된 듯 불쾌하게 아팠던

엉덩이의 무게감 또한 제법 생생하게,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살짝 엉덩이가 아파올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그를 바라보던

그 15도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Page 2: 도서관, 고요한 기적의 장소 - nl.go.kr · PDF file0 2 5 그 도서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매일매일 그 의 출석과 퇴실을 체크하던 어느 날,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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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서관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매일매일 그

의 출석과 퇴실을 체크하던 어느 날, 그의 곁에 앉기

시작했던 긴 생머리의 여학생으로 이어진다. 그 때문

에 걸핏하면 써 가던 내 상실의 흔적도 도서관 기억

에 등재되어 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으나,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조심스럽고 소중했기 때

문에, 그것을 잃은 내 무능을 향한 투서(投書)는 자

학과 자기연민의 동어반복으로만 이어졌다.

당연히 그 투서로는 부족했다. 상실감조차도 어

떤 의미로 재해석해야지만 인생의 손익분기점을 넘

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경제관념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던 그 취업준비생은, 상실의 의미를 찾기 위해

취업서적을 물리고 도서관 서가를 서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비책(秘策)을 찾기라도 하는 듯 책

을 뒤졌다. 그때의 독서는 당연히 정독이 아니었다.

아니, 글자를 읽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책의 행간에

멍한 눈길만 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드문

드문 어떤 단어가 들어왔을 것이고 나는 그 파편적으

로 주워 모은 단어들을 내 맘대로 배치하여 또 다른

책을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쓰지 않은 책, 내

가 읽지도 않은 책, 그것으로 혼자서 낸 상처는 조금

씩 아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러 간 도

서관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차라리 빽빽한 서가 사

이로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 도서관, 지금은 헤어진

연인과 큰 책상 밑에서 손장난을 쳤던 도서관, 그게

아니라면 유난히 자판기 커피가 맛있었던 도서관, 공

부를 하고 문을 나섰을 때 이마 끝에 스치던 바람으

로 도서관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도서관에서의 단잠은 어떤

가. 도서관은 공기조차 달라서 얼마나 우리를 나른한

잠으로 이끌었던가. 책장 사이에서 불면을 치유하는

아로마가 풍겨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도서관 책상에

엎드려 불편하지만 달콤한 잠을 자기도 했었다.

소설 속 도서관도 그러하다. 소설 속 도서관은 성실하게

책을 읽거나 우직하게 공부하는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차라

리 남독(濫讀)의 숲이며, 연애를 하거나 실연을 달래기 위해

숨는 장소이다. 아니면 책을 읽더라도 목적을 가지고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책이 좋아서 책과 사랑에 빠지는 장소

이다.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에서 책은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

는 치료제가 되며,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에는 책을 읽기 위

해 자발적 백수가 되는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윤성희의 <그 남자의 책 198쪽>에는 모든 책을

단 5분 만에 읽는 사람과 그 사람을 돕는 여자 사서가 등장한

다. 5분 만에 읽을 수 있는 것은 단지 198쪽만 읽기 때문인데,

그 198쪽만 읽음으로써 그 책은 온전히 읽는 사람의 것이 된

다. 198쪽의 전후를 자기 식대로 연결시키면서 의미화하기 때

문이다.

그 남자를 돕는 그녀는 도서관 사서이지만 책을 거의 읽

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책

편집자가 책을 쓰지 않는 것처럼, 큐레이터가 그림 그리는 일

을 애써 외면하는 것처럼, 도서관 사서는 책을 생각보다 많이

읽지 않는다. 그들이 각각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책을 많

이 읽는다면, 책 편집자는 편집 일을 할 수 없고, 큐레이터는

늘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힘겨울 것이며, 사서는 책을 정리

하여 서가에 얌전히 꽂기보다는 그것을 꺼내어 읽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니 사서가 책을 덜 읽는 것은 차라리 그들의 직업

의식이다.(오해가 없기를. 모든 사서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

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말

고는 특별한 점이 없다. 남들처럼 퇴근 후에 오래 샤워를 했기

때문에 수도요금이 오만 원 이상이 나왔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휴대폰을 정지시키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

에게 전화를 했고, 매달 말일에는 고시 공부를 하는 동생에게

오십 만 원을 온라인으로 송금했다. 의사로부터 신경성위염이

라는 진단을 받은 후로는 밥을 먹을 때 꼭 백 번씩 씹었다. 밥

을 먹고 삼십 분 후에는 약을 먹고, 그리고 특별히 보는 텔레

비전 드라마가 없는 날에는 열 시가 되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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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남자를 도왔을까. 단지 죽은 여자 친구가 무

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기 위해 그 도서관의 책을 다 찾아볼

것 같은 기색으로 절박했던 남자에게 마음이 기울었기 때문

이다. 그 남자가 무의미 속에서, 혹은 넘치는 의미더미 속에서

여자 친구와 자신만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무모해 보일 정도

의 간절함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남자의 여

자 친구가 그랬듯 그녀는 그 남자 이마에 난 상처에 시선이 가

고, 그 상처의 모양 때문에 남자를 ‘갈매기’로 호명한다. 그 남

자는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특별하지만, 특

별한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계속 특별할 수 있는 사람, 그래

서 모호한 사람. 198쪽에 자기 삶과 링크될 수 있는 문구가

있는 책이 특별한 책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 남자의 이마에

난 상처에서 자신의 환부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람과 책은

종종 유추된다. 좋은 사람/책, 사랑하는 사람/책, 부드러운 사

람/책, 단호한 사람/책, 시니컬한 사람/책 등. 그러나 분류되

지 않는, 그저 특별하고 모호한 사람/책인 경우가 있다. ‘그 남

자’도 그런 사람이며, ‘그 남자의 책’도 그러한 책이다.

그렇다면, 남자가 떠난 뒤에도 그녀는 왜 198쪽 찾는 일

을 멈추지 않았을까. 그것은 반복된 그녀의 일상에 그 198쪽

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

지 않는 것 같은 일상. 그러나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게 하

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묶어 두고 모험 따위는 뒤로 해야만 했

던 일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녀처럼 내가 읽던 책 198쪽을 편다. 이 책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저녁 기도는 그녀의 속도를 늦춰 주고 우

울증의 혼돈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아주 강력한 구

조지. 일어서서 저녁마다 같은 기도를 하는 거야. 누군가 우

리가 하느님께 할 말을 정해 놨고 우리는 그걸 말하는 거지.”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 중)

충분히 따분한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은 우리의

일상이기도 하다. 수도요금이나 전기요금을 한번씩

타박하고, 휴대폰 사용료를 간혹 재확인도 하면서,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하고, 동생의 용돈을 챙기기도

한다. 내일의 출근을 위해 저녁에 커피를 마실까 말까

를 두고 오래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놓고도 스트레스

성 위염이 걸리기도 한다. 그렇게 착하고 성실하게 살

지만 스스로 착하고 성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도서관 사서에게 남자는 자신의 여자 친구

가 주었다는 쪽지를 꺼내 보여준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ㅇㅇㅇ 책 198쪽을 봐. 너에게 전해 주고

싶은 내 마음이 거기에 있어.”책이란 글자 앞에 무슨

말이 적혀 있긴 한데 물에 번져서 알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남자에게 묻는다. “여자 친구한테 다시 물어

보면 안 될까요?” 남자는 대답한다. “물어볼 수가 없

어요. 죽었거든요.”

그로부터 도서관은 보물찾기의 숲이 된다. 어

느 책의 198쪽일까. 어떤 책 198쪽에는 남자의 여

자 친구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어떤 책에는 예전 여

자 친구가 살았을 적 두 사람의 습관이 적혀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책에는 남자의 이마에 난 상처를 만지

던 여자 친구의 손가락을 떠올리게 하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남자만 198쪽에서 여자 친구의 흔적을

더듬었던 것이 아니다. 그녀 또한 ‘삶은 감자를 으깨

어’라는 문구를 보면 “누나! 이 손을 으깨 버리고 싶

어.”라고 말하던 동생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 많은

책 198쪽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198쪽 너머에서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만들어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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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가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힘들었을 때

가 있었다. 나도 정말 저녁마다 같은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할 줄 모르는 나는 단 한 마디만 계속 반복했

다. “누군가 하느님께 할 말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

라 “하느님이 내가 할 말을 정해 놓은 것” 같았다. 그

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고요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었다.

고요한 기적이었다. <그 남자의 책 198쪽>의 그

녀에게도 변화가 일어난다. 예컨대, 밥맛이 좋아져서

살이 자꾸 불어났고, 바지를 한 치수 늘려 입은 것,

위염은 깨끗이 나았고 대신 식도염에 걸린 것 등.

그렇다, 별일이 아니다.

고요한 기적이란

계속 만들어 가는 것이지,

번쩍 하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198쪽이 있는 책이 존재하고,

그 책들을 도서관에서 뽑아서 읽고,

그것을 자기 삶의 어떤 부분에

연결시키는 일이 지속된다면,

고요한 기적은 우리 삶에

드문드문 일어나 줄 것이다.

글. 한귀은 경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