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tongil.snu.ac.kr/pdf/090910/01 박찬승-해방이후...탈식민, 해방과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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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담론” ················································································ 1 박명림 (연세대학교) 한국의 국가건설과 국민형성의 역사적 이론적 고찰: 거시역사적 해석과 미시분석적 접근의 결합을 중심으로” ··················································· 23 김성보 (연세대학교, 한국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 형성과 민족 정체성” ······················································· 45 김귀옥 (한성대 교양학부, 사회학) 월남민, 소수자, 그리고 민족정체성” ·················································································· 55 윤건차 (카나가와대) 재일과 민족” ······················································································································· 71 박광성 (중앙민족대학교, 중국 북경) 초국적인 인구이동과 중국조선족의 글로벌 네트워크” ······················································· 85 정준영 (방송통신대) 스포츠와 민족정체성: 월드컵의 사회사” ············································································ 93 박준규 (인류학박사, 전남대) 금강산관광을 통한 민족경계 넘나들기” ············································································· 95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남과 북의 건축문화와 민족정체성 - 전통건축과 민족건축을 중심으로 -” ······················· 127 박종일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민족주의 담론과 내부배제(exclusion from inside)’의 논리: 재외동포법논쟁과 지역주의논쟁의 재해석“ ··································································· 147 이철우 (연세대)이호택 (난민지원단체 피난처 대표) “ ‘韓人’의 분류, 경계 획정 및 소속 판정의 정치와 행정” ················································ 167 이동기 (서울대 서양사학과 강사) 독일 분단과 통일과정에서의 탈민족담론과 정치” ·························································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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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 례■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 1

    박명림 (연세대학교)

    “한국의 국가건설과 국민형성의 역사적 이론적 고찰:

    거시역사적 해석과 미시분석적 접근의 결합을 중심으로” ··················································· 23

    김성보 (연세대학교, 한국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 형성과 민족 정체성” ······················································· 45

    김귀옥 (한성대 교양학부, 사회학)

    “월남민, 소수자, 그리고 민족정체성” ·················································································· 55

    윤건차 (카나가와대)

    “재일과 민족” ······················································································································· 71

    박광성 (중앙민족대학교, 중국 북경)

    “초국적인 인구이동과 중국조선족의 글로벌 네트워크” ······················································· 85

    정준영 (방송통신대)

    “스포츠와 민족정체성: 월드컵의 사회사” ············································································ 93

    박준규 (인류학박사, 전남대)

    “금강산관광을 통한 민족경계 넘나들기” ············································································· 95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남과 북의 건축문화와 민족정체성 - 전통건축과 민족건축을 중심으로 -” ······················· 127

    박종일 (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민족주의 담론과 ‘내부배제(exclusion from inside)’의 논리:

    ‘재외동포법’ 논쟁과 ‘지역주의’논쟁의 재해석“ ··································································· 147

    이철우 (연세대)⋅이호택 (난민지원단체 피난처 대표)

    “ ‘韓人’의 분류, 경계 획정 및 소속 판정의 정치와 행정” ················································ 167

    이동기 (서울대 서양사학과 강사)

    “독일 분단과 통일과정에서의 ‘탈민족’ 담론과 정치” ························································· 207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1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1. 머리말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민족’문제, ‘민족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탈

    민족주의론, 동아시아공동체론, 대한민국 애국주의론 등은 그러한 논쟁을 이끌고 있는 담론들이

    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의 배경에는 국제적으로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 동아시아

    에서의 중국의 부상, 한중일 삼국간의 역사 및 영토 분쟁, 남북한 관계 및 북미관계의 급격한

    변동 등이 있고, 국내적으로는 외국인 100만 시대의 도래, 정치적 민주화의 정착과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과제, 사회적 양극화와 갈등의 해소 등이 있다.

    이 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와 같은 논쟁구도의 뿌리가 된다고 할 수 있는 해방 직후의

    민족, 민족주의 담론을 살펴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직후 ‘민족’을 둘러

    싼 담론은 일제에 의해 해체될 뻔하였던 ‘민족’을 다시 복원한다는 의미가 컸다. 그러나 ‘민족’

    담론은 이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분단의 위기가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에 ‘단일민족론’

    이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담론은 이후 최근까지 남한 사회의 민족담론의 당연한 전제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민족’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한편

    새로운 국가를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새로운 민족주의론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극우파, 중도우파, 중도좌파의 정치인들은 각기 민족주의에 자신들의 정치사상을 접목하여 새로

    운 민족주의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제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해방 직후의 민족 담론, 민족주의 담론을 차례로 살핌으로써, 오늘

    의 민족주의 논쟁에서 참고가 될 만한 부분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2. 해방과 ‘민족’ 담론의 복원

    1) 해방 이후 ‘단일민족’ 담론의 등장

    최근 한 사회학자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에쓰닉 내셔널리즘’으로 표현했다.1) 즉 혈연에 바탕을

    1) 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2009, 창비

  • 2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둔 종족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단일민족’설을

    들었다. ‘단일민족’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을까.

    식민지시기에 한국민족이 ‘단일민족’이라고 표현한 경우는 아주 드물게 보이는 편이다. 예를

    들어 보면, 이광수는 「조선민족론」이라는 글에서 “조선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

    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

    라고 말하였다.2) 또 중국 관내에서 1937년 민족진선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본래 우리 민족은

    순수한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진선을 결성하기에는 남보다 용이할 것이다”는 대목이 나온

    다.3) 그밖에는 ‘단일민족’이라는 표현을 아직 찾지 못하였다.

    물론 한말에 처음 ‘민족’이란 용어가 들어온 직후부터 혈통에 대한 의식이 강한 것은 사실이

    었다.4)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의 한 논설은 “자기 집 혈통 중에 다른 인종이 들어옴을 허락하

    지 아니함이 가하니 인종의 분간을 먼저 없어지게 하면 애국심이나 독립심이 어디서 나리오”라

    고 할 정도로 한국민족은 단일한 혈통을 유지해왔다는 의식이 강하였다.5) 어떤 이들은 ‘2천만

    민족은 동일한 단군의 자손’(二千萬民族은 同一檀君子孫)이라 말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황성

    신문은 “오호라 우리 대한의 삼천리강산은 모두 백두의 지맥이요 이천만 민족은 동일한 단군자

    손이니 그 혈맥의 연락과 聲氣의 밀접함과 痛癢의 상관이 사생영욕과 이해화복에서 어찌 다름

    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6)

    이와 같은 주장들은 한국민족은 ‘단일한 민족’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혈통을 기초로 한 단일민족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민족은 다종족으로 구성되었다

    는 주장도 있었다. 단재 신채호는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東國 民族

    을 대략 6種으로 分하니 一曰 鮮卑族, 二曰 夫餘族, 三曰 支那族, 四曰 靺鞨族, 五曰 女眞族,

    六曰 土族”이라 하였다. 그는 이 가운데 “부여족은 즉 我 神聖 種族 檀君子孫이 是也라, 四千

    載 東土의 主人翁이 된 者요”라고 덧붙이고 있다. 즉 “6種 중에 형질상, 정신상으로, 타 5종을

    정복하며 타 5종을 흡수하여, 東國 民族 世位에 據한 자는 실로 부여족 1種에 불과하니, 蓋 4

    千載 동국역사는 부여족 성쇠소장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7)

    또 1910년대 박은식은 「몽배금태조」에서 “조선족과 만주족은 모두 단군대황조의 자손으로 옛

    날에는 남북을 할거하여 서로 경쟁도 있고, 서로 교통도 있다가 필경은 통일이 되지 못하고 분

    리가 되어 두만강과 압록강이 하늘이 준 경계가 되어 양쪽 땅 인민들이 감히 이를 넘지 못하고

    이에 섞여 살지 못한 지 천여 년이라. 이에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가 불통하여 막연히 서로를

    전혀 다른 異族처럼 보게 되었다”고 하여, 조선족과 만주족은 모두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

    하고 있다.8)

    2) �이광수전집� 17, 삼중당, 1962, 329~330쪽 (이 글은 �동광총서� 1,2권(1933년 6,7월)에 실린 것임)

    3) 필자미상, 「民族陳線의 第一段階」 �한민�, 1937.6.30 (민국19년 6월 30일)

    4) 한말에 ‘민족’이란 용어가 들어오기 전에는 ‘동포’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고,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族

    類’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박찬승, 「한국에서의 ‘민족’ 개념의 형성」 �개념과 소통�

    창간호, 한림대 한림과학원, 2008.9. 를 참조할 것.

    5)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10일 논설 「내외국인의 통혼을 금할 일」

    6) �황성신문� 1908년(융희 2년) 3월 13일 「凡今之人은 莫如兄弟」

    7) 단재신채호전집간행위원회,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 473~475쪽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3

    1920년대 동아일보는 또 「세계개조의 벽두를 당하야 조선의 민족운동을 논하노라」라는 사설에

    서 ‘민족’에 대해 “민족은 역사적 산물이라. 역사의 공통적 생명 곧 국민적 고락을 한가지로 맛

    본 경험과 국민적 운명을 한가지로 개척한 사실이 없으면 도저히 민족적 관념을 生하지 못하나

    니 이 없이 어찌 언어와 습관과 감정과 예의와 사상과 애착 등의 공통연쇄가 有할 수 있으리오.

    이는 곧 민족을 형성하는 요소로다”라고 하여 민족을 역사적 경험을 같이한 공동체로서 인식하

    였다.9) 그런데 이 글은 또 “민족은 역사적 산물인 고로 혈통관계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

    니 천하의 많은 민족 중에 순연히 자기의 혈통만 고수하여 일점(一點)이나 타 민족의 혈(血)을

    혼(混)치 않은 자 능히 있지 못하도다. 오직 공통생활의 역사로 공통한 문화를 有한 자는 곧 한

    민족이라 칭할지니”라고 하여, 혈통보다 문화적 공통성을 민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았

    다.

    그런데 1933년 이광수는 앞서 본 것처럼 “조선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라고

    말하였다.10) 이와 같이 혈통을 강조하고, 단일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1930년대 일본에

    서의 ‘단일민족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1910년 이래 혼합민

    족설과 단일민족설이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11) 이광수는 일본 민족과는 달리 한국 민족은

    의심의 여지없는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단일민족론은 1930

    년대 중반 미나미 지로 총독이 부임하여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일본인과 조선인간의 혼인을 장

    려하면서 불온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인=단일민족론은 국내에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단일민족 담론을 처음 꺼낸 것은 안재홍으로 여겨진다. 안재홍도 1930년대에는 ‘민

    족’이란 “그 문화와 전통과 취미와 俗尙과 정치와 경제상의 핍박한 공통적 이해 따위 - 공동한

    자연적 테(紐帶)의 안에 일정한 특수 생활경향을 형성한 집단”이라고 하여, 민족을 주로 역사문

    화적 공동체로 이해하였다.12) 그런데 1945년 9월에 발표한「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에서 그

    는 민족 성립의 요소로서 1)동일혈연체, 2) 일정한 공간에서의 협동적 생활의 영위, 3) 운명공동

    체로서의 생활협동체 등을 들었다. 그는 우리 민족은 주변의 여러 민족과 혼혈이 되었지만 오늘

    날에는 그 형적을 모를 만큼 순수한 혈연을 갖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한반

    도에서 일진일퇴하면서 그 지역과 풍토를 기반으로 일정한 기질과 성능을 갖추고 연마하여 왔으

    며, 공동문화의 유대에서 결속되고 성립된 운명공동체라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그 혈액

    의 순수 단일한 점에서, 그 동일 지역인 5천년 조국을 지키어 온 점에서, 동일언어·동일문화로

    써 강고한 운명공동체로서 존속하는 점에서, 단연 독자적 생활협동체로서의 조국을 재건하여 국

    제협력의 일 분담자로 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13)

    8)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박은식전서� 중, 단국대출판부, 1975, 199쪽

    9) �동아일보� 1920년 4월 6일자 사설 「세계개조의 벽두를 당하야 조선의 민족운동을 논하노라」

    10) �이광수전집� 17, 삼중당, 1962, 329~330쪽 (이 글은 �동광총서� 1,2권(1933년 6,7월)에 실린 것임)

    11) 오구마 에이지 (조현설 옮김), �일본 단일민족신화의 기원�, 소명출판, 2003

    12) �조선일보� 1932년 12월 2일자 사설 「조선인의 처지에서」(�민세 안재홍선집� 1, 463쪽)

    13) 안재홍,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민세안재홍선집� 2, 16~19쪽

  • 4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안재홍 이후 단일민족론을 언급한 것은 중국에서 임정의 일원으로 막 귀국한 신익희였다. 신

    익희는 12월 7일 기자회견에서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도 우수한 단일민족이다. 우리 중에는 왜

    국과 같이 아이누도 에비스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분열이라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각자에게 다소 의견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14) 이

    어서 김구도 ‘단일민족론’을 언급하였다. 김구는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

    부 개선 환영대회에서 “지금 우리 국토와 인민이 해방된 이 기초 위에서, 우리의 독립 주권을

    창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급하고 중대한 임무이외다. 우리가 이 임무를 달성하자면 오직 3.1

    대혁명의 민주 단결 정신을 계속 발양해야 합니다. 남과 북의 동포가 단결해야 하고, 좌파와 우

    파가 단결해야 하고, 남녀노소가 다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 개개인의 혈관 속에는 다 같이

    단군 할아버지의 성스러운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극소수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한

    국 동포는 마치 한 사람같이 굳게 단결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15) 또 같은 달 23일 서울운

    동장에서 열린 순국선열추념대회에서 한 연설의 서두에서는 “시조 단군께서 다스림과 가르침으

    로 문명을 여신 뒤로 유구한 역사가 근 5천 년에 이르는 동안, 흥망의 역사가 어찌 한두 번이

    리오. 그러나 대개는 같은 민족이 이어받았고, 혹 외세의 침탈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지역에 그

    쳐, 단군의 후손이 한 갈래로 이어 온 계통은 언제나 뚜렷하였으니, 일제에게 당한 강제 병합은

    그야말로 역사에 보지 못한 초유의 비극이라”고 하여 ‘시조 단군’과 ‘단군의 후손’을 언급하였

    다.16) 이와 같은 김구, 신익희의 ‘단일민족론’은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가 발표되자 신탁통치에 반대를 표명한 정당, 단체

    들은 신탁 반대논리를 펴는 과정에서 ‘단일민족론’을 언급하였다. 예를 들어 천도교 청우당은

    “저들은 조선민족이 아직 자주독립할 만한 자격이 부족하다는 구실을 가진다면 우리는 조선민족

    은 세계서 보기 드문 純然한 단일민족으로서 유구 5천년 독립의 역사와 문화가 자존한다는 그

    점을 正視하라고 강조하는 일방, 조선민족의 통일이 아직까지 지연되기는 주로 미 소 양군의 남

    북분주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아울러 역설한다”고 밝혔다.17)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인민당도

    반탁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조선은 오랫동안 일제하에 눌려 있었으니 주체적 능력이 자

    력으로 독립수준에 達치 않는다는 원칙적 추측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 이것은 4천년동안 통일적

    단일민족의 국가로 독립하여 찬연한 문화를 발전시켜 온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전통과 능력을 불

    고한 바가 아닌가”라고 하였다.18) 당시 경성대학의 백남운 이하 500여 명의 교직원들도 신탁

    반대를 표명하는 성명서에서 “우리 조선민족은 신라로 통일된 지 于今 1,300년에 달한 단일민족

    이다. 우리의 언어 급 문화의 공동체를 예로부터 완성한 세계사적 민족이며 36년 이전까지는 이

    민족의 통치를 받은 일이 없는 완전한 독립민족이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19) 이러한 반탁

    성명서들에 나오는 ‘단일민족’론은 한국민족이 단일민족으로서 오랫동안 국가를 스스로 유지해왔

    14) �서울신문� 1945년 12월 8일 「신익희, 국기 친일파 국내분열 등에 관해 기자회견」

    15) 도진순 편, �백범어록�, 돌베개, 2007, 49쪽

    16) 같은 책, 52쪽

    17) �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 「천도교청우당, 반탁결의문을 발표」

    18) �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 「조선인민당, 반탁성명서 발표」

    19) �서울신문� 1945년 12월 31일 「경성대학교직원, 신탁반대를 결의하고 성명서 발표」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5

    다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1946년 들어 미소공위가 열렸지만, 6월 들어 미소공위는 장기휴회에 들어갔다. 이는 잠정적인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38도선이 민족 분단의 경계선으로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남쪽만이라도 먼저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라는 이른바

    ‘단독정부설’을 언급하였다. 이에 한국독립당의 엄항섭은 “단일민족으로서의 최선의 역량을 발휘

    하여 韓國의 모든 문제는 自決하도록 할 것이며, 동시에 美蘇共同委員會는 우리와 긴밀한 협조

    위에 신속히 진행되어 友邦聯合國의 韓國에 대한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기를 바란다. 요즘 항간

    에는 單獨政府 樹立說이 유포되고 있으나, 우리 黨으로서는 이에 찬성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단

    일민족이 분단정부를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20) 미국에 있던 김용중도 그해

    10월 유엔에 공개서한을 전달하면서 “단일민족인 조선인은 이러한 분할(미소의 38도선 양분)을

    감수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21)

    하지만 분단정부의 수립은 점차 현실화되었고, 1948년 봄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가 발표되었

    다. 이에 김구는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정부 수립을 막아보려는 최후의 노력을 하게 된다. 김구

    는 평양으로 떠나는 길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과거 미소 양국의 힘으로서 조선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상이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 앉아서 같은

    민족정신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나 하여 보자는 것이 진의이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깨

    끗이 조국통일독립에 바치려는 것이 금차 이북행을 결정한 목적”이라면서, “우리가 아무리 서로

    다른 이국 사람의 환경아래 있다 하더라도 5천년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다. 우리는 서로 같은

    피와 피를 통해서 서로 통사정하여 보는 길밖에 이제는 남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였다.22) 이처

    럼 김구, 김용중, 한독당의 ‘단일민족론’은 단일민족이 분단정부를 세울 수는 없다는 논리를 펴는

    가운데 나온 것이었다.

    한편 남쪽에서 분단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들도 단일민족론을 강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초대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은 취임 회견에서 남북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

    해 “우리는 단일민족이므로 이 강토가 양단되면 완전한 국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됨을 잘 알기

    때문에 국가민족을 위하여 적극 추진할 생각이다. 신생정부의 제일 중대한 과업은 강토 完整과

    민족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적극 추진 준비함에 있다”고 말하였다.23)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범석이 국토가 분단된 상황에서는 완전한 국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통령 이승만도 1948년 9월 30일 국회 첫 시정연설에서 “단군시조의 전통적인 역사와 단일

    민족으로서 찬란한 문화를 승계하여 온 우리 대한민국은 역대 순국선열의 끊임없는 가호와 세계

    민주주의 제 국가의 절대한 동정적 성원에 의하여 이제 바야흐로 국권을 회복하고 신생 자주독

    립, 민족적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

    20) �서울신문� 1946년 6월 5일 「남조선단정설에 관해 한독당 반대 담화 발표」

    21) �동아일보� 1946년 10월 25일 「朝鮮人은 單一民族 分割은 甘受 못한다 金龍中氏 UN에 公開狀傳達

    (워싱톤)」

    22) �경향신문� 1948년 4월 17일 「김구, 남북협상에 임하는 결의 표명」

    23) �서울신문� 1948년 8월 3일 「국무총리 이범석, 취임소감 피력」

  • 6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진 우리 민족은 전 세대를 통하여 동일한 혈통과 강토를 계승 보유하여 왔으며 공동한 문화와

    운명을 창조 擔荷하여온 우수한 단일민족”이라면서,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임을 강조하였다.24)

    한편 이승만과 안호상 등이 주장한 일민주의에서도 “원래 우리 민족은 피가 같고, 전통이 같

    고, 언어가 같고, 習俗이 같고, 생활방식이 같은 단일민족이다. 단일민족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통일된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만민평등의 사회생활을 영위하라는 一民主義는 전 민족이 같이

    나아가야 할 것이다”라 하여, 단일민족설을 강조하였다.2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 직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단일민족’ 담론은 민족의 분단 위

    기 앞에서 “단일민족은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리

    고 분단 정부 수립 이후에는 “단일민족이므로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단일민족 담론은 ‘민족’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

    어 손진태는 1948년에 낸 �조선민족사개론�의 서설에서 “조선사는 조선민족사이니, 우리는 유사

    이래로 동일한 血族이 동일한 지역에서(비록 삼국시대 말년에 영토의 北半과 그 주민을 離失하

    기는 하였지만) 동일한 문화를 가지고 공동한 운명 하에서 공동한 민족투쟁을 무수히 감행하면

    서 공동한 역사생활을 하여 왔고, 이민족의 혼혈은 극소수인 까닭이다”라고 말하였다.26) 그는

    민족의 특징으로 동일한 혈족,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 공동의 역사생활 등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강조한 것은 동일한 혈족이었다.

    이처럼 혈통을 강조하는 단일민족론은 이범석, 안호상의 경우에도 보인다. 이범석은 한 민족

    을 형성하는 요소는 혈통, 영역, 문화, 운명의 4가지라고 보고, 이들 요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민족을 형성, 발전시켜 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혈

    통이었다. 그는 혈통의 공통성을 민족 형성의 기본조건이라고 생각했고, 이 점에서 “우리 민족은

    자랑스러운 전형적인 단일민족”이라고 보았다. 그는 희귀한 단일혈통, 오랜 동일 영역 유지, 공

    통의 문화소유, 철저한 공동운명 등을 지녔다는 측면에서 한국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빈틈없이

    훌륭하게 형성된 민족이라고 생각하였다.27) ‘희귀한 단일혈통’을 강조하는 ‘단일민족’론이 등장한

    것이다.

    일민주의자 안호상은 일민주의의 뜻을 풀이하면서 이는 ‘한겨레’ 곧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

    겨레주의’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우리 민족이 동일혈통, 동일운명을 가진 민족임을 특히

    강조하였다. 여기서 동일 혈통, ‘한 핏줄’은 ‘일민’의 절대적 요소라고까지 그는 강조하였다. 안호

    상의 일민주의는 한국 민족주의 가운데 혈통을 가장 강조한 민족주의였으며, 이는 이후 한국 사

    회에 ‘단일 민족’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데 상당히 큰 역할을 하였다.28)

    하지만 해방 이후 모든 사람이 단일민족론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1959년에 나온 진단학회

    24) �시정월보� 창간호, 「1949년 01월 05일 李承晩대통령, 제1회 78차 국회본회의에서 시정방침 연설」

    3~8쪽

    25) �동아일보� 1949년 01월 27일 「大韓國民黨과 韓國民主黨, 民主國民黨으로 합당할 것을 결의하고 공

    동성명서 발표」

    26) 손진태, �조선민족사개론�, 1948, 3쪽

    27) 이범석, 「민족론」 �민족과 청년�, 백산서당, 1999, 30~31쪽

    28) 안호상, �일민주의의 본바탕�, 일민주의연구원,, 32쪽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7

    편 �한국사�의 「총설」의 의견은 달랐다. 이 글은 “현재 발달된 민족은 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

    도 결코 온전한 단일인종(협의)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역시 수개 이상의 다른 요

    소가 섞여 있다. 즉 한인(漢人)·몽고인·만주인·왜인(倭人) 기타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

    러나 그렇게 혼잡다기한 복합체는 아니다. 그래서 그 주된 기본적 요소는 언제다 우세(優勢)로

    자약(自若)하고 뚜렷하여 늘 지배적 지위에 있어 다른 요소를 융합하여 왔다”고 쓰고 있다. 한

    국 민족은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었지만, 그 가운데 주된 종족이 있다는 견해였다. 그리고 이 책

    은 그 주된 종족으로서 ‘예맥’족을 거론하였다.29) 이와 같은 ‘다종족 구성, 주종족 주도론’은 일

    찍이 한말에 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말한 바였다.

    2) 사회주의자들의 ‘자본주의 민족’론

    한편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위에서 살펴본 민족주의자들의 민족관과는 상당히 다른 ‘민족’

    개념을 갖고 있었다. 1948년에 나온 �사회과학대사전�의 ‘민족’에 대한 해설 부분을 보면, 다음

    과 같이 쓰고 있다.

    민족의 단초는 자본주의의 최초 단계와 동일하다. 여러 종족간의 상업적 상호관계는 민족

    의 통일운동을 환기한 것이다. 계급적 추진력인 근대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경제제도를 깨뜨

    리고, 봉건 제후의 모든 장벽을 없이하는 대신, 민족이란 이름으로서의 인간통일체를 만든

    것이 근대 자본주의사회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은 동시에 민족의 형성과정이었

    던 것이다. 띠라서 민족은 자본주의와 같이 발생하고 발전하며 소멸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30)

    즉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이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것이며, 자본주의의 소멸과 함께

    민족도 소멸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사전은 스탈린과 프로이드를 인용하면서, “자본주의

    적 사회와 민족이란 동일한 운명을 가진 특정한 계급의 인간집합체”라고 주장하였다.

    위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관은 이미 1930년대부터 나타난 것이었다. 1930년대 사회주

    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유기체적이고 영속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민족은 자본주의시대

    에 형성되었으며, 또 자본주의의 소멸과 함께 민족도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1)

    이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관은 해방 이후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회주의자였던 인

    정식도 1945년에 쓴 「‘민족’의 레닌주의적 개념」이라는 글에서 스탈린의 「민족과 식민지문제」라

    는 글을 인용하여, “민족이란 언어와 영토, 경제생활, 문화의 공통성에 표시되는 심리적 정신상

    태의 공통성에 의해서 결합된 인간의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동체”라고 하였다. 그는 스탈린을 인

    용하여 민족형성에 있어서는 언어, 영토, 경제생활, 문화의 어느 한 요소도 빠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즉 “이러

    한 모든 공통성과 모든 제 지표는 경제적 사회적 제 관계와 교통 등이 충분히 발전된 시대에

    29) 진단학회편, �한국사� 「총설」, 을유문화사, 1959, 7쪽

    30) �사회과학대사전�, 1948

    31) 황영, 「민족주의 지도원리의 비판」, �신계단� 6호, 1933.3. 7쪽

  • 8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있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봉건제도의 경제적 분산성을 파괴한 자본주의의 발전

    에 의해서 가능케 되었다. 민족은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범주일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어떤

    특정한 시대, 즉 생성하는 자본주의시대의 역사적 범주이다. 봉건주의의 掃淸과 자본주의의 발

    전의 과정으로 동시에 민족형성의 과정이다. 구라파에서는 사태가 이와 같다. 영국인, 불국인,

    독일인, 이태리인 등은 분산적 봉건제도를 극복한 자본주의의 승리의 前進期에 비로소 민족으로

    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식민지에서의 민족 형성도 근대 이후에 비로소 가능했다고

    보았다. 즉 “우리는 모든 식민지의 민족운동을 분석할 때에도 동일한 확증을 찾을 수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혁명적인 민족투쟁의 발전과 또 이 투쟁을 위한 여러 부족의 통일은 자본주의

    적 요소가 이러한 나라에도 침투함에 따라서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즉 식민지

    에서도 제국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부족이 통일되어 민족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자

    본주의의 침투와도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이다.32) 그러면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우는 어떠하였을

    까. 이에 대해서 인정식은 언급하지 않았다.

    위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관에 대해 안재홍은 1945년 9월에 발표한 「신민족주의와 신

    민주주의」에서 우선 민족과 민족주의는 그 유래가 매우 오랜 것으로, 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산

    물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33)

    3. 해방 이후 새로운 ‘민족주의’ 담론의 제기

    1)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론

    안재홍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라는 논설 집필에

    들어가 9월 22일 이를 탈고하였다. 이 글은 그의 ‘신민족주의’ 이론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민족주의 이론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는 1930년대의 민세주의를 발전시킨 것이

    었다고 할 수 있다.

    안재홍은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에서 우리 민족은 “그 혈액의 순수 단일한 점에서, 그 동

    일 지역인 5천년 조국을 지키어 온 점에서, 동일언어·동일문화로써 강고한 운명공동체로서 존

    속하는 점에서, 단연 독자적 생활협동체로서의 조국을 재건하여 국제협력의 일 분담자로 될 권

    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자존의 생활협동체로서의 주도 이념인 민족주의는

    거룩하다고 주장하고, 이 점이 바로 그가 신민족주의를 제창하고자 하는 이유라고 말하였다.34)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유물사관이 사회발전의 도정을 규정하

    는 하나의 準繩(法式)은 될 수 있지만, 오랜 시일 동안 풍토·역사 등 국제 관련 하에 구체적으

    로 鍊成되어온 과정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또 각 민족은 그 자

    32) 인정식, 「‘민족’의 레닌주의적 개념」 �혁신� 1, 1945.12 ( �인정식전집� 4, 11~15쪽)

    33) 안재홍,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민세안재홍선집� 2, 16-19쪽

    34) 안재홍,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민세안재홍선집� 2, 16~19쪽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9

    체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의 현재의 사태와 그 전도를 형성함에 있어

    서는 반드시 그 민족의 과거로부터 영향을 받게 마련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한편에서는 인류의

    역사가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각자의 민족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이

    세워야 할 나라의 국체와 정체도 우리 민족의 역사적 성격에 맞게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

    다. 한 인민에게 적정하고 타당한 법이란 그 인민의 과거 문화의 총화인 역사의 소산이라야 한

    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문화의 전통을 무시한 국제추수주의는 하나의 공식으로 추락

    할 뿐이라고 보았다. 그는 무조건 국제주의를 추수하는 것보다는 민족의 개성을 적정하게 발휘

    하여 전 국제협동의 분야에서 각각 독자의 이채를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다.35)

    그는 국경의 철폐나 민족의 해소는 미래의 전망으로서는 해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인공적으로

    국경이나 민족을 부인 말살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2차 대전의 과정에서 공산주

    의자들이 국가를 부인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는 이미 과거의 잔재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소

    련에서도 최근에는 여러 형태로 러시아적 요소가 강화되고 찬미되는 등 러시아적 민족의식의 고

    조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한국도 민족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독일이나 일본의 민족주의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독일 민족주의는 너무 주

    관적이고 배타 독선적이며 인위적으로, 즉 기획을 통하여 강대한 민족을 만들고 천하의 지배권

    을 탈취하려 한 데에서 결국 실패하였다고 보았다. 또 일본 민족주의 경우에도 독립자존에 머물

    지 않고 과대와 自大의 습성이 되어 정복적 침략적 의욕을 고무함을 국책·국풍으로 함으로써

    그 출발이 잘못되었으며, 결국 대륙경략과 세계 제패를 부르짖음으로써 복멸하게 되었다고 보았

    다.36) 여기서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밖으로 인류대동의 이념에 적응하고, 안으로 민족자존의

    의도”를 갖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7)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배타독선에 폐에 흐르

    는 완고한 국수주의적 경향에 빠지지 않도록 면밀히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38)

    그는 민족주의는 祖國 故土의 단일 혈연집단으로 엄숙히 존재하는 것이고, 국제적으로는 관계

    를 맺을 때에는 반드시 국제협동·인류대동을 추진하여 세계 일가를 자유의지로써 지향하는 것

    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우호적이고 국제주의적인 국민일지라도 하나의 강대국이 하

    나의 이민족을 포용하는 경우, 그것을 반드시 지배적이요 예속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말기 때

    문에 하나의 민족은 반드시 독립자주, 독립자활의 정치적 체제를 자력으로 보장받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변함없이 존귀하고 준엄한 현실 객관의 존재라고 보았다.39) 이를 통해 보면

    그는 민족주의는 인류 대동, 세계 일가를 지향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국가, 하나의 체제를 지향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30년대 민세주의에서 국제주의

    와 민족주의의 병존을 강조한 것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민족과 민족국가는

    인류가 생존하는 동안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35) 같은 글, 20-21쪽

    36) 같은 글, 22-28쪽

    37) 「국민당선언」 �민세안재홍선집� 2, 61쪽

    38) 「국민당 정강·정책해설」 �민세안재홍선집� 2, 76쪽

    39) 「역사와 과학과의 신민족주의」 �민세안재홍선집� 2, 242쪽

  • 10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해방 이후의 시점에서 볼 때 과거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주의가 침략주의로 흘렀다가 그것이 퇴

    폐화하고 패배하면서 다시 본원적인 형태의 민족주의로 환원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인류 생존의

    단계에서 민족주의는 당연히 源本的인 理念으로 지배적 지위가 부과되는 것”이라고 말하여, 민

    족주의는 인류가 생존하는 동안 근원적인 이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40)

    그러면 그가 말하는 신민족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그는 과거의 민족주의는 왕실·

    귀족, 지주·자본가, 군벌·종파 등이 富·權·智 등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노동을 면제받는

    이른바 지배와 피지배, 압박과 피압박, 착취와 피착취가 존재하는 계급분열 및 대립적인 독점지

    배계급 본위의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였기 때문에 이것을 俱全한 민족주의라고 보기는 어려웠

    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는 균등사회·공영국가를 지향, 완성하는 신민족주의, 즉 진정한 민주주

    의의 토대 위에 존립되는 전 민족 동일운명의 민족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

    는 국민당의 강령 안에 ‘國民皆勞와 大衆共生을 이념으로 신민주주의의 실현을 기함’이라는 조항

    을 넣었던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민족 내부의 공존공영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계급투쟁의 지

    양 청산을 주장하였다. 그는 신민족주의의 특색은 “폭력에 하소연하는 계급투쟁을 지양 청산시

    키며, 적색지배를 도입하는 공산모략을 방지 극복하고, 동포와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전 민족이

    협동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민족자주, 독립국가로서 민족문화를 앙양 심화하면서, 국제협조의 노

    선에 병행 쌍진”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였다.41)

    안재홍은 일제 지배 하에서 한국인은 전 민족이 계급을 막론하고 굴욕과 수탈의 대상이 되었

    다고 보고, 이제 또 全 민족적으로 초계급적으로 해방되었으므로 역시 계급을 뛰어넘어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계급독재는 분열된 여러 계급의 대립 투쟁을

    전제로 비로소 요청되는 것인데, 동일한 피예속·피착취의 운명에서 다함께 해방된 한국 사회에

    서는 자본주의적 계급독재가 현재 존재하지도 않고 앞으로 성립될 수도 없다고 보았다. 그는 또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가 남아 있고, 또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는 시점에서, 다

    시 민족 내부의 분열이 있다면 이는 민족사를 다시 불행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결론적으로 모든 진보적이요 반제국주의적인 지주(地主), 자본가, 농민, 노동자 등 모든 계

    층을 통합하여, 만민공생을 이념으로 하고, 계급독재를 지양(止揚)한 신 민주주의의 국가를 건설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의 신민족주의란 안으로는 민족 내 각 계층의 협동의 공동체를

    세우고, 밖으로는 국제협동의 분담자로서의 굳건한 민족국가를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42)

    국민개로, 만민공생의 이념은 ‘신민주주의’ 혹은 ‘다사리이념’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는데, 이것

    이 신민족주의의 중심 내용이었다. 안재홍의 이와 같은 계급투쟁 지양론, 만민공생론 등은 식민

    지 시기 그의 신간회 운동론, 즉 민족협동전선론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시에도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민족 내부의 계급투쟁보다는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민족협동전선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43)

    40)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민세안재홍선집� 2, 23쪽

    41) 「역사와 과학과의 신민족주의」 �민세안재홍선집� 2, 242쪽

    42)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민세안재홍선집� 2, 55~58쪽

    43) 이에 대해서는 박찬승, 「일제하 안재홍의 신간회운동론」 �한국근대국가형성과 민족문제�, 지식산업사,

    1986을 참조할 것.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11

    2) 김구의 자유주의적, 문화적 민족주의론

    해방 이후 귀국한 김구는 1947년 �백범일지�를 발간하면서 그 부록으로 「나의 소원」 이라는

    글을 덧붙였다. 김구는 이 글에서 자신의 민족관, 민족주의, 정치사상을 밝혔다. 주지하듯이 김

    구는 이 글에서 자신의 소원은 오로지 ‘대한독립’에 있다고 밝혔다. 즉 완전하게 자주 독립된 나

    라를 세우는 것이 70평생 자신이 가져온 유일한 소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좌우의

    대립에 대해서 “이른바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난 일시적인 풍파에 불

    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

    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나는 것이다”라고 말

    하였다.44) 이에서 보면 그는 민족을 혈통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러한 혈통에 기초한 민

    족은 영원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구는 우리 민족이 해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받지 아니하고 남에게 의뢰

    도 하지 않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며,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

    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적으로 지배하려

    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

    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

    을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45)

    이는 1910년대 박은식이 말한 ‘민족평등주의’의 사상, 3.1운동 당시 한용운이 말한 ‘민족자결주

    의’의 사상을 그대로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김구는 자신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

    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고 보았다. 즉 자유가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

    에서 온다고 말하였다. 그는 한 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한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고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고 설명하였다.46)

    물론 김구는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독

    재 가운데에서도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라고 보았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조선에서 행해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가운데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

    초로 한 것이어서 정치에서의 독재만이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

    도 규정하는 독재였다고 보았다. 그는 공산당이 말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고 보았다.47)

    그는 어느 한 사상이나 종교로써 국민을 속박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또 나라를 쇠퇴하

    44) 김구, 「나의 소원」 �백범일지� (이만열 옮김, 역민사, 1997), 365~366쪽

    45) 같은 책, 367쪽

    46) 같은 책, 368쪽

    47) 같은 책, 369쪽

  • 12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게 만드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가진 나라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가 탄

    생할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않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않는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

    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 들의 풍성한 경치

    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

    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48)

    위의 글에서 김구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 문화적 다원주의에 기초한 민족주의임을 알 수 있

    다. 김구는 독재를 배격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나라를 세울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민주주

    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지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

    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49) 그는 “나는 어떠

    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

    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라고 말하였다.50)

    위에서 본 것처럼 김구가 말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

    지만 그는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될 것을 사명으로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은 이기적 개인

    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

    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라고 말하였다.51) 즉 개

    인의 자유를 충분히 주장하되, 그 자유는 이기주의적인 자유가 아니라 남과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자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김구의 민족주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민족주의는 한말 이래 1945년 해방의 그날까지 한국의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전개해 온

    민족주의론의 가장 성숙한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3)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론

    백남운은 해방 직후에 낸 �조선민족의 진로�라는 책에서 “대체로 민족은 국가형성의 기초인

    만큼 국가 성립의 맹아 형태가 부족적 정치조직의 내부에서 배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전

    제로 한다면 국가적 자기형성의 경향과 의식을 가진 민족의 기원은 삼한 때부터로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 당시의 민족이 과연 근세적인 민족의식을 가졌는지

    48) 같은 책, 370쪽

    49) 같은 책, 371쪽

    50) 같은 책, 372쪽

    51) 같은 책, 374쪽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13

    는 의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조선민족의 인종학적 기원은 오래 되었다 할지라도 근대적 의

    미의 민족의식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민족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하지 못한 시대에는 민족

    주의의 원칙적 주관 요소가 결여된 만큼 객관적 요소가 구유(具有)되었다 할지라도 아직 민족주

    의는 육성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즉 “봉건기구가 붕괴되는 이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는 근세적 민족의식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민족주의도 육성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52)

    백남운은 개항 이후 일본, 청국과의 근대적 외교관계 수립, 서양문화의 유입 등의 상황에서

    외래자본주의의 공세에 대한 대외적 수세, 자주 독립의 의욕 등으로 말미암아 봉건적 신분제를

    철폐한 민족국가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가 고조되었다고 보았다. 즉 그는 소극적인 내

    적 민족주의가 1910년까지도 지도적인 이념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1910년 이후 일제의 압

    박 아래에서 민족주의는 그 이념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였다고 보았다.53)

    그는 민족주의란 “영토의 주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민족의 요구에 적응한 정부를 스스로 조직

    함으로써 민족국가를 완성하는 권리를 각 민족에게 인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독립된 주권

    국가로서의 민족국가를 완성하려는 것이 민족주의의 기본 속성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외적 민족주의’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 외적 민족주의는 1) 지배국가의 압박을 배제하고

    정치적으로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며, 2) 그 정치형태는 광무년간의 내적 민족주

    의와는 달라서 자유민주주의의 대표국가인 미국식의 정권형태를 취하려 하며, 3) 후진사회인 만

    큼, 주체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재현하려는 의욕이 사회해방의 노력보다 훨씬 농후하여, 계급대

    립의 관계를 민족통일의 개념으로 포섭하려 하며, 4) 전통적인 문화를 비판적으로 섭취하기보다

    는 그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려 하며, 사회문화의 창건을 기도하기보다는 국수적인 국민문

    화를 강화하려 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54)

    한편 그는 흔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로서 공산주의가 민족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의 완성자인 마르크스는 아일랜드 민

    족의 민족운동을 원조할 것을 강조한 바 있었고, 공산주의 이론의 정치적 성공자인 레닌은 약소

    민족의 민족운동자를 사회운동자의 맹우로서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을 주장하고 또 민족자결권을

    강조하였으며, 스탈인의 민족정책은 민족의 외교권과 군사권에까지도 자결권을 부여하였다고 지

    적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민족을 무시한다는 비난은 날조의 구실이 아니면 무식을 고백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만일 공산주의자의 부주의로 그러한 인상을 주었다면 공산주의자들이 반성

    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하였다.55)

    결론적으로 그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공통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연합’을 강조하고자 하였

    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문화정책면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전자가 국수문화

    또는 국민문화를 강조하는 데 대하여 공산주의는 사회문화를 제창하는 점이 다르다고 지적하였

    다. 하지만, 이것이 양자의 정치적 대립을 가져올 만큼 커다란 차이는 아니라고 보았다. 또 정

    52) 백남운,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 도서출판 범우, 2007, 43~44쪽

    53) 같은 책, 45쪽

    54) 같은 책, 46~47쪽

    55) 같은 책, 49쪽

  • 14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치형태에서 전자는 자유민주주의를, 후자는 프로민주주의를 지향하지만, 조선의 현 단계에서 어

    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연합성 민주정권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경제적 측면에서 전자는 자본주의적

    경제를 재현하여 ‘국민주의’로 나아가려 하고, 후자는 사회주의적 경제를 실현하여 계급대립을

    해소하고 명목적인 단일민족을 명실상부한 무계급의 단일민족으로 발전시켜 나가려 하는 데 있

    다고 보았다. 백남운은 당시 우리의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적 경제의 재현이나 공산주의적 경제의

    수립은 모두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 않아도 보았다. 그는 조선에 필요한 것은 ‘민주경제’를

    수립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연합 토의할 역사적 임무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로서는 ‘연합성 민주정권’의 수립이 역사적으로 요청되는 시기라고

    주장하였다.56) 백남운의 이와 같은 주장은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으로 흔히 말해지며,57) 중도좌

    파 민족주의론의 대표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4) 민족청년단의 민족지상·국가지상주의론

    해방 이후 일본의 파시즘은 물러갔다. 하지만 파시즘의 사상적 뿌리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해방과 독립이라는 상황 변화는 그간 민족운동에 참여해왔던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통일, 단결, 부국강병 등을 목표로 한 파시즘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하는 새로운 변

    수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국가지상’과 ‘민족지상’을 들고 나온 것은 민족청년단이었다. 민족

    청년단을 조직한 것은 1920년 청산리전투의 지도자로 참여해 이름을 날렸으며, 1940년대 초에

    는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으로서 활약했던 이범석이었다. 그는 1946년 6월 귀국하여 10월

    민족청년단을 창설하였다. 이범석은 해방 직후 좌우의 대립 속에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 위태

    롭게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민족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은 민족의 단결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민족의 단결은 민족과 조국에 이바지하려는 순정한 정열과 의지, 예지를 기초로 한 민

    족 주류의 조직 형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그는 민족주류의 형성을 위해

    청년단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난 날 독일이나 이태리, 터키가 부흥할 수 있었

    던 것은 오로지 그 나라 청년들의 결속된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청

    년의 궐기로써 우리의 자유와 독립의 터전을 닦자”는 생각에서 민족청년단을 만들었다.58)

    이범석은 민족청년단을 결성하면서 5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1) 民族至上·國家至上, 2)

    對內自立·對外共存, 3) 着眼遠大·着手卑近, 4) 非政治·非宗派·非軍事, 5)科學的·組織的

    運動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원칙이다. 그는 세계사적 현실

    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자기 민족, 자기 국가의 이익만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민족,

    모든 국가의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 자기 국가의 이익

    추구를 위해 다른 민족과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유린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현실에서

    56) 같은 책, 55~61쪽

    57) 이에 대해서는 방기중,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6을 참조할 것.

    58) 이범석, 「나와 청년운동」 �민족과 청년�, 백산서당, 1999, 82~83쪽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15

    “오직 건전한 민족정신에 의한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 절대 지상과제”라고 생각하고 위의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원칙을 설정했다고 설명하였다.59)

    그는 당시의 세계사를 민족주의의 시대로 파악하였다. 즉 파시즘과 공산주의, 그리고 민주주

    의가 있지만, 그 기반은 모두 민족세력의 신장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60) 여기서 그의 민족주

    의는 민족지상주의로 나아간다. 그는 “우리가 끝까지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일은 민족을 떠

    나서 개인이 없다는 것이다. (중략) 외족의 지배하에 있는 민족에게는 그 민족의 복리를 위한

    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니 개인의 인권이 보장될 리 없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61)

    여기서 그의 ‘민족’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는 한 민족을 형성하는 요소는 혈통, 영역,

    문화, 운명의 4가지라고 보고, 이들 요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민족을 형성, 발전시켜 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혈통이었다. 그는 혈통의 공통성을

    민족 형성의 기본조건이라고 생각했고, 이 점에서 “우리 민족은 자랑스러운 전형적인 단일민족”

    이라고 보았다. 그는 희귀한 단일혈통, 오랜 동일 영역 유지, 공통의 문화소유, 철저한 공동운명

    등을 지녔다는 측면에서 한국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빈틈없이 훌륭하게 형성된 민족이라고 생각

    하였다.62)

    그는 또 “인류의 역사는 거의 번영과 권세 또는 영예와 생존을 위한 족속 대 족속의 투쟁으

    로 시종하였다”면서, 여기서 족속은 아득한 고대에는 씨족이었고, 다음 단계에는 종족이었으며,

    민족이 형성된 이후에는 민족을 가리킨다고 말하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도 사실은 주의와 주의

    의 싸움이라기보다는 민족과 민족의 투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에서 민족과 민족 간의

    투쟁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고 보았다. 그것은 본디 투쟁하려는 의욕은 자아 발전의 의

    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아의 발전을 위해 타 아를 침략하는 경우 이는

    옳지 못한 투쟁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는 자아의 발전을 위한 의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불

    가피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발전이 이루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63) 자민족

    의 발전을 위해 타민족을 침략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민족 간 투쟁론은

    그가 말하는 민족지상주의의 위험한 측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이같이 위험한 측면은 그의 혈통에 대한 숭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우리는 히틀러가 억

    지로 純血운동을 벌였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독일민족의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유태인을 배척함으로써 민족적 결속에는 심대한 효과가 있

    었다”면서, 이러한 예를 보아도 피의 순결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64)

    이같은 혈통주의는 얼마든지 인종적 배타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국가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그는 민족이 생존의 공동체라면 국가

    는 생활의 공동체라면서, 국가는 민족의 복리를 위해 권력을 집행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필요하

    59) 같은 글, 84쪽

    60) 「민족론」, 같은 책, 55쪽

    61) 같은 글, 53쪽

    62) 같은 글, 30~31쪽

    63) 같은 글, 31~34쪽

    64) 같은 글, 48쪽

  • 16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다면 권력이나 무력을 발동해서라도 민족의 복리에 배반되는 내외의 온갖 요소를 배제하고 민족

    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제반조치를 강구하게 된다고 보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세우려는

    국가는 완전한 주권국가인 동시에, 단일민족국가이며, 제도적으로 개인적 또는 집단적 특권을 허

    용하지 않는” 국가라고 말하였다. 즉 주권은 삼천만 민족에게 있고, 온 동포가 정치적으로나 경

    제적·문화적으로 권리와 지위와 책임이 기본적으로 균등한 국가 바로 ‘민족지상’의 국가라는 것

    이다. 그는 아직 한국민족에게는 국가가 없으니 국가 수립이 지상의 요구이며, 이를 위해 모든

    민족이 희생적, 헌신적으로 분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5)

    그는 ‘개인’에 대해서는 “우리는 개인의식이 민족의식에 앞서는 경우가 많다”면서, 개인의식이

    확대되면 민족의식에 대립되는 당파의식과 계급의식이 생기게 된다면서 ‘개인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우리는 먼저 개인의식이 창궐하는 것을 철저하게 소탕해야 한다. 민족의 복리를 위한 투

    쟁의 길이 아무리 요원하고 험난해도 우리는 이것을 배반하고 구차하게 개인의 이익을 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66)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개인의식을 비판하면서 민족의식으로 먼저 무장해

    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상에서 그의 민족지상, 국가지상주의를 살펴보았다. 민족의 혈통을 강조하는 등 배타성이

    강하고,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외적 침략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는 등 파시즘적 성향이

    분명 있었다. 또 개인의 권리나 이익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자유와 이익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아직 한국민족이 독립된 국가를 제대로 갖지 못한 상태에서 민족의 자유와

    국가의 독립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만을 강조하고 있음도 역시 파시즘과

    유사하다.

    이범석이 민족청년단의 이념으로서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설정한 배경에는 역사학자 정인보·

    황의돈, 철학자 안호상, 사회학자 강세형 등의 조언이 있었다고 한다.67) 아마도 이 가운데 특히

    독일 예나대학 출신의 안호상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민족청년단은 미국인과 한국인 양쪽으로부터 파시스트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훈련소는 나

    치스 세대의 예나대학 졸업생으로서 헤겔학도이며 히틀러 유겐트의 숭배자인 안호상박사의 정신

    적 지도하에 있었다”고 쓴 바 있다.68)

    하지만 ‘민족지상 국가지상’이란 용어는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광복군 시절

    같은 광복군의 제1지대장 김학규는 광복군의 기관지에 실린 글에서 광복군의 첫 번째 당면 과제

    로서 “민족해방지상, 국가독립지상의 원칙 아래에서 전민족의 인력, 물력을 광복군 군사운동에

    총집중하여 적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할 것”을 제기하였다.69) 물론 이는 해방 이후의 이범석이 주

    장한 민족지상, 국가지상주의와 구체적 의미는 다소 다르다고 생각되지만, 민족과 국가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큰 틀에서는 거의 같다고 여겨진다.

    65) 「민족과 국가」, 같은 책, 56~62쪽

    66) 「민족론」, 같은 책, 45~46쪽

    67) 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편, �철기이범석평전�, 삼육출판사, 1992, 126~127쪽

    68) Gregory Henderson,. �철기이범석평전�, 136쪽

    69) 김학규, 「한국광복군의 당면공작」 �광복� 제1호, 14쪽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17

    그런데 사실은 ‘민족지상 국가지상’이라는 말은 1920년대 중국의 국가주의자들이 만든 용어였

    다는 점이 주목된다. 1919년 5·4운동을 전후하여 曾琦·李璜·余家菊 등은 프랑스에 유학하여

    당시 프랑스가 러시아혁명과 마르크스주의의 파급을 억제하고 국가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보고

    국가주의사상을 보다 철저히 갖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중국 국민당이 러시아와 제휴하고 용공

    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데에 대해 반감을 갖고 독자적인 국가주의적 정치단체가 필요하다고 생

    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1923년 12월 파리 근교에 모여 ‘중국청년당’을 결성하였다.

    1924년 9월 그들은 귀국하여 중국국가주의청년단의 이름으로 �醒獅�라는 잡지를 내는 등 선전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는 제4차 당대표대회를 열고 중국청년당의 이름을 공개하였

    으며, 이후에도 기관지를 중심으로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지상 민족

    지상’을 표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

    다. 그들은 “밖으로 强權(外勢를 의미-인용자)에 저항하고, 안으로 國賊(봉건군벌을 의미-인용자)

    을 제거한다”는 혁명적 구호를 내걸고, 국가지상·민족지상을 반복적으로 선전하면서 강렬한 민

    족주의적 색채를 드러냈던 것이다. 국가주의자들은 민족의식과 민족의 부흥을 강조하고, 특히 민

    족정신, 국혼 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국가주의란 개인·민족·종교·계급·당파적 이익을 초

    월하여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주의”라고 설명하였다. 이들은 “국가는 最高 無上의 것으로서

    개인의 도덕과 책임은 모든 것을 희생하여 국가를 옹호하는 데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들은 “개

    인은 국가에 의해 존재하며, 국가가 없으면 개인은 없으므로, 개인을 희생하여 국가에 盡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70)

    이범석이 중국청년당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범석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을 숭배하고 있었다.71) 따라서 그가 국민당의 주변 정당이던 중

    국청년당에 대해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중국청년당의 이름을 본 떠 민족청년단

    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며, ‘민족지상·국가지상’의 구호는 중국청년당의 그것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지상·국가지상의 민족주의론은 극우파 민족주의론의 대표

    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5) 정부수립 후 이승만·안호상의 일민주의론

    1948년 9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一民主義로써 민족단일체를 만들어야 한다”면

    서 일민주의를 제창하였다.72) 이승만은 “한 백성(一民)인 국민을 만들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

    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제창한 것이었다. 그는 일민주의의 목표를 혈통

    과 운명이 같은 한 겨레, 한 백성의 핏줄과 운명을 끝까지 유지, 보호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일

    70) 吳雁南 外, �中國近代社會思潮(1840-1949)�, 제3권, 제10편, 제1장 「國家主義的 傳統」 189~216쪽 ;

    Chester C. Tan(譚昌霖) �Chinese Political Thought in the Twentieth Century�, Doubleday &

    Company, Inc. New York, 1971, 290-298쪽. 이 책은 민두기교수에 의해 �중국현대정치사상사�로

    번역되었다.(지식산업사, 1977)

    71) 정인보는 이범석이 장개석의 모범으로 하여 행동과 사상을 본받아 왔다고 말하였다. 정인보, 「이장군

    논설집에 부쳐」 �민족과 청년�, 백산서당, 1999

    72) �동아일보� 1949년 1월 29일

  • 18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민의 나라, 일민의 세계를 만들어 세계의 백성들이 자유와 평화, 행복과 명예를 누리도록 한다

    는 데 설정하였다.“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나누어지는 데에서 죽고 일(一)에서 산다”는

    구호는 일민주의의 상징적 표어였다. 이승만의 일민주의는 자본주의의 ‘돈 숭배주의’와 공산주의

    의 유물론을 모두 배척하고, 양자를 지양하는 사회경제체제를 지향하였다. 이승만은 일민주의의

    4가지 강령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1) 경제적으로 빈곤한 인민의 생활정도를 높여 부유하게 하여

    누구나 같은 복리를 누리게 할 것, 2) 정치적으로 대다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계급

    의 대우를 받게 할 것, 3) 지역의 구분을 타파하여 대한국민은 모두 한 민족임을 표방할 것, 4)

    남녀동등주의를 실천하여 민족의 화복 안위의 책임을 삼천만이 똑같이 분담하도록 할 것 등이었

    다. 貧富同等·貴賤平等·地域無別·男女同權은 이승만 스스로에 의해 일민주의의 4대 강령이

    라고 일컬어졌다.73) 결국 이승만이 말하는 일민주의는 우리 민족이 동일혈통, 동일운명을 지닌

    공동체로서, 남녀상하·지방파당·빈부귀천을 없애고, 균일정치(민주정치)·동일교육(민족교육)·

    통일경제(민생경제)를 달성하여 자유·진리·공정을 실현한다는 것으로 요약되었다.74)

    이같은 일민주의의 강령을 보급하기 위해 1949년 9월 ‘일민주의 보급회’가 만들어졌다. 이사

    장은 尹錫五가 맡았으며,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은 명예회장이 되었다. 일민주의 보급회는 일민주

    의에 대해 “우리는 단일민족으로서 언제나 하나요, 둘이 아니다. 이 하나인 우리 민족은 무엇에

    고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貧富同等·貴賤平等·地域無別·男女同權의 확고한 일체

    감에 입각하여 공동과업을 추진한다면 모든 차등과 대치를 초월하여 전국민에 복리가 도래할 것

    이라는 웅건한 경륜이시다. ‘一民’이 두 글자는 대통령의 거룩한 투쟁사의 출발이요, 또 귀추일

    뿐만 아니라 전민족의 역사적 이념에 근거한 만큼 실로 민족국가의 국시라 하겠다. 따라서 일민

    주의는 어떤 정당·단체에 의하여서만 실천될 바 아니요, 전국민의 좌우명이어야 할 것이다.”라

    고 선전하였다.75)

    실질적으로 일민주의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간 것은 문교부장관이자 일민주의

    보급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安浩相이었다. 안호상은 1950년 2월 �일민주의의 본바탕(本質)�이

    라는 책자를 펴냈다. 안호상은 일민주의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먼저 2차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바야흐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상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는 이러한 시점에서 외래관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이를 비판적으로

    소화하여 고유한 민족 사상에 맞게 함으로써 ‘우리의 주의와 사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오늘날 사람마다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그것이 반드시 우리의 참된 주의요 지도원리가 된다

    고 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과거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은 신라의 화랑주의에 의해 통일되었

    는데, 화랑주의는 단군의 홍익인간, 즉 ‘사람을 크게 유익하게 함’이라는 사상을 받아 민족과 조

    국에 대한 의리의 정신을 중심으로 삼았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 남북이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

    려면 다시 화랑정신을 부르짖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랑정신만으로는 안 된다. 또 민주주의만

    으로도 안 된다. 민주주의는 흘러가는 사상일 뿐, 영원히 우리 민족의 지도원리가 되기는 너무

    나 빈약하고 천박하다. 민주주의로써는 공산주의를 쳐부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민족

    73) �경향신문� 1949년 4월 22일 「李承晩 대통령, 一民主義 정신과 민족운동에 관하여 담화를 발표」

    74) �一民主義槪述�, 일민주의보급회, 1949

    75) �민주중보� 1949년 12월 16일 「경상남도 일민주의보급회 부위원장, 일민주의는 國是라고 주장」

  • 탈식민, 해방과 ‘민족’ ‘민족주의’ 담론 19

    의 영원한 지도원리로서 일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76)

    안호상은 일민주의의 뜻을 풀이하면서 이는 ‘한겨레’ 곧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겨레주의’라

    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우리 민족이 동일혈통, 동일운명을 가진 민족임을 특히 강조하였다.

    여기서 동일 혈통, ‘한 핏줄’은 ‘일민’의 절대적 요소라고까지 그는 강조하였다. 안호상의 일민주

    의는 한국 민족주의 가운데 가장 혈통을 강조한 민족주의였으며, 이는 이후 한국 사회에 ‘단일

    민족’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데 상당히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안호상은 더 나아가 “가정

    이 가족의 집이라면 국가는 민족의 집이다. 민족은 어떠한 개인과 계급보다 더 귀중하며, 국가

    는 어떤 단체나 정당보다 더 크다. 민족과 국가를 가장 높게 또 귀중히 여김은 인생의 本性이

    요, 한 백성 일민의 本務이다”라고 말하였다.77) 민족과 국가가 어떤 개인이나 계급, 단체보다

    가장 귀중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안호상은 일민주의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78) 먼저 정치에서는

    남녀, 상하의 차별을 없이 하는 균일정치, 민주정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는 일민주의 정치는

    먼저 항상 민족과 백성을 주인으로 하는 민주정치, 어떤 개인과 계급, 종파와 당파가 아니라 민

    족 전체를 위한 정치를 뜻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일민주의의 나라 안에서 각 개인은 다 같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민족의 자유와 나라의 독립이 먼저 이루어진

    뒤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과 나라의 자유를 피로써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 일민주의 교육과 관련해서는 1) 지방과 파당의 차별의식을 없애는 교육을 할 것, 2) 민

    족주의로써 교육할 것, 3) 진리를 교육할 것 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민족교육’은

    정체모를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닌 일민주의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민족교육에서의 민족주의는 결코 남을 배척하는 주의나 남을 숭배하는 주의가 아니며 항상 남과

    친선을 도모하는 주의라고 말하였다.

    일민주의 경제와 관련해서는 1) 빈부귀천의 차별을 없애고, 2) 균일경제, 민생경제를 달성하

    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일민주의의 민생경제는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잘 살자는 것”

    이 그 이상인데, 이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의 경제와는 다르다고 말하였다. 그는 자본주의는 소

    수의 부자만이 잘 살고, 다수의 빈자는 못살게 되니 이는 결국 계급갈등을 가져와 민족의 통일

    을 이룰 수 없게 한다고 보았다. 또 공산주의는 폭력적 수단으로써 빈부의 차별을 없애려 하지

    만, 결국 공산주의 경제는 다 같이 평균적인 가난뱅이나 평균적인 거지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민주의는 모든 부자를 가난뱅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난뱅이들을 부자로 만들

    려는 것이며, 자본주의와 같이 일부의 사람들에게 소유를 주거나 공산주의와 같이 모든 사람들

    의 소유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소유를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일민주의는 소유와 이익을 절대로 승인하며 보장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사람들

    에게 소유와 이익을 돌려줄 것인가. 그는 누구나 일을 부지런히 하면 할수록, 또 이익이 나면

    날수록 그것을 모두 일하는 이에게 돌아가도록 하여 그의 소유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76) 안호상, �일민주의의 본바탕�, 일민주의연구원, 11~23쪽

    77) 같은 책, 32쪽

    78) 이하의 설명은 �일민주의의 본바탕�을 요약한 것임.

  • 20 민족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그는 분배의 공정성을 강조하였다. 즉 모든 이가 최저의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 최소한의 일을

    해야 하며, 일 잘하고 일 많이 한 이에게는 더 많이 분배하고, 일 못하고 적게 한 이에게는 적

    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 안호상의 일민주의의 사상을 정치, 경제, 교육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일민주의는 결국

    민족과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민족의 하나됨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차별과 차등을 가능한 한 없애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앞서 본 이범석의 민족지상, 국가

    지상주의와 비교할 때, 일민주의는 대외적으로 배타성은 상대적으로 덜한 민족주의임을 알 수

    있다. 일민주의의 현실적 목표는 대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대내적인 것에 있었다. 즉 첫째는 북

    한과 남한의 공산주의자들과 사상적으로 대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일민주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제3의 이념을 택하였다. 그것은 전통과 민족, 국가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파시즘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파시즘과 대결해온 민족운동가와 국민들로부

    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민주의의 두 번째 목표는 남한의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시켜 ‘대

    한민국 국민’의 의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민주의의 내용은 매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

    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경제 부문에서 ‘다 같이 일하고, 공정하게 분배한다’고 했지만, 자본가들

    특히 금융자본가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토지와 산업의 국유화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계가 없었다. 결국 일민주의는 이탈리아나 독일의 파시즘이 그러하였듯이 처음에는 자

    본주의를 비판하고 ‘국가사회주의’의 틀을 쓰고 나왔지만, 결국은 자본주의를 용인하고 자본가들

    과 결탁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승만이 일민주의를 제창한 이후 국회에서 이승만을 추종하던 세력들은 1948년 10월 여당으

    로서 대한국민당을 결성하는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한국민당은 ‘一民主義’를 黨是로서

    표방하였다. 黨의 政綱도 一民主義에 따라 1) 우리는 계급과 지역, 성별을 초월하여 민족완전통

    일로 자주독립의 국권신장을 기함, 2) 우리는 정치, 경제, 교육의 각 방면에서 국민 균등의 복리

    증진을 기함, 3) 우리는 민족정기의 문화를 계승 발휘함으로써 세계평화와 세계문화에 공헌함을

    기함 등으로 되어 있었다.79) 그러나 이승만이 대한국민당을 여당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들

    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1949년에 다시 대한국민당을 확대 결성하고 한국민주당의 내각책임

    제 개헌 반대에 앞장서는 등 이승만 지지운동을 계속하였지만 이승만은 끝내 대한국민당을 여당

    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은 20명 정도의 의원밖에 당선

    시키지 못함으로써 여당의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이후 자유당 결성운동에 밀려 유명무실한 정당

    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여당이 된 자유당은 더 이상 일민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하지 않

    았다.

    하지만 이승만은 1949년 10월 여순군인봉기가 있은 후 공산주의자들의 색출을 빙자하여 ‘국

    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이후 이 법은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이용되었다. 박정희정권 이

    후에도 이 법은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서 이용되었고, 아직까지도 국가주

    의의 상징으로서, 파시즘의 유물로서 남아 있다.

    79) �경향신문� 1948년 10월 12일 ; �자유신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