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時代遺憾, 1996년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 신세대, 서태지, x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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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62 / 특집1 세대의 문화정치학 특집 1 세대의 문화정치학 時代遺憾 , 1996 년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 신세대 , 서태지 , X 세대 이재원 1993121, 낯선 광고 한 편이 텔레비전 화면에 선을 보였다 . 짧게 끊어 지는 화면들 , 천정에 매달린 채 박살나는 전구 , 텅 빈 방안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샌드백 , 고층빌딩 위를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 , 파편화된 장면 사이를 연결하는 자동차들의 질주 . 그리고 반복되는 한 줄의 카피 . “, 트윈엑스 세대 ?” ()아모레 퍼시픽이 X세대 감성 남성화장품이라고 내놓은 트윈엑스 의 광고였다 . 같은 회 사가 동시에 출시한 여성화장품 내 나이 201/2 레쎄 와 더불어 이 광고는 당시 신인에 가까웠던 이병헌과 신은경을 X세대의 아이콘으로 등극시키며 이듬해부 터 우리 사회에 뜬금없이 ‘X세대 라는 말이 창궐토록 했다 . 돌이켜 보면 이 광고는 한 세대 의 종말과 또 다른 세대 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광고였다 . 자칫 오해하기 쉽지만 이때 종말을 고한 것은 386세대가 아 니다 . 386세대는 훨씬 뒤에 자살할 것이었다 . X세대의 등장으로 죽은 것은 신세 였다 . 요컨대 X세대 이전에 신세대가 있었다 . 그러니 X세대는 친부살해가 아 니라 동족살해를 자행한 셈이다 . 얼핏 보면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신세대 =X세대 혹은 신세대 X세대 라는 생각이 상식 처럼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 어떤 점에서는 이것 자체가 저 동족살해가 망각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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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2호 / 특집 1 세대의 문화정치학

특집 1

세 의 문화정치학

時代遺憾, 1996년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

신세 , 서태지, X세

이재원

1993년 12월 1일, 낯선 고 한 편이 텔 비 화면에 선을 보 다. 짧게 끊어

지는 화면들, 천정에 매달린 채 박살나는 구, 텅 빈 방안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샌드백, 고층빌딩 를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 편화된 장면 사이를 연결하는

자동차들의 질주. 그리고 반복되는 한 의 카피. “나, 트 엑스 세 ?” (주)아모

퍼시픽이 X세 감성 남성화장품이라고 내놓은 ‘트 엑스’의 고 다. 같은 회

사가 동시에 출시한 여성화장품 ‘내 나이 20과 1/2 쎄’와 더불어 이 고는 당시

신인에 가까웠던 이병헌과 신은경을 X세 의 아이콘으로 등극시키며 이듬해부

터 우리 사회에 뜬 없이 ‘X세 ’라는 말이 창궐토록 했다.

돌이켜 보면 이 고는 한 ‘세 ’의 종말과 다른 ‘세 ’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 인 고 다. 자칫 오해하기 쉽지만 이때 종말을 고한 것은 386세 가 아

니다. 386세 는 훨씬 뒤에 자살할 것이었다. X세 의 등장으로 죽은 것은 ‘신세

’ 다. 요컨 X세 이 에 신세 가 있었다. 그러니 X세 는 친부살해가 아

니라 동족살해를 자행한 셈이다. 얼핏 보면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신세 =X세 ’ 혹은 ‘신세 X세 ’라는 생각이 상식

처럼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에서는 이것 자체가 동족살해가 망각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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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잘 보여 다.

모든 세 는 동질 이지 않다: 1970년 생의 분화

‘신세 ’라고 부르든 ‘X세 ’라고 부르든 흔히 사람들이 이런 명칭으로 지칭

하려는 상은 “1970년 에 태어나, 1990년 에 학에서, 인생의 20 를 보낸 사

람들”이다. 이 집단은 그 이 세 를 지칭하는 ‘386세 ’에 빗 어 ‘297세 ’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보다 최근에는 연령을 기 으로 2635세 라 불린 도 있고,1)

‘88만원세 ’라는 명칭이 유행하게 된 뒤로는 386세 와 88만원세 사이에 ‘낀’

세 라는 의미로 ‘298세 ’라고 불리기도 한다(386에서 88을 빼면 298이다).2) 그

지만 이런 세 규정은 많은 사실을 폭력 으로 은폐하기 마련이다. 특히 1970년

생들과 련해서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한데, 왜냐하면 이들은 역사상 유례없

을 만큼 다양한 명칭으로 성격이 규정된 집단일 뿐만 아니라, 특히 거의 유일하

게(혹은 최 로) ‘자기 세 ’의 규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세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0년 생들을 하나의 동질 인 집단으로 묶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편의상 학번으로 구분해보면 1970년 생은 ① 89-91학번, ② 92-96학번, ③

97-99학번이 서로 구분된다. 여기서 ③은 훗날 ‘N세 ’라는 다른 명칭을 따로 부

여받기도 하는데, 1997년은 정보통신부 주도의 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 1단

계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어 인터넷이 본격 으로 PC통신을 체하기 시작한 원

년이기도 하다.(한국인터넷 회가 창설되고, 국내 최 의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

메일넷이 시작된 것도 이 해이다.) 한편 ①과 ②를 구분해주는 것은 ‘제2의 6월항

■ 1) 제일기획, 우리 시 의 Fair-ents: X-Mommy, X-Daddy ( 란통신/2호), 제일기획, 2005, 3쪽; 이세진, 「우리 시 의 미드필더, 2635세 」, 제일커뮤니 이션 359호, 2005년 12월호, 제

일기획, 64쪽. ■ 2) 고재열, “386세 와 88만원세 간의, 298세 를 아시나요?”, <독설닷컴>, 2008년 12월

3일자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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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이 되리라고 잔뜩 기 를 받았다가 허무하게 사그라진 1991년 5월 투쟁의 기

억이다. 이 기억을 간직한 ①은 정서 으로 386세 에 훨씬 더 가깝다.3) 따라서

범박하게 말하면 ‘신세 ’이든 ‘X세 ’든 모두 ②를 지칭하는 명칭이다(사실 이 집

단 자체도 동질 이지 않다).

사실 이 은 1992년 겨울부터 1993년 가을까지 이른바 ‘신세 논쟁’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때부터 차 지 되어왔다. 그것도 바로 1970년 생 자

신들에 의해서 말이다. “왜 책권이나 읽었다는 사람들이나 는 사실 확인도 제

로 해보지 못한 언론사의 기자들은 신세 를 무슨 동일하고 균질 인 성격을

가진 집단인 양 그 게 일반화시키고 제멋 로 꼬리표를 달고 난리냐”4)라는 것

이 이들의 항변이었다. 실제로 당시 신세 라고 불리던 1990년 학번 학생들

을 상으로 실시된 어느 여론조사에 따르면, ‘과반 수 이상’이 스스로를 신세

로 규정하지 않았다.5)

그러나 정작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반 수 이상’의 나머지이다. 이 나머지

는 스스로를 신세 라고 응답한 것이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신세 는 언론과 기

성세 가 말하는 신세 가 아니었다. 이들은 기존의 신세 규정이 자신들의 모

습을 제 로 반 하지 못한다고 아주 부정 으로 평가하며, 신세 는 매스컴에

서 떠들어 듯이 성에 지나치게 개방 인 이기주의자라거나 소비주의의 첨병이

라기보다는 새로운 가치 을 가진 주체 인 인간상이라고 규정했다.6) 그 다면

우리는 이 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1970년 생들의 반응에는 이미 신세

라는 존재가 제되어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신세 논쟁은 “신세

가 있다/없다”라는 축보다는 “신세 는 ~이다/아니다”라는 축을 따라 진행 다

■ 3) 고제규․고재열, 「낀세 91학번 ‘맨손의 청춘’」, 시사 제601호, 2001년 5월 3일자.■ 4) 이성욱, 「진보 문화운동과 신세 문화의 연 를 모색한다」, 월간 말 , 1994년 2월호, 233쪽.■ 5) 학문화그룹, 학생,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94 학생 의식조사 연구보고서 , 90

쪽. 다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9%만이 자신을 신세 로 규정했다. 한국청소년개발원, 국

제화 시 의 청소년: 신세 의 특성과 역할 (5월 청소년의 달 기념토론회 자료집), 1994, 61쪽.■ 6) 학문화그룹, 학생,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 87-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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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이다.

물론 신세 가 없다는 을 취한 1970년 생들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

다. 스스로를 신세 로 규정하지 않은 ‘과반 수 이상’ 새로운 가치 을 가진

주체 인 인간상이라는 새로운 신세 규정조차도 거부( 는 유보)한 집단이 있

음을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정작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런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런 집단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신세 , 더

나아가 X세 라는 명칭이 1970년 생들을 통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여겨지게

느냐이다.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면 스스로를 신세 로 규정하지 않은 ‘과반

수 이상’이 결국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그래서 상 방 진 으로 투항하거나 변

하면서 소멸 기 때문에 그 게 다. 앞서 말한 동족살해는 바로 이에 한

이야기이다.

사(前史): 1991년 5월 투쟁이라는 기억

오늘날 신세 논쟁을 회고 으로 다루는 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신세 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은 서태지의 등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꼼꼼한 사람이라면

신세 논쟁 이 의 오 지족 소동을 환기시킬 것이고, 더 나아가면 그 이 의

소 ‘뉴키즈 온 더 블록’ 사태(이하 뉴키즈 사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들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신세 로 규정하지 않은 ‘과반 수 이상’의

수수께끼를 풀려면 우리는 1970년 생들을 분화시킨 첫 번째 계기, 즉 1991년

5월 투쟁의 기억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991년 5월 투쟁이란 ‘제2의 6월항쟁’이 되리라 큰 기 를 모은 사건이다.

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 학교 경제학과 1학년이던 강경 가 학원자주화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교내 시 도 백골단의 쇠 이 에 맞아 사

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뒤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에 항의해 11명이 스스로

의 몸에 불을 사르고, 1명이 의문사하고, 다른 1명이 시 도 강경진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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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사하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약 50여 일에 걸쳐 규모 시 가 벌어졌는데, 이

것이 1991년 5월 투쟁이다. 그러나 이처럼 거셌던 투쟁은 5월 8일 분신자살한

당시 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를 같은 단체의 총무부장으

로 있던 강기훈이 필했다는 ‘강기훈 유서 필 사건’, 그리고 6월 3일 한국외국

어 학교에서 학생들이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에게 달걀과 가루를 던진 ‘외

사건’을 기 으로 느닷없이 소멸했다.7)

1991년 5월 투쟁의 패배 직후 학가에 남은 것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교정

과 집단의 열기 속에 개인 인 고민을 풀지 못한 채 깃발을 내던지고 사라져버린

몇 명의 동료들, 된 피로와 축제라는 일감”8)뿐이었다. 게다가 당시 투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89-91학번들은 한편으로는 친구와 후배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유서를 통해 자신의 희생으로 투쟁이 보다 강하게 확 되기

를 염원했던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투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에 깊은 무력

감을 느끼게 된다.9)

그러나 신세 논쟁과 련해 이 1991년 5월 투쟁이 요한 이유는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과 이데올로기에 새삼 주목하게 다는

데 있다. 곧 살펴보겠지만 신세 논쟁 당시 스스로를 신세 로 규정하지 않은

‘과반 수 이상’의 정서를 주도한 것은 바로 이 1991년 5월 투쟁 이후 ‘학생운동

의 기’라는 정세 속에서 활동해야만 했던 활동가들이다. 활동가들 내부에서 일

어난 이런 변화의 움직임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믿었던 민 혹은 에 한

의구심으로 나타났다. 이와 련해 외 사건을 심으로 당시의 기억을 회상한

어느 활동가의 말은 많은 시사 을 던져 다.

■ 7) 1991년 5월 투쟁에 한 자세한 경과 소개와 분석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91년 5월 투쟁

청년모임,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1년 5월 (이하 1991년 5월 ), 이후, 2002; 김정한, 과 폭력: 1991년 5월의 기억 , 이후, 1998. ■ 8) 김별아, 개인 체험 , 실천문학사, 1999, 124쪽. ■ 9) 최경 , “10년이라는 시간이 이제 우리를 말하게 한다”, <오마이뉴스>, 2001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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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사건이 터졌는데,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는 국면이 습니다. 제가 지 언론

에 몸담고 있는데, 당시 언론이 보수 인 입장을 가지고 간 것 같지만, 사실 언론

은 하나를 치고 나갈 때 국민들의 반응이 아닌 것 같다면 꼬리를 감추거든

요. 그런데 그 당시 계속 치고 나갔던 것은, 사실 사람들도 역시 외 사건을

보는 시각이 학생들에게 비 이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 하나의 사건으로

세가 역 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믿고 있었던 사람들의 기반이 약했다는 생각

이 듭니다.10)

사실 강기훈 유서 필 사건과 외 사건은 의나 운동을 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동료의 죽음까지 이용할 수 있고 스승까지 폭행할 수 있는 반인륜 이고

비도덕 인 패륜아들이 바로 운동권이라는 인식을 심어 으로써 1991년 5월 투

쟁에 찬물을 끼얹은 결정 인 사건이었다.11) 놀랍게도 은 검찰의 강압․조

작으로 얼룩진 강기훈 유서 필 사건12)과 우발 인 외 사건을 학생운동권의

폭력성과 민주화세력의 반도덕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의미화한 보수언론들과

정치권의 해석에 쉽사리 동조했던 셈이다.

이 듯 1991년 5월 투쟁을 통해 드러난 의 양면성을 이해할 필요성은 학

생운동권이 학습하던 커리큘럼의 변화에 반 다. “91년 이후 어디에서 내려오는

커리큘럼이나 자료이든지 그람시, 진지 , 헤게모니,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이데

올로기 등의 생경한 개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91년 이 에 나는 다른 정치

입장을 가진 활동가들과 사회구성체, 구체 인 술, 슬로건 등을 가지고 논쟁했

다. 하지만 91년 5월 이후 학습과 자기 정체성의 패러다임이 변하기 시작했다.”13)

■ 10) 이 인용문은 2001년 5월 12일 한국외국어 학교에서 열린 “91년 5월 투쟁 학술심포지엄”에서 당시 앙일보 기자 던 이가 씨가 한 발표이다. 91년 5월 투쟁 청년모임, 1991년

5월 , 174-175쪽. 강조는 인용자.■ 11) 이에 앞장 선 것이 바로 조선일보 다. 보수세력에 의한 외 사건의 의미화 과정을

분석한 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이유경, 「‘6.3 외 사건’에 한 언론의 ‘상징폭력화’ 과정」, 1991년 5월 .

■ 12) 종휘, 「강기훈씨 ‘유서 필 명’ 16년만에 벗는다」, 한겨 , 2007년 11월 13일자.■ 13) 김원, 「80년 와 90년 의 결 」, 1991년 5월 ,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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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1991년 5월 투쟁에서 ‘살아남은 자들’(89-91학번)과 1992년 학 교정

에 발을 들여놓은 92학번에게 남겨진 것은 단순히 폐허와 피로와 일감만이 아니

었다. 이들에게는 한편으로 학생운동권에 들 워진 폭력성과 반도덕성의 멍에를

벗어던져야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하면 을 움직이는 지배이데

올로기를 극복하고 다시 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과제까지 남겨진

셈이다.

학생운동의 질서재편과 변화라는 화두: 이념에서 문화로

어떤 에서 보면, 1991년 5월 투쟁은 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에도 집권

여당의 국가폭력과 연이은 실정으로 그 정당성을 유지하고 있던 변 과 민주화

에의 꿈을 다시 불살릴 수 있는 호의 기회 다. 그러나 그 꿈은 꿈으로 끝났고

결국 ‘운동의 기’가 찾아왔다. 1992년은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이 기를 학생운

동의 질서재편 논의로 돌 하려던 시기 다. 그 방안의 하나가 바로 ‘민 의 독자

정치세력화’와 그에 따른 ‘비합법 노선 폐기’에 근거한 공개 학생정치조직의

결성이었다.

사실 이런 움직임은 충분히 견된 것이었다. 1991년 5월 투쟁 이후인 7월경

국내 비합법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해온 표 인 세 개 정 (인천지역민주노동자

연맹,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 노동계 )가 맑스- 닌주의에 입각한 비합

법 조직 노선을 폐기하고 합법 노동자 정당 노선을 선언한 바 있기 때

문이다. 학생운동의 질서재편 논의는 ‘운동의 선배들’이 주창한 이 신(新)노선에

부응한 것이다.

이 질서재편 논의는 기존 학생회 체계에 한 반성과 안모색의 형태로 진

행 다. 386세 의 로망이자 1980년 학생운동의 주축이던 국 학생 표자

의회( )를 통해서 등장한 학생회는 활동가들의 인큐베이터로서 신입생들의

의식화․조직화부터 각종 시 와 행사를 한 인 동원까지 모두 담당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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랬던 학생회가 1991-92년을 후로 활동가들의 이탈과 일반 학우들을 도구화했

다는 거센 비 등에 직면하는 어려움을 겪게 는데, 계열의 우 활동

가들이 선배들의 ‘ 투 학생회론’과 다른 ‘자주 학생회론’을 주장하며 학생회

를 내부 으로 바꾸려 하는 동안에 비(非) 계열의 좌 활동가들은 조

직(학생회)과 정치조직(학생정치조직)의 분리라는 안을 내놓게 된 것이었다.

이런 질서재편 논의는 1992년 5월 29일 제6 출범식에서 국내 최

의 학생정치조직 진보학생연합(진학련)의 결성을 알리는 리 릿이 배포되고, 이

듬해 5월 27일 을 뒤이은 한국 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생활, 학문, 투

쟁의 공동체’라는 구호를 내걸고 등장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세가 된다. 그런

데 이런 질서재편 논의에서 주목할 것은 우 활동가들이든 좌 활동가들이든

모두 ‘학우 ’이라 지칭되던 일반 학생들의 이해 계와 정서를 강조하며 학

사회에 을 돌렸다는 이다.

당시에 유행하던 “학생회는 학우들에 의한, 학우들을 한, 학우들의 공간”

“생활 속의 진보, 학생자치” 등과 같은 구호들이 이 을 잘 말해주는데, 이런 변

화는 변 운동의 수세기에 직면해 학생운동은 변 운동과 함께 가되 더 이상 변

운동의 부 가 아니라 일반 학우의 실과 호흡하는 부문운동으로서의

상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인식을 그 근거로 삼고 있었지만, 실상 그 이면에는 학

생운동의 정당성과 성 회복이라는 박한 실이 있었다. 이 은 훗날 많은

비 을 받게 되지만 ‘학원 개 운동’을 면 으로 제기한 진학련이 좌 활동

가들 내부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14)

이 당시에 학원 개 운동을 주장한 진학련은 오늘날 68 명으로 알려진 신

좌 운동을 참조했다.15) 비록 당시에는 서구의 노동자 자주 리운동을 소개하며

이와 련해 교육개 의 이론 근거를 부각시키기 해서 신좌 운동이 언 된

데 불과하지만,16) 흔히 문화 명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신좌 운동의 소

■ 14) 이 석, 「90년 학생운동사 ②: 92년」, 학생신문 , 2001년 9월 19일자.■ 15) 앙정치연수원, 조반유리(造反有理) , 진보학생연합,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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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향후 신세 논쟁을 경유해 하나의 붐을 이루며 학생운동권 내부에 상당한

력을 가져온다. 을 이해하는 임이 ‘이데올로기론’에서 ‘문화론’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맑스주의자에게 ‘문화’는 이데올로기 인 것의 일반 인 명칭이다”17)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 좌 에게 이데올로기와 문화 개념은 서로 한 계를 맺고

있다. 흔히 좌 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문화를 매개로 에게 각인된다( 는

을 자본주의 주체로 ‘생산’한다)고 본다. 그러니 이데올로기론에 주목하던 당

시 활동가들이 문화론으로 넘어가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신세

논쟁과 련해서 이 변화는 매우 요한 함의를 띤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신세 ’)을 능동 인 항의 주체로 볼 것이냐 수동 인 소비문화의 주체로

볼 것이냐는 허구 논쟁구도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해 문제를 단순화시켰기 때

문이다. 어 든 은 마련 고, 이제 쇼가 시작될 차례 다.

이름을 둘러싼 싸움: 오 지족에서 신세 로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기성세 가 자신들과 다른 새로운 세 에 심을 갖게

된 계기는 뉴키즈 온 더 블록 사건이었다. 1992년 2월 16일 잠실 올림픽 체조경기

장에서 열린 뉴키즈 온 더 블록 내한공연 당시 여고생 한 명이 압사당했던 이

일을 계기로 많은 언론들은 일제히 이성 사고가 부족하고 즉흥 이며 감각

인 문화에 휩쓸리는 ‘요즘 아이들’을 걱정하는 한탄조의 기사들을 잇달아 보도하

게 된다.18) 이른바 ‘뉴키즈 사태’라고 불렸던 이 사건은 이후 불어 닥칠 신세

■ 16) 사실 이 시 에는 68 명에 한 자료 자체가 거의 없었다. 68 명에 한 자세한 소개가

이 진 것은 1998년부터이다. 정 백, 「68학생운동의 한국 수용」, 독일연구 제16호, 2008년

겨울.■ 17) Louis Althusser, "Cremonini, peintre de l'abstraction," in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Paris: Stock/Imec, 1995), p. 585.■ 18) 김의구․정재호, 「깔리면서도 “뉴키즈…”: 10 란 불상사 장 안 」, 국민일보 , 1992년 2월 18일자; 박래용, 「‘가난한 감성’ 란으로 폭발, ‘뉴키즈’가 던진 충격과 교훈」,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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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時代遺憾, 1996년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신세대, 서태지, X세대

논쟁의 행연습 같은 것이었다. 한국일보 가 “오 지족의 세계”라는 제목의 기

획기사를 총 4회 연재(1992년 10월 18-21일)한 것을 시작으로 보수언론들이 ‘압구

정동 오 지족’이라는 형상을 통해 일제히 신세 를 공격하기까지 일 년도 채 걸

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졸부들의 2세로서 하룻밤에 수백만 원의 용돈을 흥청망청 쓰거나, 외제 승용

차를 타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오 지를 건네 자기 승용차에 태운다는

오 지족. 1993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신세 논쟁은 이 게 보수언론들에 의해

먼 시작 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세 를 경험 으로 찰한 기술(記述)이라

기보다는 기성세 의 주술(呪術) 같은 것이었다. 산업화시 의 주역인 자신들이

피땀 흘려 경제를 일궈놓은 덕분에 “단군 이래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최 의 세

”가 된 은 세 들이 고마운 모르고 게 까불어 니 부모들이 단도리를

잘 하자는 주술 말이다.

한 그것은 일종의 주문(呪文)이기도 했다. 기성세 가 이토록 사회를 풍요

롭게 만들어놨으니 희들은 선배들처럼 쓸데없이 데모하러 다니거나 괜히 사고

치지 말고 자본주의가 제공해주는 물질 혜택과 문화를 당히 자유롭게

리며 열심히 공부해 국가에 충성하는 건 한 시민이 되라는 주문 말이다. 이런

에서 ‘신세 =오 지족’이라는 형상은 ‘학생운동권=비도덕 인 패륜아’라는

형상을 통해 톡톡히 재미를 본 보수언론들이 새로운 세 를 소비사회에 포섭해

탈이념성과 탈정치성을 띠도록 만든 발명품은 아니었을까?19) 차이가 있다면

자는 후속책이었고 후자는 방책일 뿐이었을?

그러나 ‘서태지’라는 존재 때문에 보수언론들의 오 지족 논의는 곧 항에

직면한다. 1992년 4월 11일 MBC의 <특종 TV연 >를 통해 첫 선을 보인 직후

폭발 인 인기몰이를 해 데뷔앨범을 1백70만 장이나 팔아치우며 연말의 모든 가

신문 , 1992년 2월 19일자.■ 19) 문화이론연구회(고길섶 정리), 「‘신세 론’을 비 한다」, 문화과학 5호, 1994년 , 282-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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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상을 휩쓸었을 때만 해도 보수언론들은 그를 무시했다.20) 상황은 이듬해 나온

2집마 2백20만 장이 팔려나가자 정반 가 다. 여 히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시 의 우상인가, 아니면 퇴폐의 표본인가”라는 의문을 표명했지만 조선일보

조차 서태지를 인터뷰할 정도 다.21)

어느덧 새로운 세 의 감각과 사고방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신세 의 아

이콘으로 등극한 서태지를 논거로 삼아, 이때부터 신세 =오 지족이라는 등식

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의들이 거 등장하게 된다. 신세 는 소비지향 이지만

그것은 낭비가 아닌 합리 소비이고, 개인주의 이지만 이기주의가 아니라 개

방성과 자율성이고, 탈권 주의 이지만 탈집단주의가 아니라 탈획일주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세 는 “이 사회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창조성을 실 할 장을

발견하지 못한 나머지 소비 이고 상업 인 문화 속에서 창조 아이덴티티

를 확인”하는 존재이지만 “개 의 진정한 필요를 구하고 있고, 장기 으로 보

아 개 의 진정한 에 지를 제공해 원동력”이라고까지 새롭게 규정된다.22)

자유주의자들과의 불장난: 서태지와의 연 ?

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사람들은 ‘문화평론가’라고 불렸거나 그 게 자임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들을 자유주의자( 는 문화주의자)라고 부를텐데, 간단히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신세 의 새로움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이 말하

는 신세 의 새로움은 바로 신세 =오 지족임을 주장한 보수세력이 자신들의

공로로 돌리던 그 물질 풍요로움, 그리고 신세 의 선배 격인 386세 가 그 공

로를 자신들에게 돌렸던 민주화의 진 에 근거한 것이다. 요컨 1987년의 6월

■ 20) 김 숙, 「≪TV ≫ 상 수상한 서태지와 아이들: “오 지족 아닌 철 한 노동자”」,

시사 166호, 1992년 12월 31일자.■ 21) 정종헌, 「2집 앨범 하여가 돌풍」, 조선일보 , 1993년 7월 19일자.■ 22) 강 희, 「신세 와 구세 의 고뇌어린 화해」, 사회평론 길 통권93권, 1993년 9월호, 160-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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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時代遺憾, 1996년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신세대, 서태지, X세대

항쟁이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1992년 최 의 민간정부인 김 삼 정권(문민정부)

이 등장함으로써 한국사회는 상 으로 민주화 고, 이 의 3 호황( 유가․

이율․ 환율)이 소멸되는 조짐을 보이기는 하나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로도

한국의 1인당 GDP는 계속 증가했다는 것이다(1986년 2천7백1달러→1992년 7천5

백39달러→1995년 1만1천4백71달러).

그래서 이들은 이 게 주장한다. 이제는 경제의 시 도, 정치의 시 도 아니

다, 지 은 문화의 시 이다! 이들이 염두에 둔 이 새로운 시 의 특성은 포스트

모던함이다. 이들이 구세 와 신세 를 구분하는 특징으로 내세웠던 욕 /쾌

락 , 문자 심 /복합감각 , 내성 /외향 , 은폐 /노출 , 축 /소비 , 미

래강박 / 실찰나 , 일원론 /다원 , 집단 /개인 등 무수한 이항 립은

결국 “지 은 문화의 시 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기 한 사 포석에 다름 아

니었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기를 신세 가 진정한 에 지원이 되어 것이라고 주장

한 ‘개 ’ 역시 문화 역에서 일어날 것이었다.23) 그리고 그 개 의 다른 이름

은 ‘자유’ 다. 이런 에서 한때 문화평론가로 ‘잘 나갔던’ 세칭 ‘자유주의자’의

진지한 자기성찰은 상당한 시사 을 던져 다. “그때는 이 게 생각했다. ‘1987년

부터 민주화로 이행해 한국 사회에서 평등은 확실히 제자리를 잡았다. 이제 민주

주의를 더 심화하려면 자유가 덧붙여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더 많은 자유

를 요구하는 일이 시 해 보 다. 순진하게도 그때는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좌

가 해야 할 가장 시 한 일 하나라고 생각했다.”24)

이들에게 서태지는 강력한 논거 다. 기성세 가 원하는 ‘ 학 입학→엘리

트교육→성공’이라는 정상경로를 무시한 이 고등학교 퇴자는 “‘2등은 기억되

■ 23) 이상화, 「신세 , 험스런 미궁인가 새로운 가능성인가?」, 이 학보 , 1993년 9월 6일

자; 조혜정, 탈식민지 시 지식인의 읽기와 삶 읽기 ③ , 하나의문화, 1994.■ 24) 강양구․안은별, “노무 ․이명박 낳은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 서동진의 <자유의 의

지, 자기 계발의 의지>”, < 시안>, 2009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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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62호 / 특집 1 세대의 문화정치학

지 않는다’는 고 문안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 학진학은 생각해 본 이 없다.

학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라는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1등의 들러리 노릇이

나 하던 다수 청소년에게 존재가치를 일깨워줬다.”25)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

다. 서태지는 천부 인 감성과 탁월한 능력으로 한국어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

지던 랩을 성공 으로 한국화해 당시 천편일률 이던 발라드와 트로트가 지배하

던 음악계의 도를 단숨에 뒤집어엎었을 뿐만 아니라 독학으로 마스터한

실력으로 로듀싱․엔지니어링․작사․작곡․편곡을 혼자 해냈으며, 기성세

의 온갖 험담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기 스타일을 발 시켜 힙합과 국악을 목

하는 놀라운 창조성을 과시하며 문화를 선도하는 ‘문화의 ’ 다. 결국 이들의

폭 인 지지로 서태지가 ‘문화 통령’이자 ‘주류 질서의 복자’로 시 의 아이

콘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26)

이제 서태지를 “미제국주의의 음악을 모방한 무국 음악인”이라며 경원시했

던 우 활동가든, “우리는 노동자입니다. 근본 으로 오 지족과 다릅니다”27)라

는 말에 콧방귀를 좌 활동가든, 이제는 그 어떤 학생운동 활동가들도 더 이

상 서태지를, 그리고 그가 변한다는 신세 를 무시할 수 없게 다. 그 최 의

반응이 1993년 7월 1일 발간된 이래 신세 논쟁을 가열시킨 신세 , 네 멋 로

해라 라는 집단 작물이었다.28) 자칭 ‘신세 운동권’임을 표방한 미메시스라는

그룹이 기획하고 집필한 이 책은 “평범하게 사느니 죽음을 달라”던 서태지의 외

침에 “더 이상 탄원은 없다. 돌 하라”라고 화답했다.

“신세 에 의한, 신세 를 한, 최 의 본격 신세 론”임을 표방한 것에

■ 25) 성우제, 「“교실이 있는 한 서태지는 원하다”」, 시사 제456호, 1998년 7월 23일자. ■ 26) 강헌, 「서태지, 주류 질서의 복자」, 리뷰 창간호, 1994년 겨울. 한 서태지는 1994년

어느 언론기 이 조사한 ‘한국을 움직이는 문화 술․연 ․스포츠계 인사순 ’ 5 에 오르

기도 했다. 김회권, 「시 가 깊어갈수록 ‘ 의 별’은 더욱 빛났다」, 시사 제1044호, 2009

년 10월 21일자. ■ 27) 김 숙, 「≪TV ≫ 상 수상한 서태지와 아이들」.■ 28) 미메시스, 신세 , 네 멋 로 해라 , 실문화연구, 1993. 이하 단락에서의 모든 인용은

별다른 언 이 없는 한 이 책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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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맞게 신세 , 네 멋 로 해라 는 신세 를 한 극 인 자기 변호 다. 미메

시스는 ‘신세 =오 지족’이라는 기성세 의 인식이 늘 학생운동으로 심기가 불

편했던 어른들의 타지라는 을 정확히 짚었다. 미메시스는 그 타지를 깨기

해 그들 말마따나 호소나 탄원이 아닌 정면 돌 를 감행했다. 자신의 성교 장

면을 엿보는 구경꾼의 을 바로 응시하는 포르노배우처럼. 그래, 우리가 신세

이다, 그런데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 바로 라, 이게

우리다! 이제 제 로 보이냐?

기성세 와의 면 을 해서 미메시스는 의 과 연 하기도 서슴지 않

았다. 미메시스는 부유층 자제들인 오 지족과 그들을 따라하려는 노동자 자식

들인 낑깡족과의 연 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서태지와의 연 도 강력히 요구

했다. 이들의 목 역시 자유주의 문화주의자들이 과옥조로 삼았던 ‘자유’

다. 이들에게 서태지는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이자 “자유로운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하는 명가”로 추앙받는다. 따라서 당연히 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세상도 “자유로운 사회 개인들간의 인간 인 교류, 그리고 그를 통해

실 되는 사회”29)이다. 이들이 이토록 자유에 목을 매는 이유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이 수동화되어 결국 노 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풍요로운

삶’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결국 이 게 서태지를 매개로 학생운동 활동가

들은 자유주의자들과도 연 하게 된다.

물론 당시 학생운동권 일각에서는 미메시스를 ‘듣보잡’ 취 했다. 활동가들은

같은 해( 신세 , 네 멋 로 해라 가 출간된 1993년) 7월 31일 “남녀 조직원들이

그룹 단 로 회합․음주하며 <포르노키오> 등 음란비디오를 시청하고, 공산주

의 명을 해 성의 공유와 상품화 반 명분으로 그룹섹스 활동”을 했다는 이유

로 경찰청 보안국이 미메시스 그룹 5명을 국가보안법 반 의로 구속했을

때도 별다른 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을 동료 취 하지 않았던 활동가

■ 29) 천호 , 「‘운동권 신세 ’ 미메시스의 신세 문화론」, 월간 말 통권88호, 1993년 10월호, 233-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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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조차도 이들이 던져놓은 화두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세

, 네 멋 로 해라 가 나온 해는 진학련이 신좌 운동을 소개하던 바로 그 해

기 때문이다.

“우리는 1917년 명보다는 1968년 랑스 5월 명으로부터 삶의 동력을 부

여받고 있다”고 주장한 미메시스는 자신들이 1968년의 서구 신좌 운동에서부터

1987년의 한국 6월항쟁에 이르는 ‘ 명 통’의 자임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돌이켜 보면 이들이 언 한 68 명은 희화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체로 걸러진

도발 세 론의 배경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신좌 운동의 역사가 이제 막 알려

지기 시작한 이 시 에서는 1991년 국내에 본격 으로 소개되어 운동진 을 떠

들썩하게 만들고 있던 포스트맑스주의나 신사회운동과 신좌 운동이 어떻게 다

른지가 미의 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미메시스의 논리를 따르면 서태지 역시 68 명의 자가 아닌가? 그 다면

서태지는 우리가 따라야 할 새로운 변 노선을 미리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혹

시 그 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이제 막 시도하려는 것이 미메시스가 말하는 그것

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고, 더 요하게는 자신들이 조직화해야 할 상

인 ‘학우 ’이 신세 라니 그 정체도 알아야겠고…. 이 게 이 해 2학기부터

활동가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미메시스가 만들어놓은 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애 의 진원지인 언론계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단체의 기획토론회에서까

지 격렬한 토론의 상이 되어 “신세 라는 유령이 한국 사회에서 날고 기고 있

다”30)는 놀라움을 사게 된 신세 -서태지 논쟁의 격화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환 : ‘X세 ’의 등장

“신세 기사와 심포지엄에 심을 보인 학생들은 학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 30) 주은우, 「90년 한국의 신세 와 소비문화」, 경제와 사회 제21호, 1994년 ,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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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성향의 학생들뿐이었다”31)라는 증언이 말해주듯이, 신세 -서태지 논쟁

은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심과 개입이 없었더라면 (오 지족 논쟁처럼 단순히

해 닝으로 끝나지는 않았겠지만) 지 우리에게 알려진 것만큼 확 재생산되

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도 그 게 빨리는. 그런데 앞서 말한 ‘과반 수 이상’

의 나머지, 스스로를 신세 라고 응답한 나머지 1970년 생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한창 유행했던 가요의 제목을 빌리면 이들은 별 탈 없이 살았다. 원래

살던 로. “흔히들 [90년 를] ‘ 문화의 융단폭격’이라고 하지만 잘 모르겠

다. 왠지 80년 와 비교하면 그 다는 이야기이지 우리들은 일상 으로 향유한

다. …선배들의 시선은 실성이 없다. 아니면 그 게 믿고 싶거나.”32)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보수세력이 말하는 신세 =오 지족이라는 등식이 일부

은이들의 특성을 체의 특성인 양 실을 왜곡․과장해 부정 ․편 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기성세 에게 바라는 것도 “재

처럼 이건 옳다, 건 그르다, 그러니까 옳은 길로 가라는 식”으로 쓸데없이

“간섭하거나 강요하지 말고 자유롭게 풀어주라”는 것이었다.33)

1993년 한 해를 뜨겁게 달궜던 신세 논쟁의 기세가 한풀 꺾일 때쯤인 12월

1일 등장한 ‘트 엑스’ 고는 “나를 알 수 있는 건 오직 나” “어제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변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증거” 같은 감각 인 카피를 내세워

당시 서태지라는 아이콘을 매개로 모든 1970년 생들의 정서를 통하고 있던

이 ‘자유로움에의 욕망’을 포착해 성공을 거뒀다.34)

■ 31) 당시 학가 최 의 신세 심포지엄을 비했던 이화여자 학교 이 학보 의 편집국장

남은지(신문방송학과 4학년) 씨의 증언. 임성희, 「신세 논의를 보는 시각」, 학신문 (서울

학교 학보), 1993년 9월 6일자.■ 32) 정우진, 「90년 가 낙 이라고요? 쎄」, 리뷰 제3호, 1995년 여름, 246쪽.■ 33) 박재홍, 「신세 의 일상 인식과 하 문화에 한 질 연구」, 한국사회학 제29집, 1995년 가을, 672-673, 677쪽. 참고로 이 연구는 총 25명의 1970년 생들을 ① 운동권(6명), ②

비운동권(4명), ③ 제조업노동자(5명), ④ 서비스업노동자(4명), ⑤ 신 지역에 상주하는 ‘신

’(6명)로 구분해 심층면 한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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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62호 / 특집 1 세대의 문화정치학

그러나 고가 포착해낸 자유로움은 자유주의자들이 바랐을 더 많은 민주

화를 한 동력도, 미메시스가 염두에 둔 만인이 인간 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사회로 가기 한 근본조건도 아니었다. 우연히 외국서 에서 본 뒤 사용한 이

용어가 그 게 선풍 인 인기를 끌 은 자신도 측할 수 없었다는 담당

고기획자의 고백처럼, X세 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 고는 그 ‘상품을 팔기

한 수단’이라는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어쩌면 스스로 신세 라고 생각하던

1970년 생들로서는 과도하게 폄하되거나 과도하게 의미가 부여된 ‘오 지족’이

나 ‘신세 ’라는 명칭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소비를 부추기는 허구 개념일지언

정(그들은 이 사실조차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식이나 생활패턴을

반 해주는 ‘X세 ’라는 명칭을 더 편하게 받아들 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세 에서 X세 로의 변화, 신세 =X세 라는 새로운 등

식의 성립은 단순한 표 상의 변화 던 것만이 아니다. 돈만 된다면 남자의 클리

토리스나 여자의 불알조차 만들어 팔아먹으려 들 자본의 놀라운 순발력 덕택에

1970년 생들을 지배하던 자유로움의 정서는 곧 세속 성공과 등치 던 것이

다. X세 라는 명칭의 등장은 바로 이런 변화를 상징해 다. 요컨 한때 기성세

와 불화를 빚게 만드는 원흉으로 지목 던 신세 의 무수한 특성이 이제

기성세 에게나 신세 자신들에게나 높은 이윤을 안겨 황 알을 낳는 거 로

추앙받게 된 셈이다.

를 들어 서태지의 ‘튀는 감수성’은 개척되지 않은 블루오션을 찾아낼 수 있

는 “선견력․기획력”으로, 3집의 실패 이후 다시 4집을 성공시킨 창작자로서의

고통은 “미래를 선도하되 Seeds와 Needs의 균형”을 잡는 능력으로 재해석된다.35)

이제 자유주의자들과 미메시스가 서태지에게서 본 창조 아이덴티티나 끊임없

이 질주하는 명은 일 이 칼 맑스가 말한 바 있는 자본의 ‘목숨을 건 도약’의

■ 34) 강 만, 「태평양 화장품 트 엑스: X세 마 」, 고, 욕망의 연 술 , 인물과사상사, 2007, 183-188쪽.■ 35) 신 암, 「‘서태지와 아이들’과 기업경 」, CEO Information 제107호, 1997년 9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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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時代遺憾, 1996년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신세대, 서태지, X세대

소 트 버 이 된다. 그리고 이 게 서태지는 ‘문화 통령’이나 ‘주류 질서의

복자’가 아니라 ‘한국의 역 최고 히트상품’36)으로 둔갑해버린다. 그러니 신세 ,

아니 X세 여, 부디 자신의 자유로움을 거부하지 말기를!

간결산: 신세 논쟁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

X세 가 신세 를 어내고 창궐하다가 IMF 구제 융 사태로 느닷없이 된서

리를 맞기까지, 그러니까 1994년부터 1996년까지 학가에 있었던 사람은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들 알 것이다. 1991년 5월 투쟁 이후 남아 있던 91학번들

은 후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없는 돈 털어서 어학연수를 떠나거나 일 취직했

고, 군 로 ‘망명’했던 91학번들은 1995-96년경 복학했으나 변한 학사회에

응하지 못하고 휴학을 거듭하거나 학원에 진학하는 ‘장수생’의 길을 택했다.37)

진학련과 미메시스를 개량주의라고 비웃던 92-93학번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열심히 그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자보와 선거용 팸 릿을

신세 의 감각에 맞춰 컬러로 인쇄하는 것은 애교 고 ‘ 학 명’ ‘발런티어’ ‘솔

리다리떼’ ‘탈주’ 등 68 명의 구호나 X세 를 수식했던 고카피 같은 문구를

짜깁기하고, 그것도 모자라 당시 인기를 끌던 어느 텔 비 코미디 로그램

에서 연원한 ‘칭찬릴 이’ 같은 것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게다가 문화

의 비 인 수용자가 되어야 한다며 무슨무슨 ‘문화읽기’로 커리큘럼을 도배하

다시피38) 하더니 결국에는 자신들의 축제에 비싼 돈 들여 인기가수를 불러오

거나 화제를 열거나 서바이벌 게임을 주최하는 것으로 성을 확보했다

고 자 했다.

■ 36) 김 환, 「한국의 역 최고 히트상품」, CEO Information 제104호, 1997년 8월 20일자.■ 37) 고제규․고재열, 「낀세 91학번 ‘맨손의 청춘’」.■ 38) 김 경, 「 하나의 문화상품: 문화논의의 반성을 하여」, 학회평론 제5호, 1997년 겨울. 당시 문화이론이 주장한 문제제기의 유효함 이외에도 각종 문화 련서 이 불티

나게 팔렸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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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2호 / 특집 1 세대의 문화정치학

물론 여 히 제2 학운동, 반(反) 학운동, 생활자치도서 운동, 성정치문화

제, 동성애운동, 굴업도 핵폐기장과 핵발 소 건설 반 운동, 환경운동, 빈

민활동 등을 시도하며 학생운동의 기를 극복하려는 활동가들도 있었다. 그러

나 그들은 언제나 소수에 불과했고, 무 심에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애 이런 소동에 심이 없었던 사람들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계속 살아갔다. 토 과 토익 수를 챙기고, 어회화 학원을 다니고, 그것도 모

자라면 장기어학연수를 갔다 오고, 학력인 상에 툴툴거리며 학 리에

신경 쓰는 등 오늘날 말하는 ‘스펙쌓기’에 몰두하거나, 자본이 알려 로 자신

의 ‘세 속성’이라는 것을 계발하기 해 고․증권연구회 등으로 발길을 돌

리거나.39)

이 게 본다면 1970년 생들은 의식했든 안 했든 386세 가 정치 역에서

했던 일을 문화 역에서 수행한 것일지 모른다. 요컨 1960년 생들이 정치

를 민주화했다면, 1970년 생들은 문화를 민주화했다. 그러나 386세 가 수행

했다는 민주화도 자유화 고, 그 결과가 “자본이 딱 원하는 인간형…기업이 요구

하는 인간형이 되기 해 자진해서, 끊임없이 학습하는 사람들. 요람에서 무덤까

지 자기 계발을 해야만 스스로 편하고, 생존도 가능한 사람들”40)이 되는 것이었

다는 어느 연구자의 말이 맞다면, 결국 우리, 1970년 생들은 386세 와 그리 다

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386세 가 ‘정치’를 가지고 이룬 바가 우리의 단

을 흐렸듯이, 우리가 ‘문화’를 가지고 이룬 바가 우리 후배들을 옥죌지도 모를 일

이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어느 카드 고 로고송이 노래했듯이, 자유가 ‘즐겨라’라

는 지상명령이 될 때 민주주의는 욕망의 민주주의가 되고, 거기에서 부박한 민주

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머 리 짓이 생겨난다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그 철학자

는 이런 민주주의자들에 해 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 39) 구본홍․이철승․정동철, 「객 기회와 주 희망」, 경제와 사회 제33호, 1997년 .■ 40) 강양구․안은별, 「노무 ․이명박 낳은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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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時代遺憾, 1996년 그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신세대, 서태지, X세대

묘사한 바를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다시 쓰고 있다.

민주주의 인간은 순수한 재만을 산다. …월요일엔 고정식 자 거 에서 여러

시간 페달을 밟으며 다시 몸을 만들고, 화요일엔 온종일 자다가 일어나서는 담배

피우며 진수성찬을 먹어 다. 수요일엔 철학책을 읽겠다고 선언하고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며 책장을 덮는다. 목요일엔 심을 먹으며 정치를 논

하다가 흥분해서는 상 의 의견에 격분해 가슴을 벌 거리고, 격앙된 채 소비사회

와 스펙터클의 사회를 비난한다. 녁이 되면 화 에 가서 세의 투장면이

나오는 허 한 블록버스터를 본다. 집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 땐 속된 인민들

의 무장해방에 가담하는 꿈을 꾼다. 그 다음날엔 과음한 탓에 목이 칼칼해져 일터

에 나가서는 사무실 비서에게 수작을 걸며 삽질을 해 다. 맹세하건 그는 사

업에 뛰어들 것이다! 그에게 부동산 수익이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주말엔

기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즐겁고, 행복하며, 무엇보다 의미 없지만 그만큼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미에 한 가로 자유를 지불하라, 그건 별로 비싼

게 아니다.41)

과연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이 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러나

구를 탓할 것인가? 모든 1970년 생들은 그 각자가 발 딛고 서 있는 객

․주 조건에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바에 따라 열심히 살아갔을 뿐인데?

굳이 따지자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탓이다. 이런 에서 “‘신세 ’ 상이란 어떤

특정 세 의 특수하고 신비한 속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들간의 소통의 문제

다”42)는 자각이야말로 신세 논쟁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일지 모른다. 그러니 모

두 모두의 탓을 하며 그냥 입 닥치고 조용히 회개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 41) 알랭 바디우, 「민주주의라는 상징」,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양창렬 옮김, 도서출 난장, 34-38쪽.■ 42) 장석 ․조하연․홍일표, 「 학사회의 기와 학생운동의 진로」, 경제와 사회 제33호, 1997년 ,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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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2호 / 특집 1 세대의 문화정치학

침묵을 깨고 더 시끄럽게 떠들어야 한다.

X세 가 회 반조(回光返照) 일보직 에 있던 1996년 서태지는 ‘그들’이 세상

을 지배했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구에게 바치게 되는 것이냐며 시 에

유감을 표명했다. 이제 우리는, 걱정하지 말라고, 서로에게 각자의 일생을 바치면

되지 않겠느냐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세 론이 아니라 우리의 세 론이

라면 그것은 화를 제로 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진정한 연 이다.

앙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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