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건협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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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건축과 사회 지난 해 새건축사협의회 이하 새건협 관계자로부터 건축가와 도시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시민들을 위한 근대 건축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근현대 건축사를 전공하는 필자로서는 건축가 그룹이 한국 근현대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부득이 수정 제안을 했 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루어진 것이 새건협 도시 건축 답사 프로그램이었고 답사에 대한 일반의 호응이 과히 나 쁘지 않아 올해도 답사를 이어가고 있다. 답사를 자료로 남겨 후일 답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제공하자는 의견이 있 어 글과 이미지로 지난 답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새건협 도시 건축 답사의 주제를 키워드로 정리하면 한국 전쟁과 도시 그리고 건축 이었다. 본 주제는 필자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 왔던 주제의 하나로 한국 전쟁 발발 년이 되던 해에 월간 이상건축 에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전쟁과 건축 이상건축 년 월호 한국 전쟁과 도시 이상건축 년 월호 를 기획 특집으로 다룬 바 있었다. 따라 서지난해 새건협 주최로 기획된 도시 건축 답사의 주제는 필자가 오랫동안 가져 왔던 관심사를 현장에서 확인해 보는 과정이었다고 하겠다. 누군가 전쟁을 종전이 아닌 발발에 초점을 맞추어 기념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 이 말 의 진위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전쟁 발발을 기념하고자 하는 데는 그 의도가 있을 것이고 이는 전쟁을 기념하는 사회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새로 짜여진 도시 조직 위에 구축되는 건축의 모습 역시 사회의 성격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 을논할때 도시와 건 의 자리는 항상 장외였다. 뒷전 정도도 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도시 · 건축은 적어도 한국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휴전 후 도시와 건축을 복구하는 막중한 역할을 부여받고 맡은 바 역할을 열심히 ? 수행해 온 도시 · 건축은 적어도 한국 전쟁의 발발 책임에 대해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얼마 · 안창모「건축과 사회」편집위원,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새건협 도시 건축 답사 : 남산 - 해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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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2005 봄 283282 건축과 사회

나다행스러운(?) 일인지모른다. 그러나일국을전쟁의폐허로부터복구시키는일을담당했던도시와건축에대한평가

로부터건축가가얼마나자유로울수있는가라는질문을던지면문제는달라진다.

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는도시와건축이행해온역할에대해서주목해보지않았다. 왜주목하지않았는가하는의문이들

지않을수없다. 전쟁발발의책임이없기때문에그로인한결과에대해서도발언권이보장되지않는것일까? 우리는도

시·건축이한국전쟁과관련된논의에서한자리를차지하지못했던이유를쉽게짐작해볼수있다. 전후복구와조국근

대화의과정에서건축은도구로서사용되었지주체가되지못하 기때문이다. 그러한건축을만들어낸건축인들은어떠

한존재일것인가에생각이미치면새삼스럽게초라해지는모습을떠올리지않을수없다.

‘한국전쟁’을화두로삼아장광설을다시한번읊조리는것은한국전쟁으로폐허화된도시의실상을생생하게재현함으

로써전쟁의참혹함을다시일깨우고, 폐허를복구하는데도시와건축이얼마나많은기여를했는지드러내고자하는데

있지않다.

필자는지난한세기동안이땅에서전개되었던역사적사건중어느것보다도오늘날한국의도시와건축을이해하는데

있어전쟁이핵심적위치를차지하고있다고생각한다. 한국전쟁이후남북의대치상황은첨예한이데올로기의대립과체

제우위경쟁으로이어졌고, 그 향은사회각분야에미치고있는장기지속적인문제인것이다. 한국전쟁은같은민족

사이에서발발한전쟁이었다는점이외에도이데올로기가첨예하게대립된전쟁이자각각의이데올로기수호를위해세계

각국이참여한전쟁이라는점에서여타국가의내전과는그성격을달리한다. 따라서한국전쟁은남북한각각에참혹한인

적, 물적피해의 향이오늘에이르고있다는점외에도분단체제를유지한채이데올로기에기초한, 또는이데올로기를

빙자한체제우위경쟁을야기하면서오늘의우리모습을만들었기때문에현재진행형이다. 또한양체제하의도시와건

축의모습에서동일민족, 동일문화권에서상이한이데올로기가도시와건축의모습을어떻게다르게만들었는지를읽어

낼수있는단서를제공해준다.

상기와같은문제의식하에구성된 7차례에걸친도시건축답사는낙산, 세운상가, 장충동, 남산에서해방촌까지, 용산등

을중심으로진행되었으며, 금번첫번째연재는‘남산에서해방촌’까지를다루고자한다.(필자註)

서울시민이면, 아니한국인이면서울과

함께떠올리는장소가있다. 남산! 한때, 초

중고생의백일장과사생대회의단골장소

고, 연인들의데이트코스 으며, 신혼여행을

떠나기전새신랑과새신부가드라이브코

스1순위로선택하던곳. 남산은애국가에만

있는것이아니라우리모두와함께하고있

었던곳이다. 이제는고층빌딩에가려남산

이안보이는곳이많지만그나마남산타워

지난해≪새건축사협의회≫(이하새건협) 관계자로부터건축가와도시건축에관심을갖고있는시민들을위한근대건축

답사프로그램을기획해달라는요청이있었다. 근현대건축사를전공하는필자로서는건축가그룹이한국근현대건축에

관심을갖고있음을확인하는계기가되었기에반가운제안이었지만몇가지현실적인이유로인해부득이수정제안을했

다. 그제안이받아들여져이루어진것이≪새건협≫도시건축답사프로그램이었고, 답사에대한일반의호응이과히나

쁘지않아올해도답사를이어가고있다. 답사를자료로남겨후일답사를필요로하는사람들에게도제공하자는의견이있

어 과이미지로지난답사를정리하고자한다.

2004년≪새건협≫도시건축답사의주제를키워드로정리하면‘한국전쟁과도시그리고건축’이었다. 본주제는필자가

오래전부터관심을가져왔던주제의하나로, 한국전쟁발발 50년이되던해에월간 <이상건축>에두차례에걸쳐‘한국

전쟁과건축’(이상건축 2000년 6월호), ‘한국전쟁과도시’(이상건축 2000년 8월호)를기획특집으로다룬바있었다. 따라

서지난해≪새건협≫주최로기획된도시건축답사의주제는필자가오랫동안가져왔던관심사를현장에서확인해보는

과정이었다고하겠다.

누군가전쟁을종전이아닌발발에초점을맞추어기념하는나라는한국밖에없을것이라고말한바있지만, 여기서이말

의진위를논할필요는없을것같다. 중요한것은전쟁발발을기념하고자하는데는그의도가있을것이고, 이는전쟁을

기념하는사회의성격과무관하지않다는점이다. 전쟁의피해를복구하는과정에서새로짜여진도시조직위에구축되는

건축의모습역시사회의성격으로부터자유롭다고말하기어렵다. 그럼에도불구하고‘한국전쟁’을논할때‘도시와건

축’의자리는항상장외 다. 뒷전정도도못되었다고하는것이보다적절한표현일것이다.

도시·건축은적어도한국전쟁의발발에대해서는책임이없다. 휴전후도시와건축을복구하는막중한역할을부여받고,

맡은바역할을열심히(?) 수행해온도시·건축은적어도한국전쟁의발발책임에대해서는자유롭다고할수있다. 얼마

식 민 지 배 의 흔 적 과 해 방 · 분 단 의 산 물 해 방 촌

안창모「건축과사회」편집위원, 경기대학교건축전문대학원교수

남산에서바라본서울

새건협도시건축답사: 남산- 해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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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봄 283282 건축과 사회

나다행스러운(?) 일인지모른다. 그러나일국을전쟁의폐허로부터복구시키는일을담당했던도시와건축에대한평가

로부터건축가가얼마나자유로울수있는가라는질문을던지면문제는달라진다.

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는도시와건축이행해온역할에대해서주목해보지않았다. 왜주목하지않았는가하는의문이들

지않을수없다. 전쟁발발의책임이없기때문에그로인한결과에대해서도발언권이보장되지않는것일까? 우리는도

시·건축이한국전쟁과관련된논의에서한자리를차지하지못했던이유를쉽게짐작해볼수있다. 전후복구와조국근

대화의과정에서건축은도구로서사용되었지주체가되지못하 기때문이다. 그러한건축을만들어낸건축인들은어떠

한존재일것인가에생각이미치면새삼스럽게초라해지는모습을떠올리지않을수없다.

‘한국전쟁’을화두로삼아장광설을다시한번읊조리는것은한국전쟁으로폐허화된도시의실상을생생하게재현함으

로써전쟁의참혹함을다시일깨우고, 폐허를복구하는데도시와건축이얼마나많은기여를했는지드러내고자하는데

있지않다.

필자는지난한세기동안이땅에서전개되었던역사적사건중어느것보다도오늘날한국의도시와건축을이해하는데

있어전쟁이핵심적위치를차지하고있다고생각한다. 한국전쟁이후남북의대치상황은첨예한이데올로기의대립과체

제우위경쟁으로이어졌고, 그 향은사회각분야에미치고있는장기지속적인문제인것이다. 한국전쟁은같은민족

사이에서발발한전쟁이었다는점이외에도이데올로기가첨예하게대립된전쟁이자각각의이데올로기수호를위해세계

각국이참여한전쟁이라는점에서여타국가의내전과는그성격을달리한다. 따라서한국전쟁은남북한각각에참혹한인

적, 물적피해의 향이오늘에이르고있다는점외에도분단체제를유지한채이데올로기에기초한, 또는이데올로기를

빙자한체제우위경쟁을야기하면서오늘의우리모습을만들었기때문에현재진행형이다. 또한양체제하의도시와건

축의모습에서동일민족, 동일문화권에서상이한이데올로기가도시와건축의모습을어떻게다르게만들었는지를읽어

낼수있는단서를제공해준다.

상기와같은문제의식하에구성된 7차례에걸친도시건축답사는낙산, 세운상가, 장충동, 남산에서해방촌까지, 용산등

을중심으로진행되었으며, 금번첫번째연재는‘남산에서해방촌’까지를다루고자한다.(필자註)

서울시민이면, 아니한국인이면서울과

함께떠올리는장소가있다. 남산! 한때, 초

중고생의백일장과사생대회의단골장소

고, 연인들의데이트코스 으며, 신혼여행을

떠나기전새신랑과새신부가드라이브코

스1순위로선택하던곳. 남산은애국가에만

있는것이아니라우리모두와함께하고있

었던곳이다. 이제는고층빌딩에가려남산

이안보이는곳이많지만그나마남산타워

지난해≪새건축사협의회≫(이하새건협) 관계자로부터건축가와도시건축에관심을갖고있는시민들을위한근대건축

답사프로그램을기획해달라는요청이있었다. 근현대건축사를전공하는필자로서는건축가그룹이한국근현대건축에

관심을갖고있음을확인하는계기가되었기에반가운제안이었지만몇가지현실적인이유로인해부득이수정제안을했

다. 그제안이받아들여져이루어진것이≪새건협≫도시건축답사프로그램이었고, 답사에대한일반의호응이과히나

쁘지않아올해도답사를이어가고있다. 답사를자료로남겨후일답사를필요로하는사람들에게도제공하자는의견이있

어 과이미지로지난답사를정리하고자한다.

2004년≪새건협≫도시건축답사의주제를키워드로정리하면‘한국전쟁과도시그리고건축’이었다. 본주제는필자가

오래전부터관심을가져왔던주제의하나로, 한국전쟁발발 50년이되던해에월간 <이상건축>에두차례에걸쳐‘한국

전쟁과건축’(이상건축 2000년 6월호), ‘한국전쟁과도시’(이상건축 2000년 8월호)를기획특집으로다룬바있었다. 따라

서지난해≪새건협≫주최로기획된도시건축답사의주제는필자가오랫동안가져왔던관심사를현장에서확인해보는

과정이었다고하겠다.

누군가전쟁을종전이아닌발발에초점을맞추어기념하는나라는한국밖에없을것이라고말한바있지만, 여기서이말

의진위를논할필요는없을것같다. 중요한것은전쟁발발을기념하고자하는데는그의도가있을것이고, 이는전쟁을

기념하는사회의성격과무관하지않다는점이다. 전쟁의피해를복구하는과정에서새로짜여진도시조직위에구축되는

건축의모습역시사회의성격으로부터자유롭다고말하기어렵다. 그럼에도불구하고‘한국전쟁’을논할때‘도시와건

축’의자리는항상장외 다. 뒷전정도도못되었다고하는것이보다적절한표현일것이다.

도시·건축은적어도한국전쟁의발발에대해서는책임이없다. 휴전후도시와건축을복구하는막중한역할을부여받고,

맡은바역할을열심히(?) 수행해온도시·건축은적어도한국전쟁의발발책임에대해서는자유롭다고할수있다. 얼마

식 민 지 배 의 흔 적 과 해 방 · 분 단 의 산 물 해 방 촌

안창모「건축과사회」편집위원, 경기대학교건축전문대학원교수

남산에서바라본서울

새건협도시건축답사: 남산- 해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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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봄 285284 건축과 사회

덕에거기어디쯤있을것이라는짐작이나해볼뿐이다.그러나남산은한국근현대사에서우리에게애정어린

추억의장소만은아니었다. 묵묵히그자리를지키고있는남산에게지난한세기는수난의시간이기도했다.

남산에무슨일이있었는지그곳을찾아가본다.

애국가를숱하게되뇌면서우리의뇌리에깊이각인되어있는남산이우리역사에서그존재를새삼스럽게

드러낸것은개항으로인해조선이시끌벅적해지면서부터다. 조선왕조가한양을새도읍지로조성하면서남

산은한양도성의안산으로자리매김을하 고, 그래서남산에는남산산신인목멱대왕을봉사(奉祀)하기위하

여목멱신사(木覓神祠)가지어졌다.목멱신사에는한양을도읍으로정하는데큰공을세운조선의국사 던무

학대사의초상이모셔졌기때문에일반에는국사당(國師堂)으로더잘알려져있으며, 목멱신사는고종연간까

지매년봄과가을에국가에서치르는초제(醮祭)를극진히받아왔다.

가난했지만자존심이강한선비가많이살았다고해서남산골샌님이라는말까지만들어졌던남산에변화가

시작된것은청일전쟁에서일본이승리하면서부터다. 1893년도성안에외국인의거주가허락된후청일전쟁

에서승리한일본은자국민을남산의북사면에정착시켰고, 일본인마을이만들어졌다. 그렇게형성된일본인

마을의이색적인경관이조선인마을에비해번듯했다는묘사는이사벨라버드비숍여사(Isabella Bird

Bishop, 1832~1904)1)의‘한국과이웃나라들’에잘나타나있다. 일본인의남산북사면거주와함께1898년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건립되었는데, 1925년조선신궁이건립되면서경성신사로개칭되었다. 지금그자

리에는리라초등학교가위치해있다.

이후1905년을사보호조약이체결되고, 현숭의여자대학이위치한곳에통감부(1906)가설치되면서, 일본

의남산점유가가속화되었다.남산일대에일인을위한공원을만들겠다는목적하에1908년대한제국정부로

부터현남산식물원을중심으로남산의북사면과남대문에이르는30만평에대한사용허가를받아낸일본은

이듬해공사를시작하여1910년5월29일한양공원을개원하 던것이다.이렇게조성된한양공원역시1925

년조선신궁에그터의일부를내주게된다. 합방직후인1912년일본은조선신궁(朝鮮神宮) 건립계획을수립

했고, 신궁은1920년남산성곽이위치한능선을따라산중턱에조성된대지에1925년말준공되었다. 이때

남산에위치했던국사당은철거되었다. 철거이유는조선신궁보다높은곳에있는국사당의존재가눈에거슬

렸던것이다. 그래서국사당은1925년인왕산으로(현위치:̀`종로구무악동산2-12)로이전되었다. 이밖에도

통감부앞에는동본원사(東本願寺)가그리고현한옥마을이위치했던곳에는헌병대사령부등이자리잡고있

었고, 남산의동쪽자락에는조선식민지화의일등공신인이등박문을기리는박문사(博文寺)도지어졌다. 이

러했던탓에경복궁에조선총독부가세워진후에도남산은북촌과대비되는일인본거지로서의성격을강하게

유지하고있었다.해방에이르기까지…

남산의수난은한일합방이전부터시작되었던것이다

이제남대문에서시작하여구성곽길을따라남산을찾아가보자.

남산을향해길을걷다보면길오른편으로600년도읍지에걸맞지않은새것같은성곽의일부를발견하게

된다. 서울성곽은1900년전차가개설되어성곽안팎이대중교통으로연결되면서성문을통과하는전차길이

놓이면서그존재가부담이되었던것같다.성벽철거가본격화된것은1907년일본의대정(大正) 황태자가방

한하기직전‘성곽처리위원회’가설치되면서부터다.이러한사실로인해성곽철거를일제의침략성을드러내

는대표적인사례로이야기하기도하지만, 이미그기능을상실한성벽을어떻게할것인가는독립신문에서종

종다루어지는주제의하나 다. 도시인구의급증과물리적확장이불가피한근대도시의상황은성벽의물리

적경계를의미없게만들었기때문이다.

남대문에서남산으로이어졌던성곽도이러한시대적상황에서철거되었다가지난1970년대후반에현재의

모습으로복원되었다. 성곽길을따라걷다가뜻하지않게건너게되는다리가있는데, 이는퇴계로가남산아

래자락을깊게파고지나가면서개설되었기때문이다. 퇴계로는해방후4대문안에개설된유일한동서를잇

는간선도로다.

좀더오르면남산길이좌우로갈라지는곳우측에힐튼호텔(김종성작)이자리잡고있다. 근대산업사회

기술미학의정수를보여주는힐튼호텔은해방과전쟁을거치면서급속하게형성되었던윤락가를도심정비차

원에서재개발하는과정에세워졌다. 이제서울역과함께사람들의뇌리에깊이각인되었던사창가를상징했

던‘양동’은까마득한옛말이되어버렸다.

조선신궁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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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봄 285284 건축과 사회

덕에거기어디쯤있을것이라는짐작이나해볼뿐이다.그러나남산은한국근현대사에서우리에게애정어린

추억의장소만은아니었다. 묵묵히그자리를지키고있는남산에게지난한세기는수난의시간이기도했다.

남산에무슨일이있었는지그곳을찾아가본다.

애국가를숱하게되뇌면서우리의뇌리에깊이각인되어있는남산이우리역사에서그존재를새삼스럽게

드러낸것은개항으로인해조선이시끌벅적해지면서부터다. 조선왕조가한양을새도읍지로조성하면서남

산은한양도성의안산으로자리매김을하 고, 그래서남산에는남산산신인목멱대왕을봉사(奉祀)하기위하

여목멱신사(木覓神祠)가지어졌다.목멱신사에는한양을도읍으로정하는데큰공을세운조선의국사 던무

학대사의초상이모셔졌기때문에일반에는국사당(國師堂)으로더잘알려져있으며, 목멱신사는고종연간까

지매년봄과가을에국가에서치르는초제(醮祭)를극진히받아왔다.

가난했지만자존심이강한선비가많이살았다고해서남산골샌님이라는말까지만들어졌던남산에변화가

시작된것은청일전쟁에서일본이승리하면서부터다. 1893년도성안에외국인의거주가허락된후청일전쟁

에서승리한일본은자국민을남산의북사면에정착시켰고, 일본인마을이만들어졌다. 그렇게형성된일본인

마을의이색적인경관이조선인마을에비해번듯했다는묘사는이사벨라버드비숍여사(Isabella Bird

Bishop, 1832~1904)1)의‘한국과이웃나라들’에잘나타나있다. 일본인의남산북사면거주와함께1898년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건립되었는데, 1925년조선신궁이건립되면서경성신사로개칭되었다. 지금그자

리에는리라초등학교가위치해있다.

이후1905년을사보호조약이체결되고, 현숭의여자대학이위치한곳에통감부(1906)가설치되면서, 일본

의남산점유가가속화되었다.남산일대에일인을위한공원을만들겠다는목적하에1908년대한제국정부로

부터현남산식물원을중심으로남산의북사면과남대문에이르는30만평에대한사용허가를받아낸일본은

이듬해공사를시작하여1910년5월29일한양공원을개원하 던것이다.이렇게조성된한양공원역시1925

년조선신궁에그터의일부를내주게된다. 합방직후인1912년일본은조선신궁(朝鮮神宮) 건립계획을수립

했고, 신궁은1920년남산성곽이위치한능선을따라산중턱에조성된대지에1925년말준공되었다. 이때

남산에위치했던국사당은철거되었다. 철거이유는조선신궁보다높은곳에있는국사당의존재가눈에거슬

렸던것이다. 그래서국사당은1925년인왕산으로(현위치:̀`종로구무악동산2-12)로이전되었다. 이밖에도

통감부앞에는동본원사(東本願寺)가그리고현한옥마을이위치했던곳에는헌병대사령부등이자리잡고있

었고, 남산의동쪽자락에는조선식민지화의일등공신인이등박문을기리는박문사(博文寺)도지어졌다. 이

러했던탓에경복궁에조선총독부가세워진후에도남산은북촌과대비되는일인본거지로서의성격을강하게

유지하고있었다.해방에이르기까지…

남산의수난은한일합방이전부터시작되었던것이다

이제남대문에서시작하여구성곽길을따라남산을찾아가보자.

남산을향해길을걷다보면길오른편으로600년도읍지에걸맞지않은새것같은성곽의일부를발견하게

된다. 서울성곽은1900년전차가개설되어성곽안팎이대중교통으로연결되면서성문을통과하는전차길이

놓이면서그존재가부담이되었던것같다.성벽철거가본격화된것은1907년일본의대정(大正) 황태자가방

한하기직전‘성곽처리위원회’가설치되면서부터다.이러한사실로인해성곽철거를일제의침략성을드러내

는대표적인사례로이야기하기도하지만, 이미그기능을상실한성벽을어떻게할것인가는독립신문에서종

종다루어지는주제의하나 다. 도시인구의급증과물리적확장이불가피한근대도시의상황은성벽의물리

적경계를의미없게만들었기때문이다.

남대문에서남산으로이어졌던성곽도이러한시대적상황에서철거되었다가지난1970년대후반에현재의

모습으로복원되었다. 성곽길을따라걷다가뜻하지않게건너게되는다리가있는데, 이는퇴계로가남산아

래자락을깊게파고지나가면서개설되었기때문이다. 퇴계로는해방후4대문안에개설된유일한동서를잇

는간선도로다.

좀더오르면남산길이좌우로갈라지는곳우측에힐튼호텔(김종성작)이자리잡고있다. 근대산업사회

기술미학의정수를보여주는힐튼호텔은해방과전쟁을거치면서급속하게형성되었던윤락가를도심정비차

원에서재개발하는과정에세워졌다. 이제서울역과함께사람들의뇌리에깊이각인되었던사창가를상징했

던‘양동’은까마득한옛말이되어버렸다.

조선신궁정면

Page 5: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옛성곽이위치했던산자락에언덕처럼남아있는옹벽

옆으로난계단을오르면잘정지된공원(현아동광장)을

만나게된다. 이곳부터구조선신궁터(현중앙공원)까지

는3단으로남산산록이정지되어있는데, 이는이승만정

권말에남산에국회의사당신축계획을추진하면서새로

정비되었다. 5.16 이후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말많던남

산국회의사당신축계획(당선안김수근)을취소하고남산

공원화계획을세움에따라이곳역시공원으로조성되었

다. 지금은어린이놀이시설몇개만남아있고, 공원의벤

치는시간의여유가있는어르신들과갈곳없는홈리스

(homeless)들의차지가되고있다. 계단을오른후왼편

의시가지쪽을따라시가전경을조망하면서걷다보면공

원한편에위치한말을탄장군동상을발견하게된다. 김

유신장군동상이다. 의문이생기지않을수없다. 한가로

운공원에웬느닷없는김유신장군동상일까? 그의문을

풀기위해서우리는 1960년대사회분위기가어떠했는지

돌이켜볼필요가있다. 남산에조선신궁이있었다는사실

외에도5.16으로집권한일본군장교출신박정희전대통

령의전력도남산을멍들게한요인의하나 기때문이다.

힘으로집권한제3공화국은정권의정당성확보를‘조국

근대화’에서찾았으며, 이과정에서부정적전통의제거와

새로운전통의확립을내세웠고, 이러한정책의결과는

‘문민’중심의유교적전통을‘무인’중심의구국적전통

으로치환하는것으로나타났다. 1966년8월15일에발족

한‘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그역할을맡았다.‘우리

민족사상불멸의공적을남긴위인및열사들의조상을건

립함으로써그정신을길이선양케하여민족의귀감’을삼

고자했던조상건립위원회는 1차로 10명2)을선정했는데,

김유신은그중하나 다. 김유신장군동상은당초태평

로 2가녹지대에건립3)되었으나언젠가지금의위치로옮

겨진것이다. 김유신장군동상외에도조상건립위원회는

70년대초까지서울은물론전국에걸쳐호국선열과민족의자긍심을높인위인들의동상을집중적으로건립

했다.

이러한분위기를더욱가속화시킨것이1.21사태다. 1968년1월21일발생한1.21사태에기민하게대응한

사람은개발연대에불도저시장으로불렸던김현옥서울시장이었다. 김현옥시장은동년3월4일‘남산요새

화계획’을발표했는데, 그핵심은유사시서울시민3~40만명이대피할수있는지하수용시설로계획된‘남

산1호터널’과‘2호터널’이었다.오늘날서울을남북으로연결하는중추적인교통망을형성하고있는터널이

교통문제가아닌전혀다른사회적분위기하에서정치적이고국가안보차원에서건설되었던것이다. 이로서

남산은깊은곳까지사람의손을타야했다.

발걸음을다시남산으로옮겨두번째계단을오르면백범광장에이르게된다. 이곳에는조국의광복을위

해일생을바친백범김구선생의동상4)이있어선생을기념하기위해백범광장이라불린다. 백범광장의서남

쪽에는야외음악당(안병의작)이자리잡고있었다. 이건물은남산공원화계획의일환으로조개껍질모양의

콘크리트구조물로서1만5천명을수용할수있는규모로1962년에건축되었으나지금은철거되고없다.이제

그자리에는성재이시 선생동상5)이있고어르신들이휴식을즐길수있는녹지가마련되어있다.

이제마지막계단을오를차례다. 그런데그계단은앞

서힘들게올라왔던계단과는다른모습을갖고있다. 계

단수도더많을뿐아니라직선으로남산을향해질주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계단왼편의경사면에는우뚝선고

층건물이하나솟아있다. 매우인상적인장면이아닐수

없다.마지막계단은왜그리번듯할까?

답은이계단이관폐대사(官弊大社) 조선신궁으로오르

는계단이었기때문이다.서울을조망하는위치인남산중

턱에자리잡았던신궁은조선의정신세계까지를지배하

고자했던일본의의지를보여준다. 현존하는계단은신

궁으로이르는주계단의일부 다. 일제강점기말내선

일체가강조되던시절수많은한인들이참배를강요당했

고, 학생들도그계단을따라신사참배를해야만했고더러

는참배기념사진을찍던곳이다. 그계단옆에어린이회

관(이광노작)6)이1970년지어졌다.경제적으로곤궁했던

시절우리사회의미래를책임질어린이를위해기꺼이마

2005 봄 287286 건축과 사회

조선신궁(항공사진)

남산해방촌아동공원에서본서울시가지

김유신장군동상

국회의사당당선안(김수근작)

Page 6: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옛성곽이위치했던산자락에언덕처럼남아있는옹벽

옆으로난계단을오르면잘정지된공원(현아동광장)을

만나게된다. 이곳부터구조선신궁터(현중앙공원)까지

는3단으로남산산록이정지되어있는데, 이는이승만정

권말에남산에국회의사당신축계획을추진하면서새로

정비되었다. 5.16 이후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말많던남

산국회의사당신축계획(당선안김수근)을취소하고남산

공원화계획을세움에따라이곳역시공원으로조성되었

다. 지금은어린이놀이시설몇개만남아있고, 공원의벤

치는시간의여유가있는어르신들과갈곳없는홈리스

(homeless)들의차지가되고있다. 계단을오른후왼편

의시가지쪽을따라시가전경을조망하면서걷다보면공

원한편에위치한말을탄장군동상을발견하게된다. 김

유신장군동상이다. 의문이생기지않을수없다. 한가로

운공원에웬느닷없는김유신장군동상일까? 그의문을

풀기위해서우리는 1960년대사회분위기가어떠했는지

돌이켜볼필요가있다. 남산에조선신궁이있었다는사실

외에도5.16으로집권한일본군장교출신박정희전대통

령의전력도남산을멍들게한요인의하나 기때문이다.

힘으로집권한제3공화국은정권의정당성확보를‘조국

근대화’에서찾았으며, 이과정에서부정적전통의제거와

새로운전통의확립을내세웠고, 이러한정책의결과는

‘문민’중심의유교적전통을‘무인’중심의구국적전통

으로치환하는것으로나타났다. 1966년8월15일에발족

한‘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그역할을맡았다.‘우리

민족사상불멸의공적을남긴위인및열사들의조상을건

립함으로써그정신을길이선양케하여민족의귀감’을삼

고자했던조상건립위원회는 1차로 10명2)을선정했는데,

김유신은그중하나 다. 김유신장군동상은당초태평

로 2가녹지대에건립3)되었으나언젠가지금의위치로옮

겨진것이다. 김유신장군동상외에도조상건립위원회는

70년대초까지서울은물론전국에걸쳐호국선열과민족의자긍심을높인위인들의동상을집중적으로건립

했다.

이러한분위기를더욱가속화시킨것이1.21사태다. 1968년1월21일발생한1.21사태에기민하게대응한

사람은개발연대에불도저시장으로불렸던김현옥서울시장이었다. 김현옥시장은동년3월4일‘남산요새

화계획’을발표했는데, 그핵심은유사시서울시민3~40만명이대피할수있는지하수용시설로계획된‘남

산1호터널’과‘2호터널’이었다.오늘날서울을남북으로연결하는중추적인교통망을형성하고있는터널이

교통문제가아닌전혀다른사회적분위기하에서정치적이고국가안보차원에서건설되었던것이다. 이로서

남산은깊은곳까지사람의손을타야했다.

발걸음을다시남산으로옮겨두번째계단을오르면백범광장에이르게된다. 이곳에는조국의광복을위

해일생을바친백범김구선생의동상4)이있어선생을기념하기위해백범광장이라불린다. 백범광장의서남

쪽에는야외음악당(안병의작)이자리잡고있었다. 이건물은남산공원화계획의일환으로조개껍질모양의

콘크리트구조물로서1만5천명을수용할수있는규모로1962년에건축되었으나지금은철거되고없다.이제

그자리에는성재이시 선생동상5)이있고어르신들이휴식을즐길수있는녹지가마련되어있다.

이제마지막계단을오를차례다. 그런데그계단은앞

서힘들게올라왔던계단과는다른모습을갖고있다. 계

단수도더많을뿐아니라직선으로남산을향해질주하고

있는것이다. 그리고계단왼편의경사면에는우뚝선고

층건물이하나솟아있다. 매우인상적인장면이아닐수

없다.마지막계단은왜그리번듯할까?

답은이계단이관폐대사(官弊大社) 조선신궁으로오르

는계단이었기때문이다.서울을조망하는위치인남산중

턱에자리잡았던신궁은조선의정신세계까지를지배하

고자했던일본의의지를보여준다. 현존하는계단은신

궁으로이르는주계단의일부 다. 일제강점기말내선

일체가강조되던시절수많은한인들이참배를강요당했

고, 학생들도그계단을따라신사참배를해야만했고더러

는참배기념사진을찍던곳이다. 그계단옆에어린이회

관(이광노작)6)이1970년지어졌다.경제적으로곤궁했던

시절우리사회의미래를책임질어린이를위해기꺼이마

2005 봄 287286 건축과 사회

조선신궁(항공사진)

남산해방촌아동공원에서본서울시가지

김유신장군동상

국회의사당당선안(김수근작)

Page 7: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련했던회관은접근이어렵고어린이에게위

험할뿐아니라확장이어려운대지조건으로

인해 5년만에광진구능동에위치한어린이

대공원옆으로이전하고지금은서울시교육

과학연구원으로사용되고있다.

마지막계단을오르면정면에반듯하게정

리된정원이눈에펼쳐진다. 조선신궁이위치

했던곳(현중앙광장)이다. 해방후에일제의

잔재를깨끗이정리하지못했던우리 지만

다행히조선의정신세계를지배하는상징이

었던조선신궁은이땅에서사라졌다. 그런데그신궁을없앤것은우리들이아니었다. 해방이되자일인들은

이튿날오후에승신식(昇神式)이라는폐쇄행사를갖고동년9월7일해체를시작하여10월6일작업을마무리

한후나머지를소각한후철수했다고한다. 유감스럽게도해방이되었음에도불구하고우리는일본제국주의

의상징을지울수있는기회를가질수없었다.

해방과함께남산에서조선신궁이철거되었지만, 남산이우리

시민의품에돌아오기까지는많은세월을기다려야했다. 신궁

이있던그자리에들어선것은이승만전대통령동상(윤효중

작)이었다. 동상은1956년8월15일81세 던대통령의나이에

맞춰 81척높이로세워졌다. 그러나 4.19혁명으로동상은학생

들에의해부서지는수난을당했고우남정7)으로불리던팔각정

의이름도지워졌다. 자신의동상을발아래민의를대변하는국

회의사당을건립하려했던이승만의노욕이부른결과 다.

이곳이조선신궁이었다는사실을의식하고지어진건물이구

어린이회관을마주하고서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이그것이

다. 식민지배의원흉이었던이등박문을사살한안중근의사기

념관8)을조선신궁터의한을풀고일본에대항할수있는대안으

로판단했던것같다. 기념관은전통건축양식을콘크리트로번안해서지어졌는데이같은건물을박정희전

대통령이선호했기때문에콘크리트로번안된전통건축은‘박정희양식’으로불리기도했다. 1974년에는현

재의동상도세워졌다.

구어린이회관과안중근의사기념관을뒤로하고한여름시원한물줄기를자랑했을분수를돌아서앞으로

나가면이제는초라해진식물원이자리잡고있는곳이신궁의본전이위치했던곳이다.

2005 봄 289288 건축과 사회

식물원을뒤로하고옆으로난길을따라남산순환도로에들어서서남쪽을따라걷다전망좋을것같은곳

에위치한독일문화원을지나열려있는주차장9)으로들어서면이전과는다른색다른풍경이펼쳐진다.

남산의겉과속이전쟁과국가안위그리고경제개발로멍들어갈때남산의북사면에는6.25전쟁으로갈곳

을잃은피난민들이모여들기시작했다. 이른바해방촌의시작이다. 피난민에의해남서측산록에자리잡은

해방촌은경제개발기에‘무작정상경’으로대표되는이촌향도민들에의해그입지가공고히되었다. 해방촌

이인기가있었던것은도심과서울역이도보권인해방촌의입지덕분이다. 날품팔이라도하면서삶을이어가

려는이들에게는서울역과도심이가까운따뜻한남산의산록은최적의주거지 던것이다.

해방촌에대해서는많은기록이남아있다. 소설가강신재는1957년에<해방촌가는길>을발표했고, 나이

지긋한분에게는아스라한기억으로남아있을유현목감독의<오발탄>의무대가되기도했다. 예전해방촌

의때깔을많이벗은지금, 해방촌은그현장을기억하는많은이들에의해이러저러한기록으로곳곳에남아

있다.

이제해방촌도과거의모습을많이벗어나고있다.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많은다세대주택들이입지해

있고몇채남지않은슬럼의흔적은빠르게그모습이사라지고있다. 그러나해방촌에는아직도전후복구기

의의지를담았던‘신흥(新興)’이라는말이곳곳에남아있다. 새롭게흥하겠다는의지를반 하는‘신흥상회’

‘신흥여관’등은70년대를살아온이들에게는매우익숙한단어들이다.해방촌에는그러한이름의흔적이‘신

흥길’로남아있어해방촌에둥지를틀었던이들이미구에꿈꾸었던흥한사회의여망을증거하고있다.

조선신궁본전이자리했던현재의중앙광장

이승만동상

해방촌전경

Page 8: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련했던회관은접근이어렵고어린이에게위

험할뿐아니라확장이어려운대지조건으로

인해 5년만에광진구능동에위치한어린이

대공원옆으로이전하고지금은서울시교육

과학연구원으로사용되고있다.

마지막계단을오르면정면에반듯하게정

리된정원이눈에펼쳐진다. 조선신궁이위치

했던곳(현중앙광장)이다. 해방후에일제의

잔재를깨끗이정리하지못했던우리 지만

다행히조선의정신세계를지배하는상징이

었던조선신궁은이땅에서사라졌다. 그런데그신궁을없앤것은우리들이아니었다. 해방이되자일인들은

이튿날오후에승신식(昇神式)이라는폐쇄행사를갖고동년9월7일해체를시작하여10월6일작업을마무리

한후나머지를소각한후철수했다고한다. 유감스럽게도해방이되었음에도불구하고우리는일본제국주의

의상징을지울수있는기회를가질수없었다.

해방과함께남산에서조선신궁이철거되었지만, 남산이우리

시민의품에돌아오기까지는많은세월을기다려야했다. 신궁

이있던그자리에들어선것은이승만전대통령동상(윤효중

작)이었다. 동상은1956년8월15일81세 던대통령의나이에

맞춰 81척높이로세워졌다. 그러나 4.19혁명으로동상은학생

들에의해부서지는수난을당했고우남정7)으로불리던팔각정

의이름도지워졌다. 자신의동상을발아래민의를대변하는국

회의사당을건립하려했던이승만의노욕이부른결과 다.

이곳이조선신궁이었다는사실을의식하고지어진건물이구

어린이회관을마주하고서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이그것이

다. 식민지배의원흉이었던이등박문을사살한안중근의사기

념관8)을조선신궁터의한을풀고일본에대항할수있는대안으

로판단했던것같다. 기념관은전통건축양식을콘크리트로번안해서지어졌는데이같은건물을박정희전

대통령이선호했기때문에콘크리트로번안된전통건축은‘박정희양식’으로불리기도했다. 1974년에는현

재의동상도세워졌다.

구어린이회관과안중근의사기념관을뒤로하고한여름시원한물줄기를자랑했을분수를돌아서앞으로

나가면이제는초라해진식물원이자리잡고있는곳이신궁의본전이위치했던곳이다.

2005 봄 289288 건축과 사회

식물원을뒤로하고옆으로난길을따라남산순환도로에들어서서남쪽을따라걷다전망좋을것같은곳

에위치한독일문화원을지나열려있는주차장9)으로들어서면이전과는다른색다른풍경이펼쳐진다.

남산의겉과속이전쟁과국가안위그리고경제개발로멍들어갈때남산의북사면에는6.25전쟁으로갈곳

을잃은피난민들이모여들기시작했다. 이른바해방촌의시작이다. 피난민에의해남서측산록에자리잡은

해방촌은경제개발기에‘무작정상경’으로대표되는이촌향도민들에의해그입지가공고히되었다. 해방촌

이인기가있었던것은도심과서울역이도보권인해방촌의입지덕분이다. 날품팔이라도하면서삶을이어가

려는이들에게는서울역과도심이가까운따뜻한남산의산록은최적의주거지 던것이다.

해방촌에대해서는많은기록이남아있다. 소설가강신재는1957년에<해방촌가는길>을발표했고, 나이

지긋한분에게는아스라한기억으로남아있을유현목감독의<오발탄>의무대가되기도했다. 예전해방촌

의때깔을많이벗은지금, 해방촌은그현장을기억하는많은이들에의해이러저러한기록으로곳곳에남아

있다.

이제해방촌도과거의모습을많이벗어나고있다.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많은다세대주택들이입지해

있고몇채남지않은슬럼의흔적은빠르게그모습이사라지고있다. 그러나해방촌에는아직도전후복구기

의의지를담았던‘신흥(新興)’이라는말이곳곳에남아있다. 새롭게흥하겠다는의지를반 하는‘신흥상회’

‘신흥여관’등은70년대를살아온이들에게는매우익숙한단어들이다.해방촌에는그러한이름의흔적이‘신

흥길’로남아있어해방촌에둥지를틀었던이들이미구에꿈꾸었던흥한사회의여망을증거하고있다.

조선신궁본전이자리했던현재의중앙광장

이승만동상

해방촌전경

Page 9: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용산에주둔한미군이자리를내어줌

에따라100여년만에우리품으로돌아

오는용산을어찌할것인가가국민적관

심이되고있다. 이제해방촌도그운명

을달리해야하는시점에처할지도모른

다. 북악에서종묘를거쳐남산에이르

는녹지축을한강까지잇고자하는바람

이많은공감대를형성해가고있기때문

이다. 해방촌이그길목을지키고있기

에눈앞에펼쳐진이풍경도우리시야에

서사라지고, 어느때인가기억에서마저

지워질지도모른다.‘남산제모습찾기

운동’이전개되면서폭파공법으로화려

하게사라졌던남산외인아파트처럼해

방촌도우리의기억속에서날려보내야

할곳일까?

해방촌은오늘의우리삶을일궈낸현

장이있었던곳이다.

1) 국 왕립지리학회 소속 지리학자로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4차례 조선을 방문한 후, 저서 <한국과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를남겼다.

2) 10인의위인`̀:`̀이순신, 세종대왕, 을지문덕, 사명대사, 김유신, 강감찬, 계백, 광개토대왕, 김춘추, 윤관

3) 1969년9월23일건립

4) 1969년8월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건립

5) 1969년9월성재이시 선생동상건립위원회건립

6) 현재교육과학연구원으로사용되고있다.

7) 우남은이승만전대통령의호

8) 1970년10월26일개관

9)‘빛깔있는책’으로유명한출판사대원사의주차장이다.

본 의후반부는<문화와나> 2004년겨울호‘근현대건축순례-남산편’에게재된 입니다.

290 건축과 사회

해방촌전경

해방촌의마지막흔적, 호국신사터● ● ● ● ● ●

새 건 축 사 협 의 회

목적과정당성 294

정책노선과실천방안 295

정강 297

행동강령및윤리규약 299

A-Z 301

회원가입원서 307

● ● ●

Page 10: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답사시작점, 성곽이위치했던힐튼호텔건너편축대위는일제강점기에조선신궁터로정지되었다.

아동공원오르는길, 이곳은성밖이다.

아동공원에서바라본서울전경

김유신장군동상, 애국선열조상위원회에의해건립된유신시대무인동상

백범광장의백범김구동상

구어린이회관과구조선신궁계단

구어린이회관에서바라본서울전경

안중근의사기념관과동상, 콘크리트로재현된한옥기념관

구조선신궁터, 조선신궁본전이놓 던곳에는현재식물원이위치해있다.

구조선신궁본전터에서바라본신궁터

독일문화원

해방촌전경, 대원사주차장, 해방촌(근경)과용산(원경) 전경,왼편의뾰족한교회탑이해방촌과역사를함께한해방교회다.

해방촌가는길

해방촌의중심, 해방촌오거리

해방촌신흥시장, 거리에서는보이지않는숨은시장이다.

해방촌신흥시장내부전경

해방촌의마지막흔적들(구호국신사터)

해방촌신흥길

구호국신사계단

답사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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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사회」2005 봄 / 새건축도시건축답사:̀̀남산-̀̀해방촌식민지배의흔적과해방·분단의산물해방촌

-̀ 안창모경기대학교건축전문대학원교수

Page 11: [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답사시작점, 성곽이위치했던힐튼호텔건너편축대위는일제강점기에조선신궁터로정지되었다.

아동공원오르는길, 이곳은성밖이다.

아동공원에서바라본서울전경

김유신장군동상, 애국선열조상위원회에의해건립된유신시대무인동상

백범광장의백범김구동상

구어린이회관과구조선신궁계단

구어린이회관에서바라본서울전경

안중근의사기념관과동상, 콘크리트로재현된한옥기념관

구조선신궁터, 조선신궁본전이놓 던곳에는현재식물원이위치해있다.

구조선신궁본전터에서바라본신궁터

독일문화원

해방촌전경, 대원사주차장, 해방촌(근경)과용산(원경) 전경,왼편의뾰족한교회탑이해방촌과역사를함께한해방교회다.

해방촌가는길

해방촌의중심, 해방촌오거리

해방촌신흥시장, 거리에서는보이지않는숨은시장이다.

해방촌신흥시장내부전경

해방촌의마지막흔적들(구호국신사터)

해방촌신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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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사회」2005 봄 / 새건축도시건축답사:̀̀남산-̀̀해방촌식민지배의흔적과해방·분단의산물해방촌

-̀ 안창모경기대학교건축전문대학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